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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닉 블룸 2026] (2) MOTOKO, AMELIE DUCHOW, EY=+C.O.L.O: 심연의 대상 너머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6. 6. 4. 22:02

    [소닉 블룸 2026] MOTOKOⓒ2026 BLOOM[사진 제공=소닉 블룸 2026](이하 상동).

    사운드가 생성되고 출발하는 지점에서, 이미지의 최초는 어떤 모습일까. MOTOKO의 평면이 이미지 너머를 이미지의 표층으로 드리우면서 세계를 표층 이미지의 급격한 확장과 전이의 타격과 함께 암시한다면, AMELIE DUCHOW에게 평면은 피부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뚫을 듯 긴밀하게 접지하며 내려오는 인공적 직선에 의해 탄력적인 것으로서 드러난다. 
    EY=+C.O.L.O에게 그것은 우주 배경 복사를 담은 텔레비전의 기본적 영점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이후 MOTOKO가 검은 바탕의 흰 얼룩에서 점차 푸티지 영화 필름의 이미지로, AMELIE DUCHOW가 피부를 입은 채 테트리스 블록의 하강하는 모습의 연속적 재출현과 함께 빠르게 뒤바뀌는 언어들의 전사 그리고 세계 지도로서 이미지의 지배로, EY=+C.O.L.O는 만다라 문양에서 무한한 변전의 이미지로 이미지의 흐름을 구성해 간다. 

    곧 세 명의 아티스트는 모두 각기 다르지만 이미지의 여정에서 세계에 대한 자신들만의 이념을 산출해 낸다. MOTOKO가 영화의 기원에 해당하는 이미지들을 소환하며 필름의 매체 특정적인 경로를 시현한다면, 또한 AMELIE DUCHOW는 세계의 평평함과 다채로움을 직물화하는 언어를 조명한다면, EY=+C.O.L.O는 텔레비전이 어디까지를 보여줄 수 있는지를, 곧 대중문화의 무한한 궤도를 따라 간다고 하겠다. 

    MOTOKO: 얼룩의 파열학

    MOTOKO의 공연은 흑백 푸티지 필름 영사의 프로세싱 자체를 은유적 차원에서 재검출해 내는 것처럼 보인다. 곧 초반을 지배하는 흰색 얼룩이 덮고 있는 세계, 후반의 초기 무성영화 필름의 몇몇 이미지가 역시 불투명하게 있는, 표층 이미지의 레이어 ‘안’에서 결정되는 방식이 보여주는 건 곧 그것들이 환상적 차원에서 영사되고 있으며 동시에 일종의 영사 장치의 렌즈라는 막 또는 나아가 필름 자체의 경계를 건드린다는 것이다. 먼저 흰색 얼룩은 그것이 가시화되면서 그와 동시에 그것이 감싸고 있는 세계의 형상을 은폐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비)매개적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세계를 순간 현상하는 것과도 같다. 

    세계가 다 보이게 되었을 때 사물의 풍경에는 ‘여전히’ 유리창 같은 레이어가 여전히 남아 있는데―또는 흰 얼룩이 완전히 평평해진 것임을 환기시키는데―, 그것은 완전한 투명성 대신에 어떤 주름들이 있는, 인터페이스로서 창문에 가깝다. 그리고 이 얼룩~주름의 계열은 흡사 자글거리는 스피커 자체의 물성으로 동조된다. 이러한 접지 불량으로 인한 노이즈 사운드의 전기적 차원의 불쾌한 감각은 그 불투명성의 경계와 같이 화면을 ‘넘어’ 관객을 침범하고 잠식한다. 그리고 이 자글거림은 동시에 입자들의 진동으로서 이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얀 얼룩은 공포영화의 한 공식적 차원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화면을 덮었다 순간 경악스러운 존재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공포는 그 비가시성으로부터 먼저 작동되며, 사후적으로 그 이미지에 정착하지만, 결국 그것은 일종의 관성적 체제의 법칙이기도 하다. 물론 MOTOKO의 공연에서 그것은 진지한 서사의 대상을 겨냥하는 건 아니다. 이어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해와 그 그림자가 출현한다. 그리고 스피커가 울리고 튕기고 나서 화면이 밝아지고, 중앙부에 마술사 모자를 든 존재가 복제되어 놓인다. 

