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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엽 작, 〈세상이 대충 망한 뒤〉: 망한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기REVIEW/Theater 2026. 9. 7. 15:42
두 개의 시간

2026 봄 작가, 겨울 무대 낭독공연 포스터. 〈세상이 대충 망한 뒤〉(이하 〈세망뒤〉)는 하나의 장소를 두 개의 다른 시간으로써 보여준다. A와 B는 각각 망한 세계의 영원회귀적 반복과 구체성의 한 조각을 예시하며, 이때 A에는 좀비와도 같은 회장과 의장 두 인물과 치킨이라는 구체성의 한 인물이 겹쳐짐으로써 A가 B보다 앞선 시간에 위치할 수 있게 된다. 관객은 여기서 두 교차되는 세계의 순서를 다잡기 위해 분투하게 되는데, 그것은 거의 마지막 별개의 장에 이르러서야 자리를 잡게 된다.
치킨이 발견하는 건 일견 B에 대한 증거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B에 대한 인류적 차원의 의례 행위가 지닌 보편성과 역사성을 확인시켜 주는 차원일 뿐이다. 곧 그것은 그 기원을 명시하는 데 가깝다. 치킨은 귀중함을 향하는 인류에 대한 착오와 혼동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지만, 이는 그들의 행위가 올바른 것이었음을 선취하고 예기하는 차원인 것이며, 단지 사후적으로/물리적 차원에서 그것이 뒤로 위치할 뿐인 것이다.
치킨은 B보다 먼저 그들이 갈구하는 의미를 깨닫고 그들에 대해 논평을 한 셈이 된다. 그러니까 관객 스스로가 인지적 차원에서의 고고학적 탐침을 수행해야 한다. 무엇이 먼저인지, 어떤 과거로 보이는 것이 어느 과거의 순서상에 위치한 것인지, 그 과거는 어떤 맥락의 역사 속에 있었는지를 파악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A는 유물론적으로 땅을 파헤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B는 배치적 산물에서 트릭의 차원으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A와 B 모두 과거를 향하지만, A는 의지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러하며 B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결국 그 모든 것은 단편적인 재생의 단위를 띤다. 역사는 끊어져 있고 연결의 몫은 그것을 복기하는 자의 몫이다. 이 지점에서 치킨은 관객의 입장과 맞닿아 있다.
‘어려운 걸 어렵게 하기’
“어려운 거 어렵게 하기”는 〈세망뒤〉의 캐치프레이즈다. 망한 세계에서 불완전하게 기입되는 회장과 의장의 이 주장과 행위는 강박적인 도덕에 대한 추동으로 보인다. 효율성 자체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듯한 이 세계관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가, 또는 구원할 수 있었던가. 그럼에도 이 둘의 관점은 무언가를 시사한다. 그것은 세계의 망함이 “대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근본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기후위기도 그렇고 전쟁도 그렇고 민주주의도 그렇고 페미니즘도 그렇고 동물권도 그렇다. 적어도 〈세망뒤〉에서 “대충”이란 말은 금기시된다. 회장과 의장에게 그 말은 용납할 수 없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쉬운’ 어떤 것도 없다. 아니 쉬운 것마저 어렵게 한다. 여기에는 어떻게든 어려운 걸 어렵게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계란이 정치적 이념의 상징물이 된 이후, 까닭 없이 사람들에게 계란을 나눠주는 행위 역시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소소하고도 비루하거나 우스꽝스러운 행위일 수도 있는데, 전쟁 이후, 절연된 세게 내에서 그것은 어쩌면 가장 숭고한 행위일 수 있다. 닭파와 계란파라는 두 대립된 세력이 나누는 세계 속에서, 이들은 서로를 사살하지 않고, 무한한 증여만을 향해 고민하고 노력한다. 닭파는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나가고, 계란파도 닭파를 아마도 죽였던 흔적이 존재한다.
