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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민 쿠엉 카스테잉(Erik minh Cuong Castaing), 〈삶의 형태(들) Forme(s) de Vie〉: 공통과 차이의 변증법REVIEW/Performance 2026. 6. 4. 22:01

에릭 민 쿠엉 카스테잉(Erik minh Cuong Castaing), 〈삶의 형태(들) Forme(s) de Vie〉[사진 제공=모두예술극장](이하 상동). 〈삶의 형태(들)〉은 신체 활동이 불편한 퍼포머들과 그를 보족하는 퍼포머들의 상호 긴밀하게 일어나는 움직임의 과정을 드러낸다. 전직 권투선수였던 카말 메세레카와 전직 무용수였던 엘리스 아르고의 두 축으로 연장되는 특이성의 신체들은 공통의 집합적 장에 분포함으로써 어떤 삶의 형태를 구성한다. 움직임은 그 집합적 덩어리 자체가 아닌 그 ‘안’에서 일어난다. 또한 그 안의 한 부분에서 다른 한 부분으로, 혹은 그 반대의 방향으로 발생한다.
이 형태는 형식의 이름이기도 하며, 표현 자체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잠재적 신체의 영토를 따른 우연성과 예측 불가능성으로부터 형식이 정의하는 틀을 벗어나며 표현이 수여하는 완결적 면모를 기각한다는 점에서, ‘형태’라는 물리적이고 형용하기 어려운 형상 그 자체로 일단 드러난다. 곧 ‘삶의 형태(들)’은 서술과 정의의 영역에서 감각과 묘사의 차원으로 이동함으로써 미학적 차원을 판단에서 참여로 재고하려는 어떤 방식이다.
〈삶의 형태(들)〉은 시작과 후반에 삽입하는 영상을 통해, 이 형태들이 각각 다른/유사한 ‘삶’들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야외 환경에서 카말이 앞장선/클로즈업된 보족하는 신체들과 결합된 권투 연습이 바로 무대로 튀어나오는 이미지라면, 프랑스의 완화치료센터 ‘라 메종’에서 환자와 교통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장면은 작품의 모티브이자 탄생 배경을 넌지시 암시한다. 이 둘은 카말과 엘리스의 무대에 대한 다른 형식의 시간성을 부여하는데, 움직임의 차원에서 전자가 순수한 (모의) 훈련이자 놀이라면, 후자는 창의적인 치료의 방편으로서 자리한다.카말의 무대는 마치 권투선수의 이전 영광을, 신체를 되찾는 과정에서 느끼는 쾌락의 환상을 적극적으로 추동하는데, 이는 어린이 같은 모습으로 관객석을 가로질러 가는 와중에 또 재주넘기 같은 동작에 신나 하는 모습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반면, 엘리스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이후의 어떤 신체 형상, 의중을 감지하기 어려운 표정과 몸짓을 어떤 식의 방향성을 찾아낼지 또 부여할지의 차원에서 판단의 여지를 재고하게 하는 측면이 크다.

전자의 관객의 자리를 침범하고 혼란 상태에 빠뜨림으로써 그 놀이와 유희가 향하는 본질이 타자가 드러나는 사회적 영역에 대한 근원적 판단에서 내가 가진 타자성, 어린 시절의 무의식적 심급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절대적인 타자성―그는 관객의 동요에 전혀 개의치도 상관하지도 않으며, 그것은 사회적 협상의 차원을 벗어나는 듯 보인다!―은 그 환상과 잉여의 차원이 여전히 유지되어야 하고, 그것은 우리의 ‘자리’로부터 우리의 마음의 동요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후자는 그 내부에의 침잠이 나의 의식적 판단 영역을 벗어나며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몸의 더딘 표지로부터 그것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된 의지의 영역의 사이로 관객을 붙잡아두는데, 이는 표면적으로 엘리스의 허공을 향한 눈과 몸짓 사이, 그리고 우리가 접속하는 예측과 판단의 가상 영역과 몸짓을 붙잡는 시선의 사이의 차원에서 우리 내부의 명상적 상태를 끌어올린다―이미 그 시선은 우리가 아닌 자신의 몸, 그것의 제어 불가능성을 향한다, 곧 그 스스로의 타자성을 향한다.
두 다른 삶의 형태‘들’이 하나의 삶의 형태로 수렴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또는 삶의 형태가 다른 삶의 형태들로 분화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두 인물은 어떻게 하나의 공통을 추출하는가. 또는 하나의 공통된 토대는 어떻게 차이를 생산하는가. 일차적으로, 두 다른 인물이 존재의 고유성의 차원이 지닌 차이와 거동이 쉽지 않은 신체적 특징의 공통됨의 다른 표현 방식의 전개―다른 신체들의 하나의 신체들에 대한 두 다른 지향의 결과, 그 사이의 교차됨을 〈삶의 형태(들)〉은 괄호로 표현한다. 그리고 물론 이는 그 선택된 다른 두 명의 존재의 차이를 하나의 형태로 ‘묶어 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공통의 토대와 체계, 그리고 보편으로부터의 어떤 추출 사이에서 이 제목이 자리한다.
