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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는 당연히, 극장, 〈발굴되지 않은 언어의 고통〉(구자혜 작/연출): 고통을 발굴하는 언어(의 역능)
    REVIEW/Theater 2026. 7. 1. 15:09

    ‘발굴되지 않은

     

    여기는 당연히, 극장, 〈발굴되지 않은 언어의 고통〉(구자혜 작/연출)ⓒ혜정[사진 제공=여기는 당연히, 극장](이하 상동).

    〈발굴되지 않은 언어의 고통〉(이하 〈발굴되지 않은〉)은 어린 시절 학교에 오지 않은 친구(들)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는데, 묘사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에 ‘나’의 내면을 흘러가는 현재형의 발화들이기에 이 언어는 집요해진다. 고통을 겪는 건 존재가 아니라 언어인데, 그것은 명명할 수 없는 개인의 고통에 대한 속성, 고통에 관한 당사자성, 곧 그가 지닌 ‘고통의 언어’가 아니라, 그것을 고통으로 명명하지 않으려는 제3자인 어른으로부터 밀려나는, 유예되는 고통이, 곧 언어 자체로 소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곧 언어는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고통과 함께 밀려나는 게 아니라, 고통 너머로 밀려나며 고통을 겪는다.

     

    사실상 여기서 언어는 매개의 언어이다. 또는 매개의 매개의 언어이다. 처음 학교에 나오지 않은 친구에게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우유를 건네주러 간 ‘나’가 마주한 환풍기 너머로 보이던 Q의 모습과 결국 우유를 건네주지 못한 실패의 경험의 긴 서술은, 타자를 현상하지 못하는,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또한 소통할 수 없는 그리고 감응할 수 없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주체가 겪는 곤궁을 보여준다. 그것은 타자의 고통도, 타자가 주는 고통도 아니라, 불온전한, 결여된 타자의 모습으로 그것을 인계하는, 매개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으로, 실은 그 고통은 그 언어 자체의 결여, 불완전함, 매개의 언어가 지닌 고통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완성되지 않은 언어는 불완전하기에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부정성에 대한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부정성 혹은 불가능성은 그 정동을 담은, 그 정동이라는 명명 불가능성 자체를 고스란히 품은 어떤 여지, 잔여, 여분 그 자체이기도 하지 않을까. 언어의 결여가 결여의 언어로 바뀌는/도착하는 지점에서 재현의 윤리에 입각한 부족분이 아니라 그것의 가능성의 경로 역시 추출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발굴되지 않은 언어”는 발굴되기 ‘이전’의 언어가 아니라, 또는 발굴‘되어야 할’ 또 다른 (미래적) 대상으로서 외부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그 언어 자체가 발굴되지 않은 과잉~결여의 차이(로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발화는 곧 문장

     

    처음 Q에게 보내는 말들의 ‘나’―이리―는 밑줄 그어지는 절 단위로 문장으로 축적되는 자막에서, 이리는 그것을 보고 발화한다. 결과적으로는 읽는 것이지만, 더 정확히는 절의 단위에 맞추는 수행으로서 발화이다―이 절들은 이리에게 인지되는 게 아니라 이리로써 식별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시선은 이리를 따라 문자를 향하는데, 그것은 결정의 장소가 배우가 아니라 ‘생동하는’ 문자 자체임을 의미한다. 알파벳의 문자 하나로 지칭되는 인물이 누군가로 특정되는 것이 아닌, 그 문장 질서의 구두점 정도로만 찍히는 것과 같이, 사실 〈발굴되지 않은〉에서 배우들은 문장 안에 있다.

     

    자막은 배리어 프리를 향한 보조적, 보족적 차원의 제3의 언어가 아니라, 이 말들이 하나의 문장임을 나타낸다. 문장을 체현하는 기능으로서 신체는 문장을 힘주어 발화하는 의지를 지닌 주체의 운동성으로 치환된다. 문장을 허락하는 몸은 문장만을 허용하는 신체로 이행한다. 그러니 몸은 문장을 옮기는 것의 스스로의 기능적 차원을 기꺼움으로서 받아들이는 데에만 골몰하며, 그 지점에서만 의지가 생겨난다. 이는 타자를 향한 언어로서 연극이 타자 자체인 문자를 ‘마주하는’ 순간과도 같지 않을까. 정면성을 띤 수많은 발화 방식이, 이리가 자막을 보고 말하듯, 그것을 등진 채 발화하더라도 그 말들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리―그 역시 지칭되고 매개되며 후반에 이르러 N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결코 자기 지시에 의해 이름과 존재가 부합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Q에게 우유를 결국 주지 못하고, 환풍기는 Q를 들여다보는 틈으로, Q와의 횡단할 수 없는 차이를 현상한다. ‘더’ 상하는 걸 막으려고 막 뛰어오던 그가 그것의 전달을 실패하고 넘어지는 건 그가 실패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를 그것으로 견뎠기 때문이다. 곧 그는 “상한 우유와 함께” 상한 우유 자체가 되어 버린다.

