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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우 작, 김현 연출/출연, 〈나누〉: 편재하는 그리하여 애도하는REVIEW/Theater 2026. 7. 2. 13:56
나누라는 누빔점

해서우 작, 김현 연출/출연, 〈나누〉ⓒ박먼지[사진 제공=상상만발극장 1](이하 상동). 〈나누〉는 작은아빠 나누를 그를 기억하던 사람들을 만나며 탐문하는 과정을 엮는다. 이 조각 모음은 선형적이지도 인과적이지도 않아서 그에 대한 당사자들의 기억으로 응결된다. 이 안에서 나누는 여러 잠재적인 차원으로 분화하는데, 곧 그 다양한 각자의 기억 속 나누는 일종의 잠재태가 ‘나누어져’ 도착하는 n개의 버전들인 셈이다. 이는 나누의 죽음 이후에 그 이전을 따라 가는 여정이며, 타인을 경유해 그의 타자성을 조각하는, 부재의 채울 수 없음을 매개의 들러붙는 언어들로써 가늠하는 독특한 시도가 된다.
이때 한 명의 배우가 이 모든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곧 1인극의 형식으로써 희곡이 옮겨짐은, 그 모두가 나누가 아니면서 나누를 말하고 듣는 이로서 공통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나누에 대해 듣는 것은 나누를 말하는 것과 유일하게 분리되는/괴리되는 부분이다. 곧 나누에 대해 말할 때 나누가 거기에 있지는 않은 것과 같이, 나누에 대해 말하는 이에게는 항상 듣는 이가 없다. 그것은 유예되고 뒤늦은, 물리적인 시차로 옮겨진다. 이것은 동시에 그 말함이 관객을 개입시킴을 의미한다.
실제 주인공은 나누의 조카이지만, 그 자신은 오직 듣는 이로서만 (또는 혼잣말하는 이로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의 듣기 행위는 다양한 인격을 고스란히 옮기기만 하는 그 현전의 행위 ‘뒤’에 위치하며, 실제로는 그 듣기의 공백을 관객으로 이전시키는 가운데, 이를 뒤집어 그 현전의 행위로써 주요하게 자리한다. 이때 듣기의 주체는 과거의 기억을 의심하거나 의문시하지 않고, 일차적인 원본의 사료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수동성에 입각한 주체는 그 일정하지 않은, 정형화되지 않는 입체적인 인물에 대한 매혹에 입각해, 공허와 우울보다는 서사의 효과 안에서 끊임없이 이행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듣기의 수행성 아래 위치하며, 그 들려주기보다는 다중 현전의 신체와의 입체적 대면 아래, 나누라는 분산된 주체의 정위할 수 없음이라는 사실은, 한 명의 텅 빈 신체 안에서 진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곧 한 명의 배우는 나누의 부재를, 나누에 대한 나누어짐을 기입한다. 만약 이 역할들을 각각으로 실재화하면 이는 그 역할 자체의 물화가 되어 버릴 것이다. 나누는 곧 떠도는 담론이다. 서사가 지닌 어떤 정동과 현실의 잔여이다.
존재의 특정성

‘나누’라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대상은 편재하며 한정할 수 없는데, 이는 이 모든 시간이 그 정위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애도의 과정이 아니라, 이 텅 비고도 충만한, 텅 비어서 충만한 존재를 경유해 애도의 형식 자체를 다시 쓰는 것으로 연장된다. 나누는 그 모든 애도의 이름의 하나이다. 곧 그는 어떤 사건과의 연루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함구되기보다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그리워하지만, 그것은 그의 부재에 대한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는 들려지면서 비로소 되살아나며, 이로써 마치 무한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곧 죽음을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대신, 삶의 한 부분에 대한 기억으로서 갈음하는 이 과정을 함께하기가 곧 애도의 한 형식이 된다. 그것은 나의 조각이 아닌 타자의 한 조각을 그냥/무심히 이어받는 것에 있다. 이 무한한 말하기의 방식 자체가 어떤 이유도 없이, 연관성도 없이, 뜬금없이 호출되어 반복되는 건 애도의 당사자성이 오히려 매개자에 의해 뒷받침될 때만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의 한 부분을 공여하는 근거 없는 연대의 차원을 만들어 낸다. 사실상 나누와 조카의 사이 역시 특별히 짐작되는 연고가 없다. 오직 타자의 목소리만 수여받는, 이 사라지는 매개자, 그것을 ‘반복’이라는 형식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되는 매개자인 조카는 삶의 차원 안에서 실은 나누의 죽음을 사건인 양 삽입한다.
이때 그 듣기는 관계가 없던 둘을 엮는 공통의 이야기가 되며, 그 둘은 각자가 아닌 하나의 나누어진 몫, 둘이 아닌 하나로서 나누어진 몫이 된다. 이 이야기만이 둘을 둘이 아닌 하나로 묶고 마치 하나였던 존재인 것처럼 하나를 둘로 약분한다. 연극성은 그것을 듣는 이가 있다는 데서 온다. 그것은 확정되며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상태로 발생한다.
“여기 없는 거 알아요. 그래도 혹시 한번 와봤어요.” 조카의 말은 작은아빠의 유골함을 찾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이는 나누가 있지만 나타나지 않는 것에 불과한 것의 유희를 통해 나누를 발생시킨다. 철저한 부재란 없다. 하지만 완벽한 현존이라는 것도 없다. 당사자들은 나누를 나누어 갖고 있다. 나누가 아닌 무언가를 더해서, 나누만의 특정성을 가지고 있다. 나누는 특별한 존재이지만 특정한 존재이기도 하다. 사실 나누의 특별함은 나의 특정함들 속에서 평범함이 된다. 기실 그 특정함만으로 되었다.
애도의 (불)가능성과 편재성으로서 존재, 그 상관관계

