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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페르튜토 스튜디오, 〈다페르튜토 문래(이런 꿈을 꾸었다)〉: 몰입적 지각, 그리고 바깥의 바깥REVIEW/Performance 2026. 7. 8. 13:55
물질의 꿈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다페르튜토 문래(이런 꿈을 꾸었다)〉©송인혁[사진 제공=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이하 상동). 1막, 도효성. 〈다페르튜토 문래(이런 꿈을 꾸었다)〉(이하 〈다페르튜토 문래〉)는 철공소들이 밀집한 문래동이라는 장소적 근거로부터 “문래의 철”이라고 하는 공연의 오브제들을 끌고 오는데, 이는 “특정한 목적 없이” 만들어졌다고 지칭된다. 주물 혼 스피커와 같이 애초에 소리 확성의 매체로서 작용할 것이라면, 금속 파이프나 곡선 파이프는 전체를 이루는 최소 단위로서 불특정한 용도로서 무한의 가능성을 갖는다. 이 후자의 차원에서 그것은 일정한 단위로 결정된 것이지만, 최종 사용의 이미지는 열려 있으며, 이 지점에서 그것이 갖는 잠재성은 일원화된 형태로의 환원, 또는 그러한 형태가 소급되는 지점이 부재하다는 지점에서 ‘특정한 목적’이 없다.
이를 적극은 생명의 메타포로서 연장하는데, 이후 인간이 DNA로서 환치되는 것과 같이, 어떤 최소 단위의 분자적 조각이 연장되는 생명의 물질성이 전제되는 것이다. 이는 적극이 직접 인용하는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물질적 상상력”, 곧 물, 불, 흙, 공기의 4원소가 생명적 의식을 갖고 있음에 착안해, 철을 일종의 제5원소로 끼워 넣은 셈이다.
이는 물에 대한 꿈이 아니라, 곧 심리적 인식의 어떤 추상성의 세계가 아니라, “물이라는 원소가 사람 안에서 꿈”을 꾸는 것과 같이, 질료-의식의 차원을 철의 꿈으로 연장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건 그것으로―특정 미래―의 꿈이 아니라, 그것‘의’ 꿈이라는 것이다. 곧 꿈의 자율성과 현재성이다. 목적은 그 자체(의 순간)에 귀속된다. 그러니까 파이프는 어떤 다른 이미지의 일부로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그 이미지들로의 분화를 꾸는 것이다.
곧 철의 5원소라는 전유보다 더 특징적인 건, 더 독특한 건, 본질적인 공연의 매개이자 형식을 좌우하는 건 ‘특정한 목적이 없음’의 사태로, 이는 무엇보다 상상력으로 비견되는 꿈의 사태와 일치하며, 나아가 꿈의 자유로움과 자율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곧 예술의 자유로움과 자율성이기도 한데, ‘질료에서, 질료로서 연장되는 퍼포머’라는 형식은, 철이라는 원소가 의식을, 꿈을 내포하는 것과 같이, 그 철과 합성되는 그때의 그 신체를 상정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질료에의 수행

4막, 임영. 신체는 철의 꿈에 함입된다. 이때 퍼포머의 비의식성 혹은 비인격성은 철이라는 질료의 꿈을 확장하는 매체 전반이며, 꿈을 꾸는 몸, 꿈에 사로잡힌 몸의 은유를 띤다. 이때 질료에 저당잡힌 신체는 수동성과 객체적 면모의 부정성을 또한 함입하는 건 아닐까. 퍼포머는 질료로부터 제2의 지위로 또는 비인격적 지위로 밀려난다.
그런데 그는 또한 질료 결착적으로‘만’ 존재하며, 이는 상호 함입적 차원에서 그러한데, 곧 자신이 다루는 그 질료에 의해 또한 그가 지지되는 것이다. 이는 그 질료를 직접 대상으로서 다루기보다 그 질료에 의해 다뤄짐을 기꺼이 수행하기로서, 질료를 자신보다 앞세우면서 그 자신을 또한 질료 되기의 차원으로 밀어붙임을 의미한다―이는 일종의 ‘분신사바’ 놀이와 비슷한 결 아닐까.
