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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윤 원작, 류이향 각색/연출, 〈모린〉: 막 너머로 환치되며 교환되는 개념들REVIEW/Theater 2026. 6. 30. 23:01
미란에서 모린으로

안윤 원작, 류이향 각색/연출, 〈모린〉ⓒ이예인(이하 상동). 〈모린〉은 다양한 소수자성의 인물을 지닌 인물들을 교차시키는데, 이는 콜센터 직원으로 한 고객의 지속적인 갑질로써 우울 증세를 겪는 미란이 시각장애인 영은을 만나면서, 연인이 되는 하나의 서사를 중심 축으로 하며, 일종의 서브 플롯으로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이를 키우는 미란의 친구 보현의 서사는, 영상을 통해 전화 너머의 세계로 건너온다.
이때 보현은 미란이 영은과 성큼 만나볼 것을 경청하며, 그것을 새삼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케 한다. 곧 시각장애인과의 내밀한 만남과 자폐 스펙트럼 자녀를 두는 것은 비례하며 우정을 경유하여 상호교차성의 잠재적 범주 안에서 횡단한다.
또한 모린이 겪는 우울은 요제프 코발스키의 산문 『보이지 않는 것들』의 낭독 도서 제작을 신청하고, 낭독 녹음을 하면서, 타인의 삶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으로서 발화할 수 있는 것인 양 그것을 발화하면서 자신을 비워낸다. 또 하나 등장하는 책인, 그가 자신의 할머니에게 읽어주던 『금강경』에서 “모습과 생각에 물든 마음”을 갖지 않는 것과 같이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그것 자체가 미란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는 것과 같은 건 그 책이 동시에 영은과의 사랑이 가능할 것임을, 또한 이뤄질 것임을, 나아가 영은 자체임을 가리킨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출판 과정 자체가 영은과 모린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그 관계를 선취한다.
또한 무엇보다 책에서 딱 한 번 등장하는 “유일한 사람”인 “모린”은 자신의 이름을 바꾸려고 하던, 그리하여 특별해지는 “미란”이라는 그 이름에 대한 일종의 애너그램식 전유인데, 이는 실은 산문과 그 실제 배경이 가상이라는 사실에 의해, 미란에 모린이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것, 그리하여 모린이 곧 미란이라는 유일한 존재를 지칭하는 알레고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밀히 자음과 모음이 음절 단위로 작동하는, 엄밀히 애너그램을 만들 수 없는 한글은 점자의 점들의 배치로 가늠되는 또 다른 글자들의 향방에 따라, 미란은 영은에게서 모린이 되어야 한다. 마치 한글 표기는 선들로 ‘이뤄진’ 그리하여 해체 가능한 점들이 되고, 모린의 ‘ㅗ’에의 유일한 점은 미란의 ‘ㅏ’에의 유일한 점으로 옮겨 가기를 희구하는 듯 보인다―이는 점자가 아닌 묵자이지만 점자가 한 번은 허공의 손짓으로 다른 한 번은 마지막에 스크린의 이미지로 제시되는 극에서, 점자를 대신하는 묵자의 변용으로서 우선한다/자연스럽다. 곧 유일한 사람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또는 미란은 그 유일한 사람을 체현하고 있다.
번역은 곧 타자에의 번역

저자인 요제프 코발스키는 시각장애인으로, 틈틈이 그가 녹음한 것을 그의 구두를 닦아주던 하숙집 아들 조지 오코너가 그의 마지막 죽음을 발견할 것이고―그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고―, 그의 녹음을 책으로 푸는 번역의 과정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 세상으로 나온 이 책과 마찬가지로 미란을 통해서(만이)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을 미란이 읽어주는 걸 영은은 좋아한다. 곧 영은은 미란을 좋아하며, 미란은 이 책으로써 영은에 대한 사랑을 선취한다.
또한 이 책은 미란이 자신을 투여하는 공간이 되며, 영은과 그 책을 경유해 하나의 공간에 있게 되는 상연의 매체가 된다. 사실 책의 내용보다는 그 저자 요제프 코발스키가 영은에 대응하며, 그것이 오로지 미란을 통해서만 다시 가시화되는 것과 같이 오코너에 해당하는 미란은 그 행위로써 불가능한 접근의 그 대상의 자리에서 코발스키 대신에 영은을 마주하게 된다. 곧 책과의 관계는 영은과의 관계와 착종되며 서로 스민다. 그 과정은 매체의 번역이라는 매개 행위만을 최종 증대시킨다. 책은 완벽하게 스며들며 그 둘로 전이된다.
〈모린〉은 곧 번역과 매개를 다루는 동명의 단편 소설이며, 연극은 영상과 무대를 오가는 방식으로써 일종의 소설 자체의 번역으로서 기능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대화보다는 화자 안에 용해되는 인물들 각자의 내면이 실은 문학적인 하나의 형식을 넘어, 작품의 이념 자체를 반향하기 때문이다.
곧 미란이 한 고객의 무자비하고도 비인간적인 클레임에 맞서는 대신에,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건, 영은이 중도에 시력을 잃었고―“중도 실명”―,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모두를 살아보는 게 자신은 더 좋다는 말을 하는 것에 조응하며, 이는 결국 〈모린〉이 일종의 타자적 세계에 대한 모험을 긍정함에 입각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미란에게는 적대가 아닌 또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을 감행하게 만든다.
〈모린〉은 무대 바깥 다양한 장소를 영상으로서 무대에 접합하는데, 그것은 이른바 기존재하던 시간이 더해짐을 의미한다. 영상은 다양한 장소를 구현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임시적이므로, 대부분의 시간, 무대의 제약을 극복하는 차원보다는 실제적인 배경이 되는데, 곧 무대 안쪽에 크게 걸린 프로젝션을 위한 하얀 막은 빈 무대를 앞뒤로 가르며 경로 의존성을 만드는 벽이 된다.
영상: 실재적인, 그리고 국소적인

