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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이온, 〈개기일식 기다리기〉: 공동체(에)의 부재
    REVIEW/Theater 2026. 9. 7. 15:56

    극장의 점유

     

    음이온, 〈개기일식 기다리기〉[사진 제공=세종문화회관](이하 상동).

    개기일식 기다리기(이하 기다리기)는 개기일식 기다리기라는 가상의 이벤트를 개최한다. 이때 의례의 차원으로 기입되는 이 행사는 연극의 기원으로 소급되기 위한 전근대적 환원이다. 연극은 어떤 것도 특정하게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수용)한다. 이는 자칫 혼동될 수 있지만, 다양성의 판본이 아닌 공통성의 판본, 공통성을 무()의 형상으로 기입하는 판본이다. 즉 김상훈은 모두를 코러스로 바꾸고자 했다.

     

    고대 그리스 원형극장에서 무대(skēnē)와 관람석(theatron) 사이에 위치한 코러스의 공간이었던 오르케스트라(orkhēstra)만을 팽창시켜, 배우/퍼포머(의 무대), 관객()을 소거하여 강제로 함께 있게 하는 전략, 그것이 (훈련된) 코러스인 것이 아니라, 코러스라(는 공간 안에 있다)고 일단 규정하고 보는 것. 어떻게 보면 기다리기는 이 같은 차원에서 모든 것은 연습하는 것이며, 실제의 수행을 유예한다.

     

    우리가 기다리는 건 어떤 것도 사건이며, 어떤 특정한 것만이 사건이 될 수 없는 그 같은 시간 아래 우리가 던져지면서 갖는 감각은, 실은 무언가가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나 예감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도착했거나 불현듯 출현하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은 식별의 차원에서 크게 특별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다리기는 그러한 감각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초래하는 차원에서 작동한다.

     

    일종의 대기 상태, 지연 전략으로서 수행, 가능성의 단일 경로가 아니라 잠재성의 무한한 지대를 긍정하기, 따라서 기다리기가 가설하는 가장 명확한 하나의 유일한 콘셉트는 바로 극장 자체의 점유이다. 편재하는 퍼포머보다 편재하는 관객이 전제조건이다. 퍼포머는 그 안에 잠입할 뿐이다. 이 편재성으로부터 산만함은 가능해진다. 그것은 도떼기 시장 같은 돗자리들의 난립에서 2층 객석, 로비, 극장 전반으로 확장된다.

     

    자유민주주의적 공간

     

    모두는 편재한다. 관객이 관객 사이에 있는 것처럼, 퍼포머는 관객 사이에 있다. 퍼포머는 그 사이를 부각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과도한 틈으로 현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물리적으로 사이를 벌리지는 않는다. 이들이 상기시키는 건 관객이 고립 영역이 아니라 경계에 있다는 인식이다. 그것은 개별 영역이 침범받거나 다른 개별 영역을 침입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민주주의적 사회에서의 동등함을 가정하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곧 극장이 텅 빈 장소로 체현됨을, 우리의 신체가 세계(의 신체)가 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이의 시선 이전에, 우리의 시선으로 소급당한다. 여기에 뭔가를 더하는 것은 우리의 바깥이 아니라, 우리라는 바깥을 확인시킬 뿐이다. 따라서 외부는 친연해진 것이 아니라 낯선 것이 더는 없다는 사실, 곧 친연한 것 너머의 기준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친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가 외부인 동시에 내부라는 것, 외화되면서만 내화된다는 사실은 어떤 소실점”(김은한)도 정합적 기준일 수 없음에 근거한다. 장면의 어원, 스케네는 또 다른 벽의 가설로서 얇은 스크린-막으로 대체된다. 곧 오케스트라 뒤쪽의 스케네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고 극장과 영화관의 공통된 기원의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때 이미지는 결정적인 것이라기보다 시간 측정의 기계이자 오케스트라에 대한 편재된 시선을 반영한다.

