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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문, 〈플란다스의 미친 개〉(정진새 작/연출): 인간적인 것 너머로부터REVIEW/Theater 2026. 8. 17. 20:27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해방

극단문, 〈플란다스의 미친 개〉(정진새 작/연출)ⓒ문현준[사진 제공=극단문](이하 상동). 〈플란다스의 미친 개〉는 영국의 소설가 위다(Ouida, 1839-1908)의 동화 『플란다스의 개』(1872)의 서사와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Napoléon, 1769-1821)의 역사를 중첩시키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에 동원된 아이와 동물의 시선을 통해 전쟁의 끔찍한 면모를 환기하기 위함이다. 동화 원안보다는 쿠로다 요시오(黒田昌郎, KURODA YOSHIO, 1936-) 감독의 1975년 일본에서 제작된 후 한국에서도 방영된 애니메이션의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보이는데,애니메이션의 O.S.T 부분 역시 초반에 등장한다.
곧 〈플란다스의 개〉의 만화적 생명력, 곧 시리즈물이 가진 일정한 구조적 틀과 형식으로부터 반복 학습을 거쳐 등장인물들이 주는 친연함과 끊임없이 연장되며 각인되는 특징은 비극적 결말을 뒤로하고, 음악에 대한 명확한 인지와 같이, 시대를 넘어 다른 시대로 전이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은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에서 네로와 파트라슈를 비극의 결말로부터 ‘구원’하며, 그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그것은 원작의 비극의 질서에 힘입으며, 역동적인 반경에서의 더 큰 역경을 경유해 해방으로 나아간다.
이는 비극적 결말을 어린아이들을 고려해 변주하는 여러 버전의 시도를 마치 영원회귀의 차원에서 증대시켜 네로와 파트라슈를 시대극의 주인공으로 치환하고, 거기서 또 다른 시련을 경험한 후에 자신들의 숙명에 대한 극복의 순간을 비로소 맞는다. 그러니까 시대극은 액자식 구성의 삽입물이고. 결말을 다르게 쓰기 위한 게임적 시뮬레이션이자 가상적 푸닥거리이다. 〈플란다스의 미친 개〉는 비극의 초점을 둘의 공동체적 죽음이 아닌 결별, 곧 네로가 파트라슈의 목줄을 풀어줌으로써 마침내 파트라슈가 인간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을 맞는 순간을 그린다.
파트라슈가 성당을 돌다 마침내 그 안에서 영원히 갇히는 결말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새로운 결말은, 한편으로 파트라슈의 해방이지만, 네로로서는 고독하고도 쓸쓸한 결말인데, 이는 파트라슈의 인격을 제고하면서 반성적 차원을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곧 개가 네로의 우유 배달을 돕기 위해 수레를 끄는 것, 그로부터 둘의 동등하지 않은 관계, 인간에 대한 희생적 존재의 지위로서 동물에 대한 가정이 원작에 전제됨을 비판적으로 사유함으로써 결말이 아니라 사실상 원작 자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극단적인 이름들

그런데 왜 나폴레옹일까.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원정(1812)에서 마주한 모스크바의 풍경, 곧 미리 방화를 저지르고 떠난 폐허의 땅에서의 극렬한 추위를 겪는 비참한 모습은, 추위에 떨다 눈을 감는 네로와 파트라슈의 마지막 장면과 일정 정도 오버랩된다. 후자를 ‘대신’하는 이 장면 이후, 나폴레옹은 전쟁에 패한 뒤 유배 당하고 다시 탈출해 복권을 누리지만 이후 전쟁에서도 패하고 다시 유배 생활 끝에 죽는데, 이는 내레이션으로 갈음된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고독한’ 경험은 순전히 이때 한 번에 그친다.
