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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앤드씨어터, 〈세상의 종말이 (아닌)〉: 현재적 주석, 부정성의 미래에서 간격을 만들기
    REVIEW/Theater 2026. 8. 29. 21:42

    특수한 방백의 자리

     

    앤드씨어터, 〈세상의 종말이 (아닌)〉©김솔[사진 제공=앤드씨어터](이하 상동).

    〈세상의 종말이 (아닌)〉(이하 〈세상의 종말〉)은 두 명의 대화와 한 명의 서술이 ‘교차’되는데, 후자가 전자의 직접적인 친연성을 확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니까 전자와 후자는 분절되며, 이 분절의 횟수가 또한 전자 내재적 차원의 분절이 수시로 감행됨에 따라, 극은 산만하기보다 파편적 형식 자체를 하나의 이념으로 각인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전자에서 후자로라는 순서적 차원이 이행의 일방향적 방향으로 치환된다는 것이다.

     

    이때 서술은 대부분 일종의 독백으로, 물리적 차원(의 한계)에서는 방백으로 쪼개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전자에서 후자로 건너올 때, 마치 세 존재의 얽힘(이 당연히 혼동이라는 걸 소거하는 지점―대표적으로 둘의 중앙부 쪽 조명이 꺼지고 조명이 주변부로 이동할 때로, 이때 시선이 반전되어 유일한 한 명은 관객을 체현하며, 우리의 시선은 그 둘로 소급되며 제4의 벽이 깨지게 된다.―)이 그렇다.

     

    그러니까 주로 면접관과 면접원의 관계로 반복, 지속되는 주로 원형 무대의 중앙을 점유하는, 보겔 박사―강윤민지―와 그를 무대 바깥에서 마주하며 질문하는 오버도르프―박혜영―의 주변부를 도는 레나―다은―의 관계가 응결되는 지점은, 순간 그 둘을 이화시키는 레나의 발화가 출현하는 순간인데, 이는 그 둘과 물리적으로 단절되어 일어난다는 점에서 독백이지만 동시에 독백으로서 한계를 노출한다.

     

    하지만 독백은 그 둘의 자리가 비워진 곳을 향함으로써 그 둘을 지시체로 지정한다는 점에서,방백의 차원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가 제4의 벽을 깬다는 어떤 혼동의 순간은 사실상 독백―그들과 함께 있지만 그들은 부재하는 것(이며 그 깨어진 틈으로부터 단지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라는 혼동을 주는 것)―임에도 방백―‘그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차원이다.

     

    희망에 대한 부인

     

    하나의 장면 위에 다른 장면이 배가되며, 전자와 후자가 합성되는 지점은, 연루의 차원에서 원심력을 갖고 있으며, 후자를 경유한 전자로부터의 그 자리를 우리의 자리로 치환하는 가운데 전자를 장면들에 대한 관찰의 경로로서 새로이 만든다. 파편적 현실을 매듭지어야 하는, 매듭지을 수 있는 ‘역량’의 지점에서 후자는 경계 지어진다.

    이 속에서 실은 세계는 정위되지 않는다. 여기서 반복은 차이의 생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장면들이 분쇄되기 위한 것이라면, 곧 결국 어떤 행위도 더 나은 결과를 불러올 수 없음을 의미하는 헛손질이라면, 실제로 강화되는 건 텅 빈 형식이다.

     

    제목의 더 나은 표기는 물론 ‘세상의 종말(이 아닌)’이다. 곧 이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닌 ‘세상의 종말’이여야 한다. 희망은 부인이며, 역설적으로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는 어떤 희망도 없다. 이 착종된 부정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가 곧 파편적인 것들의 끝없는 나열로서 전자일까. 그렇다면 후자, 곧 거리를 두는, 또한 거리가 있는 서술은 일종의 실패함에 대한 주석, 주석의 실패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파편적 조각들로서 세계가 “멀티버스”로 향하는 가능성보다는 틈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면, 사실상 멀티버스의 개념은 명목상의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수많은 인류 개별을, 동시에 그것을 하나의 인류로 수렴시켜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수많은 가능성으로써 수많은 인류를 포괄해 낸다.―을 상정하기 위해 전용되는 일시적/사라지는 메타포에 불과하다.

     

    어쩌면 〈세상의 종말〉은 인류를 포괄해 내기 위해, 하나의 개체를 수없이 약분한다. 또는 무한한 개체를 하나의 개체인 양 혼동케 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이번 선택이 잘못되었거나 잘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그러니 그것은 어떻게 선택이 될 수 있겠는가. 발화 즉시 과거가 되어 버리는 선택인데 말이다.