     

    이 불투명하게 가시화된 존재의 시점이 처음으로 출현하는 것, 곧 학교를 나오지 않은 유일한 아이인 Q―박수진―가 등장하는 건 아마도 ‘우리’가 함께했던 “그 여름의 저녁들”이 ‘끝나지 않은 과거’로 “우리는 뭐가 그렇게 즐거웠을까”와 같은 문장 안에 ‘즐겁다’의 그 자리에 갖가지 감정을 형용하는 형용사가 자리 바꿈을 하는데―김효진, 최순진―, 이 무한한 문장의 나열은 핍진한 형용사들이 갈음하지 못하는, 어떤 차이의 지연 작용 가운데 그것들의 사이를 또는 그것들 간의 횡단을, 그것들 중 어느 하나로 딱 정위할 수 없음의 사태를, 불확정성을 혹은 잠재성을 그 밤이 갖고 있음을 현상한다.

     

    절대적인 수치

     

    Q가 느낀 건 수치이다. 너를 무릎에 베고 있던, 그러나 마치 그 반대였을 수도 있는 완전한 상호 침투의 둘의 분간할 수 없는 순간, 우유를 전달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단말마같이 Q에게 사랑해가 툭 튀어나오던 N(?)과의 안온한, 달콤한 그 순간에 하필 등장한 아버지, 하필 신발을 신고 집안에 들어오는 아버지, 인격―술이 취한―이 아닌 불순물―술과 같은―, 미학적이지 않은, 불결한 침범, 너의 시점(에 부합할 나의 시점)으로부터 움직일 수 없는/거리를 둘 수 없는 그 지점에서의 수치. 인격이 아닌 ‘그것’과 나의 친연성, 그것과 사물, 집의 친연성, 보통의 수치를 견뎌내고 있었을 나의 발각, 이 모든 것의 불쾌함 따위.

     

    Q-박수진의 발화는 다른 존재들과 사뭇 다른 어조를 띠는데, 그는 멀리 있는 너에게 반향되지 않는 나의 우물거림과 달리, 내가 목격되고 있는 수치를 견디고 있는 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의 축소된 그리고 비대한 자아, 그리고 불투명한 ‘너’가 아니라, 피드백되어진 ‘나’, 그 앞에 선 바로 너를 보는 내가 그 나임을 수용하며 드러내는 것이 곧 발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Q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발화가 닿지 않은 너에게 마치 소리쳐서 그 거리를 좁히려는 듯하다면, Q의 말은 그 거리를 부끄러워하며 마주하며 되뇌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말은 항상 거리가 있다면, 타자로서 나의 말은 그 거리를 감당하며 말해야 한다.

     

    Q와의 거리를 정위할 수 없어서 N은 선회하며 “얼쩡”거리지만―“저는 그것에 도달하고 싶어요” 그리고 또 다른 N, 조경란은 어둠 속으로 뛰어든다.―, Q는 그 자리에 붙잡힌 채로 움직일 수 없다―나의 입은 “움찔”거린다. 너―N―는 당황하지만 나는 움츠러든다. 환풍기의 틈은 좁고 너는 옴짝달싹할 수 없다. 하지만 실은 너에게 나와 너의 거리는 무한하고 잠재적이라면, 나는 그 좁은 틈 안에 ‘박제’된다. Q의 거리가 윤리적 차원의 수치에 닿아 있다면, N의 그 거리 없음은 절대적 차원의 수치로서 체현된다. 그런데 이 수치심은 “너의 것이 아니”다. “그 아이”, Q의 것도 아니다. “너희는 그걸 말할 말을 갖고 있지 않”다.

