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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숙, 〈시위 기피의 역사〉에 대한 주석: 역사의 포물선형 궤적REVIEW/Theater 2026. 7. 1. 15:08

성화숙, 〈시위 기피의 역사〉[사진 제공=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상동). 성화숙의 〈시위 기피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다양한 시위의 역사 그 주변부의 목소리를 따라 가는데, 5.18 민주화운동에서 시작되어 근래의 계엄을 경유하고 다시 5.18을 향한다. 역사의 중핵은 곧 5.18에 있으며, 다른 역사의 시위는 이를 우회하여 접근하기 위한 맥거핀들에 가까운데, 이는 암묵적으로 광주와 서울이라는 두 개의 지리적 경계를 만들고, 동시에 역사와 상대적으로 현재라는 시간적 경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성립한다.
결과적으로, 이때 기피는 시위가 절대적인 몫―환경―에서 상대적인 차원으로 변화하는 그 낙차를 방어하기 위한 탈승화로서 전유된 부정성으로 보이는데, 이는 물론 5.18을 바라보는 시점의 사람들의 시점에서를 말한다. 곧, ‘기피’는 근래의 시위들이 아닌 5.18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이들의 불가능성을 부정성의 근거를 경유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의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곧 부정함으로써 그 역사에 대한 가상의 참여와 그것이 갖는 간극을 해소하고 승화시키려는 차원에서, “역사”는 현재를, 현재에 대한 어떤 기피의 태도를 광주와의 연속선상에서 단지 병치시킬 뿐인 것이다―이는 엄밀히 계보를 이루지 않는다. 곧 광주라는 하나의 역사(적 중핵)만이 있다.
구체적으로 “기피”는 인터뷰이 중에서는 세월호 참사 당시 광화문 촛불 시위에 정치적 인물로의 낙인을 기피하던 한 여배우의 발화에 특정될 뿐, 다른 이들의 의식과 태도는 기피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여배우의 경우, 물리적으로 다른 이들과 다르게 제대로 자막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지만 그 예외로서 그 기피―기피되는 기피, 혹은 부정에 대한 부정성으로 처리되는―가 제목에서 보편을 가장한다는 점에서, ‘기피’라는 개념은 일종의 개인적 증상에 대한 작품의 의식적 단면, 또는 또 다른 증상적 차원에 접근하는 데 있어 주요한 열쇠로 보인다. 곧 그것은 부정되는 것이고 예외적인 존재의 차원이지만 왜 시위를 말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되어야만 하는가.
일종의 정치적 참여에 있어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지 않은 차원에서의 자기 정체화를 동반―그 반대편에서 시위를 하는 이는 열성적이고 그것과 간극이 없는 이로 타자화된다.―하거나 알 수 없는 제약에 묶여 시위에 참여할 수 없는, 곧 기피의 부정성보다는 참여의 불가능성에 기초하거나 하는 다른 시민들과 달리, 기피는 내가 (그것이 올바른 것임을) 알고 있지만 행하지 않는다는 페티시즘적 부인에 가까운데, 〈시위 기피의 역사〉가 다루는 건 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현재의 나를 역사로 소급시키기의 불가능성을 기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곧 현재의 시위는 과거의 시위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계열들은 후자로 끊임없이 소급되어 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기피, 곧 우리의 페티시즘적 부인은 5.18이 진리의 차원임을 단지 알고 있다라는 것이다. 곧 그것이 죽음의 몫을 가정한다는 것, 그리하여 내가 참여할 수 있을까를 심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역사를 박제화, 표피화하는 공작에 가깝다. 오히려 5.18은 그것이 진리의 이름으로 미결정된 상황에서 시위가 이뤄졌으며 이는 진리를 향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기에 수행하는 것이 아닌, 단지 그것과 결부될 수 있을 진리에의 충동 자체를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것을 안다라는 건 그것과 동시적이거나 사후적인 결정일 뿐이다. 따라서 앞선 진리가 단지 역사적 사실로서 확정된 기존의 앎의 차원에 가깝다면, 여기서 진리는 타자로서 나를 향하는 태도와 자세의 차원에 가깝다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곧 나의 윤리가 진정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시위 기피의 역사〉가 말하는 기피는 결국 5.18의 정신이 현재에도 계승될 수 있는 것인가를 묻기 위한 유예된 기술의 용어이다. 여기에는 그것이 진정 현재적인 차원에서도 물어질 수 있는 것인가라는 현재의 차원 외에도, 타자를 향해 우리는 나아가고 있는가라는 미래에 대한 물음 역시 있다. 이러한 타자는 직접성으로 주어진다. 곧 〈시위 기피의 역사〉는 유령적 차원의 물리적 도입이라는 급격한 비약을 서사의 변침을 위해 시도하는데, 이는 역사와 현재의 간극이라는 불가능성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역사의 망령을 불러내어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이 타자의 형상은 우리에게 문을 열어줄 것을 호소한다.