     

    수많은 실패한 가능성들

     

    결국 〈세상의 종말〉은 종말의 시점에서 과거를 복기해 보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이 어떻게 다르든 간에 모두 무의미할 뿐임을 말하지 않는가. 과거가 기입되는 것이 아니라 현동화될 때, 곧 레나와 보겔의 서사가 하나의 원환을 이룰 때, 보겔의 서사가 레나의 서사로 젖어 들면서 레나의 서사로 완전히 흡착될 때, 보겔의 죽음을 레나가 수여받을 때, 마침내 〈세상의 종말이 (아닌))〉은 레나를 통해 보겔의 삶을 구체화(하는 데 실패)한다.

     

    수많은 구체적 가능성들 속에서 보겔의 삶은 특정되지 않는다. 다만 변화를 일으키고자 노력했던 하나의 주체, 이념적 차원의 가능성만을 남는다. 그러니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보겔이 아닌, 이제 세상에 남은 우리의 변화 가능성만을 의미의 처소로 둔다. 레나는 미래의 시점에서 주체로서 우리를 추앙하는 우리의 후손이다. 불가능성의 미래로부터 온 우리의 후손. 실패로 가는 현실 따위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실패로 갔던 현실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세상의 종말〉은 수많은 가능성이라는 건 허상일 뿐이며 단지 어떤 위안이나 반성을 안기는 다른 선택은 허구적 환상일 뿐임을 강변한다. 멀티버스를 “양자역학적 애착이불”로 격하하면서 역사적 주체의 자리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극은 어떤 하나의 잔여적 사실도 모두 붕괴시킨다. 모든 것은 ‘변화를 결정하는 주체의 위상’(레나), 그리고 ‘변화를 만드는 주체의 지위’(보겔)이다.

     

    그 과정에서, 이론과 정보는 인지적 차원의 단락되는 경로일 뿐인 일종의 맥거핀―가령 거의 막바지에 다시 한번 언급되는 “하이퍼 오브젝트”의 갖가지 범주적 여러 사례는 단순 정보 요약적 예시나 설명에 그친다.―이며, 보겔의 죽음은 (특정한) 비극이 아니라 (보편적) 죽음의 필연의 선취이며, 사실 사후적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 차원의 진실일 뿐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역사의 영도 바깥에서의 허구적 착상과 다름없다.

     

    우리라는 진정함

     

    그렇다면 진정 구체성을 획득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레나가 우리에 대한 비평적 주석이라고 할 때, 실은 보겔과 오버도르프의 대화를 이화시키는 것이 아닌, 우리의 현실을 이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때, 그리고 그 둘의 대화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현실도 다른 현실로 나아간다는 여지만을 단지 가정하기 위해서 펼쳐지는 것, 곧 예시되는 것이라고 할 때, 결국 레나의 자리만이 현실을 가리키게 된다.

     

    그런데 그는 그 둘을 그 바깥에서 확정 짓지 않는 서술의 자리를 선택한다. 이때 그 서술이 그 둘을 감싸는 단지 주변부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실은 우리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자리가 텅 빈 시점임을 드러내는 시점은, 그가 레나의 자리를 확정 짓지 않음에 있다. 그 변화하려는 주체의 자리를 점유할 때만 우리는 유의미해지며, 그의 추앙을 사후적으로 선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극의 변증법적 귀결, 실패할 인류를 타자로서 반성적으로 대면케 하고, 성찰적 ‘나’의 현재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해, 〈세상의 종말〉은 장면을 부정, 기각하고, 미래의 장면 대신에 미래를 이념화하고 역사로 소급시킨다. 결국 사고 실험적 차원이 지배하는 가운데 극은 ‘우리는 실패했고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선택의 역능을 우리에게 수여한다.

     

    우리는 언제나 실패할 것이기에 그것을 무릅쓰고 나아간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의미를 담지할 수 있다. 〈세상의 종말〉이 안겨주는 건 바로 그러한 단 하나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전에 비대칭적인 세계,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지각이 자리한다. 그러니까 〈세상의 종말〉은 그러한 사실들을 자각함에도 일원적인 주체의 이념에 모든 것을 환원시킨다. 그 주체로부터 불균질한 현실의 차원을 봉쇄한다.

