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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 조, 《산보다 큰 것을 아무리 태워도》: 공간을 지시하는 회화
    REVIEW/Dance 2026. 7. 8. 13:53

    장소에 대한 대응으로서 회화

     

    문 조, 《산보다 큰 것을 아무리 태워도》포스터.

    《산보다 큰 것을 아무리 태워도》(이하 《산보다 큰 것》)는 회화와 설치를 아우르는 전시인데, 이때 회화는 설치라는 외부로의 표현 자체를 내재적으로 함축하는 것들이다. 이때 깨어지는 건 회화 자체의 시간과 표현 양식이 철저히 자족적이라는 환영인데, 문 조의 회화들은 대부분 장소를 인계하여, 그 장소에 놓일 바를 예상해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는 그 장소에 부속되는 기능적인 차원, 그리고 인덱스적 차원에서 장소를 매개함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장소와의 비교를 통해 일정 정도 재현적이며, 또 실재에서 열화된 차원을 의도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곧 그것은 회화를 뭔가 더 단순하고 그 자체의 표현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이 기인하는 지점이며, 한편으로 외부로 나아가게 하는 접지적 차원의 감각을 가설하는 지점이다. 회화 바깥을 상정하는 이 같은 전략적 차원에서의 회화는 확실히 장소~공간 특정적 회화, 곧 그 장소가 갖고 있는 물리적 한계에 대응하는 방식으로서 (가능성의) 회화의 실험적 또한 반응적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가설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것들에는 의미심장하게도 제목이, 캡션이 없는데, 그것은 제목에서처럼 “태워도” 되는, 태워서 소각된 후 재가 되어 분별되는, 그리하여 어떤 전체가 재분배되는 감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산보다 큰 것”은 집중되고 그 안에서 편재된 전시 설치로 연장되는바, 분할적이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특정 값으로 분화되지 않는, 장소 전체의 재편으로서 갈음, 가늠되는 전시 자체를 상징해 놓은 것처럼 감각된다.

     

    사물과 회화의 횡단 작용

     

    《산보다 큰 것》에서 나무 골조와 콘크리트, 단차가 있는, 전시장에서 가장 몰입을 유도하는, 일종의 제단형 공간은 실제 제단으로 연장되는데, 각종 사물과 회화가 가장 어지럽고도 자유롭게 병치된 이 지점은 공간이 하나의 작품이 된, 수많은 사물들에 대한 캡션이 하나의 주요한 과제로 부상하는 양희윤, 이초록의 《핑킹가위 증후군》의 윈도우 공간 내 설치에 근접한다[참조=https://www.artscene.co.kr/2282.].

    그것이 수집된 사물 공화국으로서 투명성을 긍정한다면, 그리고 모으는 행위가 어떤 미감으로 구축되면서 수집에 대한 욕동과 열망을 재규명하게 하는 것 가운데 그러하다면, 그러니까 그것은 선형적인 과정 아래 회고적인 것을 추동한다면, 《산보다 큰 것》은 그것의 제의적 차원에 도달함이 그 자체의 메시지의 투명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와 설치의 중간 함수를 구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사물에서 회화로의 번역, 그리고 그 반대로의 번역이 동시에 이뤄지는 그 중간적 과정의 교환, 교차가 곧 형식을 결정하는 것, 곧 사물이 회화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회화가 다시 대상의 재배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데, 이 중간적 과정은 선형적―무한한 시간의 차원으로 열려 있는―이기보다는 상호 함입적인 것이고 조율되고 제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떤 레이어들로서 배치는 2차원성을 위한 수렴, 가늠하는 것처럼 보인다.

     

    곧 사물들을 레이어드해서 회화의 환영성에 도달하려는, 사물의 순수한 수집과 배치가 아니라 불가능한 번역의 차원에서의 시도 아래 사물 역시 부속되며, 이때 제의적임 직함한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이미지로 갈음된다. 오른쪽에 선 검은 천에 덮인 신체상 같은 진열대에 종이 오리기로 만든 문양들이 나선형으로 둘리고, 흰색 레이스와 태슬 등은 결국 의상의 트리밍적 요소로 종합된다.

     

    공간에의 회화, 공간(감)의 회화

     

    그리고 이 얇은 각종 장식들은 바닥에서는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겹쳐지며 경계의 차원을 형해화, 혼란스럽게 하는데, 이 지점이 곧 회화의 2차원성이 지닌 환영성에 입각한 배치 방식으로 보인다. 이는 맞은편 또 다른 단차가 있는 방에 걸린 회화 중 왼쪽 벽면에 나란히 있는 세 개의 같은 크기의 회화들에서 어떤 사물 위에 다른 사물이 올려져 있는 모습은, 식별의 영역이 아닌, 그 경계의 뒤섞임, 엷은 경계의 식역, 혼동, 또는 섞이며 산란되는 그 경계의 윤곽 자체로 대체된다.

     

    그런데 이 윤곽으로서 회화, 표층성을 지시하는 회화는 그것이 일종의 사물 자체의 표면을 향하는, 사물로서 기능하고자 하는 전도된 욕망의 산물로 드러나는 듯 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사물을 벗어나 공간 안에 위치하려는 속성을 지니게 된다. 곧 회화 내부에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 바깥으로의 지시체로서 ‘임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회화는 되도록 두께감을, 심층을, 깊이를 형성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회화는 긴 시간의 몰입적 지각을 통해 세계를 욱여넣는 과정의 산물이 아니라, 공간의 외삽으로서 공간과 조응하는 지각 유도의 산물이 되며, 따라서 그것은 간명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인지되도록 빠르게 그려진다. 그 공간의 임시성을 소거했을 때 이 회화의 특정성은 기능하지 않게 확률이 높다. 앞선 세 개의 동일 크기 회화가 자리한 공간에서 입구, 오른쪽 벽면 아래 구석에 나무 틀 안에 박힌 회화는 하나의 색을 사용해서 깊이감을 줄 수밖에 없는 회화이다.

