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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로미오와 줄리엣 3〉: 실재라는 환상성REVIEW/Theater 2026. 6. 26. 13:56
장소: 실재와의 거리

김상훈, 〈로미오와 줄리엣 3〉ⓒ김휘람(이하 상동). 〈로미오와 줄리엣 3〉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무대로 올리는데, 무엇보다 5막 2장으로 이뤄진 희곡의 각 장을 음원들로 만들어 틂으로써 일종의 “리스닝 파티”의 전반적인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때 희곡의 내용은 AI가 만든 음원의 가사로 압축되며, 특정 곡들의 장르와 고유성에 입각한 음악의 청취 안에서 그 가사 역시 자리하며 풀려나오는데, 그것은 또한 스피커의 물리적 위치를 가시화하는 소리이며, 거기에는 일종의 시각적 동조 작용을 일으킬 만한 존재의 이미지가 투여될 수 없이 그것이 자신만의 목소리를 그것도 대개 빽빽하게 가지고 있음이 자리한다.
이 결정적으로 ‘빈’ 무대에 울려 퍼지는 소리들은 먼저 입구 쪽 아래에 위치한 조명 디자이너 안성현에 결착된다. 오퍼석의 자리가 마치 디제잉 부스로 재가시화되는 그 지점은 실은 2층에서 조연출이 트는 음원보다 더 직접적으로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에 오는 혼동에 의거한다. 하나의 가상의-진실이 아닌 기원과 비가시화된-진실의 기원은 어쨌거나 음원의 동시성의 기원 이상의 차원을 일러주지는 않으며, 디제이의 주권을 특별한 것으로 가시화하지 않거나(후자) 그것을 교란함으로써(전자)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실제 전자가 지루하다면, 후자는 관객의 입장에 가까워 보이는데, 창의적이고 생동감 있는 디제이의 모습에는 후자가 부합하며, 그것을 지탱하는 물리적 기계 작동의 몸짓은 전자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보다 결정적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무대 중앙의 유압식 고소 작업대가 있는데, 여기에는 번번이 한 명씩만 그 위로 올라가 2층 객석 높이에서 발화하게 된다. 그 둘의 사이를, 사륜 프레임의 전동차가 무선으로 작동한다. 곧 차체 없이 추진 방향의 긴 뼈대―추진 축―와 그것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두 개의 짧은 뼈대―액슬 축―에 연결되는 총 네 개의 바퀴가 작동되고 있는 무선 자동차의 긴 뼈대 중앙부에 뒤집어 놓은 원뿔대 형상의 그물망 바구니를 올려놓는데―아상블라주 하는데―, 여기에 공을 투여하려는 욕망을 추동한다.
그것은 수직 낙하에 기초한다. 실제 〈로미오와 줄리엣 3〉은 극장 2층 통로만 객석으로 허용하고, 1층 전체를 무대로 사용해, 아래를 내려다보는 관극 양태를 출현시킨다. 이때 바닥의 단이 삐죽 나와 있는 2층 입구 방향 통로를 제하고 3면의 통로가 주요한 객석이 되는데, 물리적으로 벽에 붙은 의자 대신에, 난간을 잡고 아래를 봄으로써 시야 제한을 극복하는 관극 형태는 자발적인 선택과 흐름이며, 중간 중간 의자에 놓인 작은 탱탱볼 뭉치는 1층 무대에 그것들을 자유롭게 꺼내 던지는 수행적 작용을 전제한다.
이때 사실상 굳건하게 지지되는 고소 작업대와 가속되지 않고 일정하게 꾸물거릴 뿐인/수만 있는 이동식 지지대―후자는 전자 주변을 아른거리면서 동시에 전자의 아른거리는 그림자와 같은 대상이 된다.―는, 그리고 절대적인 하나의 기원으로서 음향 부스는, 무대의 검은 바닥 자체에 공통적으로 놓이는데, 실은 무대라는 것이 없고, 사물(적 존재)만이 남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다다를 수 없는 실재와의 거리를 축소하려는 유희적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무대는, 관객의 절대적 응시와 참여를 불러온다.