     

    페티시즘적 부인

     

    이것이 말하는 바는 〈세상의 종말〉이 서구 세계가 나머지 세계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 겪는 혼란을 직면하지만 실은 회피한다는 분열증적 징후이다. 곧 이는 변증법적 사고를 완성한 헤겔이 그가 노예의 권리를 주창하는 아이티 혁명을 노예-주인 사이의 변증법적 이념의 차원으로 승화하고/환원 짓고 그 현실을 이념의 차원에서 봉쇄하는 사실과 같지 않은가.

     

    레나의 보겔에 대한 여러 다양성에 대한 서술에서 가령 “방글라데시의 열악한 공장”이 생산하는 보겔의 다양한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을 자신이 수용할 때 보겔의 선택은 불가피하다. 이것을 반성적 차원으로 도입하는 건 이 착종된 세계의 진실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다는, ‘페티시즘적 부인’의 차원보다 ‘더’한 차원에서 어쩔 수 없지 않느냐라는 것 아닐까. 그것은 구조의 문제일 뿐 인류를 한 개인의 책임으로 수렴시킬 수는 없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로써 돌아오는 건 다시 결정적으로 페티시즘적 부인이다. 그러니 나는 자본주의적 (극단화된) 소비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 구조적 차원의 문제라는 건 개인의 회피와 부인을 위한 유용한 근거가 된다. 여기서 수많은 레나의 “추도사에서 빠진” 보겔의 여러 면모는 “없습니다.”로 부정하면서 또한 구체성들로 지시된다. 그리고 이 다양성의 차원은 일종의 맥거핀이다.

     

    〈세상의 종말〉이 근대의 시작으로 지시되는 1492년으로 소급해 가는 시점, 곧 콜럼버스의 항해로, 원주민을 발견하고 학살하고 식민주의가 가동된 이 세계를 반성적 차원의 정보로 가져올 때, 실은 극은 진정한 것을 노출하고 동시에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 이때 흑인 레나와 백인 보겔의 인종적 부정성의 위계는 현실적인 것에서 역사적인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과 연대할 수 있는 근거를 얻는다.

     

    지배와 자율의 대비

     

    그것은 교차성의 논리에 의거해, 백인으로부터보다는 흑인으로부터 조금 더 유리해 보인다. 반면, 〈세상의 종말〉은 현실적으로 이것을 살려낼 수는 없다―그래서 차라리 보겔이 마주한 관계를 하나라도 더 위계적 차원에서 교환될 수 있는 남자로 달리 설정했더라면, 이는 실제 나이에 해당할 (여자) 배우보다 더 뚜렷한 차이를 가져올 수 있지 않았을까. 오버도르프의 악은 구태의연한 특질로 점철된다.

     

    그는 입체적이지 않고 한결같이 구태의연하다. 오직 보겔의 차원에서만 그 위력이 시차적으로 구성된다. 보겔과 오버도르프가 두 다른 세계에서 자전한다는 사실, 곧 돌출된 무대의 중앙부나 그 의자, 그리고 그 바깥 네 면의 한 의자 그 두 선택지 사이에서 하나와 다른 하나가 매번 분기된다는 점에서, 이 둘이 하나의 꼭지점을 공유하는 것은 하나의 경우의 수, 곧 우연적인 어떤 사실로 남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떤 의미로 특징지어진다고 딱히 보이지도 않는다. 이 미끄러짐은 지배적인 오버도르프로로부터 보겔의 자율성을 확보한다. 이 분열증적 무대 구성은 어떤 메커니즘에 이르는 대신 무한한 자의성을 선택하는데, 그것은 이들의 대화가 어차피 현실의 한 부분으로 정착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이다. 이들의 또 다른 시간의 가능성은 자의성의 이념 아래 튕겨나감으로서 형식화된다.

     

    그들은 장소적으로 무한하게 분배된다 또는 교체된다. 만약 이 둘을 같은 위치에 고정시킨 채 조명의 전환은 남겨둔 채 지속했다면, 물리적 지연 없이 파편적인 대사가 저장되었다면, 덜 입체적인, 안타고니스트적인, 조연적인 오버도르프의 위상이 덜 부각되지 않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후반 둘의 의견이 대치되는 순간의 아마도 가장 극적인 대립의 순간은, 적어도 이후보다는 특권을 가진 세대로서 보겔이 자리한다는 것과 같다.

     

    파편적 분출

     

    어떤 오버도르프는 연구에 대한 매진을 위해 안나에게 아이를 갖지 말 것을 권유하며, 또 어떤 다른 오버도르프는 “미래의 유전적 지분”으로써 연구에 관한 “강한 동기부여”를 활용할 것을 안나에게 권유한다. 여성 혐오든 개인으로 소급되는 개발주의 도식이든 그것으로부터 간극을 두고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는 건 안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점에서, 오버도르프의 부정성은 주체에 미치는 효과 차원에서만 작용하며 곧 긍정성으로 전화된다.