『횡단보도에 끝이 있긴 한가요?』와 『꿈 잠 몸』에서 작가의 지난 장편 희곡들이 그러했듯 『나누』 역시 “바다가 된 거실 한가운데“ “낚시를 하”는 나누를 주인공이 꾸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벌꿀색”의 눈동자를 가진 나누는 세계에 편재하며 존재하는데, 이는 그의 직원이 비행기가 아닌 비행선을 수리하는 일을 하는 것과 친연하다. 그것은 희미한 연관성을 갖는다. 장소에서 장소로 옮겨 가는 데에는 필연성이 없다. 그것은 세계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대상에서 대상으로 옮겨 가는 전치의 과정은 나누를 나누면서 기억하는 행위로, 애도 불가능성에서 오는 우울의 자리에 특별한 정동들을 위치시키며, 애도를 지속 가능한 것으로 바꾼다. 끈적한 밀도의 촉각적 느낌이 선행하는, 마치 눈동자를 감싸고 덮어 버리는 ‘벌꿀색’은 벌꿀에서 비행선으로 이행하며 이행, 곧 여행의 메타포로 옮겨진다. 이는 대상의 갈아치움으로 연장된다. 대상은 기능적으로 소비될 수 없는데, 그것은 의도될 수 없는 새로운 것이며, 새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꿈은 조카의 엉뚱한 상상력으로 낙착되기 전에 작은아빠의 엉뚱한 면모로서 기입된다. 사실 작은아빠의 엉뚱한 면모를 반향하는 꿈을 옮겨 내는 존재가 조카임을 드러낸다. 이는 조카가 개입되지 않은 작은아빠의 기이한, 이색적 면모가 현전하는 것으로만 진전되는 극의 흐름과 조응한다. 김현은 이범용의 「꿈의 대화」(1980)를 틀어놓고, 서로 떨어져 있는 창문 두 개를 열고, 관객들 일부를 돌아다니며 커피에 관한 잡담을 늘어놓는다.
이러한 환기는 나누의 편재성, 나누의 부재를 체현하는 김현의 편재성이 연장된 것으로, 거기에는 어떤 주어도 없는 불명확한 말하기의 차원 역시 자리한다. 그리고 이는 이후 삼촌의 봉안당을 찾아 부재를 겪어 내기 위한 예행연습이며, 실은 그것 자체이다. 아이스 박스 두 개와 맞은편의 벤치 하나, 그리고 그것을 뱅 둘러싼 의자들의 전면에 나온 이미지와 함께, 본래의 연습실이 갖고 있는 사물들이 공간을 이룬다.
나누의 선취

김현은 조명을 직접 켜고 끄며, 이동형 고리식 랜턴을, 조명을 가지고 공간에 임시로 설치했다 떼며 재배치한다. 이는 그가 모두를 연기하며, 동시에 그 모두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담담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는 역할을 입고, 또한 벗는다. 이것은 그가 하나만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누구도 하나만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한 사람도 결코 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조건에 그가 있기 때문에, 사실은 누구도 혼자 그것을 감당하지 않으며, 따라서 나누의 부재를 그 모두가 짊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나누의 부재에 대한 환상성은 나누의 편재성에서 오며, 나누의 편재성을 하나의 삐뚤빼뚤한 경로로 잇는 김현의 편재성에서 실재가 된다. 그것은 어쩌면 모두이기에, 그래서 누구도 아니기에, 남는 유일한 신체의 뒷모습, 잔여, 공백 따위가 그러나 등장하지 않는 그 신체의 어느 지점을 마치 상기시킬 수도 있을 어떤 차원에서 예외적이고도 특별하게 위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김현의 1인극은 나누의 부재에 대한 필연적인 응답이다.
그런데 하나의 예외적 막이 있다. 이는 미세한 차이로 무언가 달라진 기류를 감지하지만, 그 이상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으로 놓쳐버릴 만한 그런 장이다. 곧 역할이 아니라 김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시간, 막 자체를 ‘지나치게’ 환기하는 그런 부분이다. 사실 나누의 편재성으로 인해 극은 대부분 장을 마치 막과 같은 것으로 두게끔 만든다. 장소는 계속 변화하고, 시간 역시 종잡을 수 없다.
앞의 시간과 장소는 단락되고 뒤로 결코 이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 김현은 앞서 창문을 열어젖히는 것과 함께 공간을 관객과 공유하는 것으로 두는데, 이때 장소와 시간은 현재의 그것으로 조정된다. 그리고 그는 앞서 말한 것처럼 커피에 관한 사소한 ‘자신의’ 애드리브인 양 그것을 발설한다.
그런데 주인공인 조카는 자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적어도 나누와 관계된 어떤 일이 아닌 걸 따로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나누는 지금껏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전환 구간으로서 장이 이후 조카의 봉안당 찾기를 통해 나누의 죽음에 대한 실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 가기 전의 의식적 비워냄 같은 것으로서 사후적으로 의미화된다는 점에서, 동시에 이로써 이것이 유령의 효과로서 ‘먼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지점이었다라는 점에서, 시간이 탈구된 지점에서, 나누가 처음으로 출현하는 구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들은 그의 편재성과 약분됨의 특정성들과 같이 하잘것없거나 엉뚱하거나 산만하다. 아니 그 모두이다.
잠재적인 것의 변용적 이행