이 두 세력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가지고 싸우는 대상이다.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당위에 관한 싸움”이다. 곧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잠식하는 문제이다. 난센스로 남는 이 친숙한 문제를 전쟁의 차원으로 몰고 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심대한/극악한 유머이다. 그런데 이 심각한 상황이 인류의 역사로 증명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결국 ‘세상이 대충 망한 뒤’는 SF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부정성을 수용하는 방식들
잔해들로서 역사, 누더기로 기운 기억 파편들로서 신체, 그러니까 역사의 타자들을 되비추는 것[A], 일그러진 전쟁의 시기에 있음에도 순박한, 밝은 ‘표정’을 하고 있는 존재들이 전쟁으로 얼룩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서로의 표정이, 마음이 “펴”질 것을 요청하는 것[B], 〈세망뒤〉의 ‘실제’하는 존재의 행위는 이것이 다다. 참고로, 회장과 의장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역사의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유물론적 차원의 계보학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려운 걸 어렵게 하는 것, 이 하나의 추상성은 망한 세상에 대한 대안이나 해법이라기보다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자가 갖는 교착 상황 같은 것의 피치 못 함을 수용하는 것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의 위험은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다. 곧 그것이 오히려 현재에 대한 차원을 암시할 때 과거가 아닌 현재에 대한 ‘쉬운’ 긍정, 합리화일 수 있다.
곧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최선”이자 “한계”라는 치킨의 말은 물론 B에 대한, 그 직전의 B에서의 엄마, 아빠를 폭격의 현장에 두고 온 예담의 죄책감에 대한 위로의 값으로 잠재적 차원에서 대응되며,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는 명제에 의거한 당연한 진리이지만, 나아가 그 역사 속의 특정한 존재들, 어려운 걸 어렵게 하려는 사람들 자체에 대한 긍정의 의미로 최종 전화되는 듯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치킨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변명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최대한 적은 수의 폭탄으로 최대한 넓은 지역을 제압”하는 치킨의 “폭격기 조종수”로서 행위는 효율을 증대하는 지점에서 어려운 걸 쉽게 하기의 극단적 사례가 된다. 치킨의 이 갑작스러운 고백은 모호하고도 홀연하다. 치킨은 자신이 죽였을 수 있는 존재들에게 사과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치킨은 내재적 차원의 유령성의 차원에 반응하여 자신의 죄를 ‘실토’하고 있는 것 아닐까.
고착화되기의 부정성
회장과 의장은 모두 기억 상실을 겪는데, 다시 부활할 때마다 이전 기억이 자리 잡은 걸 알 수 있지만, 그 기억의 사건들까지를 기억하는 건 아니다. 가령 치킨의 유해를 고고학자로 추정하는 건 치킨에 대한 관계의 차원이 소거된 이후에 전이된 지식의 차원이며, “날아오르”는 닭 한 마리가 풍경으로 삽입되는 것 역시 정보가 배경으로 융해된 것과 같다. 그것은 희미한 단서가 지닌 규칙성으로써 (보이지 않는 관찰자로서 관객에게만) 작용한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치킨의 죽음은 그들에게 어떤 새로운 희망(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고고학이라는 개념‘만’을 그들에게 선물한 셈이다. 그런데 앞서 “고고학”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이들에게 세계는 어떻게, 언제 사상될 수 있는 것인가. 매번 인식하는 세계는 완전히 소거되고 그 직전의 개념만이 자리하는 것이라면, 회장과 의장 그들이 각각 “분리”와 “조립”을 했다는 것, 그것이 지닌 구체성은 그들의 근본적 차원의 경험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신체가 해체되고 녹아내리는 듯한 현실에서 실제적 행위로서 재생된다. 이는 극 자체의 중요한 알레고리로 자리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려운 걸 어렵게 하기의 예시로 부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리와 조립은 폭탄의 잔해를 수거하고 그것을 원래 상태로 복구하는 결과로서 작동한다. 곧 전쟁을 위한 토대이다.
그러니까 이 폭탄과 유해만이 계속 발굴되는 전쟁 이후 폐허가 된 공간에서 어려운 걸 어렵게 하기의 나름 대체재적 시도, 곧 열심히 노력하는 건 부조리하게도 부정성만을 증대시킬 뿐인 것이다. 곧 〈세망뒤〉가 그것의 대안으로서, 더 어렵게 한다는 것의 정의 자체를 용납할 수 있는 차원으로 제시하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이다.
