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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멘워커, 〈113〉(연출 김제민, 극작 최재경): 수학, 문학 두 장르의 횡단 혹은 번역 그리고 삶의 미미크리REVIEW/Theater 2026. 8. 2. 17:29
현의 방식

리멘워커, 〈113〉(연출 김제민, 극작 최재경)[사진 제공=리멘워커](이하 상동). 〈113〉은 수학과 문학, 서로 다른 두 영역의 연결을 추구하는데, 이는 문학의 진리와 수학의 진리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단계, 하나의 언어로 다른 언어를 설명할 수 있는 단계로써 드러난다. 두 다른 영역은 수학자 서혁과 시인 순원이라는 실제 존재 양식으로 수렴하며, 이 둘이 친구로서 나누는 대화는 그러한 과정을 표현한다. 이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마주하여 합치되는 건 번역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차원이 더해지는 것과 같은데, 둘의 관계 안에서 제3의 지점이 통로로서 생겨나는 수학의 “연결합”으로서 표상된다.
실제 극을 쓴 수학자 최재경은 어릴 적 문학가의 꿈을 꿀 때 그 우상으로 황순원을 예시로 드는데, 황순원의 문학적 모티브는 “순원”이라는 극 중 인물로 체현된다. 곧 “링반데룽”이라는 산속에서 조난 시 등산객이 방향 감각을 잃고 원을 그리며 도는 현상을 겪는 건 순원으로, 황순원의 단편 소설 「링반데룽」(1958)이 참조됨을 지시한다.
그에 따라 〈113〉은 일종의 포스트모던식 유희로도 보이는데, 이는 무대의 시작과 끝에 직접 등장해 수미쌍관의 방식으로 극의 경계를 정하는 최재경의 메타적 작법은 실제 인물의 수행성의 효과를 내는 한편, 엄밀히 극으로 들어오는 대신, 일종의 책의 서문과 에필로그와 같이 본문 외의 외부의 시간을 도입하는 것과 같다.
반면, 그는 이 공연 자체에 개입하기의 방식, 곧 공연을 소개하거나 마무리 짓는 건 아닌데, 대신 중간중간 강연의 형태를 취하는 극 중 수학자 서혁이라는 분신으로 연장된다. 시 ‘113’을 쓴 수첩을 놓고 온 걸 깨닫고 그것을 찾으러 갔다 사라진 친구에 대한 서혁의 애도 불가능성이 결국 그 시를 찾아 나서게 하고, 링반데룽의 효과로 무대 바깥을 돌고 있는 순원을 찾게 되는데, 이때 그 시를 최재경이 읽는 것으로써 극은 닫힌다.
연결합은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는 통로로서 기능하며 시간을 복기할 수 있는 권능을 제시하는 보이는데, 그것은 영원히 멈춘 시간, 선회하는 시간을 전제한다. 그런데 같은 공간을 뱅뱅 도는, 그리하여 시차를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설정은, 친구와 멀어지면서 나눈 마지막 이별의 장면으로 재소급되는 것으로 그친다. 이는 일종의 꿈의 작용, 효과와도 같아 보인다. 곧 외부로의 또 다른 통로를 만드는 것―친구를 다시 현실로 데려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이러한 행위가 둘의 관계에서 제3의 통로(를 만드는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최재경이라는 수행적 존재

여기서 친구는 실재가 아니라, 환각의 산물로 그것은 기억의 애도 작용, 개인의 닫힌 시스템 내의 효과로 갈음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는 그가 만류했던, 그리고 비판했던 논리, 다시 시를 쓰면 된다고 하던 혼자의 중얼거림을 대신하고, 친구와 마찬가지로 그 시 자체를 찾으러 가는 똑같은 어리석음, 무모함의 절차를 반복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과거라는 잔여를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으며, 그가 링반데룽의 현상에 갇히거나 친구의 영원한 세계에 내속되는 건 아니다.
다만 친구가 쓴 시 “113”을 찾는 것으로 그 목표가 옮겨가는데, 곧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시”를 찾는 것으로써 친구가 도달했던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이 시의 구원은 그 시가 목적어에서 주어로 바뀌는 순간을 향하는데, 여기서 친구는 시를 찾다가 죽었다기보다 또는 시를 움켜쥐지 못하고 죽었다기보다, 영원한 시의 순간과 함께 이미 기꺼이 죽음을 완성했다라고 보는 것이 맞다. 곧 시를 완성했을 때의 순간에 이미 그는 그것을 뱅뱅 도는 숙명의 고리를 구성했다라고 보는 것 말이다.