그런데 이는 질료를 세계 내에 재정립하는 어떤 기술로서, 그것은 단단한 질료를 대개 균형을 맞추는 것, 물리적 차원에서 진동을, 미세한 흔들림을 주며, 그것에 잠기는, 그것을 도리어 감각하는 행위―행위 자체에 대한 지각―에 근접해 간다.
그러니까 1막 처음에서, 오목하게 파인 나무 구조물을 뒤집어 넓적한 면적의 한 모서리를 들어 약간 공중에 들린 상태가 될 때(최도혁), 그리고 그 옆에서 동시에 그것을 덮고 무릎으로 그것을 받치고 있을 때(임영), 사물은 무게를 퍼포머에게 완전히 이양하지 않는다―사물과 나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다. 그리고 사물이 세계 바깥으로 나아가려 할 때, 그 확장됨 안에, 잠재된 비가시적 힘의 차원에 ‘기약 없이’ 속한다.
이는 그다음 장면의 혼 스피커 좁다란 연결부를 바닥으로 해서 돌리는 또 다른 균형의 놀이 이후, 사물 자체에 힘을 이전하는 그 다음 순간의 장면, 곧 두 개의 혼 스피커를 바닥에 놓고 하나는 반시계방향으로 다른 하나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서로를 비켜나가게 할 때, 네모난 연결부로 인해 회전 반경 내에서 덜그럭거리는 단차를 갖게 되는데, 이 묘연한 곡선의 흐름 같은 것이 곧 그들의 행위가 말하는 바다. 최소한의 개입이 그 운동 내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실현되는 것.

2막, 도효성, 임영, 최도혁. 〈다페르튜토 문래〉는 대만 화교 1~3세대를 아우르는 한 가족사에 배경을 두는데, 1막의 2세대, 양양의 용접공 아버지 NJ(52세)의 서사가 이 주물과 관련한 것들―처음 구조물은 주물의 용광로이자 주형틀 같은 것이 된다(1막에서 도효성이 그것 안에 피운 퍼그의 피어오름과 함께 직립해 있음은 그를 마찬가지로 사물화하는 것이다.).―에 대한 ‘소개’로써 갈음된다면, 2막 양양의 서사는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해 온 ‘노아의 방주’ 서사를 활용하는데, 각종 “죽은 동물들”을 배가 아닌 기차에 태우는 행위는 “날씨놀이”라 지칭된다.
이때 기차 출입문은 입구의 커튼으로, 유선형의 기차는 (그것 ‘안’의) 곡선 파이프들의 삐뚤빼뚤한 연결로써 재현되는데, 이때 그것이 어떤 운동의 흐름 자체를 나타내면서 기차의 어느 특정 부분도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지 않음이 중요하다. 그것들은 자의적이라 할 연결들을 통해 어떤 온전한 것으로, 정위 지을 수 없는 것으로 분화해 간다. 거기에 어떤 목적이 실리지는 않는다.
반경이 크고 비교적 얇은 호스에 두 손을 집어넣어 주름을 접어 내어 그것을 쪼그라들게 하며 “죽은 코끼리”를 치환할 때, 신체에 코끼리의 코라는 불순물의 조각이 그 끝에 달린 불순물의 합성으로 전도되는 건 다시 그 반대로 돌아올 수 있는, 일종의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더 중요한 건 일관된 적용으로 인간 양식으로서 발화가 소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이핑에 의해 자막이 가설되는 하얀 막 맞은편 검은 커튼 가에 손전등을 비추어 호 모양의 음영이 커튼 전체를 덮으며 아래로 기울어지는 장면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커튼 아래 틈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 이른바 “유령놀이”이다.
몰입적 지각이 가능한 단위

4막. 최도혁. “죽은 물개”의 “연 날리기” 장면에는 검은 풍선을 활용한 두 개의 장면이 있다. 먼저 첫 번째 물개의 표현으로는 임영이 가스통과 검은 풍선을 동시에 들고 와서 대비를 주고, 다음으로 도효성이 검은 풍선을 묶은 줄을 두 손으로 번걸아 감았다 펴는 동작을 이행하고, 풍선이 천장에 닿고 나서 떠나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 모든 동작은 “1분 단위로 제작”되어 있다.
