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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이홍도, 연출 정은순, 〈꿈의 연극〉: 핍진한, 그러나 비재현적인REVIEW/Theater 2026. 7. 1. 15:08

작 이홍도, 연출 정은순, 〈꿈의 연극〉ⓒ백승진[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꿈의 연극〉―원작은 희곡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뮤직페스티벌〉이다.―은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Johan August Strindberg, 1849∼1912)의 동명의 희곡을 모티브로 한다. 신의 딸 수정(성수연 배우)이 지구에 내려와 인간을 만난다는 신화적 원형의 요소가 함축된 설정이나 꿈의 무의식적 흐름에 따른 파편적인 이야기 전개의 양상과 같이 그 기본적 얼개를 바탕으로 함에도, 그 내용은 철저히 한국의 근현대사와 사회 단면에 대한 해부를 토대로 전개되는데, 오히려 “원작”이라 함은 또 다른 함의에서 파악된다. 그것은 연극(인)의 꿈, 그리고 그에 대한 파악이다.
극 후반에는 『꿈의 연극』을 쓴 스트린드베리(해리 벤자민 배우)와의 작가와의 대화를 극의 일부로 삽입하는데, 이는 원작이 차용되었음을 메타 언급하는 한편, 스트린드베리를 ‘K-컬처’를 사랑하는 외국인의 전형으로 모사함으로써 서구 현대 연극의 기원이 민족주의적 의식이 위치하는 현재성을 마주하며, 시차적으로 재생산되는 현장을 구성한다. 이는 서구에 대한 열망과 동경이 상향된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한국 문화의 우월함에 대한 고취로 굴절되어 나타나는 자리이다.
여기서 의미는 뒤집힌 방향성을 띠는데, 곧 아래에서 위로가 아닌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통상의 자리에서와 같이 관객이 원작의 문학성과 원작자의 의도를 읽어 내는 대신에, 무해한 외국인 스트린트베리가 한국을 무조건적으로 상찬하는 기조 아래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이는 스트린트베리의 꿈이 아닌, 한국인의 꿈에 호출된 특색 없는 스트린트베리일 뿐이며, 그의 타자성은 한국인의 자의식에 함몰된 상태가 된다.
스트린트베리는 꿈의 연극을 다시 만드는 이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작동시키는 기호가 되는 가운데, 모든 것은 기호의 놀이로 수렴하는데, 그것은 다소 모호하고 또 몽환적이다. 곧 기호와 원본 사이의 간격과 시차가 그것이 현재 그 기호 작용에 흡수되고 있음 자체로부터 무색해지는 것으로 보인다는 지점에서 말이다. 〈꿈의 연극〉은 거대한 힘에 휩쓸려 가는 연극이다. 그것은 종잡을 수 없음에 대한 합목적성을 수여한다. 꿈과 같이 기호들의 자의적인 뒤섞임과 편재성을 수용하고, 익숙한 것의 변용과 변용으로서 되돌아오는 익숙함의 차이를 상쇄한다. 그리고 그 힘은 엉터리 같은 미래를 선취하는 아닐까, 상투적 조각들의 형편없음들이 누적된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말이다.

〈꿈의 연극〉은 기시감과 상투성 사이의 유희적인 복제성―출소 후 요구르트를 받아 마시는 수정은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의 금자를 패러디한 것이고, 말을 타고 나아가는 장면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최순실의 딸 정유라라는 현실을 패러디한 것이다.―, 방만한 테마의 확장과 서사의 무질서한 조합을 통해 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단면을 들여다 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서사는 안정화될 수 없고 끝없이 다른 서사의 파편에 기식하면서 연장되고, 분석되는 대신에 어떤 틈을 향해 희미하게 접속된다. 뒤죽박죽의 질서와 체계 없음의 서사, 악무한의 연결은 꿈에서의 자의적 연결과 함께 지금 여기에 대한 인지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현재성의 바깥으로 유예되며 현재를 구성한다.