음악이라는 전체, 음악이라는 솔기
김상훈은 두 명의 다른 연출에게 희곡을 음원으로 바꿀 것을 사전에 요청하여, 이를 일종의 공간 내 배경음악적 차원으로 전유함으로써 그것들을 인지하기보다 반응하는 지점으로 그것을 조종하고, 특정 구간에만 배우들이 나와 무대를 메우는 방식으로, 마치 희곡의 내용은 대부분 단지 지시되는 것에 그치며 따라서 불필요한 것인 것처럼 다룬다.
각 장에서 선행하는 지점으로, 1분 남짓의 요약된 내용을 배우들이 돌아가며 읽고, 음악이 따라오고, 군데군데 예외적으로 배우가 출현하는 이 과정에서, 첫 번째로 주어지는 텍스트는 일종의 정보 전달의 서사적 전략―일종의 브레히트식 거리두기―의 일환이며, 이는 구간 구별의 형식적 차원에서 막과 장의 구분을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대체한다.
모든 텍스트는 거의 이야기하기, 곧 디에게시스이거나 배우들의 직접 출현에 힘입은 낭독극이라기보다 텍스트 읽기로써 구성된다. 가장 많은 분량인 음악 역시 전자에 속하는데, 곧 그것은 희곡에서의 기본적인 말의 방식인 대화에 기초하지 않는다―주인공 로미오와 줄리엣이 마침내 처음으로 만나게 된 시점에서 일부 대화가 출현한다.
이는 사실상 알 수 없는/얼굴 없는 특정되지 않은 가수들이 구술 방식으로 각각의 이야기 편린들을 전달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엄밀히 음악에 과잉되어 부착(될 때 그 ‘내용’으로 인지)된다. 그리고 이는 순수 (배경)음악의 차원을 깨뜨리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는 대표적으로 주요하게 노래로 진행되는 뮤지컬이라는 형식이 발화의 차원에서 나아가 정서적 차원의 진동과 고양을 이끌어내며, 그 캐릭터성을 부각하는 차원에서 진정성~주체성의 경로를 그려 내는 것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로미오와 줄리엣 3〉은 반대로 어떤 인물(로)도 응결되지 않는다. 일종의 화자로서, 논평자로서 힙합의 랩 형식은 내용의 복잡한 세부의 구체적 면모들을 담기에 적합해 보이는 발화 형식으로, 그것이 필연적인 것이냐 의도된 것이냐를 추적하는 걸 차치하고, 두 대리-대화적 작곡가의 의도에 따른다면, 내용의 축약과 가사화 그리고 음악적 질감과 정서의 주조라는 두 개의 과제가 통합적으로 요청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후자가 조금 더 중요해 보이는데, 그리고 어떤 전자의 실천은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류로써 상반되는 물리적 난제로서 다가오는 가운데 그 지위가 뒤집히는 것으로, 곧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어찌 됐든 두 사람은 음악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어떤 음악가의 모델들을 전제하는데, 그것을 연장할 수 있는 한국 음악가라는 물리적 지지체로서 목소리에서 스타일까지 여러 양상에서 제약을 겪고 있음을 또는 그것을 해소하고자 함을 이야기한다.
“음악들이 전반적으로 옛 국힙의 뽕짝스러운 멜로디가 존나 들어가는데, 클로드 분석으로는 한국어 데이터셋 자체가 한국어+랩-〉 2000년대 초반 영향력있던 팝 랩 아티스트의 음악이 자동으로 연결되는 경향일 수 있다는 얘기.”
“lan Curtis 특유의 단조롭고 감정 없는 바리톤, 메트로노믹 드럼, 베이스 중심 사운드를 목표로 했다. 소리 지르기, 국악 리듬, 감정 과잉을 막는 네거티브 프롬프트를 잔뜩 넣었다.
한계는 있지만 포스트펑크 사운드는 어느 정도 구현이 됨.”
