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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헤이 나와(Kohei Nawa)×다미엥 잘레(Damien Jalet), 〈플래닛[방랑자](Planet[Wanderer])〉: 미래라는 은밀한 기원
    REVIEW/Dance 2026. 7. 8. 13:56

    어떻게 공간에서 움직임이 출발한 것인가

     

    코헤이 나와(Kohei Nawa)×다미엥 잘레(Damien Jalet), 〈플래닛[방랑자](Planet[Wanderer])〉©YOON6PHOTO[사진 제공=GS아트센터](이하 상동).

    〈플래닛[방랑자]〉(2021, 이하 〈플래닛〉)은 조각가 코헤이 나와와 안무가 다미엥 잘레의 협업으로 이뤄진 공연으로, 그들의 두 번째 협업의 산물이다. 〈플래닛〉은 나와의 공간 위의 결정체로서 조각을 유동하는 생명체들의 움직임으로 바꾸는 잘레의 공연인바, 이 멈춰짐의 전제 조건을 신체가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그리고 연장할지가 관건이다. 이때 신체에 가해지는 제약이 표현의 자율성과 표현의 변주 폭을 줄이거나 소거하는 방식이라고 비판하는 건 이 작품을 통상적인 무대 공연으로 환원시키는 협소한 비판의 한계에 갇힌다.

     

    아마도 신체의 제약과 신체의 생명력을 가장 극적이면서도 명석하게 그린 장면인, 무대에 난 구멍들 위의 점성을 띤 하얀 액체를 앞뒤로 오가는 편재하는 집단의 신체들은, 평평하고 단단한 바닥이라는 전제 조건을 배반한다. 그러니까 소위 일반적인 연습실에서 만들 수 있는 움직임이 단단하고 평평한 무대라는 조건을 그대로 연장하는 것이 되듯, 곧 사후적 차원에서 무대를 미리 결정짓고 있었던 것은 이른바 움직임의 ‘다른’ 출발의 조건에 대한 상상력을 언제나 제약하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던 것 아닐까.

     

    이는 〈플래닛〉에서 “재해”(나와)의 조건을 가정하는 데서 온다. 곧 안무는 인간의 삶의 조건을, 그리고 움직임의 제약과 변용의 순간을 가져올 그런 조건을 고안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는 시노그라피 이후의 무용이며, 시노그라피와 합성되는 안무의 과정이다. 유연하고 질긴 생명력의 표상으로서 갈대를 무대에, 그리고 신체에 적용한다. 더 정확히 신체는 그것을 체현한다. 갈대는 그 신체로써/신체로서 환유된다. 갈대는 지상과 지하의 중간 영역에 자리한다. 지하에 뿌리―발―를 딛고, 땅 위로 솟구쳐 있다.

     

    무용수들은 이 감자 전분의 비뉴턴 액체에 휘감긴 채 그것을 휘저으면서 동시에 제약당하면서 그것에서 연장된 전신의 움직임을 펼쳐낸다. 두 다리를 구멍의 바닥과 서로 간에 각각 붙인 채 유동하는 지지 축으로 삼아 허리는 급격하게 꺾이고 그 지점에서 반환되며 웨이브로 올라오는 앞뒤의 움직임, 곧 크게는 무릎과 발목의 가동 범위 내에서 연장되는, 여타 각종 관절부의 굴신 역량을 최대치로 활용하는 이 움직임은, 수영의 동작과 조응하는데, 그것은 일부 신체가 빠져 있는 물질의 점성+유체의 매체적 조건이 신체 전반으로까지 확장된 형상이다. 곧 신체는 그 물질에 대한 은유로서 외화된다.