〈다페르튜토 쿼드〉(2023. 쿼드)1에서 관객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하며 제한한 1분 이내 촬영분은, 이제 1분 단위의 작품들로 체현된다―작품이 시작되면 카메라를 켜고, 끝나면 끄면 된다. 이는 매체의 번역 방식의 차이 대신에, 매체적 지각 방식의 전적인 차이, 곧 두 매체의 공통된 토대(로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쇼츠와 같은 일정한 몰입 단위가 전제되고 있다면, 반대로 찍을 수 있는, 아니 ‘찍을 만한’ 단위의 설정값으로서 퍼포먼스는 지각, 선 체현되어야 한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작업은 관객을 개인으로 만들며, 곧 개인 각자의 영화관 혹은 스튜디오로 만들며, 관객을 해방시키는데, 거기에는 물론 극장의 오래된 제도와 관습이 관객에게 체현되어 있음까지는 부정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방식에서 이뤄진다. 어떤 것도 도그마화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저 관객에게 자율을 주는 것이다. 신체의 사물화와 사물의 신체와 사이의 교환 과정 아래, 신체의 연장은 길게 분포할 수 없다, 또는 찰나적 차원의 응결은 길 필요가 없다. 지지체적 신체의 개발은 몰입(에)의 신체적 단위로 가늠되며 이는 다시 관객으로 연장된다.
가령 앞선 도효성의 두 손의 가만하고도 기민한 행위는 풍선의 위치를 벽면에 닿는 (풍선의) 지각적 지점이 나의 신체적 감각으로 이식되는 지점을 확인하는 것으로 낙착되는데, 이때 ‘나’는 벽-풍선의 접지를 이른바 풍선의 입장에서 (벽을) 감각하고 다시 벽-풍선의 한몸과 이별한다. 벽-풍선-나의 접지는 나라는 신체에 대한 자각으로 돌아오며, 나는 탈-접지, 곧 해지의 순간을 맞는다. 나는 이 과정에서 풍선으로서 벽을 맞았다가 벽으로서 (밀려난) 풍선을 감각하고 떠나온다. 이 국소점들의 인식과 자각은 오브제-나-대상의 3각 관계의 연장된 이미지 가운데서 뚜렷한 경계를 구성한다.
날씨에서 기후로, 놀이에서 세계의 가설로

2막, 최도혁. 2막은 “날씨놀이”의 자장 아래 있고, 이는 다음 “죽은 곰”이 눈싸움을 제안하는 것과 마지막 장면으로 빗소리를 듣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사이에는 “죽은 피아니스트”가 기차에 타길 간청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민주화운동 시대”를 살면서 “수업거부 운동”의 일환으로, “봉쇄된 운동장에서”“헬멧을 쓴 채 드뷔시를 연주”했던 그 모습을 재현한다. 이때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의 〈Clair de lune(달빛)〉(1890.)가 흘러나오고, 일종의 검은 주형 틀 구조물이 이제 피아노가 되고 임영은 거기에 손을 얹는다.
눈 장면은 눈에 덮인 땅을 곰이 뒹구는 장면에 대한 표현으로 이어진다. 포클레인 버켓을 본뜬 나무 구조물의 네 개 이빨 중 하나를 바닥에 대고 중심을 잡되 꾹 바닥을 찍어 간다. 곧 포클레인 이빨로 눈 덮인 땅에 가해진 짓눌림을 섬세하고도 거대하게 또는 섬세함을 거대하게 증폭시켜 표현한다.
비 장면은 빗소리 가운데 세 사람이 모두 혼을 쓰고 동시에 한 발씩을 드는 모습으로 짜이는데, 마치 비는 내밀하게 혼 안을 두드려 그것을 물리적으로 막으면서 증폭시킨다. 그것은 소리로의 변환 매체가 되고, 작은 청각적 잔향실이 된다. 그리고 또한 소리에 눈먼 신체는 위태롭다, 마치 그 비의 자의적 궤적과 같이 세 사람은 한 발을 들어 뒤뚱거린다.