이 음악이 리스닝할 만하냐? 곧 들을 만하냐라는 음악적 성취의 차원은 연출의 의도에 의해 부차적인 것으로 처음부터 기각되는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곧 희곡을 어느 정도 갈피를 잡고 적당한 분위기에 젖게 만드는 음악은 최소한도의 내용적 실질로서 희곡을 대체한다. 여기서 그것이 잘, 완벽하게 대체하지 않기 때문에, 연출은 그것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없는 자신의 입장을 관객에게도 대입하는 셈인데, 이곳은 사실 음감회가 아닌 것이다―스피커의 위치와 그 소리는 치우쳐져 있고, 사실 지저분하다.
관객은 희곡을 매개하고 번역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그저 ‘목격’하는 것에 가까운데, 그것은 물론 소리를 포함한다. 따라서 소리 매체는 무대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며, 그것은 일종의 배경으로서 감돌뿐이다―마치 저 전동차의 자체 걸리적거리는 움직임처럼 스스로를 잉여적 실재로 규정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무대는 비어 있다. 실질적으로 투여되는 건 우리 자신(의 응시와 공)이다. 배우 역시 투여되는데, 이들은 2막에서 비로소 첫 등장하는데, 막간적 상황에서는 음악적 신체가 된다.
연극 안 하기의 정신
처음 이들이 걸어 들어올 때 그들은 관객의 한 모습이며, 이전에도 2층의 관객과 뒤섞인 채 자리했었다. 이는 사후적 재조립으로, 사실 그들은 엄밀히 관객과 구분되지 않았고,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극장에 입장한다. 음악이 가설하는 공간에서 그들 역시 그 안에 있음을 말해준다. 공간은 단지 1층과 2층으로 구분될 뿐이며, 그것은 특정한 분리적 차원을 배가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차원의 분별만을 연장하는 데 가깝다. 곧 응시는 드러나고, 응시가 향하는 공간만이 특정되지는 않는다.
막과 장의 수여는 이들이 그 응시와 음악을 틈입하는 행위이며, 곧 응시가 전도되고, 음악이 멈추는 순간에서의 발화이며, 전도된 역할로서, 역할 너머에서 임시적으로 연극이 출현하고 시작하는 지점을 고정하는 행위이다. 이 되감기의 기술과 본격적인 대화 양식 아래에서 음악은 멈추고, 분별된 매체로서 자리를 떠난다. 2막 2장, 작업대 위에 오른 줄리엣―2층 창가에 위치한―과 그를 바라보며 경탄하고 고백하는 로미오의 모습은 뭔가 짖궃은 장난의 방식을 게임의 규칙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곧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퀴어적 관계는 벌칙도 기꺼이 수행하기, 그리고 그것에 기꺼이 감화되기의 반응 아래 장난에서 진지함으로의 어떤 변용적 사태를 보여주게 되는데, 거기에는 원작에 대한 의도적인 비틂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도치 않은 퀴어적 조합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인공성을 지각하고 기각하는 차원에서 충분조건이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가장 기이하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 것이므로, 그리고 그 게임의 난맥이 그들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더 큰 과제를 수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2막 4장에서 이 둘이 결국 사랑을 하는 행위는 서로를 마주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바닥을 슬로우로 뒹구는 안무로써 표현되는데, 그것은 사랑에 대한 정서 대신에, 끈적한 신체들의 육중한 무게를 유연하게 처리하는 대등한 조율의 기술이며, 무엇보다 그 구도 아래에서 무언가가 발생함을, 서로의 응시하는 눈의 접촉에서 다시금 끈적한 무언가가 일어남을 보여준다―이른바 ‘젠더 수행성’과 같이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정체화된다1.
김보우의 우악스럽게 거의 한 글자씩 강조하며 소리 지르는 발성은 사랑의 발화라기보다는 남성 신체적 차원을 (의식하지 않고) 경유해서 로미오와 응전을, 팽팽한 신경전을, 적대를 증대시키는 행위이며, 이는 사랑의 성정을 부정하는 가운데, 사랑 자체의 상징성 자체를 부정하기 또는 탈각하기, 그로써 『로미오와 줄리엣』에 항거하기 위해, 그냥 날뛰고 있는 것 아닐까. 거기에는 외려 비판보다는 어떤 욕동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나는 너에게 어떤 감정도 없지만 역할로서 그렇게 한다는 전제는 의도치 않게 퀴어적 사랑의 암시 역시 기각하고 벗어나려는 반동적 몸짓으로 약호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곧 퀴어라는 부정성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퀴어라는 외부성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방식으로서 말이다.
