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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옥 예술감독, 《정민류 교방춤》: ‘정’중동의 미학
    REVIEW/Dance 2026. 7. 7. 14:38

    김진옥 예술감독, 《정민류 교방춤》[사진 제공=창무예술원](이하 상동).

    정민류 교방춤의 일곱 개의 춤은 정중동의 미학에서도 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보였는데, 이는 동으로 가기까지 정이 움직임의 요체를, 근거를, 기본을 안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는 동으로부터 정이 신중함을, 단단함을, 동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악사의 연주가 동의 기운을 안고 있다면, 춤은 정을 잡고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더디게 풀어낸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도 이것이 동으로서 가장 확장된 춤은, 또는 기꺼이 혹은 쉬이 자신을 내어주는 게 부채춤, 화선무였다. 결국, ‘은 내부의 중심으로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재적 중심은 손에 든, 손안에 있는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발현된다. 곧 그것이 부채이든, 수건이든, 칼이든, 장구에 맞닿는 채든 간에 그것은 신체의 중심, 나아가 세계의 중심부로 고정된다. 이는 안으로 모이는, 구심적 질서를 갖는, 그로부터 바깥으로 주춤, 더듬, 더딤으로 나아가는 어떤 연장의 응축된 발산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숨으로 포박되어 있는 상체의 결정된 인터페이스로부터의 모든 표현과도 같다. 첫 번째 이영화의 축원무와 두 번째 전영란의 추야월은 이를 잘 보여주는데이 둘은 단단하게 자신의 중심을 유지한다., 여기서 부채는 세계의 앞뒷면으로 갈음한다

     

    가령 축원무에서 마지막 부채 뒤집기는 얼굴과 접변하면서 그 안쪽 세계를 들여다본다라는 감각이 생긴다. 동시에 그 세계의 경계가, 반전이 찰나에 발생됨을 보여준다. 추야월역시 중간에 부채를 한 번은 바라보고, 끝에 부채를 한 번은 반대 손으로 가리키는데, 이때 저 너머의 세계가 상정된다들여다보이고 또 지정된다. 이 비의적 상징 코드는 각각 축원의 뜻과 가을밤의 정서에 대한 서사의 이전에, 아래에 자리하는데, 이는 곧 춤추는 이의 수행성이 가장 중요하며, 그로부터 춤이 말미암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서사를 짓는 게 아니라, 그 서사를 어렴풋하게 받아들이며 춤의 근본적 양식을 되풀이하고 있다

     

    세 번째 장영선의 교방장고춤은 장구를 메고 연주와 함께 움직임을 펼쳐내는데, 이때 연주와 움직임이 각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곧 그 모두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가령 팔의 움직임은 장구로 모이거나 바깥으로 펼치거나 하는 식으로, 그 방향과 초점만 그때그때 바뀌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때 연주는 박자나 음의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벗어나는 것 역시 아닌데, 이는 또 다른 춤의 이념을 발설한다. 곧 결국 움직임의 리듬이 근본적으로 음악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오른손 채와 왼손은 장구를 친다기보다 빠르게 닿는다. 쳐서 울림과 닿아서 치며 울리는 것은 다르다. 곧 움직임과 음의 합성 구조가, 합성의 그 방향성이 다름을 의미하는데, 거기에는 으쓱하는 어깨의 일정하고 일관된 움직임의 타점이 먼저, 거의 동시에 자리한다. 그것은 소위 춤선을 따른다. 곧 몸짓에 부가되는 연주가 음으로 결정된다 또는 몸짓에 따라 음이 결정된다. 동시에 음의 결정 이전에 몸의 잠재된 결정이 있다. 미시적 타점을 아우르는 거대한 몸의 형체가 있다. 그것은 세분화되지만, 그것으로 곧 결정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몸이 온오프되는 순간이 음들의 분화로 결정됨을 의미한다.

     

    그 몸의 결정적 중심을 간직한 채 그로부터 미세한 분화들이 이뤄진다는 것, 미세한 분화들 이전에 하나의 중심이 있다는 것, 오히려 그것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는 것은 장연선의 두 손이 거의 한 번에 움직인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는데, 이는 그 몸의 중심적 위상이 거의 고스란히 지속된다는 걸 뜻한다. 채와 손은 동시에 장구에 닿고, 또 장구가 한쪽으로 기울었을 때는 손이 닿는 장구 한 면에 손과 채가 동시에 닿기도 한다. 마지막 채를 잡은 두 손은 앞서 부채를 잡은 손처럼, 작은 세계를 가설하는 것, 그 안에 세계가 담기는 것, 일종의 세계 안의 세계, 곧 미시 세계로 세계를 욱여넣는 행위와도 같다.

