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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온, 〈개기일식 기다리기〉: 부재를 응시하는 법REVIEW/Theater 2026. 7. 31. 20:44
부재의 형식

음이온, 〈개기일식 기다리기〉©김휘람[사진 제공=음이온](이하 상동). 〈개기일식 기다리기〉(이하 〈개기일식〉)는 어느 미래의 시점을 끌고 오는데, 이는 375년 만에 찾아오는 개기일식이 2시간 뒤에 펼쳐진다는 전제이다. 이로써 사건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 그러나 발생할 것이 된다. 그런데 러닝타임이 2시간이므로, 정확히 개기일식의 순간은 극이 닫히는 순간이 된다. ‘서서히’ 조명이 일부 꺼지는 기이하고도 모호한 정적의 결말은 무언가를 정확하게 지칭하는 대신, 공백과 부재의 혐의를 짙게 드리운다. 그것은 극장, 공간의 실재성을 향하는 공허한 시선의 운동성 외에 무언가를 전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실상 실재를 유예하고 지연하는 시간의 이 전략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기다림이 관객에게 수여되었을 때, 곧 입장 시 돗자리 하나가 주어지고 각자의 자리를 자신이 정하고 몸을 거기에 놓아둘 때, 관객에게 양도되는 건 자신의 신체성이다. 이때 객석은 무대로 뒤집히고, 평평한 극장 위에서 관객은 가시성의 권역 아래 놓인다. 돗자리가 관객(의 신체성)을 한정한다면, 또한 그들을 관객으로 한정해 낸다면, 그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건 퍼포머들이다.
자유는 느슨하고도 한정적으로 주어진다. 아니 한정적인 틀이 느슨해지며 자유로서 자리 잡는다. 각자의 휴대폰으로 감상되는 2시간의 스트리밍 역시 느슨한 자극점이며, 신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다. 스크린, 무대는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여기서 우리가 ‘더’ 감지할 수 있는 건 주변의 여러 감각적 요소들이다. 그러니까 배우들의 등장과 발화를 중심에 두는 연극이라고 할 만한 스크린은 ‘덜’ 주의를 빼앗는다.
이 감압된 혹은 감축된 연극의 형식에서 기다리기라는 수행성은 관객의 절대적인 몫으로 옮겨 간다. 배우들은 스트리밍 안에서 가시화되지 않으며, 빈 공간을 어지럽고도 불안정하게 비추며 목소리만 등장하기에, 유령성의 공간에서 목소리는 떠돌고 있는 형국이며, 빈 공간에 대한 시선이 되돌아온다. 실상 그 유령은 이곳에서 배회하는 중이다. 신체는 양도되었고, 주체성은 빼앗겼다.
유령성의 신체

이는 두산아트센터 당시의 공연에서 이원 생방송의 형식으로써 극장을 확장하고 점유하며 동시성의 견지에서, 두꺼운 현재성을 획득하려는 시도로부터 완전히 물러선 방향이다. 미술관은 좀처럼 사유되지 못한다. 일종의 폐쇄회로의 두 공간이 서로를 유령처럼 마주한다. 거기에 얼굴은 없다. 퍼포머들은 돗자리에 마찬가지로 체류하고 있거나 돗자리의 사이를, 틈을 비집고 건너 다닌다. 그리고 무언가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들 역시 무료한 존재임을 설파하는 것일까. 스트리밍의 앱은 “겹쳐보기 기능”을 제공하여, 카메라를 켤 경우, 현실을 그곳에 겹쳐 놓을 수 있다. 이때 휴대폰 아래로 손을 뻗거나 대상을 포착해 다른 공간에 더할 수 있는데, 이는 부재에 얼룩을 더해 그것을 메우기 위함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유령성을 주체의 수행성으로 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수행성을 주체의 유령성으로 (재)확인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걸 아우르는 시선은 어디 있는가.