(이를 선행해 본다면) 김상훈의 방식은 수행성을 이행시키기의 차원에 있는데, 그것은 엄밀히 티노 세갈의 “해석자(interpreters)”가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s)”에 대한 주체-변혁적 인식의 차원과 재수행에 입각하기보다 이전의 해석자의 기원을 탈각시키고 은폐하는 지점에서 그것이 작동한다는 것, 곧 수행을 인식하지만 그것이 근원적으로 변경되거나 의문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의 수행 방식과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이는 다소 모호한 영역이 부가되는데, 배우들의 연기는 순수하게 위임되었다기보다 공통된 빈 공간이라는 합의 속에서 자신을 격발하는 창의성의 차원에서 시험되며 시험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족쇄 풀린 존재들처럼 무언가를 하게 되는데, 서사는 이어지고 지시되고는 있지만, 현실은 지정되거나 구현되지 않는 이 상황 아래에서, 배우는 낭독이라는 양식 아래에서 접 붙지 않는 임시적 역할을 떠나 자신의 구체성을 시험하고 실험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3〉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해체하는 건 이 전적으로 헐거운, 낭독 주체의 임시적 변통으로서의 단 하나의 공통된 역할의 분배이며, 젠더 차원에서 반동적으로 결정되는 일부 구간은 수행적 차원의 적극성과 그 효과를 동시에 부각한다. 배우들은 그저라기보다 그냥 존재한다. 3막 1장에서 “로미오를 제외한 모두가 퇴장한다”라는 지문에 따라 배우들은 재퇴장을 하는데, 곧 퇴장하기 위해 다시 등장한다. 이는 규칙의 엄밀함이 유희로 전도되는 순간인데, 여기서 엄밀히 현상되는 건 배우라기보다 빈 무대이다.
대응되지 않는 잔여적 실재
빈 공간에서 배우라는 존재는 ‘모두’에 합성되는 여분의 대상이며, 또한 잉여로서 떠돌거나 다른 존재에 과잉으로 흡착된다. 이는 싸움에의 결착됨이 사랑보다 더 큰 차원의 끈적함으로 전유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앞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뒹구는 장면과 연결된다. 여기서 적은 ‘나’와 구분되지 않으며 공-존재로서 그 모두에 대한 울퉁불퉁한 요철로서 연장된다. 거리를 압축함으로써 모두는 특이점의 경계에서 하나로서 살아남는다.
3막 2장의 로미오의 추방 사실에 대해 줄리엣이 한탄함은 숨바꼭질 놀이를 하며 돌아다니는 배우들의 혼잡스러운 풍경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3막 3장 역시 탱탱볼을 던지고 튕기고 노는 시간으로 운용되는데, 별다른 연기 없이 3막 5장에 이르면, 공을 자동으로 발사하는 장치가 투여된다. 그런데 이는 줄리엣의 위장 죽음과 격렬하고 절절한 속내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일정한 에너지와 양이 투여되는 유희로서 놀이가 갖는 무의미성은 희곡에 대한 사보타주인가, 빈 공간 자체에 대한 대응인가. 역할과 빈 공간―존재―의 간극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인가. 아님 사촌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의 외피로 그를 죽인 로미오에 대한 그리움을 명목상으로 대체하는 행위? 또는 로미오 대신 다른 이와 결혼을 해야 하는 곤궁한 상황에 대한 난처함을 해소하려는 행위? 아님 의사 죽음에 대한 수행성의 연장?