     

    네 번째 정형숙의 교방검무역시 양손의 칼을 다루면서 그 요란함에 결코 기울어지지 않는데, 이는 동을 다루는 정의 중심을 잃지 않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칼이 신체 연장으로서 신체에 동시적으로 공명함을 의미한다. 반면, 이 칼은 신체 전반을 오히려 사물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이 요란한 작은 조각들이 구성하는 세계 안에 자리하기라는 뒤집힌 움직임의 세계를 의미한다. 오히려 두 칼을 내려놓는 순간 주체의 의식이 구성되는데, 이는 견고한 사물적 구조로부터 한없이 이완된, 느슨해진 세계 자체와 대신 그것이 서슬 퍼런 주체의 태도로 응결되는 순간을 만든다

     

    칼을 내보내고 수거하는 것보다 이를 일종의 손으로 구성하는 것은, 손과 같이 두는 건 매우 강력한 장면으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칼끝으로 바닥을 하나씩 짚어가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할 때 보이지 않는 희미한 청각적 타점이 그 안에 그려지는데, 무엇보다 견고하고도 서슬 퍼런 주체의 기세가 그로부터 전이된다. 이 서슬은 현대적 조명에 의해 천장을 비롯한 사방 곳곳에 통제 불가능한 차원으로 산란되는 그림자로도 연장된다

     

    다섯 번째 화선무는 뒤돈 채 시작하는데, 셋의 각도가 미세하게 다름은, 곧 입체적으로 맞물림은 횡으로 펼쳐지면서 정면성으로 다시 펴진다. 부채는 신체의 인공 장식이자 확장된 신체를 구성한다. 또는 확장된 그 세계 안에서 신체는 재조정된다. 동시에 신체는 하나의 무늬가 되는데, 이는 산란하듯 연달아 회전할 때 부채의 바람 기호는 치마의 팽창으로 확장된다

     

    여섯 번째로 교방살풀이에서 천은 앞선 사물과의 관계성에서처럼 변화되는 신체의 지지체이면서 이후 분리를 통해 주체의 도약을 지시해 낸다. 천이 두 손에 있을 때 고체라면, 한 손에 있을 때는 기체로 흩어지며, 한 손과 다른 한 손이 각기 다르게 운용될 때, 곧 한 손이 그것을 잡고 있다면, 다른 손이 그것을 이동시킬 때는 일종의 액체가 된다. 그것을 놓고 마치 그 형상처럼 날아가며 다시 그것을 잡았을 때 시간의 질서가 변경되었음을 감각할 수 있다. 천은 홀연한 것이 되는데, 그것은 얇은 천의 흩날림에 투영되는 주체의 진리적 인식의 차원으로 갈음된다

     

    이춘희의 끝맺음은 천을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여 그것을 하늘에게, 관객에게 바치며 인사의 자세를 잡는 것인데, 이는 의식의 한 부분으로서, 단순히 인사의 예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것에 대한 숭앙과 일상으로의 돌아감에 대한 의연함의 기상을 드리우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충만함이 고이는 어떤 순간으로서 스스로를 지시한다

     

    마지막으로 김태덕의 교방타고무는 힘이 넘치는 무대로, 이 힘은 북으로, 또 사방으로 이전된다. 북 연주보다 앞서 주목된 사물은 그가 오른손에 든 천으로, 그는 천을 안고 드리우고 흩날린 뒤 허리춤에 메는 일련의 양상을 통해, 끄덕도 없는 불굴의 의지와 단단한 신체의 힘을 가진 존재로 거듭난다. 앞선 교방검무에서처럼 북채는 바닥을 치며 생기론적 세계를 만든다, 일종의 소리가 진동하는 북으로서 세계 말이다

     

    곧 악사의 북이 그 연주를 대신하고, 또한 보조하며 세계는 확장되고, 또한 은유가 된다. 이후에 그는 북과 한 몸이 되는데, 꽤 긴 연주는 멈칫과 더듬거림, 숨죽임, 끈기와 장구함의 시간 통해 발현되며, 그것은 시간을 쟁이고 눅이는 긴 호흡의 연장이다. 사실 그것은 리듬 자체의 가시화라기보다 리듬적 신체의 가시화이며, 앞선 순간으로의 끝없는 되돌림이기도 하다. 또한 지연되고 유예되는 잉여의 기교이며, 잠재성의 무한한 표현 양상이다. 그리고 북채를 두 손으로 잡고 인사하면서 이 에너지는 비로소 안착된다

     

    정민류 교방춤은 작은 무대를 매우 안정감 있게 운용하는데, 그러니까 무대는 비좁기보다 충만해 보이는데, 이는 신체의 밀도가 정의 차원에서도 충분히 지켜지고 유지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집중된 신체의 양상 안에서 미소한 사물이 신체의 일부가 되며 신체의 확장을 기하는 변화무쌍한 유동체로서 기능함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물론 춤이지만, 춤의 적극적 동세보다는 그것이 지닌 기상, 곧 신체 자체보다 정신의 신체화, 신체의 의식화로서 어떤 정신적 차원의 경지를 그 움직임에서 읽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김민관 편집장

     

    2026년 2월 6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2월  7일 토요일 오후 5시 

    창무예술원 포스트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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