미란이 자신을 괴롭히던 고객을 무작정 찾아 들른 아파트 단지 모습은 영은의 새로이 혼자 살 집을 알아보러 온 긴 창문의 베란다와 희미하게 초점화되는 맞은편 아파트 풍경으로 시간을 두고 연접된다. 이때 영상은 문자가, 연극의 무대가 가져올 수 없는 실제의 이미지를 산출하는데, 이는 신체가 머무는 공간의 입체적이고도 과잉된 이미지다.
전자에서 아파트를 지나다니는 불특정한 아파트 주민들의 신체성이 화자의 언어 내에서 걸러지기 직전의 순간을 상정하면서 마치 특정 고객의 형상에 대한 혼동을 감각의 차원에서 연장해낸다면, 후자에서 아파트 풍경은 그 자체로 집을 체현하며, 무대 내 연기와 동시성을 지닌다.
이후 영은의 집은 미란에게는 “영은의 질서”를 대변하는데, 영은의 집안 각종 사물들은 볼록 스티커가 각종 기계 장치의 스위치와 버튼 등에 달려 있음이 영상으로써 가시화된다. 그것은 시각장애인의 현실을 핍진하기보다 실재적으로 보여주는데, 사물의 예외적 전유 방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이후 친구 보현의 집에서, 그가 전화 받을 때 찬장의 문들이 가까운 쪽 기준으로 두 개씩 하나의 와이어 락들로 봉쇄되어 있는 것이 풀 숏으로써 한 번에 드러난다.
이는 외화면에서 “치킨”을 부르짖는 보현의 아들의 소리가 차폐된 공간에서 나오는 것과 연접한 기호를 이룬다. 그 소리를 거부하는 보현의 행위는 사전에 그것이 제어 체제 내에서 수용되고 있음을, 수용되어야 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반면, 미란과 그의 할머니는 집안에서 미디엄 숏 정도로 근접하게 비추어지는데, 이로써 배경에 대한 명료한 지각 대신에 둘의 근본적인 친밀한 정도를, 집으로 연장되는 정서를, 목소리의 다정함과 미소함의 정도를 강화한다.
할머니는 오직 영상에서만 존재하며, 그의 죽음 역시 그의 집이 텅 빈 배경으로 제시되는 것으로써 죽음을 상정한다. 물리적으로는 잠깐의 등장을 대체하는 영상의 경제적 활용이지만, 집과 밤, 안온함과 은밀함, 기억의 한 이미지 자체로서(만) 결정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또한 그것은 녹화, 녹음된 것으로서 무엇보다 실재가 특정 매체를 경유해 드러나는 그 감각 자체의 특이성과 함께 과거적 단위로서 구분되어진다.
빚과 빛

영은은 이미 시력을 상실했을 당시인 16살에 자신이 오렌지색 풍선에 갇히는 체험을 하는데, 이는 마지막 깁스를 푸는 날 보았던 빛의 경험, 곧 좌측 가를 일부 남기고 나머지 화면의 대부분을 덮은 노랗고 빨간 커다란 원이 점점 더 점진적으로 커지는 그래픽 영상, 그 이전 장면에 대한 사후적인 언어적 증강, 설명이 된다. 곧 영상이 경험을 선취하고, 언어는 영상의 이미지를 비로소 식별 가능한 것으로 구성한다, 곧 문학화한다.
그런데 이 커다란 원은 빛을 가져오는 해나 그것을 인지하는 눈알과 같은 것처럼 감각되는데, 압도적인 크기로서 체현된다. 곧 영은을 더 초과하는 이 풍선은 스크린 자체를 덮는 방식, 곧 스크린을 하나의 신체로 이전시키는 것에 의한다. 그리고 이는 주체를 지운다―지워진 주체를 갈음한다. 그런데 시력이 “있음”과 “없음”의 세계에서, 그 두 개를 연결하며, 제3의 선택지를 이루는 “잃음”의 세계는 이후의 없음이 이전의 있음에 대한 기억을 내포하는, 상실을 애도하는 하지만 동시에 그 없음을 수용하고 긍정하는 변용과 중층의 세계임을 의미한다.