이는 다분히 도착적인 해석인데, 그것은 마치 이른 나이에 불멸의 유작을 남기고 간 작가를 애석해하며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덧없음을 전도시킨 결과와 같다. 작품은 영원의 시간 아래 있으며, 따라서 그 이후의 시간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순간은 오직 대리 체험, 간접적인 것으로서만 서혁에게 온다. 그리고 이는 최재경이 황순원을 어릴 적 동경했던, 그가 문학에 대해 갖고 있는 경외감과 문학가에 대한 갈망 자체를 지시한다. 하지만 그 문학가의 지위는 최재경이 직접 그 시를 읽는 것으로써 외부의 도입 차원에서만 가능한 것이 된다.
이때 최재경은 허구적 지위를 실재적으로 완성시킨다, 그가 꿈꾼 공고한 문학의 자리에 삽입됨으로써. 그러니까 〈113〉은 최재경을 체현한 극 중 수학자 서혁이 그 반대편에서 문학가로서 또 다른 경로를 걷고 있을 순원으로 건너가는, 마침내 자신의 미래를 그 문학가의 모습으로 수여받는 ‘자기 인증’의 경로를 밟는다.
거기에는 애도의 서사 내재적 지형보다는 소망의 자전적 차원을 기입하며, 그 주체가 곧 최재경이 된다. 그리고 마이크를 든 최재경의 목소리는 서사 외적으로 ‘진정성’을 획득한다―그리고 이는 연극 외부의 삽입에 대응하는 내부라는 전도된 서사의 경로를 완성한다.
링반데룽, 죽음충동의 순간
실은 순원의 재차 반복되는 그 마지막 말은 서혁의 비유에 대한 경탄인데, 그것은 어느 날은 구조였다가 다른 날은 숫자이기도 한 수학적 깨달음이 평범한 일상이 시적 모티브로 격상되는 순간에 대한 비유로서 적합하며 사실 숫자로써 제목을 짓고 있던 그의 문학적 세계를 더할 나위 없이 설명하는바, 그것이 곧 자기의 마지막 시 113에 대한 완벽한 주석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수학적 진리보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양자역학적 진실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이때 시는 고착된 사물이 아니라 어떤 순간의 효과에 가까워진다.
이를 나와 시의 연결합으로 표현해 볼 수도 있을 텐데, 영원한 시가 곧 절대성 자체가 아니라, 곧 그 시의 영원으로의 접면에 대한 주체의 우연한 효과를 가리킨다는 지점에서, 이는 그 시와 연결된 이의 내재적인, 순전히 그에게만 발생하는 닫힌 시스템 내에서의 효과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 시가 쓰이고 완성되는 순간에(‘만’) 그 시는 절대적으로 존재했으며, 따라서 그 순간을 벗어나자 그 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인 듯 사라진다.
이제 시의 절대성은 절대적인 거리로서 주어지는 듯 보인다. 곧 그 둘이 마주하는 공동의 순간은 사라진다. 따라서 순원의 과거의 시를 찾아 나섬은 그 대상 자체를 향한 죽음으로의 무모한 시도가 아니라―시간을 거리의 좁힘으로써 상쇄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그 대상과의 절대적 거리 안에서 영원히 살기 위한 것으로 전도된다―그 거리를 시간의 영원한 거리로서 은유하는/밟아 나가는 행위가 된다. 이때 링반데룽은 대상에 대한 집착이나 강박이 아니라, 또한 일차원의 닫힌 자장 안의 한계 영역이 아니라, 그 자체로 최고의 문학적 표현의 실현으로 의미화된다.
링반데룽은 예외적으로, 무대 전반이 어두워지며 네모난 테두리, 가가 드러날 때 그 영역으로 현상된다. 그 외의 시간에 무대는 가가 없는 삼태극 안의 무늬를, 곧 같은 간격을 안고 중앙으로 수렴하는 세 개의 원의 일부를 투명 플라스틱 상자들의 나열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이는 제각기 무언가를 담고 있는 개별의 모나드들로서, 그 위에 다시 그 안의 것을 끄집어 내어 세울 수 있는, 외부로의 기호화 작용을 수행하는 지지대가 되는데, 이는 서혁의 또 다른 친구, 정태가 도넛을 빚는 특수한 방법, 안을 밖으로 감싸 두르는 전도의 비가시화되는 반죽 방식을 수없이 가시화하는 것과 같다.