    2채널상의 같은 존재들은 마술을 부리고, 그것은 또한 섬광~폭탄으로 분화한다. 그리고 그것의 마법적 효과로서 주술 걸린 듯 영상은 재생과 역재생을, 도돌이표 재생을 시현한다. 사운드는 거세지고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심상치 않은 바람과 하이톤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하나의 같은 두 이름처럼 출현하고, 그것은 다시 처음처럼 하얀 얼룩과 분리되지 않은 이미지로 동조된다. 이제 천장 위쪽 무빙 헤드라이트들이 깜빡이기 시작하고, 장치들은 일종의 생명체로서 깜빡거린다. 

    이 ‘날갯짓하는’ 장치는 스크린 쪽으로 수렴하며, 그야말로 외밀한 사물로서 그 자체의 효과를 띤다. 필름의 프레임적 추출 방식은 분절된 이미지들이 중첩되는 것이며 그 자체의 변환적 순간은 급격하기에 A와 B의 어떤 ‘연속된’ 이미지인 것처럼, 이행인 것처럼 보여준다는 것이 착각이고 혼동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이때 마치 유리병에 갇힌 나방의 펄럭임처럼 소리는 요란한 채 증폭된다. 곧 어떤 이미지들이 자리하고 그것으로 되돌아간다. ‘더’ 많은 것이 아니라, 덜 있는 것을 더 많이 반복하는 것과 같다―그것은 이분법의 (역)환상 변증법적 순환과 같다.

    AMELIE DUCHOW: 순수 기표로서 언어와 거대한 고유성의 이념으로서 언어 사이에서

    [소닉 블룸 2026] AMELIE DUCHOWⓒ2026 BLOOM[사진 제공=소닉 블룸 2026](이하 상동).

    AMELIE DUCHOW는 말을 수집하고, 그 언어를 단지 기표-목소리 차원에 두며, 일종의 거대한 음악 프로젝트로써 세계화의 기조에서, 목소리 조각의 민속지적 리서치를 연장해 나가는데, 여기에는 물론 한국 관객의 음성 역시 자리했다. 지구본을 갖다놓고 빛을 쬐는, 지구본에 대한 접촉적 수행은 일종의 토대적 산출로서, 그 사운드가 ‘환원’되는 지역의 좌표와 연결되어 연주의 한 양식들로서 기저로 자리하는데, 그는 지구본을 응시하며 그것을 조율하고 선택하며, 다시 자신의 미디 악기로 시선을 옮기는 식으로, 시간의 전개 양상 이전의 그 토대를 결정한다. 

    스크리닝에서 하얀 천을 가르고 나오면서 빛이 동시에 맺히는 수직선은 동시에 약간의 볼록한 3차원의 질감과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안에서 불룩해진다는 점에서 일종의 피부 안쪽 성대 진동을 상기시키며, 언어를 기표화하는 두 가지 전략―발음 기호를 포함한 문자의 연쇄, 소리의 질감으로서 원천―의 기원을 정초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수직선 이후에 나타난 수평선 역시 입체적 궤적 안에서 화면을 쓸어내린다. 이 두 방향성 모두 문자를 만드는 기본적 뼈대 같은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때때로 산란되면서 꺼지고 그때 그 미세한 세부로서 스피커를 튀는 노이즈의 동시 다발적 접촉의 감각이 드러난다. 곧 이미지의 현란함 대신 실재적 감각의 충실함을 부르짖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AMELIE DUCHOW의 세계화는 무엇을 위한 것이고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세계 존재의 다양성에 대응하는 언어 보존의 이념과 실천의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소수 부족 언어의 아카이브는 특별한 대의가 아니더라도, 예술적 변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소망 차원의 목적에서 아마도 출발할 것이며, 그럼에도 어떤 보존의 역학을 띠게 될 것이다. 반면, 그것을 순수 기표로 환원시키는 예술 자신의 합목적성은 그 예술이 출발하는 예술의 이념으로부터, 어떻게 타자성을 지지해 낼 것인가. 