‘잃음’은 ‘이름’과 조응하는데, ‘미란’이 ‘모린’에 조응하는 것, 본래의 이름을 바꾸고자 하고, 그렇지만 마땅한 그러니까 그것이 객관적으로 미학적이냐가 아니라 자신과 본래적인 것인 것처럼 조응하는 그런 이름을 찾는 것이 어려운바,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타자성을 제 것으로 섭취하는 것과도 같은바, 이는 대신 영은과의 만남으로 이전되며, 그 타자성의 신체로부터 비로소 그는 자신을 다르게 획득한다. 이때 미란은 자신의 이름을 잃는 것일까. 두 개의 이름 사이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빚”은 또한 “빛”과 직접 조응한다. 이는 언어유희적 발화 안에서, 채광이 잘 드는 아파트를 구입하며 빚을 떠안은 영은의 그 유머 안에서 작동하는데, 빛을 위해 빚의 받아들임이라는 역설은 긍정적인 승화 작용으로 비치는데, 곧 그 말을 하고 나서의 찬란한 빛에 둘러싸인 영은의 옆모습, 가가 빛과 동화되어 있는 영상의 그 이미지는, 마치 빛이 빚을 뚫고 나오며, 곧 빚에 대한 시름과 생각을 소거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빛을 볼 수 없는 것, 대신 감각하는 것으로서 우선하는 것은 빛을 절대적인 무엇으로, 그 전의 빛과는 다르지만 그와 같이 어쩌면 더 절실하고 뚜렷한 무엇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빛에서 점 하나가 빠진 감각, 하지만 빛을 상회하는 그런 감각으로서 빛의 결여와 빚의 과잉을 횡단한다. 그것은 빚이 아닌 빛이 아니라, 빛과 같은 빚에 가깝다. 그 달라짐, 다름, 다름으로서 횡단을 사실 영은은 즐기고 있는 것이다.
타자성으로의 여정

“얼마나 걸릴까요? 걸릴 만큼 걸리려나요?” 할머니의 죽음 이후 미란은 영은에게 시간을 그렇게 해서 거리를 둘 것을 요청한다. 이때 영은의 말은 그 시간을 그럴싸한 감각으로 그려낸다. 그것은 만남에서 이별로 이어지는 과정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직전의 설명에서, 감정의 식음이 아닌, 감정이 가라앉고 다시 시작할 때 먼 시간을 아무렇지 않은 듯 기다리는, 그 시간을 관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영은의 태도로써 형해화되어 형체화, 의미화된다.
영은은 사람들의 표면상의 분노의 발산 대신 그 안의 슬픔을 대신 들여다보는데, 그것은 감긴 눈과 조응하는 한결같은 엷은 미소의 차원에서 그가 ‘모습과 생각에 물들지 않은’ 존재임을 상정한다. 타자성의 희구로서 〈모린〉은 어쩌면 타자성을 절대화하는 것 아닐까 하는 우려 역시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미란-영은의 관계 쌍(이 다른 관계에 비해 더 집중되는 것)에서 그렇다.
〈모린〉은 파편적으로 놓이는 개별 화자들의 기억과 생각, 그 서술에 근거한 전개 방식을 재배치하는데, 이 대사는 원래 마지막에 놓인 것을 중간으로 뺀 것이다. 또한 소설의 화자성을 별도의 신체성으로 조각하여 그가 세계를 중개한다는 인상을 준다. 곧 관객석에 앉는 것으로 등장한 ‘미란이기 이전의’ 김수아 배우는 몸을 돌려, “시작할게요”라는 연극의 제4의 벽을 그 바깥에서, 곧 관객의 장소에서 공존하면서 구성하는 것으로 연극임을 고지한다.
따라서 미란을 중개하면서 현실에서 곤궁을 겪던 미란에게 펼쳐진 영은의 세계가 그를 잠식하게 되는―마치 노랗고 붉은 스크린이 잠식하는 것과 같이―, 주체의 모험과 그 여정이 영은의 세계에서 선체현되고 있었고, 조금씩 세계의 변경과 관계의 이행적 과정으로써 〈모린〉은 쓰이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니까 이 첫 번째 만남은 미란-되기의 그 여정에서의 수행적 차원을 관객에게 체현한다.
‘육체의 성애학’