4~5막은 줄리엣과 추방된 로미오의 은밀한 사랑의 성사를 도와 왔던 로렌스 수사에 의해 압축적으로 정리될 수 있으며, 그것은 이미 로미오와 줄리엣이 숨을 거둔 후이다. 무빙 라이트의 돌아감에 의해 자동 장치의 알고리즘적 시현이 다시 출현하고, 이번에는 존재의 결착 없이 빈 극장을 지시한다. “핸드폰이나 보세요”(김상훈)의 말은 “핸드폰이나 하세요”로 조금 바뀌어 (전유된) 극장 4면 중 출입구 방향으로의 면에 불투명하게 하나, 그 맞은편에 명료하게 하나가 쓰여 있다.
이 말이 극장을 개인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 개인화에 대한 비판의 저편에 사회적인 것에 대한 주장은 빈 극장과 그곳 텅 빈 환경 내에 울려 퍼지는 (녹음된, 실제 인물이 아닌 이들의) 발화, 희곡과 배우라는 접합부로서 연극의 경계를 그리는 것, 그러니까 그것은 사회적인 어떤 것을 포함하려는 차원에서 역으로 ‘(제대로/잘) 조직하지 않는’ 연극, 연극이 불포화된, 또는 과포화된 상태로서 어떤 플랫폼을 연극인 양 드러내고 있는 것인가, 연극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면서.
정보 차원에서의 요약과 그것에 더해져야 할 당의정으로서 기능적 차원으로서 음악과 (그와 상관 없이/상반되게) 도달하려는 음악 자체, 어떤 그럴 듯함으로서 음악 사이의 간극 안에서 발생하는 음악은 서사를 제시는 하지만, 배우를 대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독립적인 매체, 곧 음악이 아닌 것으로 놓이는데, 곧 신체 전사적, 의존적, 연장적 매체이며, 이는 외부적인 어떤 것으로 다른 방식의 신체가 투여되는 배경이 된다. 그 과정에서 이는 어쩌면 전수 가능한 구술 매체로서 서사의 가능성을 끌어오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연극과 핸드폰이 서로를 가로지를 때
김상훈은 〈로미오와 줄리엣 3〉에서 분명 연극을 하나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고,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적용된 유일한 단 하나의 그 말은, 역으로 이 말 하나의 관철을 위해 모든 것이 동원되었다고 전제하는 것이 가능한 이 말은, 연극과의 관계성으로 인해 난해하고 모호한 위치에 처한다. 김상훈은 연극이 핸드폰을 보는 행위 따위의 것으로 전락되었음을 말하(면서 자조하)는가. 아님 핸드폰을 철회하고 볼 만한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 연극임을 상기시키려 하는 (반어적 전략을 꿈꾸는) 것인가.
그러니까 김상훈은 핸드폰을 연극에 대한 대항 매체로 생각하는가. 아님 핸드폰이라는 매체를 연극에 대한 대안 매체로 생각하는가. 곧 핸드폰을 금제하는가. 핸드폰을 하는 행위로서 연극을 전유하려 하는가. 핸드폰을 적대하는가. 핸드폰을 긍정하는가. 아님 비판적으로 수용하는가. 선동적인 프로파간다는 핸드폰에 매몰된 수용자에게서 보이지 않게 체현되고 있는 것인가. 아님 연극이라는 고정된 하나의 양식 안에서 다만 체현될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인가, 핸드폰이라는 매개를 통해.
“올림픽 공원의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와도 관계 없고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자기인 사람들. 바다는 푸른색을, 푸른색은 자유를, 자유는 다시 사랑을, 사랑은 다시 심장을, 심장은 다시 사과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 바다는 그냥 바다고, 파란색은 그냥 파란색이고, 자유는 자유고, 심장은 심장이기를, 모든 것이 언제나 제자리에 있어서, 아무것도 변신하지 않기를. 모두가 그저 진짜이기를. 왜냐면 그래야 죽지 않으니까. 죽지 않아야 살아서, 계속 살아가서.. 계속... 계속.”(「연출의 말」에서)
김상훈은 결국 무엇을 긍정하는가. 물론 그 무엇도 아니다. 유령성의 형식으로서 연극이 자리할 때 관객은 분열한다. 주체의 흔들림이 아니라, 흔들림의 비주체성만이 있다. 결여된 연극이 핸드폰을 초대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유령이 된 관객 주체를 체현한다. 김상훈의 동시대성은 시대착오적 테제로서 연극을 되불러오는 동시에, 동시대적 현상을 당대적인 부정성으로 정의한다. 이 부정성의 핸드폰과 연극이 미끄러지는 지점 어딘가에 〈로미오와 줄리엣 3〉이 있다.연극과 관객 사이에 핸드폰이 있는가. 〈로미오와 줄리엣 3〉은 관객과 핸드폰 사이에 연극을 끼워 넣는다.
