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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고트〉(페르디난트 폰 시라호(FERDINAND VON SCHRACH) 작, 류주연 연출): 자기 죽음에 대한 자율적 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REVIEW/Theater 2026. 6. 30. 23:00

극단 산수유, 〈고트〉(페르디난트 폰 시라호(FERDINAND VON SCHRACH) 작, 류주연 연출)[사진 제공=극단 산수유](이하 상동). 〈고트〉는 자기 선택사라고 하는 자기 죽음에 대한 자율적 권리를 사회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를 두고 첨예하게 의견이 난립하는 한 공청회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것이 일종의 현재 진행형의 성격을 띠며 작동하는 말의 차원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건, 말 그대로 공청회의 특징이 충족시키는 연극의 성질, 곧 현실에 대한 어떤 결과나 변화를 산출하지 않는 영역에서 시뮬레이션 차원에서 판단과 선택의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공청회의 발화 행위들이, 곧 제4의 벽을 넘어, 의제를 던지고 수행성의 차원에서 그것이 작동하는 연극의 전면으로 고스란히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미에 실제 관객의 참여를 통해 관객은 찬반, 혹은 기권의 의견을 거수의 과정에서 표현하는데, 그보다 더 본원적인 차원에서 각 패널의 진술들은 관객의 논리를 타격하거나 관객 안의 논리를 구성하거나 갱신해 내는 역할을 한다. 곧 이성의 기능이 시험되고, 이성 자체의 한계 영역에 이르게 됨으로써 연극은 보편적 진리에 대한 추구로써, 발단이 된 리하르트 게르트너(신현종 배우)의 경우는 주인공의 서사로 독립하게 되는 대신, 하나의 사례로서 이 담론의 연속선상에서 융해된다. 그것은 그 자신의 변화를 일으키는 대신에, 의제를 위한 하나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데 그쳐야만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공청회를 여닫는 것을 포함해,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의 중간 매듭으로 드러나는 윤리위원회 위원장 슈미트(유병훈 배우)은, 또 다른 발화 진술자로서가 아닌, 형식적, 절차적 요소로서 기능하는 인물인데, 그는 그 외에는 뒤돌아서 전적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의 일환에 속한 채 마지막 관객 투표를 진행하여 무대와 관객을 접변케 한다. 프로시니엄 아치가 없는 반원형의 구조를 지닌 극장은 단차가 큰 객석에 의해 무대와의 경계를 특별하게 두기 어려운 가운데 그는 전면으로 드러나기보다 그사이에 적절히 은신한다면, 패널들은 무대 위에서 직접 관객을 향하는 진술을 쏟아내게 된다.
무대 상수와 하수의 가장 끝에 각각 위치한 변호사 비글러(예수정 배우)와 윤리위원회 위원 켈러(최광일 배우)는 찬반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마지막에 압축적으로 최후 진술의 형태를 구성해 낸다. 그 사이에서 패널들은 진리의 수사 그 자체를 매개하기보다 오히려 그 말과의 간극을 통해 일종의 증상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난다. 그리고 이는 공청회가 일어난 계기로서 게르트너에게 역시 해당된다.

아내 엘리자베스의 죽음 이후 애도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 게르트너는 뇌종양에 걸린 그의 아내가 요구하는 죽음에 조력하지 못했던 경험에 대한 반동으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사회적인 것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그가 제도 바깥의 경로를 선택하지 못했던 한계를 자신으로 소급하는 대신에 제도적 차원의 한계로 내세우며 제도와 개인의 죽음의 절대적인 상관관계를 상정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완성함으로써 그는 아내에 대한 부채를 그 제도 차원의 성립에서가 아니라, 진정 자신의 죽음으로 되갚아줄 수 있다(고 믿는다).
게르트르는 죽음에 이르는 일정량의 약에 대한 의사의 처방을 그의 안과의사인 브란트(오일영 배우)에게 갈구하는데, 이는 그에게 제도적 승인이라는 전제 아래 최소한의 고통과 함께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죽을 수 있는 권리는 따라서 죽음을 조력할 수 있는 권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는데, 여기서 그 죽음에 대해 주변 사람과 사회에는 일종의 가치 판단의 차원이 요구된다는 것은, 〈고트〉에 전제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끔찍한 역사적 경험과 공명한다.
반면, 이는 그 전사를 안정화하고 적당히 물신화하며, 변화된 현재의 시점에 안착하는 데 더 가까운데, 인종 우생학적 관점으로의 위험, 위협, 혹은 두려움은 가령 마지막 비글러의 발화에서처럼 공동체적 사회를 벗어나 개체들의 자유와 권리가 최대한으로 보장되는 ‘오늘날’의 사회를 확정하면서 국가나 민족 단위의 사고 체계를 암묵적으로 기각하고 부정하고 개체들의 ‘자유로운’ 발화의 지점을 독립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데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트〉는 진리의 차원에서 무언가를 확정하기보다는 어떤 증상의 차원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데 가까운데, 그것은 손쉬운 죽음에 대한 소비가 인간의 존엄한 죽음의 권리와 구분되지 않는 어떤 경계에도 있다. 게르트너는 어쩌면 자신이 실제적으로 아프고 그래서 그 고통을 겪으면서 조력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기 전에 죽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아내의 죽음은 그의 유보되고 답보된 삶의 연속을 구성하는 셈인데, 곧 아내의 진정한 죽음을 성취하기 위해, 그로부터 미적거리고 있던 자신과의 연쇄를 끊고 과감하게 희생제물로 던지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그때로 돌아가 기꺼이 했어야 할 일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아내의 죽음에 대한 애도 불가능성을 온전하게 수용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의 신체는 너무 멀쩡한데, 이 부분은 그의 물리적 신체의 측면보다는 심리적 차원에서도 그러하다는 점에서 진정 문제적이다.
곧 그는 애도보다는 그리고 과거의 기점에서의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보다는 그것이 좌절되고 미끄러지는 데 있어 사회에 대한 반동적 태도에 고착된다―그는 슬픔에 젖기보다 각성한다. 그것은 그의 사회적 행위로써 자신의 선택에 대한 올바름을 승인받고 그 반사이익으로서 죽음을 쟁취하기 위함이다. 곧 그의 행위는 자신의 과오를 확정 짓고 반성하고 되돌리기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투여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자신의 선택이 개인을 옥죄는 사회의 진정한 힘이었음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죽음을 선언,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부터 그는 아내의 죽음(으로부터의 고통)을 지울 수 있다, 아내가 성취하고자 했던, 바랐던 부분 말, 아내가 먼저 겪었던 그 고통 이전에 말이다.
거기에 어떤 착오가, 착시가, 선택의 수월함이 있는 것 아닐까. 하나의 죽음을 다른 죽음으로 갈아치우는 순간 말이다. 자신의 발화가 사회적 차원의 판단을 거쳐 일단락된 이후에 그는 비로소 그의 아내에 대한 죽음을, 그에 대한 애도를 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의 죽음은 그의 아내의 죽음에 대한 전적인 의존이 아닐까. 주체로의 선언과 주체의 공백은 같은 뿌리로 소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법은 개인의 욕망과 전적으로 합치될 수 없지 않을까. 그가 아내의 죽음에 대해 처했던 곤궁은 자신의 주체적 위치의 결여와 실패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진정 그 죽음과 함께했던 순간 자체로 의미화될 수 있지 않을까.