시간을 뒤집는 기술
그리고 이 시간은 연남이라는 그림자 같은 주체에 의해 수행됨으로써 무대는 이중의 시간으로 쓰인다. 보이지 않는 작용, 힘은 인물의 무의식, 잔여 같은 부분을 상정하는데, 이는 후반부 그가 마이크를 통해 내레이션을 실시간 더할 때 인물의 내면을 반향하는 장소로 거듭날 때 분명해진다. 연남은 표기되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시간의 비가시화된 작용이 존재함에 대한 물리적 증명을 이룬다. 안에서 바깥으로의 뒤집기는 그 자체로 표현이자 차원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 투명 상자가 채운 무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갈 때 방향이 바뀌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갈 때 시간을 앞지르게 되는 “구름 카페”로 전제된다. 이 네 개의 문을 가진 독특한 카페는 처음 엄청난 영감을 주어서 수학자에게는 난제를 풀 수 있는, 시인에게는 궁극의 시를 쓸 수 있게 하지만, 이곳을 벗어날 때 그 생각들은 말끔히 씻기는 환상 공간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결국 서혁은 수학 과제가 아니라 시의 과제를 떠맡는데, 순원의 시간을 앞질러, 순원이 찾으러 간 시를 대신 현상하는 것이다.
서혁에 있어 순원은 정태에 있어 안나와 같다. 안나 역시 정태에게 제빵사의 꿈을 안겨 주고 다시 등장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데, 그것은 마찬가지로 홀연하다. 그러니까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거꾸로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 그를 다시 현상할 수 있게 된다. 정태에게 어느 날 나타난 청년이 그런 존재이다. 정태는 안나에게 벽화를 의뢰받은 후, 추상화와 정물화를 합성하는 그림을 완성하지만, 이 그림은 이제 정태가 안나를 기억하는 추억의 근거로 전도된다.
곧 현재 안나의 카페를 정태 혼자 운영하고 있으며, 벽화를 카페의 정체성으로 홍보하려던 차에, 이 벽화를 찍으러 온 청년은, 이 벽화를 찍고 돌아간 후 다시 돌아왔을 때, 안나와 정태가 함께 있는 시공을 만나고, 안나와 정태가 벽화와 합성된 사진을, 곧 안나의 시점에서 정태와 그 벽화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을 찍고 그것을 보여주게 된다. 이는 서혁이 순원을 앞질러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된 것에 상응한다. 동시에 구름 카페에 벽화 카페가 대응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정태는 서혁과 달리, 청년이라는 알 수 없는 제3의 존재의 매개에 의해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사라지는 매개자, 혹은 사라져야 하는 매개자
그것은 벽화를 찍었기 때문일까. 아님 정태가 그에게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도넛을 그에게 선사했기 때문일까. 곧 더 잘 보이는 “관계”를 구성해 내는 “고차원”의 관점을 청년이 수여받게 된 건 (특별한) 청년의 주체적 행위에 의한 것일까. 아님 (평범한) 청년에게 마법적 효과가 전이되었기 때문일까. 사실 청년의 등장 역시 안나의 사라짐만큼이나 홀연한데, 그는 독립적인 서사적 주체로 결정되기보다는 정태의 무의식을 반영하기 위한 이접된 존재로 보인다.
곧 청년의 어린 시절, 가면을 쓴 여자에 대한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제3의 관계가 만들어짐은, 미스터리로 남은 정태의 무의식으로 거슬러 가는 절차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청년이 별도의 대상으로 매개하는 게 아니라, 정태가 청년으로서 매개되고 있던 것 아닐까. 청년은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며, 정태에게 가면 쓴 안나, 곧 베일에 싸인 안나의 삶을, 안나의 무의식이 아니라, 안나라는 정태의 무의식 안의 존재가 거처하는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닐까. 곧 여기서 안나의 세계로 가는 경로는 주어지지 않는다.
무대는 미로가 되고, 여자는 기억에 갇혀 영원히 그곳을 헤매는 존재가 되는데, 이는 여자의 독립된 세계의 차원을 제시하지 못하며, 청년의 기억을 경유하지만 실은 정태의 무의식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청년에게 안나와 정태가 합성되어 나타난 것처럼, 그는 고차원의 관점을 소유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주체적인 경로로 주어지는 건 아니다. 반면, 그의 목소리로 과거를 돌이킬 때 그것은 그의 현실 세계와의 기울어진 균형을 맞춘다.
