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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기군상, 각색·연출 고선웅, 〈조씨고아〉: 역사는 어떻게 순환하는가, 또는 그 너머에서 읽히는가REVIEW/Theater 2026. 7. 2. 13:56

원작 기군상, 각색·연출 고선웅, 〈조씨고아〉[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조씨고아〉는 복수를 위한 인내의 긴 세월과 그 허망함의 짧은 순간을 다루는데, ‘조씨고아’는 진나라 대장군 도안고가 조씨 가문을 멸족시킬 때 마지막 핏줄로, 문객으로 온 의사 정영이 자신의 아들과 바꿔치기해서 그가 살아남도록 돕고 키우며 장성한 뒤에 그 사실을 알려주며, 비로소 복수가 시작된다. 전반부에서 중심이 되는 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정영과 뜻을 같이 한 주변 사람들의 의로운 희생, 그리고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정영의 아내 송향의 만류와 절규, 그 안에서 번민하고 갈등하고 탄식하는 정영이며, 도안고는 그 과정의 직전에 음모를 계획하고 성사함을 제하고서는 주요한 플롯을 점하지 않는다. 이는 진나라의 정세 자체에 대한 비평적 주석으로서가 아니라, 조씨고아의 희생을 막기 위한 생사의 고투, 그리고 복수의 차원에서의 서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보여주는데, 따라서 시대적 배경은 보편적 차원의 서사로의 환원에 있어 기능적인 차원에 그친다.
전반부의 정영에게 펼쳐진 사건들로부터 그가 겪은 애쓺과 애달픔의 정서적 기류는 조씨고아의 성장 이후에는, 그것에 무지한 동시에 그것에 대한 경험에서 괴리되어 있는 조씨고아에게 그 사건들 자체의 (재)서사화가 필요해지고, 그 역사를 그의 삶에 접지시키고 그를 복수의 주체로 거듭나게 함이 요청된다. 이 서사는 일종의 이미지 기억, 곧 두루마기에 그려진 각종 인물들의 주요 장면들로 압축되고, 그것을 해독하고 감응되는 데 수월한 일차적 코드로서 기능해야 한다. 거기에는 인간 사회의 상징 조각들을 읽어내고 인간의 도리를 아는 정영에게 배운 문(文)의 바탕이 있다면, 다음으로 조씨고아 자신이 그것이 ‘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실행의 다음 몫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실행의 몫에는 도안고에게 배운 무(武)가 바탕이 될 것이었다.
반면, 앎과 실행의 그 사이에는 더 강한 접착제가 필요한데, 그 사실의 인정은 동시에 ‘설마 그것이 나의 일일 수 있을까.’ 혹은 ‘설사 나의 일이라고 해도’라는 부인의 기제를 낳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앎은 그 기억의 오랜 각인의 차원과는 구분되는데, 이 앎은 정영의 경우에서처럼 그 그림으로 전수해야 하며, 반드시 조씨고아가 복수를 완수해야만 한다. 여기서 내재적 차원의 각인은 역사의 소명의 궁극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위한 중간자적 기입으로써 필연적인, 자신의 매개적 기능을 의미한다. 곧 그는 역사를 건너가게 하는 중간자적 역할을 해야만 한다.