파편화된 말들이 부유하는 형식 아래에서 〈시위 기피의 역사〉에서 단 하나의 가장 중심이 된 이미지는 바로 처음의 움직임이자 마지막의 움직임인, 무언가를 던지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무언가를 던지기보다 그 던짐의 궤적 자체를 그리는 것에 가까운데, 이는 마지막 은박담요를 두 손으로 치켜 들고 그리는 형상과 가깝다. 곧 면을 선취하는 선분으로서 던지기는, 화염병 혹은 체류탄을 던지는 시위의 상징적 도상으로 자리하면서 거기에 감속된 차원을 더함으로써 무언가를 가른다는 것, 갈라진다는 것, 그 궤적의 유기적 차원의 시간적 단위가 지정된다는 것의 의미화를 더한다. 나아가 계엄 정국 때 시위에 쓰인 담요들이 하나로 집산되어 하나의 존재 양상을 성취하는 마지막 이미지에서 비로소 역사는 자리를 잡는다. 또는 역사는 현재의 차원에서 완성된다―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이 둘의 겹쳐진 이미지로부터 5.18의 귀환과 그것이 갖는 역사적 형상으로서 의미가 정립되는 셈인데, 이는 시기를 달리 한 부분들의 언어의 병치에 비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시위 기피의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 하나의 장면이다.
정치 얘기를 가급적 하지 않는 것,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방과 사회적 분위기에 불편함을 가져오는 상황은, 앞서 시위 참여를 기피하는 여배우의 의견에 대한 논거가 된다. 이는 인터뷰의 자료적, 인터뷰이의 현존적 성격을 매개하는 것에서 나아가, 네 명의 퍼포머가 일단의 자율적, 가상적 입장으로 그 차이를 드러내는 연극적 구성 아래에서 드러나는 부분이다.

앞선 문을 두드리는 유령의 발화는 그 말의 신빙성으로 소급되기보다는 내부적 균열을 일으키는 하나의 사라지는 매개자의 효과에 가깝다는 점에서, 엄밀히 물리적인 차원은 아닌데, 이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황선홍의 골 장면의 스크리닝 이후, 동방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가시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여성 혐오적 규약의 시대착오성을 드러내는 시점에서, 홀로 남은 여학생에게 찾아온 유령으로 시작되어, 훌쩍 나이가 든 어느 현재의 시점에서 반복된다.
이때 극은 여성에 대한 혼동을 통해 그 임무를 완수하는 데 결정적인 힘을 실어주는데, 이차순 열사를 안다고 하는 이 남자는 실은 과거에 화염병을 실수로 아이 앞에 던져 절대적인 윤리적 곤궁에 빠지게 될 때 , 그의 감정을 무마하고 위로하려는 그 옆의 여학생은, 이 시대를 건너뛰어 그 기억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현재의 주체로 부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자의 여학생은 오로지 나이든 후자의 여자와의 연관 아래에서 사후적으로 복권되는데, 이 둘의 혼동, 곧 연극에서만 가능한 환유는 추체험―‘기록관에서 접했다고 하는 짤막한 전언 안에서 기입되는’―을 통한 당사자성을 획득하며 역사의 시차가 사라지고 현재화되는 순간을 가져오는 셈이다.
이 복권의 행위는 사실 역사적 계승의 주체로서만 후자의 여자가 의미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는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그에 매여 있는 존재이며, 이는 우리의 현재를 암시한다. 결국 〈시위 기피의 역사〉는 광주에 대한 빚, 책무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현재의 우리를 호명한다. 이차순 열사를 ‘언급하는’ 남자는 그 역사에 대한 주석을 우리에게 맡기는 셈인데, 역사의 유령은 완벽한 타자성의 전형이다. 그것은 이유 없이, 또한 근거 없이 우리를 찾는데, 이러한 비약적 순간은 역사의 왜상이 우연하게 도착한 것임에 조응하기 위한 차원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 가능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 역사의 궤적에 대한 즉물적 형상화로서 몸의 투구 자세는, 그 허공이 갖는 무게와 부피를 증명하면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형체임을 분명히 한다는 지점에서, 이 역사의 유령성 동시에 그것의 절대적인 힘의 각인을 안겨주는 차원에서, 오히려 이 솔기 어린 타자성의 명확한 형체보다 더 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아마도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
김민관 편집장
2025.12.13.(토) 16:00
예술극장 극장1
60분
창제작진
구성·연출 성화숙드라마투르그 이윤정
음악감독 김시율
무대디자인 김시원
영상디자인 권오경
움직임감독 김해초
조명디자인 이유진조명프로그래머 이지나
조명오퍼레이터 정선주
영상 VISUALKEI
출연 박현승 박성현 김연경 김민주'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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