〈개기일식 기다리기〉는 그 시선을 빈 칸으로 둔다. 아니 그 빈 칸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보고 있음의 권능을 소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단지 유령적 차원임을 확인하는 것일 뿐이라면, 기다리고 있는 존재를 들여다보는, 또는 개기일식이라는 초재적 현상과 이 만남을 하나의 시점으로 현상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잠재된 시간은 잠재된 존재의 차원을 또한 상정하고 있는 것 아닐까. 아니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빈 카메라의 시선은 그 시선의 역량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장소 특정적인 동시성의 연장을 소거하며, ‘덜’ 열심히 하는 방식, 오히려 최소한의 질적 강도마저 소거되는 방식, 열화된 공식적인 채널, 곧 공식적인 채널이 의미가 없어지는 방식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방식에 가까워진다. 이러한 덜어내기의 방식은 곧 그 빈 시선, 초재자의 자리를 구성하기 위한, 곧 장소의 한계를, 곧 장소 특정성을 비특정한 시간성, 우주의 무한한 시간성으로 바꾸기 위한 것 아닐까.
파편적 공동체성

이러한 느슨한 풍경의 구성은 극장의 질서를, 규칙을, 제도를 다시 구성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을까. 개별적 자유와 개성을 수용하는 느슨하고도 제한 없는 권역을 만드는 일이 곧 연극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일까―이때 연극 공동체는 하나의 효과로 남는다. 〈개기일식〉은 그것을 진정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때 연극(이라 불리던 것)은 하나의 매개, 기능, 삽화 같은 것에 그친다. 이번에 음이온은 그것을 더 축소한다, 시간은 더 길게 늘어뜨리면서.
두산아트센터의 공연 시간은 62분이었다. 이때 60분이라는 기다림과 2분이라는 개기일식 장면의 충실함 같은 것이 파악되지 않는가. 따라서 아마도 120분의 끝, 개기일식이 매우 미약하게 처리되는 것, 기다림에 거의 파묻히는 것이야말로 이번 공연에서의 결정적인 변화로 갈음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는 다음 공연, 세종문화회관 세종S씨어터에서의 180분의 기다림으로 연장되지 않겠는가.
일견 이 현재의 공간을 미래로 유예하는 것, 더 정확히는 제물로 바치는 것, 우리의 신체를 그 순간을 위해 저당잡히는 것은 거꾸로 절대자의 시선과 역량을 상정한다―이는 또 다른 작업을 상기시키는데, 정지혜 안무가의 〈코스믹 댄스〉가 그것이다1. 이는 일종의 공동의 제의가 사라져 버린 이후의 텅 빈 형식의 제의이다. 또는 그 망각된 질서의 복원 대신에 주춤거림, 주저함 같은 것들이다.
절대적 신비의 차원은 분산된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개별 주체들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그것과 덜 근대적인 또는 전근대적인 주체와의 절대적인 온도 차를 현상하는 건 흥분되어 있고 떠들썩한 휴대폰-연극의 발화자들이다.
하지만 이 분산된 주체들이 공동체적 집성을 흐릿하게나마 이룰 때 의도되는 부분은 극장의 전적인 복원이라기보다 극장에 대한 실험, 시험이다. 이 산만한 연극이 관객을 자신처럼 역시 느슨하게 만드는 건, 또한 다중 시점의 공동체로 만드는 건, 우리 안의 극장, 손안의 극장을 전치시켜 극장의 시간으로 확장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식별되(지 않)는…

곧 외부와 내부라는 두 개의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휴대폰과 휴대폰 바깥의 두 공간이 우리에게 여전히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관객성을 완전히 제한당하지는 않고, 우리를 극장으로 연장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돗자리와 신체의 넓은 유격은 자신의 신체성을 다룰 과제를 각자에게 수여한다. 그리고 이들 개별적 차원을 잇는 차원에서 어쩌면 퍼포머들은 돌아다닌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시화되고 있음을 물론 인지하고 움직이지만, 그것이 더 가시화되거나 잘 가시화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적어도 갖고 있지는 않다. 기다리기의 행위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개기일식보다는 이 시간 자체를 수용해야 한다. 또는 때워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관객 역시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방송은 오직 순간의 현상만이 있다. 보이지 않지만, 그 모든 건 진행자를 제외하면, 등장과 퇴장으로 갈음되며, 하나의 화제를 맴돌면서 시간을 유예하고 지연하는, 유예되고 지연된 시간을 좁히는 일정한 충동 자체이다.
