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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쿼드(적극 연출), 〈다페르튜토 쿼드〉: 연극을 정의하는 놀이
    REVIEW/Theater 2023. 5. 31. 23:46

    콘셉트/연출/무대미술: 적극, 주최/주관/제작: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다페르튜토 쿼드〉[사진 제공=서울문화재단](이하 상동).

    〈다페르튜토 쿼드〉는 어떤 말이 있고, 그것을 수행하는 순서를 가져간다. 프롬프터의 말이 무대로 흘러나오고, 그것이 규칙이 되고 표현의 근거가 된다. 곧 각각 연출의 말과 배우의 수행이 그것이다. 그 말에 따라 관객은 빛과 어둠의 경계를 분별하며 어둠에 자리해야 한다. 마지막에 어둠과 빛의 경계를 무력화하는 것 역시 말이다. 쿼드 극장을 말(제목)과 공간으로 전유한, 〈다페르튜토 쿼드〉는 불, 물, 흙, 공기의 4막으로 태초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기원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또는 기원을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순차적으로 흐르는 말과 움직임 또는 말과 이미지, 곧 언제나 이미지에 앞서 선행하는 말은 태초에 말이 있었다는 공연 바깥의 어떤 말을 따르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다페르튜토 쿼드〉에서 이미지는 말에 대한 번역이면서 표현으로서, 그 둘은 애초에 완벽히 포개지기보다 각자의 다른 차원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둘은 대등한 관계를 설정하는 듯 보이며, 나아가 말은 오히려 행위에 관한 뒤늦은 반증일 수도 있다고 보인다. 곧 이미지가 말을 재현함으로써 원본의 가치로부터 질적 하락의 사태에 처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의 합목적성을 위해 이미지가 펼쳐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의 비가시성은 평등한 주권의 영역 아래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열등한’ 이미지들은 어차피 말이 어떠한 이미지를 고착화시킬 수 없었음을 천명할 뿐일 수 있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다페르튜토 쿼드〉는 주어진 말과 뒤따르는 이미지의 관계를 통해 어렴풋한 서사를 현재화하는데, 이로써 어떤 토대를 구성하는 것도, 시간의 질서를 설명하는 것도, 태초의 정의를 재현하는 것 역시 아니다. 〈다페르튜토 쿼드〉는 단지 어둠이 있었고 말이 나타났으며, 어떤 것들이 그 말처럼 일어났었음을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태초에는 이야기의 특정한 정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행위가 있었던 것이다. 〈다페르튜토 쿼드〉는 태초의 근원적 차원을, 이야기하는 존재―사물을 궁구하고 규명하려는 존재―와 행위하는 존재―말의 엄격성을 이탈하며 말 이후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존재―의 현재성으로 수렴시킨다. 신성함, 숭고함 같은 것이 이 공연에 남아 있다면, 그건 그 정의의 엄격성이나 순수성이 아니라 그 정의가 갱신되고 수행될 수 있음 자체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어떤 공백 같은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러한 수행성은 연출[말]에서 배우[이미지/행위]로의 (여기서는 실제적인) 순서에서, 그리고 관객[바라보는 자]과 배우[보이는 자]의 관계에서 일반적으로는 이중으로 소외당하는 보통의 배우의 자리가 단순히 어떤 대상으로 위치 지어진다는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연장되는데, 배우는 그 말의 재현태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말은 그 움직임을 어디까지나 책임지거나 보증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배우들이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는 동안, 말은 물러나 있으며 배우는 행위자 자체로 존재한다. 이는 어떤 내적 질서를 가진 캐릭터에 입각하는 대신에 주어진 행위를 완수하는 데 그친다. 여기서 배우는 특별한 존재의 심상을 갖는 대신 그 행위가 관객에게 역시 조응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매개자의 역량을 흩뿌리는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말과 관객 사이에 배우가 있고, 말을 가로지르는 배우가 무대로 전이되며 그 말이 희미해지는 구조 아래, 배우는 명확한 행위자로 남는다―각자에게 주어진 온전한 수행의 몫이 된다. 그리고 그건 관객을 추동하는 효과이다.

     

    이러한 효과는 공연이 일차적인 텍스트로서, 관객에 의해 파생되는 이차 텍스트를 위해 제시된다는 개념과도 맞물려 있다. 커튼콜에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고 할 때 박수가 아닌 ‘과거’를 기록하려는 적극적인 관객이 탄생하듯 〈다페르튜토 쿼드〉는 공연 전반에 촬영이 가능한 날짜를 상정함으로써 휴대폰이 극장에 더해지는 하나의 장치가 되는데, 이는 공연의 시간을 공연 이후로 유예하고 복제함으로써 공연 이후의 사건을 발생시킨다. 여기서 그 사건의 주체는 관객이 되는 동시에, 그 관객은 자신이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이 있던 자리의 개별 시점을 인증하는 능동적인 매개자가 된다.

