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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추니엔, 〈뉴턴〉에 대한 주석: 실험 박스 안의 존재REVIEW/Visual arts 2026. 7. 14. 20:25

호추니엔,〈뉴턴〉(2009. 단채널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 4분 16초.)[사진 제공=아트선제센터] 〈뉴턴〉(2009. 단채널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 4분 16초.), 〈지구〉(2009–2011. 단채널 영상, 5.1 서라운드 사운드, 42분. 싱가포르아트뮤지엄 컬렉션.), 〈굴드〉(2009-2013. 단채널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 1분 49초.), 〈미지의 구름〉(2011. 단채널 프로젝션(16:9포맷), 컬러, 5.1 서라운드 사운드, 28분. 싱가포르아트뮤지엄 컬렉션.) 순으로 열린 호추니엔의 스크리닝에서, 나아가 1층과 2층의 전시에서 선보인 여러 영상 작업에서 역시도 두드러지는 건, 음악과 이미지의 공존이다. 오디오는 적극적인 화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영상의 합목적적 결과로 나타난다.
이미지는 총체적 서사로의 이행, 중간 단계로서 복속되기보다는 장면 하나 하나 시각 체제의 공고한 산물로서 개별 단위의 독립적 구문으로 제시된다. 그 결과 서사는 사라지기보다는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서사는 시간성의 순차적인 경과에 의존하기보다 공간들의 병렬을 통한 연결과 확장에 따른다. 여기서 시간은 오디오로부터 오는데, 영상을 하나의 ‘현장’으로 바꾸는 노래와 말하기의 일체화된 신체가 가정되고, 그 신체성이 위치하며 시간이 탄생한다. 〈지구〉는 스튜디오가 아닌, 그 현장의 한 존재가 라이브로 노래를 진행한다는 착각, 오인이 들 정도로 바짝 영상과 붙어 있는데, 오디오의 이미지를 향한 직접적 방향성―이미지를 직접 가리키거나 표상하는 차원과는 별개로―은 다른 대부분의 작업을 관통한다.
〈뉴턴〉은 백색 공간과 프린트, 책 등의 사물들, 아시아계 알비노 주인공까지 하얀색으로 ‘표백’된 세계의 진공으로서 메타포를 뉴턴의 떨어지는 사과를 통해 발견한 중력이라는 가설의 인공성과 결부시킨다. 주인공의 행위와 함께 반복되는 ‘일정한’ 세계의 구조가 하나의 서사의 한 원형으로 연장되는 가운데, 벽면에 꽂힌 책들에서 중간의 책 한 권이 떨어질 때 가정되는 손의 움직임과 벽 너머의 공간은 지워진다.
‘실험이 나타내는 진리는 영속하고 같다’라는 사실은 실험을 뒷받침하는 인간 존재의 자의성과 사고의 고안에서 고려할 부분들, 들러붙는 여러 텍스트의 잔해가 말끔히 세탁된 후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지점에서 일종의 신화임을 지시한다. 나아가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공간은 실험이 도출하고자 하는 자연의 초월적 힘과 그것을 가시화하는 인간이라는 조건의 은폐는 서로 맞물려 있다. ‘모든 실험은 같다’, ‘인간의 조작 행위는 순수한 견지에서 출현했다’와 같은 명제를 증명하는 건 또 그것이 신화적 서사의 아래 작동한다는 걸 드러내는 건 공백의 힘이다.

호추니엔,〈굴드〉(2009-2013. 단채널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 1분 49초.)[사진 제공=아트선제센터] 〈뉴턴〉은 진공의 질서 아래 일정한 프로세스의 단속적 잔향을 가끔 노출하며 하나의 원환을 그린다. 총체성은 반복의 한 단위이자 반복의 행위 그 자체이기도 하다. 〈뉴턴〉은 따라서 그 시간에 부여되는 총체적인 하나의 신체적 목소리가 출현하지 않는 예외적 작업이기도 한데, 〈굴드〉는 이와 상응하면서도 차이를 수반한다. 피아노를 치는 같은 인물은 그 피아노 소리 자체가 배경음악을 대체하는데, 여기서는 그 음악에 대한 감상과 그것을 향한 순수한 연주 행위의 반향을 도출하는 대신에, 그의 머리에 놓인 손이 그를 지배함으로써 그가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 이 세계의 구조임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있다.
〈뉴턴〉이 백색 공간이라면, 〈굴드〉는 어둠의 공간으로 대응하는데, 전자에서 인물의 머리에 떨어지던 공이 인간의 행위로써 사물-인간의 네트워크를 추동하고 있었다면, 이 같은 손으로 나타난 비가시적 인물의 힘으로써 음악의 신체를 지배한다. 그것은 피아노가 아니라 인간을 진자 운동화한다. 신화의 보이지 않는 구조의 힘은 비가시적으로 산출―은폐하거나 일부만 드러내는―된다.
결과적으로 〈뉴턴〉은 근대의 진리가 성립하는 과정을 근대적 프로세스의 일환으로 바꾸는 가운데, 또한 그 진리의 신화성을 드러내는 가운데, 일종의 희극성을 노출하는데, 그것은 억압과 지배의 보이지 않는 힘과 결부된다는 점에서 〈굴드〉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굴드〉는 그보다 블랙 유머의 희극성을 보여주는데, 그렇다면 그 힘은 무엇인가.
공간을 지배하며 영감을 또한 지배하는 그것은 서구와 아시아의 지배/피지배 관계, 문화의 이식 등을 의미하는 것일까. 〈굴드〉와 마찬가지로 〈뉴턴〉은 진리가 발굴되는 메커니즘을 가시화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정교한 조작과 합의의 산물임을, 자신이 행위소로서 그 일부임에도, 무의식적으로 봉쇄한 주체에 대한 역설적 은유를 보여준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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