     

    방랑의 반개념으로서 조각적 신체

     

    ‘방랑자’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플라네테스(planetes)’에서 온 행성(planet, 플래닛)에서 온 작품명은 그 어원을 병기하여 단어의 의미를 되새긴다. 갈대밭의 유영이 방랑을 즉자적으로 상기시킬 수 있는 것인지는 물론 의문인데, ‘방랑’은 생명체에게는 심리적 차원을 주입하며, 그것은 공간에 대한 제약보다는 공간 자체로의 정위 지을 수 없음의 사태를 더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류세 이후의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행성 자체의 재해라는 조건으로, 방랑은 공간의 제약 조건 자체에 사로잡혀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공간에 뿌리를 내리는 일종의 반-사물적 움직임을 비롯해 이후 집단적 움직임의 열을 맞춘 지상에서의 움직임 등은 공통적으로/적어도 일종의 유기적 통일성의 기조 아래 종속과 제한의 신체적 차원을 반영한다. 공간은 움직임을 제약하고 신체는 공간에 종속된다. 왜 방랑은 견고하고도 일정한가. 그것은 왜 아름답고도 비인간적인가. 갈대의 흐름 아래, 신체는 반환되며 일정하게 반복된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물론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화되는 인간의 조각적 반향에 있다.

     

    그런데 이 시각적 대상으로의 전환이 숭고미로 낙착될 수 있는 데 이 재해에 대한 환상적 봉쇄의 전략이 자리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그것은 실재를 비켜나며 의사-실재의 즉물적 조건 자체를 수용 가능한 것으로 떠넘기는데, 이는 퍼포머의 역량, 수고(로움으)로서 재코드화된다. 여기서 인간의 의지와 의식을 소거하거나 비울 수 있는 행성의 조건 자체는, 인간의 연약함이나 취약성, 방랑이라기보다 방황 등을 거세한다. 이는 조각의 결정성이 어떻게 생명의 분화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미적으로 타진한다, 생명의 움직임이 조각으로 결정됨에 대한 비극의 정신을 투여하는 대신에.

     

    힘을 주면 딱딱해지고, 힘을 덜어내면 유연해지는 비뉴턴 액체는 실제로는 “저항”을 길들인다. 마지막 역시 하얀 슬라임-비가 떨어질 때 신체는 결정형의 사물로서 그것을 수용한다. 약간의 간헐적 움직임들은 반환에 기초한다. 그 액체가 응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액체의 의사-응고되어 감에 기꺼이 동화되는, 신체적 결정에 대한 (비의식적) 결정(決定)이 있다.

    그렇다면 현대적 의미에서의 방랑의 틈새는 가로막힌 것일까. 공간에서 연장된 신체는 사물적 조각의 비의식으로 닫혀야 하는가. 극단적인 정(적인 것)의 사태는 뉴에이즈적 차원의 요가와 명상에 조응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반-사건의 층위, 곧 개체의 차이와 집단적 차원으로 확산되는 정동의 차원을 봉쇄하고 있지는 않은가.

     

    장소성: 기둥, 땅, 사회, 그리고 우주

     


    공간의 절대적 조건이 신체를 구조화하는 안무적 작동에서, 공간과 신체의 틈을 드러내는 건 지양된다. 그렇다면 신체의 자율성이 제약당하는 것이 미적 층위가 아니라 재해의 한 단면임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는 어디서 생겨날 수 있을까. 그러니까 〈플래닛[방랑자]〉은 비판의 조건이 무력화된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는데,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현재적 재해 상태를 고착화시키고 물화시키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더욱 나아간 미래의 시점에서 우리의 저항과 세계 내의 틈새는 불가능한 차원에 이르는 것이다.

     

    세계의 탄생 시점으로 돌이켜 보면, ‘어둠’ 위에 금가루 같은 것이 수직 기둥의 이미지로 내리꽂힌다. 그것은 빛을 반사하는 유동하는 입자―실제 반짝이는 모래―로, 그 빛의 반향이 흔들림으로써 일종의 홀로그램 같은 이미지를 선사한다. 그리고 점점 밝아지면서 바닥도 드러나고, 덩어리 신체의 형상도 드러난다. 그 전까지는 꾸물거리고 기어가는 어떤 움직임만이 있었다. 그리고 바닥과 신체의 경계까지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제 바닥은 덩어리, 딱지, 불순물과 같은 무엇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신체적이다.

