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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냇물 작/연출, 〈답장 좀 해〉: 어떻게 타자의 말을 마주할 것인가
    REVIEW/Theater 2026. 8. 2. 17:36

    타자에 대한 응답

     

    조냇물 작/연출, 〈답장 좀 해〉©유승연[사진 제공=조냇물](이하 상동).

    답장 좀 해는 타자에 대한 응답의 의무를 오늘날 생활 세계 전반에 자리 잡은 휴대폰을 경유한 채 다시 쓴 것 같아 보이는데, 이는 발신이 아니라 수신의 차원에서 들려오는 것에 가깝다. 곧 타자를 향한 요청이 아니라 타자의 요청이 수용된 시점에서의 피드백 고리가 한 차례 완성되는 시점, 나의 요구가 아니라 너의 요구를 듣는 나 자신에 대한 위치성으로부터 정립되는 윤리를 다루고 있다고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면 이 문장은 너무 범박해지고 마는 것이다.

     

    곧 타자에의 윤리를 상정하는 문장 형식의 제목은 공연 중간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층 의미심장하고도 모호한 것이 되는데, 이는 미추홀구에 살고 있는 동생 미조와 어머니의 집이 재개발 상황에 놓인 가운데 천장에 새는 비로 인한 곤궁의 상황을 그들과 독립해 살고 있는 미주가 뒤늦게 대응하는 것, 그리고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계약 작가 이영이 겪는 여러 어려움에 대해 역시 그러한 것 모두와 조응한다.

     

    이는 두 현실 모두에 그가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곧 그가 타자에 대한 응답(response)으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not responsible) 것을 초래한다. 미주는 워커홀릭의 상태에 빠져 있는데, 그에게 대부분의 일은 자신이 직접 책임지고 처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그는 시차적으로, 뒤늦게 미조, 그리고 이영이라는 타자의 음성에 응답하게 된다.

     

    미주가 그 둘을 매개하면서 전면에 위치한다면, 그리하여 두 개의 축으로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우리는 미주에 대해 더 많은 앎을 수여받을 수 있을 것인가. 정작 그가 주체로서 갖는 곤궁이라는 공통됨이 그에게 어떤 윤리적 과제를 안기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또는 그 사태에 대한 당사자성의 차원이 우선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조의 내면에 대해 응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역설이 생겨난다.

     

    트라우마로서 바닥

     

    그리고 미조와 이영의 두 축의 서사는 미조의 차원에서 더 많이 조율되고 가늠되며 최종적으로 갈음되게 되는데, 이는 비가 새는 방바닥을 환유적 대상으로 감각하는, 수미쌍관의 차원에서 처음에 대한 끝의 반복과 증폭에 의한다. 아마 이 바닥에 대한 집요한 파지는 극 전반의 중심적 도상으로서 증상적인 차원으로 재출현하게 되며, 답장 좀 해가 전적으로 추구하는 하나의 사물에 대한 이념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곧 이 바닥에 대한 집착이 이 극을 극사실주의적 차원의 연출을 고집하게 되는 이유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인데, 상수에 치우친 초록색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를 고정한 채 실내 공간으로 접속되는 상수 공간을, 타자를 찾아가는미주가 중앙부에서 그 경계를 넘나들 때 그는 반드시 신발을 벗고 다시 신고 한다. 그것은 이곳이 물이 닿는 바닥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때문이다.

     

    곧 처음 비가 잔뜩 내려 커다란 볼에 물을 받아 놓은 것을 비우기 위해 들고 나갔다 다시 돌아오며, 맨발로 바닥을 하염없이 닦던 동생 미주의 행위는 결코 해소할 수 없는 차원의 직접성과 비언어적인 사태로 남는다.

    트라우마로부터 답장 좀 해는 자유롭지 않다. 마지막에 미주와 미조가 함께 폭우에 맞서 방 안의 비를 퍼 나를 때 미주는 정신을 거의 놓기에 이르고, 미조는 혼자서 강박적으로 이 물을 베란다 바깥으로 퍼 나르는데, 이는 둘 다 광적인 공통의 상태임을 보여준다.