     

    1막은 불을 다룬다. 가장 첫 장면은 시위하는 자의 화염병 투척과 이에 맞은 이의 몸에 불을 끄는 전경의 살수, 그리고 그와 함께 순간적으로 피어나는 증기를 실사 애니메이션으로 나타낸 것이다. 쓰러져 있는 사물화된 신체는 불과 물의 화학작용을 드러낸다. 이어 원래 원형 단세포, 고리모양DNA(circular DNA)를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단세포로 전제하고, 이 단세포의 한 점을 프로메테우스가 불로써 끊어내는 게 다세포의 기원이 된다는 새로운(?) 신화를 설정한다. 이는 실제로는 바퀴를 바텐에서 분리하는 것으로 옮겨진다. 곧 직선의 어법이 원의 영구한 순환을 하나의 연대기적 시간으로 끊어낸다는 개념은, 신화의 시간과 근대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을 물리적 감각과 인지의 어법으로 인계된다. 여기서 퍼포머는 용수철처럼 움직일 때마다 무작위로 튕겨 나가는, 철사가 달린 가방을 멘 채, 즉물적인 사운드 효과와 함께 곤충-인간의 기이한 생명력으로 드러난다.

     

    물을 다루는 2막은 가장 가벼운 오브제의 끊임없는 변용의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곧 은박지는 조명을 받으며 산란하는 물의 흐름으로 드러난다. 오브제이기도 하고 공간이기도 한 이 은박지는 신체와 맞닿으며 신체로부터 연장된다. 이어 나오는 서사에는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이전 작업인 〈암세포 삼형제〉의 모티브가 합성되었는데, 아버지의 암세포들이 등장하고, 무력해진 아버지 위에 천장에서 내려온 거푸집 같은 나무 틀이 씌워진다. 죽음에서 시원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는 최초로 지상에 올라 인류의 조상이 됐던 순간의 모델이 되며, 이는 물과 뭍의 경계를 반복적으로 구성하는 팔굽혀펴기 형태로 나타난다. 이른바 “팔굽혀펴기 물고기”다. 정점은 해미 클레멘세비츠의 사운드 퍼포먼스로, 바닥의 진동과 공간 전체의 떨림을 통해, 공간은 더 세분화되고 쪼개지며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공간의 입자화와 입자화된 하나의 공간이 구성되는 가운데 무대는 비워지고 관객은 공간의 주인이 된다. 일종의 입체적인 명상의 공간과 그 공간과 합성되는 쉼이 물의 질서를 구성한다.

     

    땅을 다루는 3막은 대지는 땅 밟기로 시작된다. 얼굴을 보고 안 보고로 나뉘는 객석의 향방이 묘연한 만큼 퍼포머의 땅 밟기 행동 역시 그러한데, 얼굴을 틀어 앞뒤로 굼실거리며 스텝을 밟는데, 시선과 스텝의 불일치로 머리는 의식(意識)해야 하는 신체의 짐처럼 눌러앉고, 의식 (儀式)을 치르듯 스텝 하나하나를 고도로 각성된 상태로 진행시켜야 한다. 이때 얼굴에 쏠리는 시선과 감지되는 몸의 방향이 뒤틀리기 때문에 관객 역시 교란된다. “베케트의 미로”가 사각형 안의 얼굴과 스텝의 이접적 콜라주라면 “톨스토이의 미로”는 원형 안의 삐거덕거리는 사물과의 콜라주다. 여기서는 안과 바깥이 각기 다른 질서와 시간을 갖는데, 퍼포머들은 각자 다른 사물들과 신체를 혼합하여 어정쩡한 움직임이 된다. 이는 표현의 고도성이 강조되기보다는 역시 행위한다는 것, 그 행위를 가져간다는 차원에 가깝다.

     

    영상 찍기가 미래의 접속 지점을 만들면서 관객과 공연을 합성한다면, 곧 찍는 관객이 그 바깥의 시각장으로 흡수된다면, 일종의 연습과 시도의 차원에서 배우들의 이러한 행위는 관객 없는 유튜브 화면 안으로 잠겨 든다. 미래적인 이미지로의 합성과 과거의 이미지로부터 나오는 현재적 합성은 극장 안팎의 공간과 저장 공간의 분화를 통한 시간의 연결고리를 만든다.

