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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혈예술청년단, 〈Equilibrium 03: 방황하는 몸들 stray bodles〉: 몸에 대한 방황하는 정신 혹은 개념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6. 6. 10. 12:59

    열혈예술청년단, 〈Equilibrium 03: 방황하는 몸들 stray bodles〉 영상 캡처[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7lXediXgkpI](이하 상동).

    〈방황하는 몸들〉에서는 시적 텍스트들의 파편적 양상과 그에 대응하는 움직임 조각들과의 관계로부터 추상적인 몸의 기호들에 대한 문학적 메타포가 출현하는데, 마주하는 두 명의 해설자 혹은 발화자의 조망 아래, 그 사이, 중앙의 텅 빈 공간으로 네 명의 “방랑자”가 위치하며, 따라서 이들은 무대의 경계를 구성하고 게임의 단서를 예표한다. 몸들이 산출하는 제각각의 여러 경로와 서로 간의 관계 맺음을 시야에 두는 이들의 말들은 대략 몸에 앞서 전제되며, 그 몸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채 현상에 대한 인식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말들의 파편성과 몸들의 파편성, 다시 말해 단속적이며 급작스럽게 출현하는 이 각기 다른 언어들, 추상성에 기초한 언어와 비언어적 재현을 향한 언어의 교직에 따라 흘러가는 시공간에서, 오직 그 둘의 관계만이 의미의 지대를 형성하며, 이 관계성은 그것에 앞서 나오지만 그것을 바라보듯이 말하는 것, 곧 말은 이 보임의 차원에서 미리 소여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어느 정도 창작의 경로 자체에 접근하는 경로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서로의 매체적 경로를 서로를 향해 그 반대편의 하나의 원천으로부터 가져온다는 것에 있다. 곧 몸은 침묵하고, 말은 몸의 바깥에 위치한다.

    이 둘의 서로를 지지체로 두는 행위는 각자의 빈 공간으로의 환원의 무력함을 상쇄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암묵적인 행위 양상이 만드는 허공에 흩뿌려지는 시선, 또는 허공으로부터 잠재워지는 시선과 보일 것 또는 보이는 것에 말을 부여하는 시선은 결코 서로를 마주하지 않고 평행선상에서 그 환원의 경계에 열려 있다. 여기서 어떤 틈을 메우는 규칙이 생성되는데, 말들이 허공을 헛손질하지 않을 만큼, 몸들이 허공에서 부유하지 않을 만큼, 말은 구역을 부과하는 몸이 우선하며, 몸은 그 말의 구역 안에서 자리를 지킨다. 

    무엇보다 말은 언어에 기초한 움직임을 다시 수거하는 것이 아닌 움직임과 결부되는 언 어 자체로서 출발하며 단지 그보다 먼저 작동하며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기에, 이 둘의 관계는 실제로는 동시적인 것에 가깝고, 그 감각의 차원에서 차이로 분배된다. 그 차이가 시차를 통해 생산된다는 사실, 곧 우연한 장면들과 그것을 마주하는 마법적인 말들의 조우가 그것들이 일정한 순서 아래 놓이며, 따라서 서사의 흐름을 발생시키는 가운데, 그 둘 간의 위계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방황하는 몸들〉이 곧 어떤 파편들의 순간을 만들지만, 그것이 어떤 질서적인 차원을 부여하거나 전체의 구조라 할 것을 만들지 않는다는 걸 나타낸다.

    이 조각들, 파편들, 놓이고 다시 수거되는 것들은 ‘방황하는 몸들’이라는 알레고리에서 해석의 단초를 가져올 수 있는데, 세계의 부조리성 혹은 비일상성, 비의미성과 같은 특징 속에 몸들은 그 세계의 균열을 포착하기 위한 부조리한, 비이성적 말들로서 부유하며, 오작동되고 미끄러지고 버둥거리는 방황을 체현한다. 이는 또한 좌표 없음, 장소에 대한 근거 없음을 기초로 한 배회의 기조를 만들어 낸다. 

    말들은 연금술을 모방하는 의사-수학적 공식들, 시계의 마법적 통로로서의 전유, 곧 시침과 분침이 따로 따로 논다는 가정으로써 탈시간적 세계의 마법적 경계를 지시하거나 그 너머에 대한 상상을 구성한다. 반면, 몸들은 사물을 부착하거나 사물과 결부되며 존재하며, 그 둘의 이질적 조합 자체를 부조리한 것으로 둔다. 또 그 몸들은 서로를 마주할 때 일종의 무덤덤한 사물이 되어 엉키거나 서로를 통과하려 한다. 

    가령 해변을 재현한 세트 안에서, 물안경을 쓴 두 사람이 결착된 상태에서 양말을 신으려다 포기하고 서로에게 한 짝씩 양말을 신겨주는 장면은, 일상적 통제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발생하는 자가당착적 오류를 자기 반영적 타자로부터 해결하는 모순된 혹은 역설적인 화합과 같은 우의적 장면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몸들의 사물성이 구성하는 비주체적 차원은 (앞의 장면 역시, 관계의 해소에 대한 의도가 아니라 관계로써 해소하는 비의도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정념과 정신의 차원을 소거한 상태와도 같고, 이는 비언어적 세계 안에서 닫힌다. 

    〈방황하는 몸들〉은 방황이라는 개념의 수행을 통해 몸과 결부되는 언어의 부조리함을 만들고, 이는 거꾸로 동시대의 몸에 대한 진단과 판단을 드러낸다. 몸의 사물성, 너저분하고 미끄덩거리고 바닥을 헤집는 몸의 비고양적 차원은, 몸의 단정할 수 없음, 그것의 의미를 지정할 수 없음의 차원에서 시대적 징후를 드러낸다. 곧 몸들의 방황은 몸들에 대한 방황하는 판단과 관점이며, 이 같은 방황하는 몸에 대한 판단의 어려움, 불가능성은 동시대의 시간적 차원에 예속된다. 어떤 명확하지 않은 재현의 양상을 띠는 이 몸들은 비문법적 차원으로, 비주체적 차원으로 영원히 환원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의 몸들이 공간적 차원에서의 동시성을 띠는 후반, 헬륨풍선을 만들고 가지고 노는 화합의 장면, 참여의 장면을 통해 그 장면 안의 닫힘을 일정 정도 벗겨낼 수 있게 된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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