     

    그것은 일종의 CCTV적 감시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자의적 포착의 다양성 속에서 우리가 사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시는 가깝고도 비켜나는, 가깝게 비켜나는 시선들로 이뤄진 집체성을 조망하여 확인시키고 우리가 이 세계 안에 함입되어 있음을 확인시킨다. 질식할 것 같은 세계를 안정화한다. 그러니까 이는 멀리 있는 동료를 파지해 오는 일종의 친밀함의 인증샷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깝고도 멀다.

     

    무대를 탈구시키기

     


    사건은 감축되며 매개된다
    . 아니 매개되어 감축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매개이자 장애물이다. 모든 관객은 하나의 사건에만 귀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하나의 사건에 대응하는 관객이라는 것이 구성되지 않는다. 이는 무대를 소거하여 신체로 수렴시키며, 더 정확히는 신체의 사이로 수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얇은 막은 이 모든 이의 질량감을 가볍게 잘라서 들어올린다. 모든 것은 그와 같이 휘발된다.

     

    작은 조각의 결정은 모든 시간이 포착될 수 없으며, 각자의 자율적 공간이 하나의 무대로 가시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저 스크린은 산만한 극장()의 시선, (단일) 무대의 불가능성에 대한 식역이다. 무대가 개별 차원으로 수렴됨을 지지하는 건 휴대폰을 곁들일 수 있는 개체 소급적 장치 때문인데, 이는 음성해설의 자리에 대신들어오는 채팅방으로써 집단을 규약한다.

     

    백남준아트센터 버전[각주:1]에서의 휴대폰-스크린이 이곳이 아닌 다른 텅 빈 공간을 현상함으로써카메라 자체가 부재를 감도(는 가운데 그것을 파지하는 데 실패하)는 방식이다., 부재의 차원 아래 그 스크린에 전사하며 자신을 유령적 신체로서만 공준하는 기이한 병치술을 선보였다면, CCTV-스크린의 현재성과 함께 익명입장 시 가명을 설정해야 한다.의 자율성이 지닌 민주주의적 표현의 장으로서 우리는 확인된다.

     

    곧 백남준아트센터 버전이 공간이 부재를 현상하는 방식으로서 기능하고자 했다면, 세종문화회관 버전은 과잉을 손질하기 위해, 어떤 부재도 가능하지 않음을 확인하기 위해 작동한다. 여기서 채팅창은 그 공간과 친연하지 않으며 동시에 시간 역시 탈구되어 있는 온라인상의 세계로의 연장, 동시 다중 ()접속이 가능했던 김상훈 연출의 유인매장(2025)의 그 채팅창과 교환된다[각주:2].

     

    극장의 틈

     

    유인매장이 오히려 하나의 공간 안에 모두가 자리하지 않아도 되는 비극장 공연을 가설했다면, 그러니까 실재를 점유하기의 불가능성을 공동의 차원으로 인지, 자각하며 열악한 파트타이머 노동자의 불안정성을 시각화하여 가상-실재적 세계 안에 교착된 자아로서 탈승화되고자 했다면, 나아가 역설적으로 극장의 환영성이 지닌 통일성의 규약과 전제를 비트는 소급점을 만들고자 했다면, 조소와 자조, 너저분함의 이 시도들은 기다리기에서 가라앉는다.

     