    그것은 다소 형식적인 제스처가 아닐까. 또는 그것을 자임함으로써 예술은 스스로 겸허해지고 있는 것일까. 일종의 산란-노이즈 계열의 사운드는 반복되며, 세계의 온오프와 함께 무언가 일정하게 ‘불거지는’ 생명적 잔향의 차원을 기본적이고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바다 속에서 그 산란됨이 번져 나오는 것 같은 이미지의 전환 이후에는 현상학적 세계의 초월적 닥침의 그 반대편으로부터 전체의 일부로서 무언가를 감각하는 존재의 미약함과 섬세함을 반향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곧 그것이 아마도 말하는 것은 지구본은 우리가 사는 곳보다 넓고 광활한 세계를 표상한다는 것 아닐까. 

    EY=+C.O.L.O: 현란한 혹은 방만한 이미지

    [소닉 블룸 2026] EY=+C.O.L.Oⓒ2026 BLOOM[사진 제공=소닉 블룸 2026](이하 상동).

    EY=+C.O.L.O의 스크리닝은 매우 현란한데, 그 정도를 더해 가는 쪽으로 이행되어 가는데, 그것은 포스트모던적 유희에 대한 은유로서까지 생각될 정도이다. 오히려 처음에는 꽉 찬 소리 덩어리를 분사하여 사운드만의 충격을 안기는데, 희미하게 출현하는, 희미한 이미지 자체는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의 빈 화면과 같다. 그리고 날카롭게 번져가는 노이즈에 대응하는 화살표에 이르기 전 주어지는 건 만다라 문양과 같이 4면이 대칭된 복잡한 구도의 장식 같은 이미지들이다. 이는 그 전의 얼룩들의 번짐이 규칙적 무늬를 생성한 것과 같다, 화살이 만다라 문양의 구조를 정초하는 것과 같은 것인 듯 말이다.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로 이뤄진 세계는 원형 스피커의 입체적 진동의 이미지로 바뀌면서 2차원이 주는 심연에 대한 상징적 코드는 오히려 3차원적이지만 초월적이지 않은 입체적 진동의 현란함으로 전화한다. 그럼에도 중앙의 검은 빛 번짐은 그 내부의 어떤 에너지를 전제한다. 그리고 이 중앙부의 응결, 증폭, 반향 과정은 날카로운 예각의 몰입을 추동한다. 그럼에도 TV의 지지직거리는 소음의 반경 안에 이미지는 어느 정도 예속된다. 그 중앙으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동상이 정렬하며 다가오며 사라지는 장면은 징후적인 파편으로, 몇 개의 전근대적 이미지의 반복-증상적 출현의 한 예시를 이룬다. 

    그리고 이제 꿈틀거렸던 저 이면의 무언가가 실물화되는 지점에서, 이미지들의 쉴 새 없는 침투가 시작된다. 그리고 색 역시 본격적으로 출현한다. 이모티콘 입자들의 순간적 출현과 맞물리며 게임 음악적 장르가 함께 출현한 이후, 이번에는 연속된 가면 쌍들이 분명하고도 견고하게 무언가를 중얼거릴 때 음악은 경박해지는 데서 나아가 기괴해지고, 그 마스크 토템의 기호들이 난사되는 정신없음, 산만함의 세계로 인도되게 된다. 그리고 불꽃이 튀기는 타이어의 출현과 함께 3D 실사 그래픽적 이미지가 도열하면서 이제 이미지는 구조에의 종속―어떤 법칙성과 그것의 합목적저 의미―을 벗어나 완전히 자율적 생명력의 자의적 전개 양상을 스스로 획득한 듯 보인다. 

    팔레트 조명 장치 세트를 싣고 가는 오토바이 한 쌍과 같이, 그것이 난사하는 조명들의 통제 불가능한 자의성과 같이, 이 고삐 풀린 이미지들의 향연은 어떤 주의 집중의 최소한을 산만함을 지지체로 둠으로써만 가능한 듯 보인다. 그것들은 기입되기보다 대체되는 것이며, 전복하는 게 아니라 전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선 비너스의 재출현 같은 것으로부터 희미한 파편적 연결로부터 기억의 한 조각을 획득해 내며 이 전반의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안정적 지각의 단서를 마련하고자 하게 된다. 세계의 어떤 법칙성과 심연의 코드에서 표층의 다양함, 이색적 차원으로 변용되어 가는 과정에서 EY=+C.O.L.O가 말하는 건 어쩌면 어떤 자유로움의 극단은 어떤 적절한 쾌락의 범주를 초과한다는 사실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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