     

    붉은색 계열로 호숫가 나무들을 그린 이 회화는 빛이 비친 영역을 대기와 강 모두를 잇는 하나의 배경으로 설정해 미색으로 처리하고, 그 밖의 숲, 나뭇가지 등을 거의 진홍색으로 처리했는데, 그리고 예외적으로 좌측 가장 두껍고 큰 나무만 빛을 받아 하얗게 처리했는데, 이것은 결국 빛의 산란이 지정하는 영역의 강렬함을 드러내기 위해 두 가지 색의 명도차를 크게 주어 구현한 것이다.

     

    환영성의 차원

     

    반면 이 회화가 지닌 공간감은, 이 회화 자체의 처리 방식, 곧 창문틀 안쪽으로 ‘더’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써 오브제로서보다 일종의 장식적 차원의 환영으로, 장식적 차원이라는 것의 강세 속에 환영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환영성은 작가에게 있어 단지 장소와 결착됨의 기능성을 추구하지 않을 때 하나의 본원적 주제가 되는 듯 보인다.

    곧 그 사선으로 위쪽에 걸린 그림은 목탄으로 그린 것으로, 커다란 나무와 숲을 배경으로, 두루마기 한복에 갓을 쓴 두 남자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그 얼굴들이 검은색 배경을 나무 혹은 숲과 뒤섞이며 의도적으로 유령성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인물을 향한 그림은, 인물이 배경으로 뒤섞이는 경계에서 그 둘을 식별할 수 없는 지점으로 몰아붙이며 존재하고, 그것은 그 둘의 거리와 의도, 위치, 포즈 모든 것을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게끔 만든다. 곧 사실주의적 기법은 그 환영성을 위한 차원에서 도입되는 것이 된다. 아마 가장 회화가 지닌 세계 자체가 자족적이며 다채롭고도 입체적인 작업을 꼽자면, 입구를 지나 바로 안쪽 공간으로 진입할 때 왼쪽에 모로 비틀려 맞물려 있는 두 개의 동일 크기의 그림들 중 왼쪽에 자리한 그림이 될 것이다.

     

    이는 환영적이기도 하지만 환각적이기도 한데, 오른쪽 가의 가장 커다란 오브제, 곧 큰 나무와 같이 약간 구불거리는 검은 기둥 앞으로 하얀 환영 같은 존재가 바닥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 지점의 어딘가에 걸터앉아 있는데, 그 희미한 존재는 삐죽 솟아 나온, 두 갈래로 갈라진 광대 모자인 제스터 햇과 같이 생긴 머리~얼굴의 부분이, 한편으로 그 아래 발의 그것과 조응하면서도 현실을 일탈하는 궤적을 보이는 그 지점에서, 반대편의 에메랄드 빛기둥이 꺾이며 튕겨 나가는 듯한 어떤 힘의 자장과 효과와 조응되고 있는 것이다.

     

    검은, 불탄, 지표성의 회화

     

    이때 검은 오브제 아래쪽에 위치한 빛의 반짝임을 나타내는 금색의 기호는 이 힘의 마법적 효과에 대한 표식이 된다. 또한 이 굳건함의 지지대가 그림의 중심을 공고하게 잡는 한편, 전시장 바깥에서 참조되어 오는 검은 장막, 제단의 차원으로서 그 안의 환상성을 일종의 의식적 차원의 무대로서 갈음해 낸다.

    그러니까 이 회화는 이후 공간에서 실제로 구현될 검은 제단 공간을 선취한다. 동시에 그 제단 차원의 세계가 하나의 회화적 배경이자 대상임을 주지시키는 예외적인 회화로 (사후적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어쩌면 공간에 직접 반응하지 않고 그 자체의 독립적인 그림을 그릴 때, 그 세계는 조금 더 커지고 확장될 수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또는 상상하게끔 한다.

     

    제목은 어떤 부정성의 정념을 간직한다. 그것은 산보다 큰 것을 아무리 태워도 곧 즉물적으로 다 태울 수 없다는 뜻일까. 아님 산보다 큰 것을 아무리 태워도 결과적으로는 산과 같은 무엇을 얻지 못한다는 것일까. 여기서 태운다는 행위는 무엇을 표현하는가.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라면, 그것은 왜 태움의 의미로 전화되는가. 검은 제단은 어둠의 부정성을 실질적으로 재로 남는 태움의 의미로써 현상하고 있는 장소인 것인가.

     

    《산보다 큰 것》에서 제목이 가리키는 행위는 일종의 연극성을 표방하면서, 이 공간에 깃든 배치의 행위성을 은유의 차원으로 기입한다. 그것은 어떤 임시성, 제의성, 수행성의 차원에서 결성되는 작업으로서 본래적인 회화의 차원을 재고하게 하고, 또한 그 배치의 서사 속에서 회화의 위치를 그리고 출발을 재기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이른바 회화 자체가 축적하는 행위가 아니라, 소각하는, 태우는 행위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성의, 산정 불가능한 차원의 대상들을 태울 때 우리는 일정한 흔적으로서 변용된 지표적 대상들의 연결,, 그리고 공간에 내속하게 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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