     

    천둥의 엄청난 굉음과 비를 사운드와 조명, 이후에는 하수로부터의 포그로써 체현하는 가운데, 이 둘이 겪는 비극은 천승세의 희곡 만선의 그것에 육박한다. 자신의 거처가 이토록 불안정한 것으로 변모할 때 전적으로 실존적 차원이 가로놓인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신이 속한 세계, 소우주 전체가 흔들린다는 점에서 그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사실상 이 결말은 미조가 미주에 대해 뒤늦게 답장하면서 미조의 트라우마를 공동의 것으로 재산출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현대판 만선

     

    동시에 미조의 트라우마가 하나의 절대적 기호이며, 이 절대적 경험은 다룰 수 없는 것으로 자리 잡는다. 하나의 긍정은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과일을 갖다 주는 미조의 긍정과 널브러진 미주의 두 신체성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비인간적 사태로부터 공동의 대응이 그 둘을 우정의 공동체로 직조한 셈인데, 그것은 어찌 됐건 일상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미조는 결코 이 특정한 폭우의 강도로써 넋을 잃은 것이 아니다.

     

    모든 시도가 무력함을 지난날로부터의 경험이 반복적으로 자리 잡으며 지연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같다이를 만선에서 넋을 놓은 구포댁의 모습과 겹쳐진다고 하면 과장일까[각주:1].">https://www.artscene.co.kr/2202.[/footnote]. 이영의 넋 나감은 소진된/탈진된 신체적 증상으로부터 먼저 미조에게 감지되고, 커피숍에서 카운터를 보며 손님을 응대할 때 극대화된 불안과 초조의 증상으로 증대되며, 마지막 손님인 미주에게 미조에게 자신이 괜찮다고 전해달라고 할 때는 분명 그 행위는 적절하(게 수신자를 지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자신의 취약함을 미조에게 이어 재누설하는 행위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두 개의 사건이 강도적 차원에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상호 교차성의 범주로써 가늠할 수 있음을, 또는 나아가 이를 토대로 연대할 수 있음의 가능성을 개념적 차원에서 드러내기 위한 소소한 비약 아닐까. 전세 사기 피해로 인한 취약해진 신체는 뜻밖에도 비가 새는 상황을 맞닥뜨린 미주에게 더 증폭된 형상으로 도착한다.

     

    이후, 미조는 하수 벽면에 붙어 물을 푸는 모습으로 주체, 매개자의 자리에서 내려온다. 그는 누군가의 현실에 자신의 현실인 양 반응한다. 미조는 피해자의 당사자성을 예외적으로 벗어나 있으며, 따라서 답장 좀 해의 발신 앞에서 고민하는 주체가 된다. 하지만 이는 마지막에는 미주의 세계, 미주의 관점 안에 자리 잡는다, 사태의 심각성이 아니라 존재가 겪는 어려움을 역설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방구석으로

     

    답장 좀 해는 곧 집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세 피해를 본 이영, 비가 새는 집에 사는 미주가 을의 입장에서 겪는 불가항력적 피해라면, 다른 한편, 기업 AI 사용과 기후위기 연관성에 관한 피켓 시위기업 AI/기술 싸움/기후위기/가속페달”(미주)와 그 옆의 전기 먹는 하마 AI/등터지는 기후위기”(찬주)를 하는 미주의 경우, 거대 기업의 소수적 지위가 갖는 영향력이 지구라는 공유지로서 집에 보편 타당하게 미치는 막대한 효과, 곧 을의 축을 상정한다.

     

    어쩌면 마지막 폭풍우가 집에 직접 들이닥치는 효과는 이 기후위기의 사태가 벌어진 지구 전체에 대한 환유일 수도 있는데, 이른바 지구라는 타자가 발신하는 답장 좀 해인 것이다. 피켓을 함께 들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지키려고 자기를 못 지키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미주에게 건네는 찬주의 말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를 지키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의 충고인 한편, 하나의 행위가 부정성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서 신탁을 상기시킨다.