한국 사회는 단편적인 사실들로 나열되며 패러디되고, 패러디-기계가 흡입하는 요소들은 하나의 서사에 복무하기보다 각각의 원본을 지시하며 빠져나와 독자적 생명의 세계를 열어젖힌다. 기이한 세계의 작동은 한국 사회의 어떤 무의식적 파편들, 문화 질서의 기호들로 이뤄지며, 그러한 작동은 의식적 차원이 무매개된다는 환상을 준다. 반면, 이는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경로를 추출하는 과정이다.
〈꿈의 연극〉은 한국 사회의 징후적이고도 잠재된 기호들의 무질서한 나열을 통해 그것들을 의미화하는 대신에 기호화한다. 그것들을 작동시키는 대신에, 종합하고 체계화하지 않음으로써 꿈의 레이어를 만들지만 꿈이 지칭하는 바로부터 벗어난다. 따라서 〈꿈의 연극〉은 꿈꾸는 상태를 만드는 가운데 비정상적인 한국 사회를 비추며, 명확한 입장으로부터 우회한다. 끊임없이 서사의 우회로를 부러 만드는 〈꿈의 연극〉은 미래의 시점으로 유예되며 꿈이 깨는 순간, 곧 각성의 순간을 기다린다.
결과적으로 〈꿈의 연극〉은 이른바 서사적으로는 실패한 연극의 전형이며, 의도적인 실패를 향한 연극이라는 점에서 그 실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꿈의 일단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이, 현재 한국 사회에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효과와 작동과 순간을 위하며, 의미와 분석과 종합을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꿈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서사, 인물, 이미지의 향연은 현실을 닮아 있지만, 자신만의 현실로 안착되지 못한다. 이는 주인공 수정의 “압도적인 힘”이 현실을 변혁시킬 수 있는 초월적인 역량으로 호출되고 또 잠재된 상태로 유예되는 것과 같이, 꿈의 열망과 꿈에 대한 지시―꿈 바깥의 질서―를 뒤섞는다. 이는 극과 극의 바깥, 곧 수정의 꿈과 관객의 꿈을 뒤섞는 것이기도 하다. 수정은 트럼프(우범진 배우가 연기하며, 우범진은 그 외에도 다역을 소화한다.)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데, 이는 한국에 동화된 스트랜드베리의 모습에서 징후적으로 각인된 바일까.
이는 미국이라는 세계 평화 질서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주한 미국 대사관이 위치하며 미국을 수호하는 우파 집회가 열리는 광화문 일대―수정이의 첫 등장 장소 역시 광화문이다.―의 전유된 트럼프-미국의 한국적 이미지로 소급되며 그것의 환상이 깨어지는 비현실적인 미래의 순간으로 고양되려는 건 아닐까, 미국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미국에 대한 환상에 대한 승리의 환상으로 말이다. 곧 미국과 한국이 상상적 차원에서 대등한 지점을 불가능성의 차원으로 두고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미국과 한국의 대등한 연결점의 환상을 환상적 차원에서 기각하는 것 말이다.
이는 현실적 좌표를 다시 상상적으로 불러오며 일종의 제유로써 활용하면서 가능해지는데, 곧 한국 안의 친화적 미국 국기의 활용이 미국 자체가 아닌, 미국에 대한 맹목적 신념의 한국적 알레고리를 상징한다면, 여기서 트럼프는 그들의 신념을 고취하는 승화의 도상인 동시에, 그것이 격파됨으로써 기각되는 건 극히 한국적 차원에서의 장소적 형상이다. 곧 트럼프는 이중적으로 환상을 제공한다. ‘그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죽음을 맞는다고!’ 실재적인 건 동시에 환상적인 건 이 장소로 그것은 지극히 한국적 차원에서 닫히는 미국이라는 도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꿈의 연극〉은 우리의 무의식을, 무의식과 무의식을, 무의식과 무의식이 연결되며 갈등하는 현실의 무대를 불러온다. 〈꿈의 연극〉의 외부와의 대결은 한국적인 미국의 이미지를 통해 다름 아닌 그러한 믿음의 이데올로기적 허상으로 자리 잡는 경로를 분쇄하고 파쇄하려는 진정한 ‘내부’의 몸짓 아닐까. 스트랜드베리의 도구적 차용에서 그 신화로부터 자유로워지기―그 자체를 위함이 결코 아니라―가 일종의 우리의 증상인 것처럼 최종 낙착되는 것처럼 말이다.

