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최찬숙, 〈더 텀블 올 댓 폴〉에 대한 주석: 횡단적 사고와 환원론적 사고 사이에서
    REVIEW/Visual arts 2026. 7. 13. 14:48

    최찬숙, 〈더 텀블 올 댓 폴〉(2024. 가변 크기, 1채널 비디오 설치(FHD), 30분, 컬러, 사운드, 아카이브.)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더 텀블 올 댓 폴〉(2024. 가변 크기, 1채널 비디오 설치(FHD), 30분, 컬러, 사운드, 아카이브.)은 일반적인 “에세이 필름”보다는 화자의 내레이션이 감싸는 오디오 비주얼 필름에 가까워 보이는데, 이는 인터뷰 당사자의 신체 역시 그래픽적 이미지의 전체 영상 미감에 흡수되어 있고, 일종의 이미지와 재료로서 융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원주민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입과 강탈의 현장에 원주민 당사자의 목소리를 맞세우는데, 이로부터 도출되는 인간과 인간의 영적이고 신성한 만남이라는 전제는 내레이션의 형태로 명상적 정서 아래의 윤리적인 정언 명령으로 삽입되고, 이는 근대적 해석과 분석보다는 절대적인 타자의 형상을 수용하는 레비나스적 진리에 입각해 부족과 부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전제로 비약한다.

     

    따라서 근대인으로 상정되는 관람객의 전근대를 향한 염원과 접합의 비변증법적 매개로서 인물들은 자리하는데, 원주민과 현재의 접점을 꾀하는 차원에서, ”슈페리어에 거주하는 마을주민인 원주민 참전용사, 전쟁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미군 출신의 운전사“가 도입된다. 전자가 부족민의 장소라는 근본과 현재의 시간이라는 근대와의 매개를 가져간다면, 후자는 트라우마라는 병리적이고 정신적인 장소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처소로서 전근대의 시간에 접근한다.

     

    대량의 구리 광산 개발권이 쟁점이 된 애리조나 슈페리어 지역은 (이 작품의 기본적으로 개발업자의 입장을 다루지 않는 태도와 함께 앞선 내레이션의 전유를 경유해) 아파치 부족 고유의 영토(에 대한 정치적 점유의 의제를 제기하기)보다는 정신(을 통한 고양)과 겹쳐지는데, 동굴이라는 장소는 그 상징적 표지로 나타난다. 이를 비유하는 세 인물의 발화가 진행되는 어둡고 투명함이 겹쳐진 공간은 블랙 큐브보다는 화이트 큐브로서의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데, 그 속에서 인물들은 특정 인물로 가시화되거나 사실상 잘 구별되지 않는다. 이들은 그 공간 그 자체의 연장이거나 반영이다.

     

    클로즈업은 적당한 공간과의 분배를 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이들을 제대로 초점화하지 않으며, 세 인물의 이미지적인 그리고 공간 안의 뒤섞임 속에 이들은 특정 인물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거기에 등가된 크기의 음악이 적용되면서 전경화된다. 이 무성화된 공간은 일종의 민족지적 연구를 동반하는 미술관의 상상적 자리를 차지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타자의 형상들을 나열할 수 있으며, 실제적이지 않지만 실재의 왜상을 기입할 수는 있는 표현의 장으로서 기능한다.

     

    결과적으로, 〈더 텀블 올 댓 폴〉은 다양성과 복잡계 차원의 동시대적 좌표를 첨예하게 세공해 가고자 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시간과 장소의 급격한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타자에 대한 윤리가 있는데, 그것은 상처받은 타자이거나 상처 입은 주체―개발업자는 자본주의적 대상으로 그 바깥에서 어두운 영향력으로 작용한다.―의 사이에서 후자의 취약함을 근거로 상호 연접될 가능성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의 근본적 연결이 아니라 병치로써 애초에 그것이 시도되기 때문이다.

     

    이 병치 혹은 나열 혹은 환상으로서 횡단은 근본적으로 서사의 주체를 독특한 것으로서 각각 구성하기보다 타자로서 존재라는 환원의 이념적 차원을 주창하는 데 가깝다. 그러니까 그것이 서사화되기보다 나열되기 위해 수집되는 착안의 단계에서 종결되는 것과 같은데, 그리고 해석보다 이념 자체를 검증 없이 수용해야 하는 결과를 낳는데, 이는 원주민으로서 우리를 소급하며 환원하는 이념의 가시화에서 종착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다시 ‘시각적’인 것의 재검증이 필요한데, 시각예술에서 그것은 너무 즉물적 이미지에 천착되어 있는 것 아닐까, 또는 너무 이념으로의 환원, 그 정답의 도출에 갇히는 것 아닐까. 곧 어떤 형상들의 시각화가 아니라, 그 형상들(이 서사의 차원에서 맞물린다고 할 때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비가시적 차원의 모든 것들, 해석과 판단, 사유를 부르는 차원에서 시각적인 것이 그것과 맞물려 연장되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