이때 자신의 아들을 당대의 폭압적 명령에 따라 남의 손에 죽게 해야 하는 선택은, 개인으로서 부조리하며 불합리하지만, 이는 소거된 임시적 역사를 영구 보존하기 위한 존재를 체현하는 것과 조응하며,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그것을 부탁한 공주의 자결에 역사적 차원의 존재로 응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한 명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따라서 두 사람의 목숨을 그가 떠안게 된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 죽음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가 그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역사적 프로그래밍이 그의 내부에 각인되어 작동하기 시작하는 셈인데, 그가 아이를 살리지 않는다면, 그 죽음에 대한 책무를 떠맡지 않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곧 그는 그 거대하고 비좁은 구멍의 시간 바깥에서 임의적인 형상 자체로 비역사의 자장 아래 굳어져 버릴 것이다. 그것은 이 부정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그 악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하나의 부속이 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다른 선택의 가능성은 없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주체가 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주체로의 충동에 기꺼이 몸을 맡겨야 할 때 그의 개체로서 삶의 지속에 대한 포기는 그에게 항변의 부단한 논리로써 그를 가격할 것이었다. 이때 가장 첨예한 칼은 그의 아내로부터 온다. 송향은 이 말이 되지 않는 논리에 대해 항변하는데, 이것이 진정한 비극임은 자식을 죽음으로 모는 아버지의 윤리와 결코 그것을 지켜볼 수 없는 어머니의 윤리가 정영에게 맞세워진다는 부분이, 결코 정영에게서조차 종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송향의 인간의 근원적인 차원에서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단 하나의 궁극적 진리를 수호하는 것에 대해 정영은 어떤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 그는 특정한 역사의 시간 단위 차원에서 프로그래밍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영의 방백에 의해 언급되는, 송향이 정영의 전후 사정을 모두 들은 이후이기 때문에, 결코 그가 그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주장하는, 격하하여 포현하면, 떼를 쓰는 건 아니다. 그는 설득과 논리의 차원 너머에서 단지 진리를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정영은 송향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죽여야 하는 선택지만 가능한 상황에 놓이는데, 이때 송향은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결코 볼 수 없다. 그리고 그가 만류한다고 해서 역사의 어떤 사명을 그가 저지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또는 그가 정영에게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정영은 그 죽음(들)에 저당 잡혀 있음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선택은 자결이다. 적어도 그의 아들의 죽음을 그가 막지 못하고 지켜볼 수는 없으며,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아들의 생명의 가치를 역사적 차원으로, 더 정확히는 역사적 차원의 한 분기로 승화시켜야 한다. 곧 조씨고아를 지키는 사명, 나아가 조씨고아의 사명에는 그와의 맞바꿈에 대한 이중의 배가된 생명의 몫이 있다는 것, 정영도, 조씨고아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승화는 정영에게, 조씨고아에게 타자의 몫을 안기는 것이다.

전반부가 육박하는 경험의 역치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면, 후반부는 그 경험의 전수 방식으로서 그림의 해독에 따른 디에게시스, 그리고 복수의 짧은 순간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안고에게 서사의 초점이 있지 않으므로 이는 급격하게 결말을 향한다. 이는 반대로 조씨고아 역시 복수의 일념을 시대의 청산에 대한 과제로서 ‘물려받는’ 것일 뿐, 그가 그 경험을 결코 체현할 수는 없다. 곧 정영은 그에게 이야기의 전수에 대한 이행뿐만 아니라 역사적 책임의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별도의 조처가 필요하다.
이때 그는 자기의 팔 한쪽을 자르는데, 곧 그의 생명에 대한 즉각적 심판이 필요하다. 이 사명이 실천되지 않을 시 그의 지금껏 살아남은 시간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조씨고아〉는 이 이전에 내려온 사람들의 목숨값을 진귀한 것으로 여겨야만 하는 후대의 딜레마를 체현한다. 따라서 이는 그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자신의 몫을 시험케 하는 과제를 안긴다. 물론 조씨고아의 몫은 거기까지이며, 그의 주체성은 대리되고 위임된 것을 떠안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정영은 두 사람 중 한 명의 아버지를 선택하며 죽은 진짜 아버지의 몫을 위해 다른 한 명의 아버지를 죽인다, 그렇지만 그가 부인할 때 거기에는 오히려 진정한 것 역시 있지 않았던가. 곧 다른 한 명의 아버지, 도안고가 그에게 주었던 사랑은 그를 조씨고아가 아닌 정영의 아들 정발로 오인했기 때문에 진정한 것이었던 것이다. 조씨고아는 그 시간을 비판하고 부정하기보다는 부인해야 하는데, 그것은 정의의 차원에서 사사로운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가 도안고의 오인을 깨우쳐 줌에 의해 복수는 반드시 성사되어야만 하는 것―도안고로서는 조씨고아를 죽여야 하는 입장―이 되는데, 이때 중요한 건 조씨고아가 그것을 언제 알았느냐가 아니라, 정영이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복수의 여정에 대한 관망자가 되면서 도안고의 가문이 멸족됨의 사실을 왕에게 물으며 재차 확인하게 된 정영은, 전수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나서 약간의 희생을 더하기는 했지만, 실상 그는 자신의 소임과 마찬가지로 그의 삶이 종착지에 이르렀음을 인지할 것이다. 곧 하나의 역사가 마무리되고 순환하는 여정을 확인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이 그 역사의 수레바퀴에 탑승했었던 이로 과거화됨을 그 너머에서 본다. 그는 그 복수의 원환을 저지할 수 없는 만큼 또한 기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도안고의 진정한 처단이지만, 그 일족은 이름 없는 자로서 도안고의 이름으로 환원될 것이다.