     

    ‘톨스토이의 미로’는 죽음의 순간에 타자로의 자기 함입의 의식을 겪는 주인과 하인의 변증법적 질서가 마이너스 차원으로 굴절되는 기이한 순간을 이야기한다. 처음 극한의 추위 속에서 하인을 두고 떠난 주인은 결국 하인을 발견하고 나서는 의식이 흐려지며 죽음을 직면한다. 썰매 안에 남아 있던 하인을 감싸고 나서 하인이 깨어나자 주인은 돌연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을 마주한다. 의식은 영원한 잠을 향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하인의 것임을 깨닫는다. 타자가 습합되는 상황은 〈다페르튜토 쿼드〉의 주제를 이루는데, 그 이전에는 시원적 경계와 구분이 탄생의 순간을 더듬는다면, 이후에는 그러한 경계가 지워지는 사태를 만들고자 한다. 세계의 분화는 세계로의 침투, 곧 ‘다페르튜토’의 세계관을 구성한다.

     

    4막은 공기를 다루는데, 공기는 비가시적이며 물보다 절대적으로 세계 전반을 공유한다. 버섯 균이 개미 머리를 뚫고 나오는 장면은 구부러진 관을 사다리를 타고 퍼포머들이 아래에서부터 올려서 조각상의 머리를 뚫고 나오는 식으로 구현한다. 떨어지는 낙하산 우산은 포자를 표현한다. 포자는 버섯으로 자라고, 버섯은 순록이 먹고 순록의 오줌으로 나와 다시 인간에게 흐르는 순환 속에서 ‘나라는 정체성을 만드는’ 뇌의 한 구간(DMN)을 비활성화시켜 ‘나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이후 무대와 관객을 나누는 빛과 어둠의 경계는 해체된다.

    이어 자궁 밖 최초의 미생물과 아기의 만남은 해체된 아기 얼굴 이미지의 합성으로, 처음 나왔던 자궁 막과 이후 나갈 질 막은 두 개의 커튼으로 표현된다. 자궁 막-커튼에서 나온 역시 커다란 이미지의 팔이 얼굴과 붙고 또 떨어진다. 엄마의 모유가 특정 미생물들의 먹이라는 전제는 아이-이미지의 바깥에 관객을 미생물들로 정체화한다. 미생물-관객에게는 엄마 모유의 상징으로서 우유 맛 사탕이 제공된다. 이를 나눠 먹는 타동적이고 어정쩡한 공동체 의식과 함께 어쨌거나 관객은 화학 작용과 인식의 단서를 결합해야 하는 과제를 삼키게 된다. 분리되어 퍼포머들의 스텝이 맞물리고 흩어지며 어른거리는 아이-이미지, 그리고 큰 풍선 신체가 만드는 자궁 입구가 관객의 중앙에서 한쪽 통로를 만들며 관객을 육박하고 에워싼다.

     

    〈다페르튜토 쿼드〉는 사실상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작업들을 결산하고, 텍스트의 주문과 이미지의 다른 이행이라는 전제 아래 여러 오브제 양식과 신체와의 투박한 결합술을 실험하며, 4 원소의 키워드 안에 이를 묶어 내려 한다. 그렇다면 형식적 자장과 주제적 연결이 사실상 공진하는가. 4 원소를 사실상 죽음의 재구성, 죽음과 삶에 대한 재인식, 죽음의 삶으로의 통합 의례, 삶의 갱신을 향한 의례와 같은 성격으로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곧 신화적 원형은, 고대적 단어들은 재현이 아닌, 표현을 위한 어떤 개념의 잔여물로서, 미지의 가설로서, 이야기하기 자체로 현재화된다. 이를 통해 삶-죽음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연극을 정의하는 것에 대한 수행이다.

     

    4 원소는 순환이라는 철학적 이념의 추상화를 제한다면, 사실상 구체화된 연결로 세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단지 그것이 삶, 죽음, 신화를 다시 쓰기에 대한, 모든 것을 함입할 수 있는 일종의 블랙홀 같은 맥거핀이라면, 이 주제의 아득함에 대한 혐의는 조금 지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연극은 연극을 ‘단지’ 하는 것과 연극을 ‘가볍게’ 정의하는 것의 사이, 이미지와 말 사이의 어떤 매개였다. 재현과 드라마와 역할과 연기와 배경적 요소들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며 연극의 기원을 유희적 전술로써 매개하고 전유해 왔다.