     

    둘은 처음의 갈라진 입장을 유예하다 마침내 하나의 대화를 완성해 가지만, 그 잠깐의 순간을 제하면, 오버도르프는 곧 보겔이 자신의 입장을 취하기 위한 효과에 불과하다. 이는 둘의 대화가 무한함의 여지를 구성하기 위한 기능적 차원이라고 해도, 이 둘의 물리적 분기로써 더 앞선 반절의 시간은 조금 더 날아간다. 대화의 장소를 확정 지을 수 없는 〈세상의 종말〉에서 가장 적합한 혹은 정합적인 상연의 구조는 과연 무엇일까.

     

    지금처럼 둘‘에’의 시간과 또 다른 한 명의 경계부의 시간이 합성되는 세계에서, 둘‘의’ 시간으로 그리고 여기에 또 한 명의 이행적, 이동식의 시간 역시 함께 고착시켜 버린다면, 그러니까 이 셋을 포함해 모든 걸 일종의 낭독극 자체로 돌려버린다면, 그리하여 더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루한 이 산만함으로 안착되어 버린다면, 그럼으로써 세 개의 다른 속도상의 행성을, 마치 평행우주의 차원에서 변화하는 세 개의 삼각형을 만들지 않는다면, 이 파편적 합성의 차원이 지닌 환상성을 억제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실 『세상의 종말』은 낭독극이어야만 하는 그런 희곡 아닐까. 한편으로 이 무대는 파편적 현실이 과거의 잔상, 그것도 불확실한 잔여로 남기 위한 가장 적확한 연출 방식일 수 있다. 방금까지의 현실이 과거였음을 알려주는 무대의 효과를 도입하기. 그런데 그 효과는 그 둘 사이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곧 그 둘의 대화가 공간적 약분을 이룰 때 보겔의 심리가 극대화된다. 외부의 효과가 두 사람 사이를 관통하며 그 둘이 미끄러지는 가운데 말이다.

     

    죽음이 아닌 부재

     

    한편으로 또 다른 여성, 릴리가 하나의 배우로 합성됨으로써 안나는 고정된 지위를 강화한다―이 둘은 피드백 루프를 이룬다. 이때 릴리는 오버도르프 교수의 안부를 묻는데, 이로써 그 둘은 구분이 된다기보다 주변부의 인물들로 환원된다. 오버도르프에 비해 릴리는 드물게 출현하는데, 딱히 두 인물이 주체의 기작을 갖는 인물로 작가가 분류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지점에서 두 인물을 하나로 합성할 때, 그에 대한 식별의 장치를 가져가지 않는 건 우려할 수 있는 부분이겠다.

     

    조금 더 아쉬운 건, 오버도르프의 부재는 나아가 그에 대한 애도는 서사의 중요한 축이 될 수도 있는데, 이는 바로 안나 자신의 죽음이 레나에게 이어지며, 그것을 선취하는 자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안나가 아닌 레나가 이어받아야 하므로, ‘오버도르프(였던 릴리)’―희곡과 달리 인물의 이름은 대화가 아닌 경우에 언급되지 않는다, 또는 될 수 없다.―가 ‘자신’의 죽음을 물으면서 그 죽음 자체를 소거하는 경우로부터, 동시에 안나의 죽음이 역할로서 배우에게서 분리되는 것이다.

     

    이는 안나의 면접을 받는, 그리고 취조를 받는 입장 자체의 연약함의 공통됨만을 ‘더’ 강화한다. 그런데 이 심문은 진정 주체의 곤궁을 만드는 차원에서 먼저 작동되고 있는 부분일까. 죽음으로 급격한 도약을 이루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허공의 기념비를 이룬다. 그의 삶은 철저히 비어져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드디어 ‘주변부’에 있던 서술상의 존재를 현재로 투여한다.

     

    이 미묘한 지점을 극적으로 처리하려는 욕망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말이다―이때 또한 죽음이 증상적으로 잘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이를 드라마적이지 않은 것으로서 푸는 것이 연출의 의도, 이 극에 대한 해석이라면 그것은 타당하다. 그러니까 예컨대 〈세상의 종말〉은 이 파편적인 것들이 갖는 드라마성, 그 드라마의 맥거핀적 기능성의 차원에서만 독해 가능한 작품인 것일까.