변증법적 부정성!?
치킨이 폭탄을 장식된 계란으로 착각하며 희망을 가진 것에 기대자면, 부활절 계란인 양 계란을 나눠주는 행위와 사람들을 살상하기 위해 폭탄을 만드는 행위는 모두 어려운 걸 어렵게 하는 행위가 된다. 이 지점에서 어려운 걸 어렵게 하기에 무엇을 더해야 하는지, 또 어떤 차원에서 그것이 근본적으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회장의 분리수거가 자기 만족을 향한다면, 따라서 그것이 세계의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행위의 조각으로서 자리하지 않기에 재고될 필요가 있다면, 의장의 조립이 아닌 타자에 대한 작은 친절의 어려움은 센스 없는, 이론을 마치 실제에 그대로 적용하는 고지식한 행위로 보인다.
치킨의 희망 역시 자신의 죽음으로 직결된다. 어차피, 어떻게든 세상은 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로 이제 돌아간 B의 세계에서 무언가 막 시작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기시감인 동시에 착시라는 것을 〈세망뒤〉는 비교적 짧은 간격을 통해 분명히 일러준다. 희망을 품은 치킨이 바로 죽고 다시 나타난 회장과 의장, 그리고 바로 직후의 B의 사람들은 죽음으로 소급될 (것일) 뿐이다.
그런데 B는 마지막이 처음에 나오는 구조이므로, 그들이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은 기정사실화된 부분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희망은 없다. 다만 치킨이 사람들이 전쟁터 가운데서도 나눠줄 것으로 추측했던 역사의 가상적, 허구적 차원에서 희망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희미한 기원, 전통적인, 전승적인, 전래적인 차원에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전제할 수 있는, 그 희망의 단초 외에 B가 계란을 나눠주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일 당위는 없다.
한계의 가능성
그것은 희망을 붙잡기 위한 노력일까. 아님,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어떤 굴절된 시도일까. 왜 계란을 나눠주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는 “부활절 계란”이라는 종교적인, (전)근대적인 차원의 관습으로부터 그것에 의미를 쉬이 부여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개인-집단적 차원에서 어떻게 의미로서 발현된 것인지를 추적할 수는 없다.
썪은 계란인지 폭탄인지 모를 것들을 업어온 민주로부터 그것이 폭탄인 듯 묘사되는 것 역시 혼동이다. A에서 폭탄이 계란인 양 등장한다면, B에서는 계란이 폭탄인 것처럼 착각된다. 하지만 A는 폭탄을 계란으로 착각하고, B는 폭탄인 것 같은 계란을 계란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폭탄과 계란은 끊임없이 교환되는 기호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혼동 안에서 그러하다. A에서는 치킨이 혼동한다면, B에서는 관객이 혼동한다.
하지만 혼동을 하는 치킨이든, 하지 못하는 B의 존재들 모두 무지한 편이다, 그곳이 전쟁터인데도 말이다. 〈세망뒤〉가 묻는 건 “세상 마지막으로 남는 계란”(세윤)이 공동체를 향한 선물인지 폭탄일지를 묻는다. 기원은 갈음되지 않지만, 종말은 갈음될 수 있을까. 세윤의 소망과 같이? 그들의 모든 행위는 그 “시기를 살았을 사람들의 최선” 그리고 “한계”이다. ‘잘 못 만든’ 게 아니며 나아가 “잘못 만”든 것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세망뒤〉는 인류의 순전하고도 순박한 긍정성을 한 번 더 믿어보려는 시도일까, 그것이 장난 같더라도. 아님 그것이 곧 ‘잠식’당하는 것처럼 인류의 부정성, 곧 세상이 이미 망한 뒤일 뿐임을 주지시키는 데 불과한 것일까. 아님 어차피 세상이 망한 것일 뿐이라면, 세상이 이미 망한 뒤 그런 시도가 그제야 시작될 수 있음을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
틈을 허물어뜨리기
B에서 세윤과 예담의 대화에서, 사람들의 “꼬여있”는 삶이 계란을 나눠줌으로써 그들의 표정이 펴질 수 있다는 세윤의 말은, 삶을 표정으로 대체한다. 꼬여있는 삶이 꼬여있는 표정의 펴짐으로 펴질 수 있다는 소망이 그들의 시도를, 삶의 희망을 의미의 차원으로 기입한다. 삶-표정은 ‘펴다’라는 동사를 경유하며, 환유적 제스처가 은유적 차원의 의미망으로 증폭된다.