그 환원의 몫에 정영도 자리했고, 그의 아내도, 무엇보다 그의 아들 정발도 자리했다. 정영은 정발의 목숨에 대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조씨고아를 목숨 걸고 수호했다. 그리고 마침내 조씨고아가 복수를 완성함으로써 공주의 목숨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더 정확히는 그 사실을 그만이 알고 있었던 점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정영에게 조씨고아는 정발에 대한 환상의 자리가 부여되었다면, 이제 그 진정한 대체물이 될 수 있을까. 이제 그 환상에 대한 유인이 사라진 이후, 조씨고아는 그의 의무를 기꺼이 종결시켜 준 역사의 매개자에 다름없다.
그의 과거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졌으며, 아니 그의 유일한 주체의 몫은 역사의 책무로서만 주어진 것으로부터 그는 개체의 다른 몫을 보유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도안고만큼이나 그의 삶은 정영에 의해 오인되어 왔고, 그는 과거를 그 역사의 차원에서 승화시켜야 하는 과단의 몫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전승의 몫은 역사의 몫이며, 역사 안의 개체의 몫이며, 또 다른 서사의 축을 그 너머에서 개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로써 개체는 역사적 주체로 압축되고 또 단단해지는데, 조씨고아는 이때 새로운 역사의 원환에 진정 첫발을 딛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멸족, 곧 자신의 피, DNA의 전수가 역사의 가장 핵심적 토대가 되는 이 역사적 서사의 공진 아래에서는 그러하다. 곧 역사가 한 바퀴 돌았음을 목격한 정영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그 서사가 자신과 함께 종결될 것임을 역시 알고 있는 것인데, 그때 복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비의미, 무의미의 차원이 주체의 공백을 한없이 가닿고 있는 지점에서, 〈조씨고아〉는 또 다른 문제의식으로 극을 총체적으로 사후화한다. 그건 전수의 몫 자체로서 살아남은, 살아남아야 했던 개체가 그 사명의 달성 이후 한없이 무력해지는 어떤 숭고 차원의 허무함 혹은 공허함인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5.11.21 ~ 2025.11.30 평일 19시 30분|토·일 15시 (월 공연없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주최 국립극단, 국립극장
제작 국립극단
만드는 사람들
원작 기군상 각색·연출 고선웅
번역·드라마투르기 오수경
무대 이태섭
조명 류백희
의상 이윤정 최인숙
음악 김태규
분장 이동민
소품 김혜지
움직임 고재경
무대디자인보 박은혜
조연출 홍단비
제작진행 김현희
출연
정영 役_하성광
도안고 役_장두이
공손저구 役_정진각
영공 役_이호재
조순 役_유순웅
제미명 외 役_조연호
정영의 처 役_이지현
도안고의 부사 외 役_유병훈
서예 외 役_장재호
한궐 役_호산
영첩 役_강득종
신오 외 役_김명기
조삭 役_김도완
묵자 役_전유경
공주 役_우정원
조씨고아(더블캐스팅) 役_이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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