     

    또는 일견 사회와 싸우는 존재, 사회운동을 하는 미주와 같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사회와 싸우는 데 매몰돼서 자기를 잃어버리는 존재에 대한 자기 안위의 차원에 대한 부분으로도 볼 수 있지만사회를 지키는 행위 역시 결과적으로 자기를 지키는 행위의 다른 버전인 셈이다., 바로 뒤의 이영을 향하는 말로서, 자기를 엄정하게 옭아매는 구속적 행위가 사태를 더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치는 행위 자체임을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찬주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기자를 그만두고 다시 미주와 함께 사회운동 활동가로 복귀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지만, 미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앞선 충고를 담대하게 건네고 사라진다. 곧 그 충고를 건네기 위해 잠시 출현한다. 그리고 미주와 이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말을 심어둔다. 거대한 구멍으로서 세계, 곧 마치 물을 푸다 세계를 상실한 존재가 되는 미주의 곤궁과 같이, 사기당한 후 여러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자신을 더 절벽으로 밀어붙이는 이영의 모습 역시 자기를 못 지키게 된 어느 순간들로 당도한다.

     

    내면 없음의 외부

     

    가장 묘연한 인물은 미주의 집주인박경연(최진희 배우)인데, 그는 미조를 만나러 온 자리에서 예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재개발 계획이 예정된 상황에서 이사 동의서를 받으려 한다. 이때 물이 새서 500만 원의 수리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 그에게는 마땅찮은 일이며, 동의서들을 모아 재개발로 인한 수익이 담보될 때 그 여남은 비용 안에서 수리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임을 전한다. 이는 미조에게는 흥정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때 집주인의 의중은 충분히 읽히지만, 그가 형식적인 차원 이상으로 미조 집안의 사정에 공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또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적어도 절대적으로 그들과 같이 궁핍한 상황에 부닥쳐 있는 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곧 그가 처한 위치성이 그만큼 절절한 것인지를 공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는 충분히 인격화되지 못한다. 대신 부조리한 상황을 처리하기 힘들다는 것을 확정해 내기 위한 차원에서, 그 비인격적 상황이 처음으로 인격으로 소급되는 지점에서 그는 예외적인 모습이 되며, 곧 중요해지며, 동시에 비인격적 차원으로 물화된다. 그의 진실을 알 수도 없지만, 그를 진실한 존재로 입증할 여남은 근거도 없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미주와 미조의 비가 그친 다음 날의 일상이다.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는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없다. 트라우마가 고이고 응결되는 물리적 장소, 틈으로서 바닥이 연대하는 존재와의 토대로 갱신되는 이 풍경은, 문제의 해결 자체를 향하기보다는 문제적인 내면에 상응하는 물질적 차원의 반향으로서 연동되는 공간, 극장 자체에 대한 신체적, 증상적 언급으로서 답장 좀 해가 기입됨을 의미한다.

     

    촉각적인, 증상적인

     

    리얼리즘의 기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닥을 분별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서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것을 쓸어내리던 미주로부터, 이영의 방을 찾아 신발을 신고 벗고 하는 경계를 설정하는 미조에 이르기까지 극장을 하나의 방과 방 아닌 것으로 구별해서 은밀하고도 사적인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적, 사회적 공간으로 두고, 이 내적 공간에 침투하는 외부에 대한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답장 좀 해는 촉각의 (무의식적) 드라마이며, 물은 그 밖에서 끊임없이 구체화된다. 미조와 만나며 그리고 이영을 마주하며 두 번의 커피숍에서 사용된 커피를 담는 텀블러, 전자에서 미조의 텀블러에 남은 커피를 옮겨 주는 미주, 그리고 잔에 남은 커피까지 다 마시는 미주는 살뜰하다. 그것은 방을 닦는 집요함의 기호를 전이한다. 찬주와의 만남에서는 찬주의 허공 위 손질로 자판기가 환유되며 상수 가의 틈에서 포카리스웨트 캔 2개가 바닥으로 굴러 도착한다.

     

    실물인지라 미주는 집요하게 한 방울까지 또 다 마시는데, 이는 찬주와는 대조되며, 미주의 강렬한 생의 의지를 한 번 더 매듭짓는 행위이다. 음료는 소시민의 한 전형으로 갈음되는 등장인물들의 갈급함을 채우는, 일상을 유지하는 어떤 필요조건처럼 가로놓이고, 이는 미조와 집주인이 만날 때 집주인은 음료를 마시고 와서 괜찮다고 하는 장면에서 다시 연결된다.

