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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들, 〈휘이-청〉: 위험과 안전 사이에 존재하는 서커스라는 은유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6. 6. 9. 21:48

걸작들, 〈휘이-청〉ⓒ삼일로창고극장(이하 상동). 〈휘이-청〉은 인간 사회 내 “위험”이 갖는 사회학적 함의를 두 사람의 질문과 대화 양식 안에서 풀어내는데, 이때 걸작들은 결정적으로 ‘위험’을 서커스 양식으로 전이시킨다. 그러니까 ‘위험’이라는 소재는 위험을 바탕으로 한, 하지만 위험의 궁극적 제어라는 메커니즘으로서 서커스에 대한 암약하는 코드가 되는데, 서커스라는 형식이 다루는 위험은 기실 위험에 대한 매개로서 서커스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결정적 언급이 된다.
이러한 순환 고리 안에서, ‘휘이-청’이라는 제목이 상기하는바, ‘휘청’이라는 부사를 더 길게 늘여 그 안의 흔들리는 움직임의 유격을 더 긴장감 있게 묘사하는 이 같은 명기는, 위험을 겪는 인간에 대한 표현인 동시에, 그 위험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표현으로 연장하는 서커스의 표현이기도 하다. ‘위험’과 대립하거나 공통된 단어들로써 〈휘이-청〉은 그 단어의 의미에 접근해 가는 절차를 밟는데, “모험”이 그것과 유사하면서 다르다면, “안전”은 그것과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걸작들은 삼일로창고극장의 구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처음 극장 상수 가 안쪽 천장에서 매달려 내려오는 권혁재는 하수 쪽 등퇴장 입구로 윤예은이 사라지는 장면, 또 객석을 경유해 극장의 객석 오른쪽 바깥 비상구에서 둘이 등장해 문틈으로 비좁게 두 몸이 끼어 안간힘을 써서 한 명씩 연이어 나오는 광경을 연출하거나 하는 것, 그리고 수미쌍관의 방식에서 다시 같은 등장의 방식으로 사라지는 첫 등장의 역재생 장면 등은 극장 전반의 순환적 질서를 형성한다.
무엇보다 가장 많이 단속적으로 반복되는 움직임은 초록색 비상구 표지의 한 발을 들고 뛰어가는 동작을 재현하는 것으로, 이는 그야말로 불시에 닥친 위험에 대한 그 순간적 반응으로서 ‘문득문득’ 삽입된다. 그런데 처음에 전제되듯, 이상적 개념으로서 안전은 사실상 위험의 정도를 0으로 낮추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행하고 움직이는 존재이므로 현실 차원에서 완전한 안전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둘은 비례하며 혼합되는 양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때 도입되는 ‘모험’이라는 개념은 ‘안전’과 함께 태도의 차원에서 위험을 바라보는 두 입장으로 분기된다.그러니까 모험을 지향하느냐, 안전을 지향하느냐가 두 사람의 대화에서 각각 남자와 여자의 주된 입장을 각기 이루게 되는데, 이는 여자의 지지체로서 주로 역할을 하는 남자와 그 반대편에서 위험을 ‘더’ 감수하는 여자의 관계로써 반전된다, 또는 그 둘의 입장은 행위 양식으로는 불일치한다. 곧 권혁재는 오히려 안예은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안전을 고려해야 하고, 곧 윤예은의 움직임과 몸을 제어해야 하고, 윤예은은 더 위험에 가까워지지만, 수동적으로 그것에 기꺼이 이르러야 한다.
따라서 발화는 오히려 의식적 차원보다는 무의식적 차원에서 두 사람의 반동의 심리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는데―그에 따르면, 〈휘이-청〉은 ‘안전’의 관념은 사회가 아니라 이 둘의 서커스에 대한 은밀한 발화 차원에서 사실 성립한다.―, ‘윤예은’은 실은 자신이 위험하기에 안전해지고 싶어 하고, ‘권혁재’는 모험의 정도를 더 해야 함에도, 그것에서 위험을 줄여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에게는 안전한 모험이라는 역설이 전제되는데, 그것은 실은 위험을 동반하고 그로부터 출발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그 둘의 관계는 착종되어 있고, 따라서 서로에 대한 절대적 지지의 차원이 전제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위험이 모험이었음을 확인하는 데, 또는 안전―안정감―을 느끼는 데, 그리하여 어떤 역치의 순간으로서만 그것이 유효한 지점이 되는 데, 곧 서커스의 본질이 있지 않을까. 따라서 언어 이면의 차원에서 움직임이 갖는 최후의 또는 근원적 기호 작용의 심급이 전제될 수밖에 없는데, ‘안전’이라는 주제가 걸작들과 맞물리면서 메타적으로 그 둘의 서커스 안의 관계를 탐문하는 경로가 표지되게 된다.
〈휘이-청〉은 실은 2025년 혜화동1번지에서 열린 〈〈2025 안전 연극제: 불완전〉〉에 초청된 작업으로, 〈휘이-청〉 속 ‘안전’은 그것을 주제로 한 연극제의 직접적 반향이라 할 수 있다. 안전에 대한 관념은 트라우마로부터 반동적으로 성립되는 것이기도 한데, 슬며시 언급되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쇄골에 대한 통증이 아직 남아 있는 윤예은의 경험처럼 위험은 예측할 수 없이 벌어지며, 그에 그치지 않고 지연되고 유예되며 지속된 상태의 일부로서 자리한다.