이는 그들과 자신들의 관계적 긴장이 누그러지는 것으로 동시에 전화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틈을 조금씩 좁히는 차원으로 살아간다. 예담의 반감 어린 반문에 대해 세윤은 “조금 펴져. 순간적으로, 잠깐 펴지고 그럴 때가 있어. 그럼 그 틈을 파고드는 거야.”로 응수한다. 적대가 의심이 거두워지고 신뢰와 공동의 시간이 만들어질 때 세계는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세윤의 말은 계란 나눠주기를 위한 것일까. 계란 나눠주기를 통한 효과에 대한 것일까.
여기서 “조금”이라는 것은 어떤 “틈”으로 연쇄된다. 어떤 틈을 결정적으로 포착하는 것, 결정적인 틈을 포착하는 것, 이로써 세계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뼈를 뼈로 보지 않으려는 마음”,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죽음을 발굴해서 그의 삶을 추적, 추정해보는 어떤 고고학의 시도, “최초 발굴자”가 지녀야 할 “의무”감은 “자신이 발견한 최초의 정황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이나마 “파괴”를 유도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희망의 어떤 ‘틈’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것은 복원의 차원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복원’은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뭘 찾”는 게 아니라 말이다. 그것은 본래의 삶을 “되살려보는” 일이 된다. 말 그대로 〈세망뒤〉는 회장과 의장을 반복해서 되살려낸다. 손전등을 비추면 그들은 살아난다.
물리적으로는 빛이 그들을 살리는 것이지만, 의미적으로는 그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그들을 다시 살려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회장과 의장은, 회장과 의장의 죽어있음으로서 삶은, 현재의 인류가 과거의 인류를 의미 차원에서 되살려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복원에 대한 의지
그런데 이 고고학적 행위는 회장의 쓰레기를 분리수거, 재활용하는 공정과 흡사하다. 재활용을 통해 사물의 신체들을 되살리고, “잘 가” 하며 진정한 이별이 가능해진다. 의장의 조립 역시 잔해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과 같다. 실은 두 일을 회장과 의장 모두 초월적으로, 자동적으로, 관성적으로 완벽하게 해놓는다. 그것은 그 이전 상태로, 사물의 본래적 모습 자체로 되돌린다는 점에서, 고고학의 연장에 있다. 아니 고고학이 지닌 꿈의 물신적 버전이 된다.
그것이 곧 고고학에서의 “복원”이다. 회장의 눈이 빠지고 의장의 손가락이 빠지고 하는 건 이들이 시체와도 같으며 살아있었음의 의식과 죽은 몸이 시차적으로 연결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이 죽었음의 의식을 결코 갖지 못한다. 그런데 이는 좀비와 같지 않은가. 언데드에 있는 이들과 세계의 존재들은 대화를 할 수 있다.
역사의 타자들을 되비추어 살려내는 일과 공동체의 결속됨, 축제의 열광 같은 걸 만들어내려는 일은 역사의 문화적, 사회학적 토대를 만드는 길이다. 그러니까 현재를 망한 상태로 그대로 두지 않고 ‘복원’하는 일이 된다. 치킨이 죽였을지 모를,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회장과 의장의 존재를 향해, 치킨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어느 사회가 “귀하게” 지킨 계란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B들의 행위를 향하는데, 물론 혼동이다. 하지만 이 작은 의미가 엇갈리더라도 반드시 실현되었던 것임이 사후적으로 의미화되는 것에 B의 의미, 그리고 그로써 재의미화되는 치킨의 죽음이 있다. 그것은 뒤늦었지만 소급으로써 획득될 것이다. 미래를 선취하는 시대 착오적 예기일 수 있는 치킨의 생각은 그것이 뒤늦게 실행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실현된 건 꿈(의 결말)이 아니라 희망(의 위대함)인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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