나누의 예외적 현전의 지점과 나누에게 직접 애도하는 조카의 모습은 대칭적이고도 가깝다. 그것은 연습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데 가장 주요한 두 장이다. 봉안당에 가기 전에 들른 슈퍼에서 맛소금 250g을 사기까지 연습실 비품 창고의 여러 물건은 공연의 소품으로 분한다. 조카가 나누와 관계가 있던 이들에 대한 사전 정보와 친근함 따위를 갖고 그들을 만나왔던 데 반해, 고모할머니를 만나고 1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꼬마, 고송은 예외적이고 우연하게 그와 만난 것이다.
고송은 나누와 조카보다 더 친했다고 한다. 완전히 친했다는 말이다. 고송을 거쳐, 조카는 나누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누의 집을 찾고, 길고도 엉뚱한, 엉뚱하게 긴 무협지 하나를 발견하고, 제목 중 “반로환동”을 검색하다 온라인상의 카페를 발견한다. 거기서 “8848”로 활동했다는 걸 알고, 그것이 작은아빠의 자식 라나의 전화번호 뒷자리라는 것도 상기한다. 그런데 무협지 내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처리된 ‘반로환동’은 늙음을 되돌려 아이로 돌아오다라는 뜻이 있는 본디 존재하는 단어이다.
곧 기억이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또는 더 생생하게 기억되는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생생하게) 복원하기도 하지만, 바로 앞선 고송이라는 아이에게 더 아이 같았던 나누의 모습을 통해, 어린아이로서 나누의 특이성을 아이‘로써’ 앞서 나누고 있었던 셈이다. 작은아빠가 마치 그 라나와 같은 모습이었던 것과 같이. 이제 조카는 나누를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존재로 수용한다. 그리고 또 두서없는 자기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의 말이다. 이 말들은 그것을 듣는 이를 곧 조카를 내포하지 않는다. 김현은 그 말들을 더 멀리 생생하게 꽂아 넣는다.
이제 조카는 히말라야의 산을 찾는다. 그러네 산장지기 니코가 나누의 그 무협지를 가지고 있다. 나누가 영어로 다 번역해 줬다고 한다. 니코는 나누의 눈이 꿀빛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누의 마지막 모습이 인상적으로 각인되며, 나누는 여전히 조감할 수 없는, 종합할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아마도 〈나누〉가 가진 가장 중요한 특(이)성이라면, 이 한 존재가 공여되는 나눔들이 결과적으로는 잠재적 차원에서 삶의 여러 모습으로 분화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가능성과는 다른 이 잠재성은 곧 나누 자체만이 아니라 나누와 접면한 수많은 다른 존재들의 나눔이기도 하며, 그렇게 나누는 이행하고 이전되며 증식하는 ‘히말라야에 다다른 벌꿀’과 같은 어떤 가늠할 수 없는, 정위할 수 없는 움직임의 경로로써 그려진다. 그것은 우연이기도 하지만, 실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누는 편재하며 나누어진다. 아니 조카는 편재하며 나누를 나눈다. 그렇게 애도한다.
우리의 삶은 무언가를 묻혀 오고 또 묻히고 오는 그런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접촉의 양단은 변용된다. 무언가가 발생하고 이행한다. 그리고 그 묻었던 것이 또 다른 조카의 몸을 거칠 때, 누출될 때 그것은 벌꿀과 같은 이야기로 수용된다. 인간의 이야기하기의 역량, 커뮤니케이션을 향한 특별한 이야기의 본성이 거기 있지 않을까.
김민관 편집장
창작진
연출, 출연 김현
작 해서우
진행 조서연
홍보물디자인, 사진 박먼지
도움 김상훈, 김슬기, 김형연, 박해성, 선명균, 이라임, 이시은
제작 상상만발극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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