퍼포머들이 장소를 옮겨다니며 무언가를 잇는다면, 발생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적어도 퍼포머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 안에 연결되어 있다라는 감각이다. 중앙의 위치에서 처음에는 스쿼트를 하다 나중에는 예배 차원에서 과도한 정향 행동을 반복하는 것(김동민)과 같이 제자리에서 초과된 가시권의 영역을 설정하거나 노트북을 켜놓고 조용히 시청(김경헌)하는 관객인 양 있는 퍼포머들도 있었지만, 그 반대편에는 돌아다니는 행위들이 있었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거나(김보우) 관객의 숫자를 세고 다니거나(김중엽) 하는 순간의 이벤트나 퍼포먼스와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김은한은 괴담 등의 짧은 이야기를 긴 시간 주고받으며 본래 자신의 이야기꾼의 면모를 연장하고 있는 그와 반대되는 경우였다. 하지만 그밖에도 어떤 사이의 대화들이 틈틈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식별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식역의 차원을 전제한다. 15명의 출연자를 다 눈치채는 건, 살피는 건 불가능하다. 신체는 장소 곳곳에 두루 편재하며 또한 일정한 영역에서만 편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의적이고 우연적으로 관객과 절합된다.
측정하고 가늠하는 틈

관객을 잇는 방식 중에서 김휘람의 위치 옮김은 기묘했는데, 빈칸을 침투함에 있어 그 관객에게 의식 당하지 않은 채 그러니까 더는 주의를 가져가는 걸 포기하거나 거의 잠든 신체에게 다가가서 유령적으로 그곳을 점유하는 이 같은 방식이, 그 바깥의 이에게는 발각될 수밖에 없는 지점에서 그는 주춤하고 망설이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의도되지 않은 방식의 비가시화적 침투에 있어서 사물화된다면, 그 바깥에서는 특정 관객의 심리적 상관물로서 자리하며 결과적으로 원격 현전 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빈자리를 채운다는 것의 환상성 자체가 된다. 허윤경의 경우, 카메라의 겹쳐보기 기능을 연장하듯 자신의 휴대폰 카메라 앞에 손을 내밀어 흔들거나 관객 사이로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이는 외부로의 환상성에 나를 투여하는 것으로, 그것은 공백을 메운다고 안위할 수 있는 행위였다.
실은 이는 온도를 측정하여 뜨거운 쪽에 몸을 싣는 자신의 시뮬레이션 아래의 작동이었는데, 그것을 쉬이 가시화할 수는 없더라도, 세계를 하나의 경계 아래 두는 경계 짓기의 움직임으로 표상되는 것으로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이러한 지점이 가능한 것은 세계의 틈이, 세계 자체이기도 한 공연의 양태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채워질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행위는 눈치껏 가능한, 지시자, 대타자 없는 무대, 그것을 이양한 무대, 모두가 상연되는 무대, 모두가 관찰되는 무대, 그 상연성을 나눌 수 있는 무대, 가시성을 또 다른 가시성으로써 덮을 수 있는 무대였던 것이다. 곧 〈개기일식〉은 공간을 메우(려)는 충동을 구성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근래에 음이온이 참여했던, 72시간 쉼 없이 진행된 공연 〈파빌리온 72〉와의 유사성을 재고하게 하는데, 퍼포머들은 관객과 마찬가지로 그 공간에 있기라는 과제 자체를 무엇보다 우선해 수여받게 된다. 대본이 있고, 시간에 따른 설계는 있지만, 더 주요한 건 시간을 무작정 견뎌내는 데 있다. 그 안에서 행위는 하나의 전략일 뿐이다. 거기에는 의도보다는 혐의가 놓인다. 〈개기일식〉에는 ‘축소된 연극’ 곧 휴대폰을 들고 또는 놓고, 자신의 신체성에 사로잡힌 관객들이 있고, 그들을 도리어 ‘바깥에서’ 깨우거나 다른 자극을 주려는 퍼포머들이 있었다.