따라서 청년이라는 존재는, 또 그의 기억의 산물 역시 작품 전체에서는 불순물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이는 정태의 삶과 간극을 구성하면서, 정태의 삶 자체를 간극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청년이라는 존재는 마치 정태에게 있어 또 다른 외부이거나 더 깊숙한 내부로서, 그 사이에서 제3의 관계항을 독립적으로 만드려는 어떤 시도이자 제2의 관계항을 보족하려는 어떤 시도 사이에서 미결정된 인물로 남는다. 그리고 그를 정태의 내재적 연장으로 쏟지 못한다면, 무엇보다 안나는 사라진 순간 이후 완전히 소거된 존재가 되어버린다.
구조로서 종합

“113”은 “자기 자신과 1로만 나누어지는” 소수인데, 또한 131, 311로 배열을 바꾸어도 여전히 소수라는 점에서 이상적인 숫자로 여겨진다. 또한 연결합은 1과 1이 만나 3을 만드는 신비한 효과이다. 1은 하나의 차원 안에 속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연결합을 “변증법”으로도 비유했듯 3을 얻는 건 서혁이고, 정태(이며, 청년)이다. 그것은 타자를 마주하여 각성하고 깨달음을 얻는 주체로의 한 효과이며, 시간을 순간 되돌리는 것과 같이 또 다른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다시 살펴보는 것에 같다.
이는 서혁의 경우에, 애도가 아니라 깨달음 자체를 향한 과정으로 보이는데, 친구의 죽음에 대한 애도보다 그 친구가 떠안은 지고의 시를 찾기 위해 친구와 같은 길을 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수학적으로 최고의 난제를 풀듯 문학적으로 최고의 작품을 써내려가듯 두 개의 성취의 그 순간 자체가 주는 효과에 도달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순원에 의해 먼저/모범적으로 성취되고, 서혁은 단지 그 성취의 과정을 순원의 경로로서 표현하기 위해, 곧 그것을 목격하기 위해서 간다는 점에서, 그것은 주체적이기보다 매개적이고 또한 관객의 입장에 있다.
그리고 또한 그 시가 직접 제시된다는 점에서, 또한 그 시가 궁극의 시의 견지 안에서, 자족적인 시의 차원에서, 매체와 문학성 모두를 시험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와 동시에 시의 내용이 극의 전체 내용과 조응되며, 극 전체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줘야 한다는 점에서, 곧 시의 형식과 내용이 진자운동을 하며, 극을 결정짓고, 시로서 외부의 평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결론이 되는 건 여러모로 위험하거나 불리하다.
이 지점에서, 최재경이라는 원환을, 퍼포먼스를, 실제 인물로서 체현을 시도한 건 정합적 선택이다. 이는 수학자에서 문학가로서의 등단이라는 위상차를 극 내재적으로 갈음한다. 곧 극작은 궁극의 수학적 차원의 시, 곧 문학을 수학자에게 쥐여주는 결론을 향하는데, 실제의 수학자가 그것을 대신 체현함으로써 그 문학가를 마주하는 형상이 된다. 이때 수학과 문학의 연결합이 존재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 아닐까.
한편으로 서혁은 연결합에 대한 강연을 한다는 점에서, 극을 매개하면서 그 극을 수학적 진리의 양식으로 매개하는 최재경 자신의 페르소나적 위치가 되는 것이다. 〈131〉은 이 수학적 진리와 궁극의 문학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리는 지점을 구성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문학을 수학으로 매개하기에 가깝다.
또는 이를 통해 수학이 문학으로가 아닌, 문학이 수학에 가까워진다. 시는 구조적 차원의 효과, 정합성을 기초로 결정된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그 반대의 지점에서, 곧 순원, 안나의 차원에서 또 다른 서사의 경로를 구성할 수 있었을까라는 것이다. 곧 그들이 반대의 지점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느냐일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2026년 7월 3일 – 7월 12일 평일 7시30분, 토·일 3시(월 쉼)
대학로 극장 쿼드
제작: 리멘워커
후원: 고등과학원, 서울문화재단, 서울예술대학교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
창작진
출연: 최재경, 박병호, 신현우, 이창재, 최찬, 최현영, 김재현
연출 김제민
극작 최재경
드라마투르그 함성호
조연출 한승훈
PM 장은준
음악감독 민경현
음향디자인 원형빈
조명디자인 성미림
무대제작 이강원
가면제작 손 희범
레이저 슬릿스코프
제작PD 권오범
기획PD 김용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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