     

    그렇다면 스펙터클의 힘 동시에 스펙터클의 과도함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을까. 물론 이는 관객 전체를 공간의 체스 말들, 공간에 함입하는 전략에 상응한다. 그것은 여전히 작은 연극, 하지만 부풀려진 연극―풍선이나 아날로그로 뻥튀기된 물성의 오브제들―의 차원에서 미소하며 신체 감각적으로 수용되는 것이겠으나, 모든 부분이 미소한 것의 충격 이하의 과잉적 이미지로 다가오는 부분 역시 존재한다고 보인다. 이는 주제적으로 또는 소재적으로 개념들의 뭉뚱그려짐으로 보인다. 이미지와 개념은, 말과 이미지의 역학과는 또 다른 섞임을 발생시킨다. 마지막으로, 결산의 또 다른 측면에서, 기억은 과거의 것이 새로운 것과 합산되며 그 둘 사이의 잉여를 남긴다.

     

    〈다페르튜토 쿼드〉가 어떤 이정표 없음으로서의 무한한 흘러감이 결산의 차원에서 ‘전체’라는 하나의 순일한 집합성을 향해 가며, 또한 부분들의 집합으로서, 결과적으로 형식적인 잔여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면, 이후 새로운 무의 상태는 어떤 잔여 감각으로 영점 조절을 하게 될까. 어떻게 다시 흘러갈 수 있을까. 목적 없음과 형체 없음으로의 귀결은 어떻게 연극을 정의하고 수행할 수 있을까. 이는 정치적 시위와 치안으로서의 폭력이 매개되는 자연의 순리는 어떻게 더 첨예한 구체성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 역시 포함한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일시: 2023.03.28. ~ 2023.04.16. 평일 19:30 | 주말 15:00 | 월 쉼

    -장소: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관람연령: 14세 이상 (미취학 아동 및 초등학생 관람 불가)

    -러닝타임: 90분 (인터미션 없음)

    -주최·주관·제작: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문의: 대학로극장 쿼드 1577-0369

     

    • 공연 관련 알림

    - [관객 참여] 회차 운영: 4월 4일(화)~4월 16일(일) / 관객이 자유롭게 공연 촬영 및 해당 영상 SNS에 업로드(1분 이내)

    [한국어 자막 회차] 4월 11일(화)~4월 16일(일) / 관람의 장벽 낮추기 위한 시도 병행하며, 마지막 주 전 회차 제공

    [관객과의 대화]: 4월 1일(토), 4월 15일(토) / 공연 종료 후 당일 공연 관람자 한해 참석 *4월 15(토)의 경우, 수어 및 문자 통역 제공

     

     

    ▶ 크레디트

    콘셉트·연출·무대미술: 적극

    움직임 리서치, 퍼포먼스: 김용빈, 이종현, 임영, 전혜인, 최도혁, 하영미, 허윤경

    사운드 퍼포먼스: 해미 클레멘세비츠

    조연출: 정찬동

    그래픽디자인: 박찬신

    프로듀서: 박지선

    미술·제작: 김건태

    안무: 유지영

    음악: 해미 클레멘세비츠

    조명: 디자인 박현정

    영상: 림벌트

    음향: 안세운

    무대감독: 강노을

    무대조감독: 황인영

    미술팀: 민주영, 장기욱

    조명팀: 이정하, 박진희, 서민지, 박태직, 이영준, 박세환, 한태훈

    음향팀: 강보연, 원혜진

    조명 오퍼레이터: 김보경

    영상 오퍼레이터: 박준영

    실시간 타이핑: 적극

    라이브 비디오 촬영: 정찬동

    무대팀: 강혜경, 김병구, 김효준, 이동준

    전환수: 권서령, 김용오, 박진희, 서민지, 윤여준

    관객 이동 안내 크루: 김대근, 이영하, 추동근

    접근성 매니저: 최봉민

    접근성 콘텐츠 제작: (주)한국콘텐츠접근성연구센터

    자막해설 작성 및 자막 디자인: 서수연, 구태훈

    자막 오퍼레이터: 크리스탈

    수어통역: 수어통역협동조합

    문자통역: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

     

    적극은 2010년 ‘도처에, 어디로나 흐르는’이란 뜻의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를 만들어 연극을 재정의하는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드라마에 집중된 연극 형식을 포기하고 ‘결국은 제자리’인 삶과 죽음의 서사, 배우의 돌연변이인 ‘퍼포머의 현존’을 극적인 내용과 대치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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