비정치성의 주체를 위한 정치를 위한 혐의

그것은 결말하고만 정합되는, 불균질한 시간을 노정하는 신체의 감각적 이행의 차원에 자리했다. 그것은 곧 공-현존의 순간을 만들기 위한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기와 같다. 그것은 이 현재의 함께 있는 순간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한 절차로 보인다.
이는 또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무력화하는 뉴에이즘적 평안과 쾌락보다는 역사적 주체성의 불가능성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개기일식〉의 관객들은 일정 정도 피서를 온 관광객이며, 또한 하나의 목적을 위해 결집한 정치적 공동체이다.
“그러니까, 삶에서 그 시간들을 기다리지 않잖아요. 왜냐면, 저희는 도무지 기다리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근데 또, 지금에 만족하지도 않고, 기다리지 않으면서 문제는 미래로 치워버리는 거 같기도 하고, 이제는 지금 여기 있지도 않은 과거를 자꾸 추억만 하고, 뭔가 우리 참, 시간이 없구나, 우리 아무 시간도 잡고 있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게, 개기일식 자체보다는 그걸 함께 기다리면서, 우리한테 좀 시간이 생기는구나? 시간을 돌려받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팀 어쓰의 공진화 PD[김중엽 배우])
아마도 이러한 불특정한 집단성과 특정한 이념의 공동체 사이에 위치하는 관객은, 비주체적이기보다 비판적이고 자유롭다기보다 자율적이다. 그것은 타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이는 근래 심지후의 〈여는 마당: 프로파간다〉과 비교적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성은 프로파간다를 표방하면서 실은 재현하는데, 이는 광장의 차원을 복기하면서2, 한편으로 그 힘을 극장의 역량으로 이전시키고자 한다.
〈개기일식〉은 광장을 기다리지 않는다. 거꾸로 기다리는 자들을 광장으로 분류해 낸다. 〈개기일식〉은 프로파간다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거꾸로 프로파간다가 상실된 지점에서 주의/집중을 시험하고 그것을 태도로 갈음한다. 주술적이거나 신앙적인 공동체가 향하는 가장 어렴풋하면서 추상적인 이념은 우리가 공동체일 수 있는 하나의 혐의를, 핑계를 만들어 내려는 수단이다. 공동체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나 근거 같은 것은 충분하지 않다.
불확실한 매체를 경유한 공동체

이러한 공동체 되기는 하나의 화두를 텅 빈 유머로서 던져 놓고, 관객을 대강 엮는 음이온의 한 방식에 의거한다. 그것은 구성이나 배치보다는 관객을 수납하고 분할하고 헛손질로써 대강 잇는 방식의 가미로써 가설되는 세계이다. 관객은 무엇을 진정 기다리는가. 기다림은 기능인가. 본질인가. 개기일식이 가짜라면, 기다림은 진정한 것일 수 있는가. 다시 한번 관객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관극의 행위 자체가 공연의 반향으로 작용한다면, 시선으로 매개된다면, 관객은 자신을 성찰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되는 것일까. 이는 일견 퍼포머, 촬영자, 관객 모두를 가시화하는 하나의 과정을 퍼포먼스를 정의하는 오민의 〈동시, 퍼포먼스〉(2025)를 떠올리게 한다.
