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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재환 , 김광우, 《띵찰》: 사유하기로서 사물 다루기
    REVIEW/Visual arts 2026. 8. 17. 19:52

    전유의 방식

     

    ‘띵찰’은 명찰의 오지각적 표기를 전면화한 것으로, 전시 안의 모든 작품은 명찰 안에 담겨 있다. 명찰이 실은 이름에 대한 지시, 분별의 기능적 오브제인 것에 상응해, 비닐과의 틈을 거쳐 식별을 요구하는 배경면의 텍스트들이 자리하는데, 이것은 거의 주재환에게서 온다.

    그리고 반대로 순수 이미지들, 구체적으로는 고전 명화와 같은 이미지들을 잘라내고 그 위에 채색을 더해 (또는 그 반대일 수 있는 과정 아래) 전유하는 등의 어떤 이미지 공작을 거친 이미지들―김광우 작가의 그것―을 뚫고 그것들이 자리한다. 또는 그 반대로 어떤 텍스트들 배면에 이미지들이 있다.

     

    아마 전시의 표층적 양상은 이와 같을 것인데, 이 명찰 규격의, 명찰로 포장된 작업들은 동시에 그만큼의 유격을 안고 존재하며, 개당 50,000원의 가격으로, 두 개 이상으로 현장에서 판매됨으로써 동등한 가치로 규정되며 가치의 식별로 연결된다.

    판매는 이 레디메이드로서 명찰의 기능을 부각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액자를 대체하고 포장의 기능을 하는 명찰의 비닐은, (어느 순간 작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작품의 아우라를 비루하게 굴절시키는 동시에 레디메이드 상품 그 자체의 질서 아래 작품으로서 틈을 영속시킨다.

    하지만 이는 명찰의 잘못이 아니라 명찰에 끼워넣는 작품의 형식이 (어느 정도) 오작동되는 부분이다. 그럼으로써 훼손되지 않는 건 명찰인데, 곧 전시는 명찰을 (고유한 것으로) 보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 거친 공작의, 헐거운 끼워 넣음의 절대 형식은 작품이 아닌 이 모든 것이 그저 각각의 명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한한 생산 양식으로서 작품은 자본주의적 공작의 동력에 상응하며, 작가들의 소진되지 않는 에너지 자체를 함의하게 된다. 아이디어, 상상을 옮기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매우 짧고 또 일회적이고 임시적이며 즉흥적으로 구가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은 애초의 생각을 그 자체로 옮기는 것에 가깝다는 점에서, 표현의 2차적, 실질적, 구체적 경로를 거의 생략하며, 그로부터 자유롭다. 어떤 끼적거림이나 메모, 단순 공작 혹은 덧칠 등은 작품의 표현에 함몰되지 않고, 작가의 의식 세계와 메시지를 투박하게 비춰내는 것으로 보인다.

     

    사물에 대한 성찰

     

    명찰로 전유된 작품들이 이중적 기호로 전환되는 과정처럼, ‘명찰’을 전유한 ‘띵찰’이라는 제목은 전혀 다른 의미를 구가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띵, 사물(Thing)이며, 사물에 대한 성찰 혹은 성찰이 극대화된 상태 자체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 레디메이드라는 사물(의 일부)이며 또한 주재환의 의식 세계, 또는 발화된 주체의 의식이 비정념적인, 반정념적인 차원으로 드러나며 상징계적 차원을 무력화하며 실재(Thing)에 대한 진리를 향하고 있는 부분과 상응한다.

     

    주재환의 촌철살인, 해학적이고 또 풍자적인 말은 시간과 공간, 세계를 비약해서 현재의 자아를 매우 작은 것으로 축소하고 깨달음의 순간으로 환원되게끔 하는데, 이때 주재환은 자신은 우스갯소리 같은 짧은 화두를 던지는 가운데 현실 층위를 가뿐히 뛰어넘고 조소하며 상징계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주체의 공백과 결여의 상태를 향유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드는 되돌아옴, 곧 성찰의 과정으로, 대자적 차원을 경유해 자아에 구멍을 내거나 확장된 세계 안에 자아를 위치시키며 의식의 확장을 꾀하는 주체의 경로를 만들어내는데, 여기서 작가는 그 거대한 세계의 하나의 점으로 또는 그 거대한 세계의 텅 빔 자체로 현상된다.