〈플란다스의 미친 개〉는 전쟁을 수호한, 전쟁 관련한 상징적 인물로서 나폴레옹을 경유해, 모순되고 역설적인 인간의 의식과 행동 양식을 드러내는데, “자유”, “평등”, “박애” 곧 프랑스혁명(1789-1799)의 정신을 전쟁의 이념적 차원으로 옮기는 나폴레옹에게 네로가 “왜”를 연이어 던질 때, 나폴레옹이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 건 그의 독단적인 성격의 일환이라기보다 그것이 역사에 대한 현재의 물음으로서 이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네로를 빌려, 일종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주석의 차원을 가상으로 삽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플란다스의 미친 개〉는 전쟁으로 인해 죽어간 아이와 동물에 대해 거듭 애도를 표하는데, 이때 그 두 존재의 자리에 네로와 파트라슈가 예시로서 ‘대입’된다. 네로는 나폴레옹의 초상을 그리는 예술 병사로, 파트라슈는 동물을 그리고 종래 사람을 구하는 역할로써 전쟁에 참여하며 서로 떨어지게 된다. 이때 네로보다는 파트라슈의 독립적인 존재가 담보되면서, 전쟁에 맞지 않는, 전쟁에서 무용한 역할로서 지시되는 파트라슈의 차원을 인간의 인위적 관념이 덧대어진 것으로서 전복한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부터 프랑스혁명의 정신으로 소급해 가는데, 그러니까 파트라슈를 제련하려는 온갖 시도가 실패할 때 순전하게 평온한 파트라슈의 모습으로부터 인간의 사고를 거둬야 하는 식으로 거꾸로 인간이 제련되며, 종래 자기 지시적으로 작품을 부정하고 비판하기에 이른다. 곧 “플란다스의 미친 개”라는 수식어는 잘못된 것이며, 미친 건 정작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관점을 전도하기 위해 일부러 제목을 잘못 지은 것임이 드러나는데, 이른바 전쟁의 장면은 미친 인간의 행위를 아이와 개의 시점을 경유해 재산출하는 작업인 것이다.
원작의 다시 쓰기 혹은 패러디

〈플란다스의 미친 개〉는 〈플란다스의 개〉에 대한 다시 쓰기의 작업이며, ‘미친’ 상황을 가정하고, 그것을 괄호 치는 일종의 〈플란다스의 (미친) 개〉라 할 수 있다. 파트라슈는 네로의 여러 질문에서 수레를 끌었던 것이 그에게 수고로움이었고 긍정하지 않았음을 연이어 대답하며 그 사실을 확정짓는데, 이때 그것은 개의 울음 소리로 일관된다. 파트라슈(배지우)는 시종일관 특유의 개 울음을 핍진하게 표현하는데, 그것은 애니메이션의 음가와도 닮아 있다. 실상 이 가면을 벗기는 것 역시, 적국에서 동원된 개와의 만남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인간의 말이 된다.
이는 물론 그 둘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관점에서는 그들의 언어가 언어로서 의미화되지 않는 상황을 반추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를 필연적으로 구사하는 장면이다. 파트라슈와 나폴레옹을 한 명의 배우가 경유하는데, 따라서 그 둘은 모두 한 명의 배우(박수빈)가 연기하는 네로와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는 비인간의 관점과 역사에 고착된 인간의 잘못된 관점을 하나의 극단적인 스펙트럼으로 두고 아이-인간의 시점에서 그 둘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는 그 둘의 강력한 캐릭터성 앞에 사라지는 매개자의 자리에 인간을 두는 것과 같다.
적군 개들의 목에 채운 시한폭탄들을 뒤늦게 눈치 챈 네로가 그것을 풀어 하나로 모은 후에, 파트라슈는 그것을 한데 물고 달리기 시작하고, 여전히 일관되게 느린 파트라슈 대신에 허스키가 대신 달리기 시작하는데, 이는 영화 〈원티드〉(2008)과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를 합성해 놓은 느낌이다.
폭탄을 목에 채운 쥐들을 무기로 사용하는 전자와 도시 전체를 점멸시킬 수 있는 시한폭탄을 날개에 매고 바다로 향하는 배트맨을 그린 후자를 각각 상기시키는 이 설정은 역사적 사실을 극단적으로 벗어나는데, 이때 허스키를 연기한 박수빈 배우는 막 너머로 퇴장하기에 이른다.