〈꿈의 연극〉은 아무것들을 소환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척, 그것이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척 말이다. 〈꿈의 연극〉 안 여러 클리셰들은 한국으로부터 추출되었음으로 소급되는 대신, 한국적인 것이 클리셰라는 것으로 환원됨을 더 밝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기발한 상상력의 차원을 보여주기보다는 어떤 것도 더 기발하지 않은 비합리성으로 총체적 연결망으로서 한국 사회를 지시하는 데 가깝다.
영상에 드문드문 비치는 5.18 당시 군부가 짓밟은 투쟁의 현장의 흐릿함은, 우리의 또 다른 무의식의 지층을 상정하는데, 또는 기원적 기억을 상정하는데, 모든 것은 그것으로 소급된다. 곧 이데올로기적 신앙의 차원에서 군부 독재의 압도적인 힘은, K-pop을 비롯한 미래적 활기를 띤 한국 문화의 선전이 지닌 압도적인 힘은 과장된 것이고 과잉의 차원을 이룰 뿐이다. 그것은 기이한 숭고, 승화를 향한 정신 승리가 지닌 도착성을 보여줄 뿐이다.
수정의 경로는 미래로의 도약, 영웅의 힘을 되찾고 발휘하는 선형성의 도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정의 내릴 수 없는 시차적이고 혼재적인 것, 진정으로 동시대적인 방황이다. 그리하여 극은 결국 꿈의 은유를 통해 아무것도 진정한 사건으로 자리잡지 않은 채 뒤섞이는, ‘넝마주이의 쓰레기봉투’만을 보여준다―모든 것들은 기시감 어린 것으로 이미 충족된 것이지만, 서사의 유기성을 충족시키지 않는 차원에서만 단지 그러하다.
〈꿈의 연극〉은 결국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들여다본다. 아마도 〈꿈의 연극〉이 화제를 가져왔음에도 그리고 무대 자체가 열띤 현장의 분위기를 이끌었음에도 어떤 언어로, 의미로 거의 번역되지 않았음은 징후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집단 무의식적 차원의 발현 그 자체로서 발화했기 때문 아닐까. 어떤 분석과 해석의 차원을 시도하는 대신, 그것들이 가능하기 전에 단락되었기 때문 아닐까. 얼키설키 이어 붙인 이미지들이 하나같이 무엇을 말하기보다 실재의 잔여물로서그 실재를 지시하지도, 자신의 온전한 지위도 주장하지 않은 채, 그저 뒹굴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2024.11.26 ~ 2024.12.14 화수목금 8시/토일 3시
Space111
제작진
- 작: 이홍도
- 연출: 정은순
- 조연출: 조다은
- 출연: 김홍국, 나경민, 박여름, 성수연, 우범진
- 컴퍼니 어드바이저: 이경성
- 희곡개발리서치: 이홍도, 이경성, Kayip(카입)
- 특별출연: 해리 벤자민
- 프로듀서: 송미선
- 무대·소품 디자인: 박소영
- 무대·소품 어시스턴트: 문혜정
- 무대 제작: 에스테이지(대표: 이윤중)
- 무대팀: 김세진, 권오준, 김용선, 임대환, 임학균, 박호준, 이승윤
- 무대 작화: 작화공간(대표: 이남련)
- 작화팀: 박지원, 이재형, 최다정
- 사운드: Kayip(카입)
- 음향감독: 김서영
- 음향 오퍼레이터: 진희경
- 음향 크루: 박지광
- 무대감독: 정우성
- 의상 디자인: 김미나
- 조명 디자인: 김효민
- 조명 프로그래머/오퍼레이터: 고민주, 최예원
- 조명 크루: 김민지, 김주슬기, 김형표, 나홍선, 류동우, 박나경, 홍현화
- 영상 디자인: 김상완
- 영상 오퍼레이터: 김다영
- 영상 크루: 김정호, 강정묵
- 촬영 크루: 김서현, 최소용
- 자막 제작: 조다은, 한지혜
- 자막 오퍼레이터: 한지혜
- 티켓 매니저: 양기쁨
- 그래픽 디자인: 한상애
- 사진 및 영상촬영: 백승진
-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크리에이티브 VaQi'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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