    이는 껍질만 남은 바보 같은 사물의 모습이기도 하다―“알맹이만 내주고 껍질만 남은 바보 호두여”(반으로 잘린 호두 껍데기 세 개로 눈과 코를 가진 얼굴의 형상으로 응결시킨 작업 아래 쓰인 주재환의 문구로, 호두 껍데기는 위에 두 개는 안쪽이 드러나도록, 아래 하나는 껍질 쪽이 드러나도록 각각 누였다. 다름 아닌, 빈 호두 껍데기는 욕망의 무게를 덜어낸 작가의 상태를, 장난스러운 작업을 조소하여 긍정하는 것이다.).

     

    호두의 알맹이를 취하지 않는 모습, 껍질만 남은 자리에 자신을 대입하는, 자조와 자유가 혼합되는 이 과정은 작가 스스로에게는 그러고자 함의 지향이고 일시적인 유희로서 극복일 뿐, 그 자신을 하나의 진리를 담지한 주체로 명시화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작가는 거대해지고 투명해져서 사라지는 매개자의 위치를 담당한다.

     

    자아 피드백

     

    모든 사람이 죽음 이후에는 관으로 들어간다는 한 기사의 인용에서도 볼 수 있듯, 작가는 깨달음의 문구를 진리로서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자아를 비워내(려)는 하나의 주문처럼 취한다―이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주소가 정확히 똑같이 기입된 작가 자신에게 보낸 엽서 작업처럼 자기 자신의 피드백 회로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작가 스스로가 죽음이라는 특정한, 필연적인 귀결의 순간으로부터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의 위치, “유명”하거나 “위세”를 갖지 못한 자의 대척점의 위치를 자임하면서 이 주문을 통해 그 모두를 동류의 차원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진리의 외양 아래, 죽음의 차원 아래 어떤 콤플렉스나 위축감을 떨쳐버리려는 것이다.

     

    또한 주문을 스스로의 진리로 수용함으로써 (모두가 아닌) ‘자신’만의 삶을 평범하고도 사심 없는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여러 작업 안에서 또한 통시적 차원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결국, 직접적인 성찰의 매개체로서, 그 앞에 위치한 관객마다 그 자화상의 일부가 작품을 완성하게끔 기능하도록 만드는 거울이 붙은 작품의 경우에 있어서도, 가장 먼저 그 일부가 될 수밖에 없는 건 물론 작가인 것이다.

     

    김광우의 작업이 미술에 대한 주석이자, 미술사적 궤적 위에 한 발을 얹는 일종의 지식인, 명철한 작가의 입장을 견지한다면, 주재환의 작업은 신경증적이고 또한 인간적이다. 그것은 상품으로서 외양을 주장하지만, 반예술의 지위에서 그러하다. 곧 완벽한 상품이라기보다 흠이 있는, 그중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상태를 예술-상품으로 취할 수 있는 여지를, 골라잡기의 성취를, 일종의 도떼기시장 안에서 자신의 값을 먼저 제시하는 상인의 떨이식 화법과 함께 드러내는 것이다.

     

    사물로 하락하기 또는 증대되기

     

    애초에 사물은 그 형식 자체가 그 외양 자체가 전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기보다 오히려 허름하고 그저 사물의 지위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에서 분명 특정하며 또는 반특정적으로 특정해야 하며,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작품을 기각하는 차원에 맞춰져야 하는데, 이 지점에서 사물로서 작품의 지위, 사물에 가까운, 사물이어도 되는, 의도적으로 사물이 되는 작품이 탄생한다. 작품은 그 지위의 기각을 오히려 담담히 수용하는 데,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가깝다. 애초에 사물에서 작품으로의 변용, 또는 그 경계로서 사물-작품이 주재환의 작업에 자리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분홍색 동그라미 안에 “2025 / 환”이라 쓰고, 그 아래 “무엇인가 / 그림은 없고 사인만 있으니 / 사인을 그림으로 보면 안 되나“라고 적힌, 주재환의 작업은, 김광우의 작업이 자리할 수 있는 대명제와도 같다. 김광우의 작업에는 명화를 전유하는 몇 가지 특정한 방식이 있는데, 위에 덧붙이는 표식이 그 그림의 주석으로서 기능하면서 디자인적인 재배치로 남는 것, 최소한의 얼룩이 원작의 연장선상에서 기생하면서 2차적 파생의 의미로 형질 변화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주재환이 이미지를 잘 만들거나 매끈한 이미지 자체에 대한 고려가, 추상이 없다면, 김광우는 기존 이미지들 자체를 탈맥락화하면서 그것 자체를 보존하며 드러내고 있으므로, 본래의 이미지 자체에 대한 매혹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본래 이미지가 가진 매혹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지 못한다고 할까. 또는 그 매혹됨을 부인하기 위해 이미지를 변용시킨다고 할까.