김민관 편집장
2026년 6월 11일(목) ~ 6월 13일(토)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캠퍼스 연극원 B1 실험무대
CREDITS
작 | 윌리엄 셰익스피어 연출 | 김상훈 (연극원 연출 23)
조연출 | 정은유 (연극원 연출 24)
드라마투르그 | 이정화 (연극원 연극학 26)
무대감독 | 김휘람 (연극원 연출 22)
기획 | 김규호 (연극원 예술경영 24)
기획 | 김시준 (연극원 예술경영 25)
프로젝트 기획 | 조연우 (연극원 예술경영 24)
음악감독 | 김휘람 (연극원 연출 22)
음악감독 | 정인혁 (연극원 연출 25)
무대 디자인 | 서지원 (연극원 무대미술 24)
조명 디자인 | 안성현 (연극원 무대미술 24)
메이커 | 김현승 (미술원 조형예술 20)
그래픽 디자인 | 윤예진 (미술원 디자인 25)
출연 | 전총명 (연극원 연기 23)
출연 | 김도윤 (외부)
출연 | 김동민 (외부)
출연 | 김보우 (외부)
출연 | 박진아(외부)
객석진행 | 박지현 (연극원 무대미술 26)
객석진행 | 장민혁 (연극원 예술경영 24)
객석진행 | 허지영 (미술원 디자인 25)
객석진행 | 윤영광 (영상원 방송영상 23)
객석진행 | 이채희 (무용원 예술경영 25)
객석진행 | 김종환 (연극원 연기 25)
객석진행 | 정민철 (연극원 예술경영 23)
객석진행 | 김해인 (연극원 연출 26)
객석진행 | 왕건우 (연극원 연기 24)
객석진행 | 박승건 (무용원 예술경영 25)
객석진행 | 정연재 (연극원 연기 26)
객석진행 | 최유정 (연극원 연기 22)
객석진행 | 천서진 (무용원 예술경영 26)
객석진행 | 김보민 (무용원 예술경영 25)
객석진행 | 이자연 (무용원 예술경영 26)
객석진행 | 양수영 (무용원 예술경영 25)
객석진행 | 백채연 (무용원 예술경영 23)
셋업크루 | 이수빈 (연극원 극작과 26)
공연 실황 영상 촬영 | 박경혜 (외부)
포토콜 촬영 김휘람 (연극원 연출과 22)
지도교수 | 정세영
기술감독 | 임건수
조명감독 | 홍선화 음향감독 | 고태현 무대제작감독 | 송기선 제작감독 | 이은혜 이한아
제작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 1. 현재 전시장―리움미술관―에서 상연되고 있는 티노 세갈의 〈키스〉(2002)를 일견 떠올리게 하면서, 그것을 더 선명하고 증폭된 방식으로 보여주면서, 그 메커니즘을 의문시하는데, 이는 사랑하는 이들의 수행성이 사랑을 담지한다는 어떤 전제가 환상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물론 거꾸로 키스를 수행하는 커플들이 사랑을 매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비윤리적일 것이므로, 그것은 존재가 역할을 상회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역할에서 존재로 소급되어 가는 사유의 경로 안에 있다.
그러니까 수행으로 인해 사랑이 촉발되는 것이냐, 아님 사랑 안에 수행이 존재하는 것이냐, 아님 사랑하기 때문에 역할로서 과정을 순수하게 분리시켜 진행할 수 있는 것이냐는 여러 질문으로써 연기에 대한 근원적 차원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참조: https://www.artscene.co.kr/21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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