     

    그러니까 집주인은 미조와 어떤 친연성을 가져가려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이, 어떤 갈급함 역시 없는 존재로서 구별되는 것 아닐까. 그가 여타 다른 특성을 그의 내재적인 차원으로 결정지을 수 없는 존재인 지점에서 말이다. 마지막에 미주가 미조에게 가져다주는 과일 역시 수분이 많은 수박인 것은 일관된 기호적 배치로 수렴한다.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방식

     

    반면, 의욕이, 수분이 다 빠진 것 같은 이영의 모습은 더는 갈망과 의욕의 기호로서 외부를 자신에게 도입하지 못한다. 도리어 자신의 아래 카트에 놓인 하얀색 봉지 안의 커피가 담긴 종이컵들, 여러 손님의 주문에 상응한 각종 음료는 그를 짓누르고 있는 과잉의 기호로 산출된다.

    그리고 이것이 전세 피해자를 증상적이고도 마치 히치콕의 영화인 양 스릴 넘치게 표현하는 방식이다예외적으로 하수에 치우친 장면으로서 곧 상수의 방에서 밀려난 상수 가에 치우친 테이블과 사선으로 비켜나면서. 그러니까 이 지점은 해소되지 않는다, 해소될 수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천 미추홀구 전세왕 2심 감형냉혹한소식은 미소하고도 오직 무심하게 지나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영은 비극적 결말을 맞기도 한 전세 피해자의 보편을 전제하면서도 어떤 특수로도 쉬이 수렴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존재가 모호해지는 탓이다. 그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이 사라지거나 다행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존재가 특정화되는 부분이라면, 모험 만화를 그리는 작가이지만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의 원화를 그리는 일을 하는 이영의 굴절된 직업의 양태 속이다. 그는 모험의 외부 대신에 구획된 틀 안에서 작업을 수행하며,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 좁은 방구석에서 허우적거리는 형국이다. 다만 방송은 그를, 그의 마지막 모습을 어렴풋하게 담아낸다. “밤새 폭우가 쳐서 침수를 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모녀의 사례가 처음에 제시되는 것과 같이 이는 무심하게 개입한다.

     

    이때의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고 언급만 되는 미주와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를 대신한다. 그리고 나아가 미주와 어머니가 겪는 현실이 극단화된 지점을 선취한다, 마지막에 뉴스를 듣고 있을 또는 그 뉴스의 직접적인 피해자로서 지시될 이영, 곧 결말이 제시되지 않는 이영이 그 뉴스로부터만 상기되는 것과 같이.

    사회적 현상과 그것을 서사로 가져오는 것 사이에서 답장 좀 해는 번민한다. 그리고 그것이 관찰되지만 주체의 관점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이영이라는 존재로 현상된다. 거기에 어떻게 답장을 할 수 있을까. 뉴스의 짧은 한 토막은 그것의 심각함과 어려움을 하나의 클리셰로서 무심하게 현상해 낸다[각주:2]">https://www.artscene.co.kr/2227.[/footnote]

     

    김민관 편집장

     

    7월 24일(금) ~ 2026년 7월 26일(일)

    신포아트홀 (인천 중구 신포로31번길 6)

     

    출연 | 김규리, 김민혜, 남재국, 백소정, 최진희 

     

    작, 연출 | 조냇물

    프로듀서 | 권근영

    무대 | 이단비 

    조명 | 유예찬

    음악, 음향 | 황예은 

    홍보 이미지 | 박강희

    기록 사진 | 유승연

     

    주최,주관 | 조냇물

    후원 | 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 시작공간일부

     

    본 공연은 '2026년 청년예술인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개최되는 사업

    1. 1. 참조=[본문으로]
    2. 1. 라디오라는 형식을 빌려 세계가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작동되고 있다는 견지를 주는 작업으로는 위차야 아르타맛(Witchaya Artamat)반 쿨트, 무앙 쿨트: 숭배에 관하여 Baan Cult, Muang Cult가 있다.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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