이때 중요한 건 설정의 허구성보다는 전쟁에서 끔찍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인간과 어떤 대의를 위한 희생의 인간학적 역할의 스펙트럼을 파트라슈의 일관됨과 비교하는 데 있다. 파트라슈가 숭고한 자의 몫을 차지하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숭고함이라는 가치 자체를 인간이 점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파트라슈는 ‘영웅’이 되지 못한다. 파트라슈와 네로는 적과 내통하여 큰 손실을 입힌 죄로 군사 재판에 회부된다.
전쟁을 비켜 서기

나폴레옹은 이 둘을 감면하고 사면케 하고, 대신 불명예 전역을 하게 된다. 네로는 항거하며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은 나폴레옹이라고 비판하는데, 어린이와 동물까지 전쟁에 동원한 그 결과로서 부득이하게 여기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죽음을 유예하고 새로운 삶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났을 때, 이제 마치 파트라슈가 네로를 끌고 가는 형상이 되는데, 이는 “주인”과 “반려동물”의 위치가 반전되었음으로 주지된다. 그리고 마지막 성당에 도착해 맨처음 순간으로 소급된다.
역사의 재귀적인 연결은 순전히 인식론적 차원에 입각한 것이다. “슬픔”과 “두려움”이 뒤섞인 네로의 심정은 자신의 동반 존재가 사라질 것임을, 그리고 영원히 혼자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거기에는 “묘한 기쁨”도 자리한다. 죽음보다는 이별에 따른 죽음충동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플라스틱 우유 상자들로 쌓은 무대 뒤쪽 경계는, 제일 윗단을 그 나머지의 초록색 상자와 구분하여 하얀 상자로 두었는데, 허스키가 하수 뒤쪽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 붉은 조명이 아래를 비추며 붉은 선분의 경계가 그어지는 것으로써 대규모의 폭발이 처리된다.
이때 죽음은 사라진 허스키보다는 전쟁으로 인해 죽은 어린이와 동물에 대한 죽음을 대신 현상한다. 허망하고도 화려한 이 순간은 죽음을 체현하지 않으면서 전쟁이 갖는 효과와 세계에 대한 거대한 반향의 차원을 잘 현상한다. 한편, 이 우유 상자는 학창 시절 우유 급식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를 떠올리는 것과 같이.
이 우유 상자로 쌓아 올린 구조적 경계의 일부를 뚫은 뒤에 내레이터가 위치하는데, 그는 이 모든 장면을 이야기로 적당하게 봉합하는 효과를 갖는다. 우유 상자라는 막과 같이 그는 이 전쟁의 위험과 공포를 단속적이지만 적재적소에 나타나 목소리로써 안정되게 꿰매는 자이다.
〈플란다스의 미친 개〉는 극단적인 전쟁의 상황과 기아로 인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바꿈으로써 본래의 결말을 유예시켜 더 과거로 소급해 가지만, 이는 오히려 동물과 아이의 시점에서 쓰이는 불가능한 현재, 곧 미래적 상황에 가까워진다. 세계의 광기―‘미친’―를 불러와 그것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의 측면을 두 존재자로부터 반향한다.
비판적 주석은 존재의 투여와 참여에 직접 의존하며, 그 너머에서 이념은 현상되고 재고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이는 오히려 불가능성의 세계와 생명 존중의 정신에 입각한 두 존재의 극단적 대비와 간극 속에서 성취할 수 있는 효과인 셈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6.07.24(금) ~ 2026.07.26(일) 시간 금 19:30, 토 11:00/14:00, 일 14:00
광진어린이공연장
출연 박수빈 배지우
목소리 출연 전선우작/연출 정진새
미술 임은주
조명 김현
음향 이현석
안무 윤상은
분장 이지원
그래픽 손유라
조연출 강효정
무대감독 양정현
사진촬영 문현준
영상촬영 박영민
일본어 번역 이은혜
오퍼레이터 이승혜 이아라
기획 이도연
기획보조 전미진 이솔
홍보물 제작 수목(sumok)'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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