     

    신체는 어둠에 흡착되어 있었으며, 그 뒤에는 더 커다란 어떤 멈춰진 덩어리가 있는데, 전자는 후자에 흡수된다. 튕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의 면모가 드러나는데, 이는 덩어리, 딱지, 불순물의 표면이다. 이는 물론 하나의 신체로서 성립이다. 곧 그 직전까지 신체는 모든 걸 흡수했다는 걸, 신체로 모든 것이 흡착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구멍 안에서의 몸부림, 갈대밭 자체가 되는데, 이를 벗고 나오고 나서, 이들은 군집된 형상을 만든다.

     

    상수와 하수에서 4 대 4의 구도로 마주하는 존재들은 뒷걸음질 치며 하나의 종축을 이루는 지점까지 교차되고 다시 분기된다. 이때 일상의 백색소음이 지배적인데, 이는 사회적 현실 풍경으로서 이 질서가 작동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느리게 다시 빠르게 속도를 조절하며 집체 내의 리듬을 규칙적으로 만드는 가운데, 신호음의 개입이 단속적으로 소리와 교환된다. 점점 거리가 생겨나면서 질서는 희미해진다. 그리고 TV의 지지직거리는 소음, 우주배경복사의 우주 전파 신호 일부를 포함하며, 행성에 대한 은유를 구성한다.

     

    기원적 신화

     

    어쩌면 방랑(자)의 모습은 굳어져 가는 신체의 복원에 대한 단 하나의 일념, 유연함과 강인함, 단단함과 무름의 상대적 차이를 횡단하는, 그 둘이 교차되는, 어떤 경계의 지대 안에 정확히 신체를 집어넣고 작동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그것이 갖는 타동성의 견지는 자율성의 차원보다는 비주체성의 차원에서 함께 짝을 이룬다. 여기서 존재의 의지는 그 환경 자체에 결코 침윤되거나 무기력해지지 않는데, 오히려 강박적 차원에서 자신의 신체와 연장된 지점에서의 미적 토대를 작동시킨다.

     

    물론 이는 심미적 정형, 또는 조각적 신체로서 안무적 기술이며, 현상학적 신체를 제련하며 ‘압출’하는 방식이지만, 그리고 그것은 무용수의 현존이 주는 가치와 감동으로 측정, 승화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지닌 근원의 시간 자체를 재해의 시간으로, 현재에 대한 비판의 차원으로 연결지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시간이 주는 현재와의 간격보다는 무시간성으로의 응결이며, 기원적 신화로서의 시대착오적 회귀는 아닐까. 지지직거리는 소음에 따라 존재들은 앞으로 튀어나오며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은 채 흙을 좌우로 쓸어내린다.

     

    이러한 땅을 쓸어 내는 집약적 노동의 순간이 다시 평평한 땅을 만드는 것의 의도로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일정한 안무의 형태로서 명확하게 집약되는 것도 아닌데, 그것은 다음 순간을, 다음 무대를 예비하기 위한 기초적인, 지연의 과정 자체라 하겠다. 이것은 일종의 고체화 과정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이들이 슬라임-비를 맞을 때도 역시 그러한데, 처음 하나의 덩어리로서 뭉쳐 있는 것 역시 그러하다. 곧 이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그린다. 이미지적 토대가 된다.

     

    뒤의 구멍들에는 연기가 나고 있다. 구멍은 일종의 분화구가 된다. 다섯 개의 구멍들, 하얀 비, 무엇보다 생생한 건 소리이다. 어두워지면서 바다 소리가 들리는데, 이는 또 다른 지층의 분화를 가상적으로 설치하는 것인가, 새삼 그곳이 바다가 되어 가고 있음을 뒤늦게 인지시키는 장치일까. 이 끈적한 덩어리 빗소리 가운데 단말마같이 “하”가 튀어나오고, 여전한 빗속에서 이미지의 실조와 함께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것은 행성적 공명의 장소적 확장이다.