    무엇보다 하나의 시공간을 각자가 점유하는 모두의 극장에서만 그것을 배가함으로써 우리는 어느 정도 인격적 주체의 자리를 벗어던질 수 없게 된다. 교양을 지닌 존재여서가 아니라 교양을 지니지 않을 이유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다리기가 갖는 실재란 무엇인가. 이 상상계적 환상이 가득한 세계, 극장이라는 장소를 애초에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공동의 염원과 꿈을 팔겠다는 뻔뻔한 연극의 타락을 우리는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기다리기는 곧 무엇을 충당하는가. 허구적 장면의 성사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기다리기의 행위로, 무용함으로 치환하는 데 목적이 있는 시간에서, 그러니까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이 자기 안락감과 기꺼운 여행의 모드로 치환되는 상황에서, 다변화된 소비 욕구와 타겟팅에 대한 진정성의 개념을 고안하며 성취해 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전략의 일환 아닐까사실상 싱크넥스트라는 세종문화회관의 굿즈/상품으로서 기다리기역시 고가격대로서 제시된다(이는 음이온의 기존 작업들에 부여된 티켓 가격에 비해 현저히 높다.). 묵묵하게 무언가를 수행하는 퍼포머들은 노동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자유로워 보인다고 해도, 또 모든 것이 즐거운 피크닉의 이상적인 장면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그것을 대속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 스스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실재는 거기에 있다. 전근대적인 공동체의 형식을 의태하고 있지만, 실은 장면화되는 현실의 환상 너머로 작동되고 있는 노동의 신체들, 모든 것이 흡착되는 매끈한 세계의 힘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한 극장의 시간에 있는 신체가 내는 불균질한 힘이 내는 균열 같은 틈 말이다.

     

    어떤 노동의 형식들

     

    이는 유인매장의 실재적 잔여로서 옮겨붙(으며 선취되)는 바다. 실제 모든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우울하지 않았다. 실상 무언가를 더 열심히 하는 자의 착오 같은 것이 혼동을 주었을 뿐이다. 혹은 혼동 자체가 착오였을 수 있다실상 무언가를 더 열심히 하는 자에 대한 착오 같은 것이 혼동을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령 주변부에서, 발화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는 주체들, 그들이 좇는 건 소위 내향적 자유로움일까, 아님 철저한 그림자 노동의 일환일까.

     

    이는 쉬이 판단하기 어렵다. 그 반대의 지점, 발화의 중심적 토대를 차지하는 주체들, 방송에 등장하는 존재들이 연기/배우의 일반적 차원을 재현하고 있는 것 아닌가에 대해 답변하기 어렵듯 말이다. 모든 것은 표면에 둥둥 떠다닌다. 반면, 꾸물거림, 공허한 시도와 같은 그림자적 행위는 장면화되지 않는다. 중앙 집중화되지 않는다. 거기에 소리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것이 미약한 노이즈로서 잔존한다.

     

    가령 입구 쪽 스크린 부근은 맞은편 중계석이 자리한 스크린 쪽에 비해 다소 주의의 차원에서 밀려났다라고 볼 수 있었는데, 그러니까 먼저 온 관객이 유리한 시각 장을, 또한 중심의 볼거리그런 게 있다라면를 획득하게 되는 구조였다. 늦게 출입한 관객은 입구 쪽으로 밀려나게 되는데, 이때 입구 계단 아래에서 몸을 풀던 그리고 스크린 옆에서 몸을 풀던 각각 권혁재와 김휘람은, 시야 바깥에 고착된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관객 중간에 자리 잡는 것이 향하는 가시적인 것의 비가시적 자리 잡음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 자체의 가시성을 준다. 비계 지지대 양쪽에서 철봉 묘기를 시도하던 권혁재와 발레 기본 동작과 같은 움직임을 벽 쪽 부근에 옮겨다니며 하는 김휘람은, 자율적 시간을 갖지만 동시에 이 공연에서 탈구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보다 중요한 건 파트타이머 노동자가 지닌 정동의 형상 같은 것 아닐까.

     

    오케스트라 연극 개념에 대하여

     

    기다리기의 잠재적 영토의 가설 방식은 나아가 외부적 차원에서 잠재적 영토로서 또한 기능하게 되는데, 앞서 자기 참조의 토대로서 기다리기를 점검했다면, 기다리기자체가 여러 작업에 대한 주석으로 작용하는 것이다이는 물론 동시대적 감응 관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우선 감자피아의 열린 연극회 : 오픈 오케스트라 쇼(이하 열린 연극회)는 오케스트라 자체를 공간으로 그리고 관객의 참여적 몫을 확보하는 것으로 연장한다.

