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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경, 〈독백연습〉: 언어의 재경계를 표식하는 움직임(의 언어)들REVIEW/Performance 2026. 6. 30. 23:00

허윤경, 〈독백연습〉[이미지 제공=Q-PERFORMANCE]. 허윤경의 〈독백연습〉에는 안무가 자신이 찾은 또는 그를 거쳐 간 여러 텍스트를 움직임과 연관 짓는데, 그 둘은 공간이라는 통 분모를 가진다. 이때 언어와 신체가 갖는 각각의 공간성은 절합 가운데 교섭되는 여지를 마련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언어 안에 움직임이 재포섭되는 절차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언어가 움직임으로 재분절되며 연장되는, 곧 확장되는 것일 수 있다. 곧 움직임은 언어의 공간이며, 언어의 공간에는 움직임이 담긴다. 그러나 움직임은 순수한 언어의 어떤 가능성을 전달할 수도 있을까.
허윤경은 움직임의 경로를 찾아 나간다, 언어를 빌려―몸은 전제되는 무엇이다.―, 또는 언어에 빗대―몸은 언어로서 구성된다.―. 텍스트를 담은 종이는 구멍에 박혀 있다. 그것은 손과 바닥 사이의 틈이다. 가장 많은 구멍과 틈이 있는 곳은 관객들이 모인 자리와 다름없다. 따라서 그는 관객에게 다가서고, 가상의 종이를 펼쳐서, 카프카의 얼굴을 꺼낸다. 그건 자신이 내민 손을 잡은 한 관객의 손을 다시 잡는 것과 같다. 이때 자신의 신체가 은유되는 걸 관객은 인지한다. 신체는 그 안에, 하나의 언어-공간 안에 있다.
“대신 만지다”라는 이후의 개념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것이 우리를 대리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는 좀 더 특이한데, 자기 손에 관객의 손을 얹게 해 허윤경을 만지다가 그걸 관객으로 이전할 때, 나는 나를 (‘다르게’) 만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퐁티의 나의 오른손이 나의 왼손을 만질 때 일어나는 감각의 전이, 곧 나의 왼손을 만지던 오른손의 감각이, 나의 오른손에 만져지던 왼손의 감각으로 ‘변화’하는 지점―그것의 동시성은 하나의 살이라는 토대 안에서의 표기로, 실제로는 전환의 과정에 가깝다.―을 나와 너의 연결된 하나의 살로부터 변주한 것과 같다.
처음 허윤경은 자신을 만지지만, 자신을 만지기보다는 거기에 지지되고 있는 관객에게 자신을 만진다는 감각을 ‘대신’ 불어넣고자 한다―관객이 어디까지나 허윤경의 머리를 만지는 건 아니다. 반면, 이것이 관객을 향할 때, 그는 자신을 다른 느낌으로 만지게 되는데, 이때 무대는 관객 한 명의 심부로 굴절되어 들어간다. 그리고 이는 관객이라는 구멍을 무대 시작점의 위치로 재조정하는 허윤경의 무대 배치술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는 내장적 감각의 언어와 또한 조응되는데, “뱃속 요동치는 덩어리는 이후 무대 가, 곧 공간 구석―관객의 경계로 들어온 허윤경 이후에 그곳은 ‘먼 곳’으로 위치한다.―의 파도치는 자연의 심부와 연결된다―“벽(의 반대말)”은 “해안”이 된다. 또한 머리에서 발을 잇는 긴 척추인 “가짜 척추”와 같은 가상의 몸에 대한 훈련 양식은 전이-전도되는, 연장-확장되는 신체 감각의 차원에서 납득 가능해 보인다. 이는 “가(짜) 성대”의 운용으로 이어지고―이는 음이온의〈스와이프!〉에서 허윤경이 그로울링의 기술을 선보였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참조 https://www.artscene.co.kr/2033―, ‘가짜’는 몸을 확장적으로 운용하는 기술의 근거를 이룬다.
허윤경은 자신이 안무하거나 출연한 또는 그가 관객과의 경로 안에서 퍼포먼스를 연장하는 것처럼, 이곳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을 예외적으로 삽입하기도 한다―나희덕의 시 〈벽의 반대말〉이 그것이다. ‘경로’는 우연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경로 자체를, 무언가의 흐름과 효과와 표현 자체를, 공간을 이야기한다. 벽과 해안은 모순적이지만, 실질은 조응되며, 불가능성에서 상상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단계를 만든다. 마치 커튼-벽은 관객과 함께 그 가에 허윤경이 설 때, 이곳과 다른 저곳에서의 다른 차원을 보여주는 실재적 경계인 양 자리한다. 좁다란 간격의 스텝과 움츠러든 몸은 밀려오는 그 파도-벽과 공기-벽의 흐름을 체현하는 듯하다.
벽과 해안의 평행적 구도, 무대와 객석의 그것을 연장한 이 구도는 자신이 들어간 집으로서 껍데기가 소라게 자신에게 어색할 수 있음의 언급과 또한 조응한다―“영원히 자기 자신과 안 맞을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바다는 소라게로 국소화된다. 그리고 다시 신체로 돌아온다. 또한 소라와 게 사이의 구멍을 상기시킨다. 〈독백연습〉은 허윤경 자신이 겪어온 경로들을 마구 호출하는데, 이 같은 하이퍼링크식 다중 맥락의 연결-접속 방식은 문학/텍스트와 움직임의 공진으로써 나아간다.
그것은 실제 ‘평행’하는 두 축을 전제한다. 동시에 서로를 넘나들며, 가로지른다. “독백”이기에 그것은 텍스트에 비중을 두는 듯 보인다. 이 언어적 활용은 움직임이 위치할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며, 그 공간의 분포 안에서 움직임이 어떻게 입체적인 언어로서 기입되는지를 또한 전제하고 명시한다. 독백은 또한 관객‘으로’ 연장됨으로써 관객의 신체는 하나의 무대가 되고, 그 감각이 전이되는 입구로서 재정초된다.
“연습”은 무언가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호들과 그 연결들의 잠재적 지대를 넓고도 유연한 차원에서 남겨둔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식 병치로써 주어지는 특유의 산만함과 방대함이 동시에 어떤 선형적 차원으로 (우연히) 도달할 수 있느냐의 견지가 아니라, 그 산만함이 어떤 유기적 조직체로서 일정한 상을 덮고 있다라는 가정, 곧 그 산만함이 작업의 구조성을 탈은폐, 가시화할 수 있느냐의 질문, 곧 그로 인한 서사의 특정한 얼개를 획득할 때 ‘독백연습’은 연습이 아닌 정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김민관 편집장
Q-PERFORMANCE # 21
2026.3.26.목요일 5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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