그러니까 위험이 단순히 하나의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일상의 시간과 기억으로 연장되면서 계속해서 효과를 미치고 있다는 지점에서, 안전에 대한 지향의 태도는 보수적인 것이라고만 볼 수 없다. ‘위험’은 지나친 경쟁이나 사회 시스템의 와해나 붕괴를 초래하는 행위 요소로 암시되기도 하는데, 이는 윤예은이 권혁재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는 것으로써 직유된다―이를 거꾸로 본다면, 서커스의 한 동작을 위험의 요소로 전치시킨 것이다. 여기서 윤예은의 질문은 이 행위에 대한 욕망의 기저를 향하는데, 왜 그러고 싶은 것이라는 것이다 .
걸작들, 〈휘이-청〉ⓒ이양희(이하 상동). 이는 서커스에 대한 직접적 탐문으로 동시에 작용하는데, 서커스야말로 직접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임을 이행하기 때문이다. 이는 보편 사회학적 리서치의 결에서 유예되는데, 서커스는 기본적으로 언어에 부속되면서 언어가 떨리고 위험해지는 어떤 언어의 조건 자체를 만든다. 곧 윤예은이 권혁재를 밝고 몸의 중심을 세울 때 그 말들은 떨림과 진동을 수반하며, 언어를 움직임에 부속된 무엇으로 분명히 드러낸다.
또한 ‘위험’은 서커스에서 직접 현상되면서도 서커스는 그 위험에 대해 기능적으로 부속되듯 어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개념의 차원 안에서 진동하는데, 이는 조금 더 첨예한 또는 구체적인 리서치로 이행됨을 돌려세우는 바가 있다. 귀가시의 경계태세는 단순히 위험의 한 예시로 처리되지만, 실은 페미니즘의 의제와 자연 맞물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킨스쿠버의 체험은 도파민의 쾌락을 위한 것으로 해명되(며 앞의 이야기를 덮)는데, 이는 다분히 진화심리학적 기제와 연관시키면서 또한 그것으로 환원시키는 ‘위험’이 있는 건 아닐까. “알레르기” 역시 위험 인자에 “노출되지 않다 보니 잃게 되는” 몸의 내성으로, 위험을 자연적인 요소로 전제한다.
그러니까 미시 문화사회학적, 역사적 차원으로 ‘위험’의 범주와 개념을 넓혀 작품을 물리적으로 그리고 주제적으로 동시에 확장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둘의 긴밀하고 지속된 움직임의 조건, 발화 자체가 일종의 서커스의 긴장된 상태에 놓여 있음으로 인해, 현재의 30분 정도의 시간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어 보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미시 정동들의 양태를 위험-안전-모험 그 단어로써 추상화, 곧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을 세부적으로 갈라놓고 재정의하며, 나아가 그 사이의 다른 단어들 역시 출현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드는 것은, 곧 (서커스) 움직임 자체가 언어 이후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어떤 것들을 보여주는 것임을 드러낼 것이다
곧 ‘휘청’을 ‘휘이-청’으로써 늘려, 움직임에 어떤 시간적 이미지를 새겨 넣은 것과 같이, 〈휘이-청〉은 위험이라는 요소를 서커스 내재적인 차원에서 끌어올려 보여주며, 감정과 정동 이전의 순발력과 원초적인 신체 운용의 차원에서 그것을 상기시킨다. 위험~모험의 관념은 안전에 대한 태도와 대립되면서 어쩌면 (일반적인 것이라 상정되는/의사-진화 심리학적인) 남녀 재현적 타입의 차이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가급적 존재의 투명성을 전제―사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휘이-청〉에서는 윤예은, 권혁재 개인의 사적 기억을 소환하면서 자신으로 임하면서 그로부터 두 대비되는 역할 모델로 확장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한다기보다 사회의 다양한 체제와 그 속에서의 역할 모델의 차이를 전제하여, 위험과 안전 사이에서 여러 삶의 태도를 추출해 보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직접적인 사회적 사건과 연결, 연대하여 당사자성을 성찰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위험과 안전 두 관념의 대비는 삶에서 오로지 안전만을 취할 수 없으니 때로는 위험을 감수한 모험이 필요하다는 도덕 교과서적인 결론으로 끝날 공산이 큰데, 〈휘이-청〉의 결론은 장소 특정적인 극장성의 은유 속에 안전과 위험 사이에서 여러 삶의 실천 가능성을 암시하며 끝난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휘이-청〉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미쌍관의 형식으로 소급해 가며, 극장의 이전을 극장 너머의 차원으로 동기화함으로써다.
곧 등장했던 곳으로 다시 퇴장하는 것, 동시에 극장의 보이지 않는 경계로 사라지는 것이 그것인데, 이는 무대 자체가 위험의 알레고리이며, 그 무대를 0의 상태로 물리적으로 만듦으로써 완전한 안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첫 번째 안전-모험의 테제를 실현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권혁재는 “안전”을 두 번 말하고, “암전”을 외치면서 일종의 수행 발화의 지시문으로서의 결론을 낸다.
이 발음적 유사성에 기초한 안전-암전의 계열 축은 자연히 암전에 대한 기술적 매개로의 사인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의 기원적 순간을 안전의 관념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순수한 극장성으로, 암전에 상응하는 어둠은 기실 앞선 야심한 동네 뒷골목으로 추정되는 환경처럼 위험이 극대화된 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휘이-청〉의 짤막한 외마디 결론은 기실 위험의 의사/가상-수행에 기초하는 극장의 조건이라는 또 다른 소재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김민관 편집장'REVIEW > Interdisciplinary A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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