오민이 모든 장면을 미학적인 결정적 장면으로 둔다면, 〈개기일식〉은 너저분하게 산재된 시간 풍경들을 그저 각자의 자리로 소급시키거나, 또는 어느 정도의 공통된 지대로 포화시키는데, 그것은 전적인 제어의 함의를 띤 포착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매체를 불확실한 차원으로 다룬다, 더 정확하게는 아마도 수용한다가 될 것이다. 곧 기다린다는 행위는 이 시간의 미결정성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그것을 잠재적인 차원으로 내버려둔다는 것이 된다. 퍼포머들은 역할을 상정하고 그것을 아마도 공통의 합의, 승인 차원에서 시행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승낙받거나 이후 제어받는 경험을 하지는 않는다. 퍼포머는 어떤 시간을, 장소적 사이를 떼워야 하는 역할에 몰입한다.
그것은 가짜 형상, 모종의 맥거핀에 그치는 형식적 행위에 치중되어 있지만, 어떤 효과를 일으킨다. 아마도 결정적인 건 창문 앞에 서 있는 일련의 퍼포머들이다. 뒷모습에서 어떤 생각을 읽어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저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 개기일식과 관련된 무언가를 목도한다라는 감각을 주기에는 충분하다―그것은 사물화된 존재, 곧 “너도밤나무”가 바라보는 시점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것은 세계를 규합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다만 세계가 불연속적으로 연합됨을 보여주는 매개 이미지로는 충분하다.
감축되는 희곡

음이온은 희곡을 수단으로 활용하고, 본격적으로 본질로서 심(미)화시키지 않는다. 이는 여러 사례로써 가늠해볼 수 있는데, 가령 음이온은 대본을 공유하기도 하는데, 〈갈대밭의 에듀케이션〉 역시 그러했다. 대본은 두 역할에 따른 배우/언어의 여러 연결합을 통해 반복적으로 차이를 갖고 상연되었고, 특히 반복됨에도 한국어가 함께 공존하는 사례를 소거3.함으로써 제대로 된 의미의 연결을 구성하기 어려웠다. 대본은 수행의 여러 몫을 위한 기본적 토대를 이루는 것이면서, 실은 구조적 형식을 위해 ‘희생’되는데, 곧 대비되는 언어의 차원으로부터 대본은 시차적으로/사후적으로만/그리고 최종적으로만 확인 가능하다.
〈개기일식〉의 경우, 대본은 공연 전에 나눠준 핸드아웃에서 사전에 접속 링크가 큐알 코드로 공개됨으로써 마치 대본은 연극을 위한 하나의 기능적 차원의 지위를 얻게 된다. 또한 두산아트센터와 같이 전면의 스크린을 매개로 그 안에 변화되는 극장 곳곳의 퍼포머들의 이전과 수행의 정도를 한편으로 진정성으로 다른 한편으로 리얼타임으로 펼쳐놓지 않음으로써 변별점을 갖는데, 그것은 각자의 기다리기에 대한 자율성을 허락하고 또한 고양시킨다.
무엇보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이번 버전은 부재라는 화두를 끌어올린다. 입구 맞은편, 안쪽의 백남준의 각종 영상 작업의 스크리닝 광경과 입구 바깥쪽 오른편에는 백남준의 〈버추얼 비너스로 향하는 우주선〉(36대의 텔레비전, 네온, 알루미늄 구조물, 19세기 석조 불두. 소장처: 중국 타이캉 미술관.)이 있다. 따라서 스크린을 더하지 않는 것은 기존 스크린을 대체하지 않는 방식으로써 그것을 수용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
미술관을 전유하는 이 같은 방식은, 물리적 한계 때문이라기보다는 미술관의 관(람)객이 극장과는 다른 방식의 태도와 관점을 가져가기 때문은 아닐까. 편재된 시각적 요소들과 분산된 주의의 체제를 극장과는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 아닐까. 그런데 무언가를 더하지 않으려는 것보다 무언가를 더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의 태도가 거기에 잠재해 있다고 보인다. 부재의 공간을 비추는 카메라, 그로부터 끼어드는 손짓과 관객의 사이를 건너지르는 허윤경의 투명한 손짓, 창문 옆 멍한 응시의 신체들…
가상적, 잠재적

“이제는 너무 많은 스펙타클로 둘러싸인 우리에게 이 유구한 스펙타클은 어떤 의미인가요.”(과달루페) 동물들이나 너도밤나무의 시점에서 개기일식을 보는 관점을 들여오듯, 〈개기일식〉은 “지구 밖에서”(우주인) 본 관점 역시 들여오는데, 그것은 “거대한 그림자”(가 덮이는 세계)를 보는 것과 달리 그 “그림자” 자체를 지구와 함께 보는 일이 된다. 축소된 개기일식, 곧 지구에 뚫린 구멍으로서 그것은 신비하고 초재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반전된 양상으로 도출한다.