     

    무엇이 안무인가, 혹은 안무를 구성하는가

     

    원기둥을 이루는 금빛의 홀로그램 점박이들이 갖는 신(탁)적 에너지, 뻘과 갈대숲, 흙으로 덮인 땅, 그리고 하얀 비와 신체의 연루됨을 지나, 다시 어둠으로 향한다. 곧 침묵의 가상성은 생생한 소리의 실재성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퍼포머들은 노동을 하거나 장소와, 사물과 자신을 겹쳐놓음으로써 액체화되거나 고체화되는 가운데 신체성 자체를 드러낸다. 시노그라피의 영역은 신체를 변용시키고, 신체 자체를 다르게 감각하게 한다. 그것은 원초적인 몸이라 지칭되는 부분이고, 그 생명체의 특이성 자체를 발화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정한 종의 상태를 표기하며, 중간계가 지니는 숙명, 신의 의지가 관철되며, 축축하거나 메마른 땅의 위협을 이중으로 받는, 취약한 그리하여 강인한 존재의 양상에 입각한다. 이는 거의 장소, 사물, 그리고 그로 인한 세계관의 설정―또는 그 반대로서 세계관에 입각해 장소와 사물이 투여된다.―으로써 좌우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안무는 그것을 자연 연장하는 일에 가깝다. 물질과 신체의 연관성을 탐색하고, 장소에 대한 적응과 활용의 차원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움직임의 여러 표현 가능성 안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움직임의 제한된 범위를 어떻게 수용하게 할 것이냐, 적합하고 합목적적인 차원으로 드러나게 할 것이냐에 있다.

     

    그것은 곧 배치의 차원에서 가늠되는 부분이다. 절대적인 환경의 필요성, 그리고 그것이 낳는 지난하고 힘겨운 적응에의 과제는, 우리의 새로운 행성적 차원에 대한 사고를 향한다. 그리고 그것은 움직임과 행위 양상의 전도와 변용을 의미할 것이며, 또는 행위 자체가 움직임의 차이로서 용인될 것이며, 따라서 춤은 합목적적으로 움직임의 과제를 새로운 것으로 양식화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이 안에서 감지되는 가능성과 동시에 위험성은 이러한 타동적 안무의 차원이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 이전에 움직임의 다양한 표현 가능성을 함입하는 것 대신에 선택된 또 다른 수동성의 차원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곧 세계가 어떤 세계 이후의 차원으로 새롭게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춤의 종말을 대체하여 그 자리를 재기입하기 위해 출현하는 것 아니겠느냐라는 것이다. 이때 각 퍼포머들의 춤의 자율성이 오히려 제약되고 제한된다는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세계가, 신체가 곧 이미지로 잠겨 간다. 〈플래닛〉의 마지막 장면이 기입하는 방향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인데, 곧 이 세계에 대한 이물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표피적인 신체성에 대한 즉물적 감각 자체로 접촉한다.

     

    곧 특이한 신체적인 것의 재발명은 이세계에 대한 설정, 그 다른 세계를 위한 스펙터클한 압력의 강도로 바뀌어야만 어쩌면 합목적성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그 은폐의 진정함이 있을 것이다[각주:1]. 결국, 신체가 이세계를 드러내지만, 거꾸로 이세계가 신체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우리는 혼동하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신체가 갖는 역설적인 단 하나의 힘이다―〈플래닛〉이 보여주는 신체적인 것의 진저함은 바로 이런 것이다(대상이지만 대상일 수 없다.). 곧 여기서 그 세계 자체는 형용 모순의 사태 자체로 남으며, 결코 사유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곧 기원 자체를 절대화하는 방식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6-06-24 ~ 2026-06-26 수, 목, 금 19:30

    GS아트센터

     

    콘셉트 및 안무: 다미앵 잘레 

    콘셉트 및 시노그라피: 코헤이 나와

    1. 1. 스펙터클이 최소화된 채 움직임만으로 상상적 실재의 차원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갈대밭의 표현의 사례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https://www.artscene.co.kr/21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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