     

    관객을 포함한 배우 모두를 오케스트라에 위치시킴으로써 연극을 보는 자가 아닌 하는 자의 몫으로, 보는 것(거리를 두는 것)이 아닌 수행하며 감각하는 것으로 두는 것이다. 관객과 공연자 사이에 놓인 분할선을 물리적이고 장소적으로 재분할 또는 합치하는 전략을 통해, 관객의 장소, 곧 관객은 사라질 수 있을까.”[각주:3].

     

    오케스트라의 영토를 개념적으로 동시에 이념적으로 공유했던 이 작업은, 흥미롭게도 여러 방식의 실제적인/실재적인 차원으로 옮겨감으로써, (기다리기이전에) 이성직의 작업에 대한 주요한 한 경로를 추적해 보는 단초를 제시한다.

    가령 별도의 무대 없이 극장을 전시장으로 구성하되 그 안의 요소 모두가 관객과 접변하는 생동하는 사물이 되는, 관객이 돌아다니며 겪는 모든 것이 극장의 시간이 되는 이성직의 착생 안티 식물 고네(2025)[각주:4]는 어떻게 보면, 열린 연극회 : 오픈 오케스트라 쇼로부터 오케스트라에 대한 대입이 엄격하게 규정되는 것에서 자유로워진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기다리기는 배우 자체를 가시화의 경계로, 식역으로 둠으로써 무대를 완전히 해체하는 대신, 파편화된 시간을 쌓아나가며 개인화된/개체화된 시간으로 수렴시키고자 한다. 거기에는 개인의 자리, 자율성의 주체를 향한 자리가 있다. 우리는 개성을 지닌, 자유로운 개인으로 갱신된다. 그런데 이는 피크닉을 전용하는 자본주의적 신체, 힐링적 형해화된 주체성의 자리로 쉬이 전이되는 것 아닐까.

     

    공동의 경험을 위해

     

    열린 연극회가 공동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면, 시도할 수 있(는 정도로 인원이 적)었다면, 기다리기는 지나치게 많다. 공동의 경험보여주고 봐줘야 하는, 교환가능한 극장사의 세계”(김상훈)에서의 소거의 전략이 아닌, 무언가가, 아니 무엇이든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런데 사실, 오케스트라가 사라진 것(의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담고 있는 세계가 어떻게 극장에서 구현될 수 있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김상훈이 결국 바라는 건 가상과 현실을 이어주었다고하는 코러스라는 역할의 구현이다. “중간이자 미디엄 자체로서 관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미해지는, 파편화되는, 시민을 닮아가는 배우는 관객 자체를 체현하면서 관객으로부터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비가시화될수록 오히려 더 얼룩으로는 짙어지는 것 아닐까. 마치 실재의 차원을 주변부의 퍼포머들이 수여했듯 말이다.

     

    공동의 세계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더 직접적인 행위가, 시도가 필요하다. 가령 착생 안티 식물 고네는 관객을 체현하기보다 관객을 직접 매개하는데, 이는 관객을 관찰하며 무대 바깥으로 사라지는, 그럼으로써 무대의 식역을 희미하게나마 증명하며 실은 그 무대라는 구분을 경계부에서 지정하는, 그러니까 그 바깥(이 없음)을 가리키는 행위로 나타나며, 이른바 안티고네 역할의 강혜련 배우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다리기는 스크린-벽을 마주하며 방송을 하여 무대를 몰아낸다.

     

    동시에 이는 스크린으로 송출되면서 관객으로부터의 시선을 거두고, 다시 환영적 무대를 만들어 낸다. 2의 장소로서 무대가 어딘가에 가설되어 있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그 무대가 예외적이고 중앙 집중적으로 모두를 잠식해야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한 그것이 매체의 전반적인 지형을 이루는 토대인 것도 분명하다. 스크린의 증폭은 무대의 배가가 아니라, 무대의 환영성을 증폭하며, 동시에 무대 자체를 분산화하며 형해화한다.