     

    가령, 왕칭송(WANG Qingsong)의 〈안전한 우유 Safe Milk〉(2009. 150×300cm.)의 배경을 검정 크레용으로 거칠게 칠해 지우는 “폭력적인 삭제 행위”로써 완성된 〈최후의 만찬〉(2024)은 “주변적 맥락과 권위를 제거”하며, 오히려 여성 신체를 과잉으로 드러내고, 또한 그 기저에 결핍을 전제한다. “여성 이미지의 소비 구조”는 작품 본래의 차원을 지시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비판하는 구조로서 이 가시화가 작동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지에의 시차

     

    스스로를 “무대 밖 권력”―왕칭송은 ‘무대 위 권력’인 셈이다.―으로 참칭하면서 그로 인한 “지워진 흔적”을 “역설적으로 증폭”시킴은 곧 형상에 대한 초점과 집중을 결코 무력화하는 것이 아니며, 형상만을 남기는 것이며, 형상을 결코 지우지 않고 형상에 가닿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매만지는 전유가 무대 너머로, 어떤 그들만의 은밀한 일상으로 이들을 건너오게 하는데, 이때 주체의 권력을 마치 소거하듯 은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가시화의 구조를 다시 관음의 대상으로, 이미지를 타자로, 패션 화보의 광경을 고전 회화의 한 범주인 양 바꾼다. 그들은 공간에 배치되기보다 이제 스스로 안정화된다. 일본 우키요에의 대표작으로 토리 기요나(Torii Kiyonaga)의 〈목욕탕의 여인들〉(Onna-yu, 1780년대 후반)에 “파스텔 톤과 글리터 매니큐어 얼룩”을 여러 개 부가한 김광우의 작업 〈목욕탕〉(2025)은, “중첩된 현대의 기호들에 의해 대상화와 소비의 시선으로 다시 읽힌다.”

     

    이 중첩의 방법은 이미지를 대상화하고 소비한다. 하지만 그 시선으로 다시 읽히기보다 그 시선 자체를 읽도록 한다. 이미지에 더하는 일은 이미지를 만지는 것, 신체를 만지는 행위, 신체를 배회하는 일이 된다. 여기서 에로스적인 것은 목욕탕의 여인들을 관음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보다 그들의 신체를 만진다는 것, 이미지를 대상으로 그리고 신체로 치환한다는 것에 있다. 크레용의 얇은 두께는 섬세하고도 주저하는 심리적인 차원의 행위로 기입된다.

     

    이미지로, 그리고 이미지 너머로

     

    《띵찰》은 명찰 ‘안’의 작업이라는 공통된 규칙 아래, 두 다른 작가의 작업을 함께 선보이는데, 김광우가 차용하는 서구의 회화, 이미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주석적 차원은, 그 이미지 특정적, 연장적 세계의 형식을 보여준다면, 그리하여 그 이미지를 재이미지화하며 가치를 보존하고 (가치의 차원에서) 연장한다.

     

    반면, 주재환은 사고가 규정하는 어떤 세계로의 열림을 수여하는데, 이는 그 사고 자체로부터 유명무실한 또는 부실한 어떤 이미지로 돌아온다는 점과 같다는 점에서, 이미지는 더할 나위 없이 하찮으면서도 웅대해진다. 이미지를 물질 차원으로 최종 경유하느냐 아님 이미지를 물질로 어쩔 수 없이 경유하느냐, 이 지점에서 둘의 어떤 결정적 차이가 있을 것이다.

     

    명찰은 개인적인 것이면서 사회적인 것이다. 나를 지시하면서 나로 소급된다. 이 소소하고도 흔한 것 안에 작품을 욱여넣는 방식으로써 《띵찰》은 사물에 대한 재고를, 동시에 작품에 대한 재고를 시도한다. 그것은 작품이 성립하고 작동하는 방식의 단출한 경로를 선명하게 가시화하고, 탈은폐의 차원에서 작품을 선보인다.

     

    그것은 표면상 작품의 박리다매식의 전술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가치가 하락되었음을 또는 사회적 차원의 소비 심리의 위축을 의미하기보다는 작품이 일상 차원에서 의미를 상실했음을 또는 거세당했음을, 값비싼/먼 스펙터클로 치환되었음을, 그리하여 인지적 자각의 대상으로부터, 성찰하는 관점으로부터 멀어졌음을 비평하고 있다고 보인다.

     

    김민관 편집장

     

    플레이스막2
    8/9-8/31, 2025
    12-18시, 월-화 휴관
    !!오픈일은 8/9 토요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전시 관람 가능!!
    기획.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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