눈 위의 발자국 내기, 피아노 건반의 두드림, 찰랑거리는 바닥에서 중심 잡기는 연쇄적인 움직임의 흐름을 현상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두 소리가 있다. 3막은 대만 화교 3세대, 누나 틴틴의 이야기로 넘어오는데, 틴틴이 문래의 기후위기를 다룬 전시를 방문한다는 전제다. 먼저 시아노박테리아는 기다란 나무 위에 무겁고 길어 휘어지는 철사들이 꽂힌 오브제로, 인간의 DNA는 나선형 계단의 나무 구조물로, 산소와 탄소는 필라멘트가 보이는 전구로 형상화된다.
“시아노박테리아가 산소를 대량 방출”하고, “거대한 육상식물의 조상들”이 “이산화탄소를 과도하게 흡수해” 인간 이전에도 기후위기 사태를 불러왔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힌두교 종말론 “프랄라야”의 개념을 불러와 “종말”은 “새로운 세계가 태동하는 잠복의 시간”이 됨으로써, 고대와 현재를 겹쳐 놓고, 구조주의적 반복의 주기론을 전제하여 재앙의 한시적 사고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현 인류에 대한 세계 양식을 뛰어넘는 사고로의 지향이다.
꿈을 들여다보기 혹은 내려다보기

4막, 최도혁. 3막은 거대한 것과 작은 것의 대비가 두드러지는데, 가령 바텐이 내려오고, 거기에 노란 전선 하나―산소의 어떤 경로성―가 얹히고 다시 올라가는 건 프랄라야 세계관의 정립이다. 곧 포화된 산소는 다시 세계의 틀과 함께 하강한다. 도효성은 인간 DNA와 결착된 와이어 줄을 당겨 오브제가 흔들리는 가운데 그 자신은 거기에 매달려 비틀린 대상이 된다. 곧 인간의 근본적인 운명을 가르는 상징적 움직임은 그것에 올라타 대롱대롱 걸린 존재로 순간 전화되어 그 운명의 난도를 체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간략하고도 추상적으로 정립되는 이 세계의 변경 가운데, 존재들은 주로 세계의 작은 틈이 된다, 거대한 관념에 대응하는 미약한 존재의 매개를 수행한다. 특히 혼을 거꾸로 놓고 그 위에 또 다른 혼을 돌려 얼굴에 갖다 대고 좌우로 돌리는 최도혁의 장면에서, 좁은 틈으로 세계를 보는, 동시에 좁은 틈으로 닫히는 위장 전술로서 보기는 매체의 비대칭적 교란 속에 있는, 준안정적인 존재와 같다.
4막은 극장 2층으로 관객이 이동한 후, 앞선 전면 스크린 프로젝션과 함께 바닥에 프로젝션이 하나 더해진다. 그리하여 대만 화교 1세대인 양양의 할머니의 부활절 의식에 대한 몽상으로 돌아간다. “1936년 도림동 성당”에서 “성체거양, 영성체, 행진”과 같은 “특별한 순간들”은 그가 “마치 기다렸던” 순간들이다. 그 꿈이 나를 꾼다, 마주한다.
성당의 숭고함과 몽상의 환각감이 아래로 내려다보는 거리로써 충당된다. 작은 나무들이 얼기설기 교차되며 삐쭉들 나온 구 덩어리 오브제는 “망각”―여기에 이후 긴 철 원통 자재들이 “부활절 의식”으로서 꽂혀, 성체가 만들어진다.―으로, 〈다페르튜토 쿼드〉에서 “팔굽펴혀기 물고기”였던 배의 옆면이 ‘부활’을 의미하는 “조개껍질”로, 미러지가 “달”로 하나씩 소개된다.
달은 입체적인데, 미러지에 빛을 반향시키는 행위는 겹의 레이어를 만든다. 조개껍데기 안에 들어가서 한쪽 팔을 뻗어 바닥을 저어 나가는 임영의 모습은, 뒤집힌 배가 바닥-강을 지지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인데, 이 배에 갇힘을 타동적인 이행, 움직임으로 바꾸는 건 그의 수동성이 아니라, 그 배의 인격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전이시킨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오브제를 대변한다. 실은 조개가 껍데기 바깥으로 발을 뻗어 이동하는 이 장면은 오브제적 신체와 신체적 오브제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를 시험하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묘연한 순간 둘: 소리 없음의 전이

4막. 이 경계의 실험은 또 다른 막을 건너뛰는 것으로써 변주된다. 곧 극장의 창문 쪽으로 이동한 후에,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그 바깥에서 퍼포머들의 수행이 벌어지게 되는 것인데, 사실 이야기가 실제로 시작된 장소이기도 한 문래예술공장 앞 영등포화교소학교를 그렇게 하나의 프레임으로 끌어들인다. 초록 레이저를 일정한 간격에 맞춰 운동장에 먼저 쏘고, 더 멀리 학교 정문 앞에서 문을 넘어 랜턴을 아래로 쏘아 댄다.