     

    공동체 위에

     

    기다리기는 연출의 지시와 감독에 의한 배우들의 배치에 기반을 둔다기보다 연출 역시 극으로 흡수당하며, 공동체의 합의와 놀이로써 또 다른 공동체에 기생하기, 평행하는 두 개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공동체 간의 느슨한 시차와 절합의 여지를 해소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 내부 차이에 대한 간극을 해소하는 것은 부가적이거나 부차적인 목표로 전환된다.

     

    7살 어린아이 상훈으로 분해, 특히 거의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극장 중앙 공간을 사용하여, 인터뷰이로 분하는 김상훈은 연출의 자기 조소적 농담을 과잉으로 투척해 밈이 되기 위한 노력에서뿐만 아니라, 자기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며, 그러니까 특권을 지닌 이, 바깥에 자리하는 이, 이곳을 무대로 바깥에서 바라보는 이가 아님을, 그런 존재는 없음을 명시하기 위해 거기에 사실 있어야 한.

     

    친밀함, 친목의 차원이 공동체에 스며 있다면, 그 반대로 타자성이 확보되는 방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개기일식이라는 맥거핀에 가려 있다. 그러니까 개기일식이 절대적인 타자의 자리를 점유한다. ‘우리는 텅 빔이 아니라 부재를 점유한다. 부재를 충만함으로 채운다. 관객은 부재의 기표 자체가 된다. 관객이 기다리는 건 개기일식이 아니며, 또한 개기일식이라는 부재 역시 아니며, 그 부재의 자리를 충만한 공동체의 스펙터클로 채우며 소거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기다리기는 부재를 이중으로 취하고 이중으로 지운다. 관객을 부재로 기록하며 관객 자체가 부재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덮는다. 이때 공동체 내에 타자가 출현할 수 있을까. 관객이 타자를 마주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공동체 안에서 수용될 때, 그로부터 어떤 간격을 도출할 수 있을까. 극장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을까.

     

    타자성 대 개체성

     

    아마도 이성직의 기이함은 열린 연극회: 오픈 오케스트라 쇼착생 안티 식물 고네, 거슬러 올라가서는 아파야 낫는다 건강백세!에서 꾸준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배우가 아닌 존재를 캐스팅하는 가운데, 그것의 낯섦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데서 온다. 곧 그와 같은 레벨에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러니까 그는 실재를 매개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그에 비해 실재를 매개받지 않는다.

     

    이성직이 (여러) 타자성을 낯선 차원에서 그냥 수용해 보기 자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김상훈은 어떤 연극의 정신을, 이념을 연대와 유대의 차원에서 공동체 짓기를 통한 일시적인 연극 만들기에 두는 것으로 보인다. 역할에 대한 강박에서 탈역할에 대한 자율적 떠맡기의 차원으로부터 나아가며 소거할 수 있는 건 공동의 시간을 이루는 것 자체의 강박이다.

     

    그러니까 무대의 강박은 실은 그 내용의 차원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하나의 시간을 가리킨다는 것 자체에 있다. 이때 모든 존재의 시간을 개별화시키는 전략은 우선 모든 배우의 시간을 단락시키는 전략을 통해 이뤄지며, 마찬가지로 관객 모두를 동등한 파편으로 두며 개별적인 차원으로 수렴시키는 전략을 통해 이뤄진다. 이 둘은 서로 협력하는 게 아니라 조응한다.

     

    그러니까 이 개별화로부터 벗어나 유격을 좁힐 때, 곧 공동체 자체의 현존에 가까워질 때, 거기에는 그들만이 공유하는 컨텍스트가 있고, 어떤 소통의 기류가 있고, 유희가 있고, 정동이 자리한다. 가령 최근 음이온이 참여한 삼봉낙타퍼리의 그릭 트레제디 디지털 떼창 음원장례식↘〉은 그 극단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층위

      주체의 레벨 타자의 레벨
    자율도 높음 낮음
    실재의 정도 낮음 높음
    정동의 방향성 내부외부 외부내부

     

    집단 내재적 정동 대 개체의 자리가 주는 정동

     