     

    과거와 미래를 잇는 또 다른 현재의 가설을 위해…

     

    거꾸로, 파편적인 것들의 자의적 병치에 대해, 마치 퍼즐을 맞춰 나가는 차원에서 심리 스릴러적 장르의 지위로 이 작업을 가져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장르적 귀속과 재미는 경계해야 할 부분인데, 구체성이 보편성이 되는 지점에서, 극의 이념이 실천,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총체로의 환원이다.

     

    “하이퍼 오브젝트”는 모든 것이 너무 거대하게 착종되어 있어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서, 극을 경유해서는 내가 그 거대한 세계에 필연적으로 속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분화한다. 이때 나는 주변부에서 중앙으로 격상되는데, 그것이 세계에 대한 사고로 옮겨갈 때 ‘나’는 세계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유일한/예외적인 지위를 획득한다. 그것이 우리가 주체로서 가져(가)야 할 어떤 유일한/하나의 선택이다.

     

    곧 희곡은 과학적, 철학적 개념을 전유해서 주체의 서사를, 배가된 주체의 지위를 만든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맞닥뜨린 후에 작가는 우리를 구성하려 한다. 실천적인 우리의 미래에 주는 찬사는, 우리의 또 다른 이성을 대입한 결과이다. 따라서 이 극은 세상의 종말이 아닌 지점이 우리의 인식에 대한 가늠좌를 어떻게 상정하느냐의 차원에서 새롭게 구성될 수 있는 것임을 설파하고자 한다.

     

    안나의 유일한 실천적 행위로서 유효한 것은 바로 레나이다. 안나가 흑인이라면, 그는 백인이고, 세상의 종말을 다음 세대에게 안겨줄 수 없다는 판단과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판단은, 레나에 이르러 응결된다. 그것만으로 물리적이고 실질적인 차원의 수행이 성사되었다, 모든 것이 입증될 수 없는 파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레나는 근 내부를 향하지만, 그들을 경유해 결국 우리에게 속삭인다.

     

    서사의 윤리

     


    곧 레나는 미래를 과거의 시점으로 소급시켜 현재로부터 예상 가능한 무한한 선택지들을 가진 자로서 우리의 위치성을 조각한다. 그것은 평행우주적 세계들의 하나이지만, 우리 각자의 시점으로 설계해 볼 수 있는, 우리에게 파지되는 것들이며, 그 가능성 자체가 결코 서사의 중핵을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미래는 공통적으로 부정성의 결과를 도출할 것이며 그럼에도 우리는 더 나은 부정성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러하다. 모든 것은 이 현재가 가진 서사들의 파지 가능성과 또 다른 경로로의 희미한 틈새 가능성을 위한 복잡한 그러나 맥거핀적인 분투인 것이다―“그녀가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그녀들, 어쩌면 다른 어딘가에서는 실제로 존재했을 그녀들”(레나).

     

    〈세상의 종말〉의 분열증적 합성, 기억의 스위치가 문득 들어오고 제각각의 세계 안의 한 부분을 접속하게 되는, 처음에는 비디오 되감기 버튼의 신호음이 입혀졌지만, 이후 장소 변경과 분할, 조명의 차이를 통해 분별되는 무대 기술적(technic) 기술에 의해 이 다름은 계속 지시된다. 그러니까 〈세상의 종말〉은 기호학적 차이로써 분열증적 대사 변환을 시각화하고자 한다.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시점을 가정하며, 실은 현실에서 연장된 다양한 가능성들을 외삽한다는 점에서 SF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서사들, 서사라는 가능성들을 단지 흔적 혹은 씨앗으로 간직하며, 그 어떤 서사도 주체를 경유해야만 의미가 도착하며, 그 주체라는 효과를 하나의 서사로 갈음할 수 있음을 말한다는 점에서, 서사에 대한 서사이며, 일종의 서사의 기술(technic) 자체를 기술(inscription)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윤리에 대한 서사를 말하기 위한 서사의 윤리를 고안해 내고 있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2026.08.06(목) – 08.09(일) 평일 19:30 / 주말 15:00
    연희예술극장 (서울 서대문구 연희맛로 2-3, B1)
    출연 | 강윤민지 박혜영 다은
    작가 | Chris Bush
    번역 | Kim Alyssa
    연출 | 전윤환
    드라마트루그 | 박지선
    프로듀서 | 권근영
    무대 | 송지인
    조명 | 공연화
    사운드 | 최영두
    프로듀서보 | 이유정
    무대감독 | 민재원
    그래픽•사진 | 김솔
    티켓매니저 | 김현주
    음향 오퍼레이터 | 채윤
    주최/주관 | 앤드씨어터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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