미란과 영은의 애무는 영상에서 근접 촬영된 것으로써 기입된다. 영은이 미란의 쇄골 아래로 내려와 닿는/읽히는 두 개의 점은 점자로 “나”이기도 하고 “삼”이기도 한데, 거기에 영은은 입을 맞추고, 이후 그렇게 미란이 “나삼”으로 불리는 순간 이후, 영은은 미란의 이마에서부터 서서히 그의 얼굴을 매만져 나간다. 보이지 않는 얼굴에 대한 영은의 식별―더듬음―의 과정이기도 한 이 매만짐은 미란에게 읽힌다는 감각을 주는데, 그는 곧 부끄러워져서 불을 켜는 것으로써 이 시간을 중단한다. 그리고 불을 켜면 미란만이 영은을 보고, 불을 끄면 영은만이 미란을 보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원작과 달리) 할머니와의 영상이 초반에 출현함에 따라, 할머니와의 시간은 더 오래전의 것으로 기입되며, 더 나아가 기억에서 되불러온 이미지가 아니라, 현존 그 자체로 체현‘되었’다. 따라서 애도의 순간 역시 더 커다란 것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막의 전환(이는 막 자체가 아닌, 막 안의 이미지의 변용으로 이행된다.) 이후 할머니의 부고와 그 전에 산 들고 있던 군밤이 든 종이봉투를 떨어뜨린다. “우리 똥강아지”라는 그의 음성과 함께, 앞선 성애학이 그것과 연접되는 기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머니 대신에 할머니와의 관계만 드러나는 미란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영은과의 애무가 멈추는 지점은 이 할머니와의 관계가 급작스럽게 끝나는 시점으로 연장된다. 곧 기원을 소급해 간다. 영은의 애무는 미란에게서는 자신의 읽힘이기도 하지만, 미란에게 점자를 기입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는 영상의 클로즈업식 번역을 통해, 정동을 미시적인 것으로서 증폭시킨다. 불을 켜는 건 무대로 돌아오는 길이고, 불이 꺼져 있던 건 곧 영은의 세계, 빛이 없는 어둠의 세계로 소급되는 경로가 된다.
영상은 곧 이 어둠의 세계를 밝게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빛을 빛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이. 할머니의 부재를, 어둠 속 둘의 신체를. 앞서 미란은 영은의 마음에 관한 말을 닮아 가는데, 그는 눈을 감고 무대 앞쪽, 어둠의 장소로 나아간다. 이때 붉은 점이 점점 커져서 빛이 되어 사라지며, 앞선 해~원의 이미지적 증폭은 빛으로 전화한다. 그것은 잃음일까, 소멸일까.
미란은 마지막에 책상 아래로 들어가서 코발스키의 ‘매체 번역 이론’을 매개한다. 그것은 여러 개의 껍질로 이뤄진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주로써 공명시킬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상상이다. 이는 열매 자체가 씨앗인 밤의 그 껍질이 심고 나서도 3년 동안 썩지 않고 살아 있는 가이드로서 말로 연장된다. 이 밤은 와륵 쏟아지는 탁구공으로 대신한다. 탁구공은 곧 낱낱의 점(자), 그리고 눈과 풍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물들지 않은 것처럼’ 하얗고도 자신을 증여한 밤껍질처럼 비어 있다.
김민관 편집장
2026. 6. 19(금) ~ 2026. 6. 28(일) 평일 19시 30분 | 토.일요일 16시 (월 쉼)
원작 안윤 『모린』, 문학동네
연출 류이향
제작진
원작 작가 안윤 | 각색 류이향 | 조연출·음향오퍼 장혜지 | 기획팀장 박형욱 | 기획팀원·홍보마케터 서연두 | 기획팀원·접근성매니저 오현아 | 접근성협력 김시락 | 기술감독 오찬혁 | 영상기술감독 강경호 | 영상기술 어시스턴트 안현근 | 영상디자인 류이향 | 무대디자인 신나경 | 무대어시스턴트 황지민 | 조명디자인 고승우 | 조명어시스턴트 진혜련 | 음향감독 전영식 | 음악·음향디자인 장민혁 | 그래픽디자인 이정근 | 의상·소품디자인 이사랑 | 무대감독 양정렬 | 조명오퍼 장준서 | 영상오퍼 김민채 | 자막오퍼 이원림 | 음성해설 나레이션 정다혜 | 관객과의 대화 수어통역사 유하영 | 공연기록촬영·편집 권희승 | 포스터·콘셉트 사진 류이향 | 연습·공연 스틸컷 이예인 | 제작협력 양지운, 윤희남
출연 김수아, 박윤선, 변신영, 장인혜 (영상출연: 강애심, 김복길, 노충희, 박형욱, 사현명, 오현아, 이아담, 이아인, 장혜지, 조윤영 )
주최/주관 류이향(김이향) · 이향 프로젝트
지 원 극단 고래
후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협 찬 Blind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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