우리는 카메라에 손을 갖다 대어 변화된 우리의 신체를 사물인 양 다시 마주한다. 마치 우리가 이미지를, 태양을 가리는 달인 양. 그리고 그것이 어떤 유희 자체임을 갈음하면서. 곧 접촉이 아닌 중첩, 우연한 그 만남이 실은 극장의 편재성이 주는 어떤 느슨하고도 산만하게 연결된 공통의 감각이라는 것을 비유하고 있는 것 아닐까. 또한 백남준의 후예인 양 TV-스크린 안의 이미지를 신체의 투여로써 변용―곧 〈자석 TV〉(1965/1969)에서 자석을 대서 TV 외부에서 화면에 영향을 주는 것―시키고 있던 것 아닐까.
관계의 엮음은 “뜨개질”로 직유된다. 그리고 한 번의 뜨는 행위는 시간을 육화하는 것에 비견되는데, 곧 각자 다른 시간의 엮임이 구조가 되는 뜨개질로써 퍼포머의 횡단적 행위를 갈음해 볼 수 있을 것이다―“…시간으로 만들어진 구멍 안에 다시 시간을 넣어서 계속 또 구멍을 만들고 다시 시간을 집어넣으면 시간끼리 엮여서 하나의 구조물이 되는 느낌을 받거든요. 그런 걸 즐거워하고 있어요.”(전혜인).
〈개기일식〉의 부재가 검은 구멍을 품은 지구의 은유에서 정신분석적 차원으로 의미심장해진다면―‘그림자-세상이 아닌 지구의 구멍으로서 그림자’―, 이 뜨개질의 은유에 이르러서는 잠재적인 시간성을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개기일식은 가상의 경계로서 결국 공간에 내속된다―개기일식을 실제적으로 다룬 (그리고 실재의 왜상을 마주하게 되는) 작업으로는 적극의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2025)를 들 수 있다4. 실재는 곧 극장이다. 가상이 부재로 지시되는 자리, 하지만 그 부재가 ‘예외적으로’ 공동의 스크린이 되는 자리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 1. “그리하여 그 춤은 우리가 우주에게 보내는 춤이 아니라, 우주인이 추는 춤, 우주인이 우리의 신체를 통해 보고 있는 그 춤이 아닌가.” 출처: https://www.artscene.co.kr/2006. [본문으로]
- 2. “이는 따라서 대리/대표로서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를 직접 민주주의의 차원으로 바꾸려는 노력일 수도 있는데, 곧 〈여는 마당〉의 수행(이 갖는 순수성과 위험성)은 곧 수많은 목소리가 존재하는 광장의 정치를 ‘믿고’ 재현하려는 데 있다.” 출처: https://www.artscene.co.kr/2164. [본문으로]
- 3. “그런데 이 조합의 방식은 더 많은 ‘실험’을 가능하게 하지만, 더 나은 이해를 도모하지는 않는데…” 출처: https://www.artscene.co.kr/2117. [본문으로]
- 4.이는 실제 지구-달-해의 거리를 축척의 비례를 적용해 개기일식을 재현하는 시각 장치로써 “응시의 실재가 비가시적인 것이 되는 순간”을 직접 관객의 신체로 체현한다. 출처: https://www.artscene.co.kr/198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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