     

    이 담임 선생의 말은 그런 사태를 겪어내는 당사자성을 어른의 책임으로써 전가하려는 성숙한 어른의 태도보다도 그 사태 자체를 부인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나’의 것도 아님을 또는 내가 그 말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은폐하기 위해, 그 말 자체를 부인하기 위해. 그런데 분명 Q가 느낀 건 절대적 수치였다. 어른이 수여해서는 안 될 어떤 환경과 세계를 그 환경 안에 찌들어 있는 것 같은 어른과 달리, 아이는 극단적으로 넘겨받고, 명석하게 판별하고, 첨예화한 언어로 전유한다. 그러니 그 언어는 부정될 수 없으며, 부인되어서도 안 된다. 너는 그 말을 금제해서는 안 된다. 그 언어를 접근할 수 없음에 대한 너의 언어를 고안해 내야 한다, 실천해 내야 한다.

     

    수행성의 윤리

     

    결국 이 선생님들에 대한 태업, 저항, 학교생활 자체를 유예하고 지연시켜 학교에 오지 않은 또 다른 Q와의 거리를, 시간을 좁히려는 몇 가지 행동 양상이 떠오른다. 먼저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이 먹혀들지 않는다. 또 다른 Q인 S가 학교에 오지 않자 또 다른 N―전박찬―은 ‘너’를 찾으며 뒤쪽에서 앞쪽으로 튀어나온다―밝음으로 나온다. 그는 이제 세상에 묻는다. 곧 수학 선생님의 판서 중에 S의 향방을 묻는다. 그럴 때마다 마카가 잠깐 멈췄다 다시 움직이는데, 그 잠깐의 지연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것은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잠깐의 곤궁을 초래한다.

     

    선생님은 이제 칠판 위 마카가 되어 버리고―상대적으로 무빙 헤드라이트의 초록색 빛에 휩싸인 N은 광활한 초록(이는 노란색과 하얀색 빛의 합산으로 변화하면서 어지러운 분필들로 분화하거나 또는 환상적 분위기의 연출로 확장되어 간다.) 칠판 안의 또 다른 마카가 되어 방종을 누린다. 그에게는 어떤 정해진 지침의 경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S라는 존재를 향해 매번 불러 세워지지만 질끈 눈을 감고 현실로 나아간다. 또 다른 N을 저지하지 못하고, 그러니 순전히 N의 질문은 자신에 대한 질문이 되어 내재적 곤궁에 허덕이면서 현실을 순순히 봉합한다.

     

    학교에 나오지 않은 또 다른 Q인 K의 자리에 또 다른 N인 J―장윤실―가 앉는다. 부재를 덮으며 떠안는다. “내가 없는 내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T가 있다. 그런데 T 역시 사라진다. 부재(에)의 상연을 견딜 수 없어서? 또 다른 Q인 K를 찾으러 가기 위해!? 그런데 이제 또 다른 N인 J인 나는 친구의 부재를 기억하고 증언하기 위해 단지 존재하는 것, 따라서 사라지지 못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 〈발굴되지 않은〉은 이 예외적 존재를 두고 존재함에 대한 이상함, 겸연쩍음과 수치, 그리고 그 타자를 매개하려는 의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N은 정작 1년 전에 선생님의 주문으로 Q에게 우유 배달을 하러 갔다 그를 마주하고는 돌아오지 못함이 제3자에게서 사후적으로 전해진다―이때 처음 Q를 마주했던 게 N이었음이 드러난다.

     

    마치 타자에 대한 간극은 좁혀지지 않고, 또 다른 간극으로서 매개될 뿐이다. 어렴풋한 이야기의 확장은 직접적 윤리로부터의 멀어짐/감축이 아니라, 간접적 윤리의 차원이 어떻게 세계로 전파/증폭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발굴되지 않은〉은 당사자성만이 무언가를 더/정확히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서, 타자와의 간극을 생각하고 따져 묻는 것 자체가 실은 진정한 윤리임을, 예외적이고도 절대적인 윤리의 입구임을 이야기한다. Q의 가난과 비참함이 그의 잘못이 아니듯, Q를 마주하며 얼쩡거리는 게 N의 잘못도 아니다.

     

    사라지지 않고 사라질 수 있을까?

     

    또 다른 N―최순진―은 태업을 하며 친구들에게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의 행위는 Q를 보고 얼쩡거렸던 그 행위의 연장이다. 사회를 지연시키려 하는 뚜렷한 목적성을 띠지만, 그의 행위는 셈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충동적이며, 정위되지 못하는 스스로의 방황 같은 것이다. 하지만 S를 생각하며 S의 빈자리를 끼워 넣는다.