이 유희로써 문을 두드리는 행위, 또는 경계를 유희하는 행위는 그 빈 터전의 전유로 인해, 새로운 극장성의 급작스러운 이전 이후에 일종의 커튼콜로의 급격한, 의도치 않은 선회로, 묘연한 느낌을 준다. 첫째, 경계 간의 이행, 곧 공간을 건물 바깥으로 그리고 그 공간의 또 다른 바깥으로 나아가는 두 번의 절차가 일종의 점프 컷처럼 선연하게 제시되며, 거기에는 어떤 언어가 없다. 둘째, 안의 소리와 달리 그곳의 소리는 차폐되어 있고, 그것을 암묵적으로 공유한 채로 소리를 내지 않고 있기도 한 채, 이 소리 없음의 사태로 인해 그곳은 매우 가까운 클로즈업으로 증폭되기 때문이다.
거리를 상쇄하는 건 소리 없음으로, 이(러한 매체적 변환의 결과)는 확장한 이미지에 대한 집중으로 전이된다. 언어와 소리는 하나로 수렴하는바, 곧 그것이 말이다. 그리고 이는 처음부터 자막으로 대체된 묵독의 형태로서만 제시되고 있었고, ‘말’은 원래 없었는데, 그것을 내면적 목소리가 채우고 있었던 셈이다. 이것이 완전히 빠질 때, 그 셋의 말하지 않는 입은 우물거리는 표정 전반의 일부로서 말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느껴지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데, 그것이 곧 ‘말’의 최초의 순간이 되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다페르튜토 문래〉의 말이 줄어드는, 감산되는, 정지되는 행위들의 차원은, 굉장히 인상적인데―그러니까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 곧 최고의 몰입된 지각과 같다.―, 반면 그것들은 자막의 비가시화된 언어―그것이 곧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유일한 그러나 강력한 연극적 힘과 질서를 수여한다.―의 힘에 비하면 매우 약소한 것이었고, 실은 그 질서에 의해 은폐된 혹은 잠재된 차원에서 어떤 침묵의 사태로서 묶여 있었던 셈이다.
아마도 그것을 깨우는 것, 언어로부터 튀어나오는 것, 언어 너머에서 발설할 수 있음을 인지시키는 것이 바로 이 장면이 갖는 알 수 없는 힘을, 그리고 이 작품의 진정한 혹은 의미 심장한 ‘바깥’을 가리키고 있는 것 아닐까. 따라서 이 지점의 신선함은 이후 무언가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또 다른 동력, 어쩌면 이전의 동력의 한 경로로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김민관 편집장
다페르튜토 문래 (부제: 이런 꿈을 꾸었다)
2026.6.18(목)-6.20(토)
목/금 19:30, 토 17:00 (3회 공연/ 러닝타임 70분)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크레디트
콘셉트·연출·무대미술: 적극
퍼포먼스: 도효성 임영 최도혁
움직임 리서치: 곽유하 김용빈 도효성 윤혜진 이채은 임영 임정하 장보경 전혜인 정나원 최도혁
프로듀서: 조유림
무대미술.제작감독: 중간공간제작소 김건태
무대미술보: 중간공간제작소 윤재희
사운드: 해미 클레멘세비츠
조명 디자인: 봄빛멋짓눈사람 박현정
영상 감독: 림벌트
그래픽디자인: 크리코트2
포스터 사진: 이동웅,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조연출: 이은주
주최·주관: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2026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 선정 프로젝트- 1. 참조= https://www.artscene.co.kr/1900 이는 지각 단위에 대한 고민 이전에 서사 창안 및 구성의 차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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