법률전문자문위원 리텐(신용진 배우)이나 의학전문자문위원 슈페르링(김중기 배우)의 경우, 죽음에 대한 사유에 이르기 전에, 마치 그 죽음에 일조하는 측면에서 직접적 당사자로서의 지위를 벗어나는 데 주력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이는 곧 이 둘은 의사의 명예와 법의 고전적 지위에 대한 것에만 천착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리텐이 암시하는 환자에 대한 연명 치료의 합리적 절차에 의한 점진적 감축을 통해 서서히 죽음에 닿게 하는 것과 게르트너가 원하는 것과 같이 그대로 죽음을 선사하는 것의 사이에서, 슈페르링은 단지 직접적으로 또한 최종적으로 환자가 그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기피하며 소명에 대해 최선을 다한 의사로서 고착됨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게르트너가 죽음으로써 죽음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 둘은 죽음에 대한 의식적 차원의 방어로써 그것에서 무감해지고자 한다.신학전문자문위원 틸(이상직 배우)은 고통을 인내하고 감내하는 삶의 당연함, 숭고함을 설파하는데, 그는 비장하고도 숙연해지는 일종의 설교 연설을 한다. 그것은 신의 뜻을 가정하기보다 가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진정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죽음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건 신보다는 법의 기원에 묻는 것에 가까운데, 그것은 전적으로 죽음에 대해 무심한 법의 비인격적 차원으로, 이는 오히려 신에 가까워지면서, 인간의 절대적 고립과 고독에 대한 반대편에서의 신의 응시가 진정 인간주의적인 것임을 노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틸의 연설은 신의 뜻을 결코 대신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으로의 진정한 승화 작용이 아닐까. 그의 말은 죽음의 반대편에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불가피함으로부터만 주체가 가능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의 말이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들어온다는 건 결국 생명에 대한 존엄이 더 이상 신의 신비한 무엇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 아닐까.

그리고 거기에는 이미 죽음에 대한 판단이 다수의 투표에 의해 거행될 수 있는 것과 같이, 관객의 동등한 참여와 인터랙티브한 교통이 자유주의적 개인의 탄생과 그 정신의 연장이며 그에 빚지고 있음―신학적 풍경이 소격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이―을 〈고트〉는 형식적인 전제로서 취하고 있는 것 아닐까. 곧 〈고트〉는 숭고한 삶의 가치가 하락하고 분열된 어느 시점으로부터 우리의 삶의 진리를 찾기 힘든 시대의 혼란과 분열적 초상을 고스란히 관객을 포함시킴으로써 달성하는 것 아닐까.
〈고트〉의 의사-포스트 드라마적 수행성은 관객의 무조건적인 동참을 달성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개체적 환원이기도 하다. 곧 의사-소비주의로서 투표는 신의 뜻과 실존주의적인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의 연관성을 뛰어넘는 이 민주주의의 이념으로서 도달하는 비진리성을 체현한다. 그리고 이 투표는, 관객은, 불특정한 다수의 시민은 이 극을 지배한다―관객은 마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선택할 수 있다고 가정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입장이 더 타당한 것이 아니라, 어떤 입장도 그럴듯하며 결과적으로 정답은 없다는 걸 수용하는 것과도 같다는 결론을 향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그것은 죽음의 불가능성을 죽음에 대한 다양성으로 전도하는 것 아닐까, 게하르트 자체의 정신분석이 가해지지 않는 것과 같이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5.10.25 ~2025.11.02
소극장 산울림
공연시간 120분
출연 예수정, 신현종, 이상직, 김중기, 최광일, 유병훈, 오일영, 신용진
작가 페르디난트 폰 시라호(FERDINAND VON SCHRACH)
번역 A-In Oh
연출 류주연
드라마터크 박구용
무대디자인 이희순
조형디자인 박성희
디자인 류승현
의상디자인 최원
분장디자인 이동민
영상디자인 장주희
그래디자인 김솔(보통현상)
조연출 유가영 오륜
기획 김서아 최호재 방경미
프로듀서 김용식
주최·제작 극단 산수유
후원 서울문화재단'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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