    사회의 체계를 오작동하게 만들고 오류를 불러일으킨다. 합창을 계속 틀려 아예 다른 노래가 세계 내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S가 다시 학교에 나와 이 노래를 잘 맞추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를 고민한다. “S가 돌아오면”을 가정하고, 상수 쪽 객석에서 고개를 내밀고 발화하던 최순진은 객석을 둘러(극장 바깥으로 그리고 다시 극장 안으로 등장한다.) 지연된 순간을 안긴다. 사실상 극장의 부재가 느껴진다.

     

    그러니까 또 다른 N은 사라진다, S의 부재로서. “사라지지 않고 사라질 수 있을까?” Q의 대사를 하며 앞으로 나와 어둠에 잠긴다. 사라지면서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거꾸로 묻지 않는, 이 비가시화된 존재가 사라지지 않음이라는 기억과 부재를 더듬고 대리하는 N의 존재들로부터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너의 몫을 남겨둔 채 나는 이 가난과 수치로부터 영원히 기꺼이 사라지고자 하는 것, 그런데 이 말을 다시 ‘너’가 해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곧 이 말은 너를 전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물리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나의 기억에는 남아 있는 그 기억을 충당하고 있는 나 자신의 혼란스러운 사태를 전유하지 않을까.

     

    또 다른 Q인 다음 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은 H의 자리를 대신 앉은 너를 보는 나―김효진―이 등장한다―그러니까 이는 부재의 대리 현전을 보고 사라진, 앞선 T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너는 어디에 있니? 너는 거기에 있니? 너는 있니?”로 이어지는 질문들은 너를 정위할 수 없는 장소에서 찾다가 너와의 경험을 특정하다가 나 자신의 인식론적 흔들림으로 수렴해 간다. 그리고 이때 또 다른 N은 또 다른 Q가 아닌 N을 대리한다. 그는 그것들을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들었기 때문이다.

     

    최순진은 앞선 대사를 빠르게 복기한다. “Q, 우리는 뭐가 그렇게…”에서 마지막에 남는 건 오직 “Q”다. 이때 앞선 문장들은 빠르게 마찬가지로 절 단위로 줄 쳐지면서 사라져 간다, 하지만 그 단어들의 시간을 최순진은 빔으로 두고, 곧 약간의 간격을 둔 채 Q를 외치며 문장의 부재를 증명한다. 곧 자막은 현존의 언어가 아닌, 부재의 언어를 기입한다.

    그러니까 수없이 “그 여름의 저녁들” 안에서 Q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Q라는 존재는 곧 끊임없이 바뀌는 순간의 출현 곧 무대의 상징적 기표인 Q이기도 하다. 이 언어 유희적 공명을 일으키기 위해, Q는 Q다. Q가 곧 주체의 위치를 재상정하는 근본적 물음이자 균열, 결여임을 무대의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Q는 곧 Q다. Q는 시작이자 곧 끝이다.

     

    그리고 또 다른 Q인 R이 등장한다, Q, 사실 너는 우유를 들고 학교를 떠난 것이었다. 그리고 맨 처음 N인 이리 배우가 등장한다. 그렇게 시작과 끝이 이리 배우로 맞물린다. “우리는 아름답지 못했어”, 너의 아름답지 못함과 나의 아름답지 못함은 다르지만, 그것은 공통으로 서로를 묶는다. 그리고 이 관념의 범주는 다시 어른을 향한다. “나는 얼쩡거려” 어쩌면 이제 이 말은 너를 직접 향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숙명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너의 아름답지 못함을 보는 내가 나의 아름답지 못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 것과 같이, 이제 너의 움찔거림에 대응하는 나의 움찔거림은 나의 단어가, 개념이 된다.

     

    김민관 편집장

     

    2026. 6. 26. 금 - 6. 28. 일  금 19:30, 토/일 16:00
    모두예술극장

     

    출연_ 김효진, 박수진, 이리, 장윤실, 전박찬, 조경란, 최순진, 최승미
    작/연출_ 구자혜, 연출부_ 류혜영, 프로듀서_ 김진이, 무대감독_ 이효진, 조명디자인_ 노명준, 사운드디자인_ 목소, 사운드오퍼레이터_이예원, 의상디자인_ 정호진, 자막 제작/오퍼레이터_ 임민정, 공연 수어통역_ 명혜진, 관객안내 수어통역_곽지수, 그래픽디자인_ 로호타입, 티켓_ 공기(gongki.com), 티켓매니저_ 조은화, 사진기록_ 혜정, 영상기록_ 유니온씨, 무대크루_김현회
    제작_ 여기는 당연히, 극장
    후원_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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