카말과 엘리스의 무대에는 무용수들이 있고, 그들을 보족한다. 차이는 무용수들로부터 나오기보다는 카말과 엘리스로부터 온다. 따라서 공통의 형식은 신체 수행과 보족, 존재의 영역과 그로부터 연장되는 행위의 공-현존, 곧 절대적인 타자의 상정과 함께 그에 ‘개입하지 않는 매개’의 영역을 가정하는 가운데 그 존재 자체의 차이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공통의 토대는 형식보다는 그 형식을 이루는 방식에, 표현보다는 표현의 매개 방식에 상응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보는 건 절대적 타자성, 고유한 특정성 외에 그 바깥의 쩔쩔매는 세밀하게 고려하는 바깥 존재의 모습들이다.
초반에 카말 외 2명, 유미코 푸나야와 낸스 피어슨은 같은 과제를 지향한다. 하나의 몸과 여러 개의 합해진 신체, 곧 여러 개의 신체가 합치된 상태, 하나의 의지를 나눠 가진 존재들, 하나의 존재를 위한 기능이 되는 신체들에는 지향의 직선적 결행과 종속과 부속을 통한 지향의 결합이 있다―권투 동작을 표현할 때는 유미코와 낸스가 보족하지만, 구르기와 점프 등의 이동을 통할 때는 낸스와 아룬이 보족한다. 여기에는 상호 주관적인 피드백이 작동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즉각적인 충동의 발현과 해소만이 자리하는 듯 보인다(그로써 어린아이의 꿈은 이뤄진다!). 그의 눈은 저 먼 곳을 향하여,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향해 번득인다.
반면, 엘리스와 그를 보조하는 이―초반에는 유미코가, 후반에는 아룬 마샬이 자리한다.―와 일 대 일의 관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카말 집단과 달리 힘을 뚜렷한 하나의 목적 안에서 작동시키는 것, 일종의 스포츠 체계의 일환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이 정위될 지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움직임에 수반된다는 점―그것은 일종의 안무가 직조되는 과정이다.―에서 머뭇거림, 곧 사유가 개입한다―이는 의식과 신체의 연결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연 현상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포괄한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의 힘에 의해 휩쓸리거나 변용되는 것을 수용하면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보족의 기능적 차원이 카말에게는 그 바깥에서만 일어났다면, 엘리스에게는 그 바깥이 스스로에게 의미의 지형으로 발생한다. 곧 엘리스는 미세한 감각의 전이와 의미 지형을 반영한다. 이는 유미코와의 행위에서는 접촉 즉흥의 행위 양상과 가깝게 나타난다면, 낸스와 결합할 때는 움직임 자체를 선택하는 것, 곧 움직임을 단순히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움직일지 말지의 차원에서 시작하는 것을 인지하게끔 한다는 어떤 차이가 드러나 보인다.
결과적으로, 선택된 두 존재, 카말과 엘리스, 그 둘의 표현양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존재론적 차이인가. 곧 전직 권투 선수이자 무용수로서의 차이인가. 각기 다른 장애의 차이인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인가. 아님, 안무의 접근 방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선제적 차이인가. 이러한 여러 질문들은 장애를 절대적 명제로 두기보다 다른 의제와 교차지어 볼 수 있음을 상정한다, 또한 매개의 측면을 상기시킨다. 차이를 포획하는 공통된 토대는 다양성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유함을 지닌 미적 체계의 진실을 기입한다. 그리하여 결국 중요한 건 그것이 복수(“들”)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2024년 11월 14일(목) ~ 11월 16일(토) 관람시간 목·금 19:30, 토 15:00
모두예술극장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7 구세군빌딩 1~3층)
크레디트
콘셉트·안무·연출 에릭 민 쿠엉 카스테잉, 아룬 마샬, 마린 레린저
드라마투르그 마린 레린저
공동안무 아룬 마샬
영상 촬영 빅토르 제보출연 엘리스 아르고, 유미코 푸나야, 아룬 마샬, 카말 메세레카, 낸스 피어슨
영상 출연 마샬 부커, 소아이직 카보넬, 진 콜린, 요시코 키노시타, 에릭 민 쿠엉 카스테잉, 애니 오드, 브루노 산틸리
무대미술 앤 소피 투리온
의상 실비아 로마넬리사운드 디자이너 리나우 바쥬
조명 닐 도우셋
기술감독 버질 카펠로
무대 매니저 레오 데이비드, 스태니슬라스 코펙
사운드 녹음 프랑수아 샤리에, 사뮤엘 포이레
편집 루시 브룩스
색보정 알렉시 람보트 라벨 42 스튜디오
프러덕션 매니저 카를라 알베르니
프러덕션 어시스턴트 마틸드 단텍
행정 막심 코트만제작감독(영상) 스칼렛 갈슨
로케이션 매니저(영상) 사무엘 튀레다
케어러 도핀 램버로롯수아, 소피 레오나르드
협력 엑스트라폴 (아녜스 앙리)
운영총괄 (주)스탭서울
음성해설 저자 플로랑스 매지유
음성해설 번역 이진이
통역 제렌 오즈잔
기록촬영 스튜디오 야긴후원 INSTITUT FRANÇAIS agefi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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