    이를 실시간으로 SNS에서 찍어 올린 영상들을 보면, 현장 안의 즉흥성이 부각되면서 각자의 고유성들이 짙어지고 강도를 더하며, 아울러 정해진 내용과 순서를 초과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그들 바깥에서의 다른 맥락을 형성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그리스 비극 엘렉트라에 나오는 코러스 대사를 음원으로 만든 공연을 당시 배우들과 코러스장의 퍼포먼스 아래, 관객 각자의 스트리밍 사이트를 가지고 떼창[각주:5]을 하는 이 공연에서, 이미 내용이 음원으로 해체, 형해화되었듯 오직 형식에의 유희에 모든 걸 투여하게 된다.

     

    가령 이 더 많은 배우의 소리를 하나의스피커로 투여해 하나의공간에서 공유한다는 것을 꺼뜨리는 것, 개체의 차원을 확성짓지 않는 것, 공동체적 긴장과 교류가 절대적일 수 없는 것, 기다리기는 다만 그 지점에서 결정적으로 분기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하나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소리는 스크린보다 더 극장을 확고하게 감싸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관객, 극장의 소리를 일종의 백색소음으로 감싸 안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의 백색소음이 만든 주조음 안에서 각자의 역할에 매진할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기괴함이 있는데, 그 소리가 이질적이지 않음을 물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의 이질적임을 어느 누구도 고려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구체음악적 범주화와 그에 따른 비선형적 재생에는 분명 천체 현상, 라디오라는 매체성, 자연의 동물들 울음 외에도 전쟁의 폭격과 같은 소리 등이 자리했던 것이다.

     

    이때 그것이 가상이라는 것을 물론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재난이나 난민, 전쟁과 같은 근거리의 사회적 경험을 상기시키는 맥락이 있음에도, 극과 어떤 연결성의 타진이나 의미 부여로 이어지지 않는 세계가 지속된다는 것이 기이하다. 그러니까 우리의 미션은 단순하고도 강렬하고도 무엇보다 가벼웠던 것이다. 어떤 부담도 없는, 그 부담이 없기에 채워 넣을 수 있는 매끈하고도 충만한 농담 같은 시간들.

     

    관찰자의 윤리 (없음)

     

    기다리기가 또 하나 상기시키는 맥락의 공연은 여기는 당연히, 극장발굴되지 않은 언어의 고통으로, 학교에 부재하는 한 학생에 대한 윤리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제3자의 시선을 단속적으로 기입하는 문장들이 그러하다. 가령 음악 선생님은 수업도 하지 않고 종이 칠 때까지 B를 찾았다.”에서 우리 반에 없는 친구의 이름을 공책에 적어놓고 계속 불러도 되는 것일까.”로 이어지는 어떤 계열들의 문장 속에서.

     

    윤리는 타자와 현실의 간극 속에 위치한 제3자에 의해 진작된다[각주:6]. 이는 개기일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모호하고도 표피적으로 공연에 스며든다는 점에서, 한 시간 여백을 앞두고 중간의 빈칸을 채우기 위한 일종의 더미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앞선 공연의 오마주이거나 패러디 차원에서만 어떤 의미를 띤다는 점에서 미심쩍다.

     

    기다리기는 공연의 내용보다는 형식을, 얼쩡거리고 머뭇거리고 서성거리고, 주변을 맴돌고 배회하며 그 간극을 확인하는 형식이 곧 윤리인 앞의 공연에서 사실상 그 문체를 빌려오며, 실은 타자와 화자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참조된 공연을 연장해 간다. 이는 어떤 체화된 반응으로서 몸을, 연극이 끝나고 남아 있는 기억의 잔상을, 공연의 리듬을 재기입하는 행위에 가까운데, 비판적인 대신에 관성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단속적인 말들은 위험하게도 현실 층위에 끼어들며 그 내용 역시 부정성으로 전화되어 진작되어 있다. 예컨대 10여 분 정도 남은 가운데, “아무도 B의 장례식장을 알려주지 않아서 가지 못했다.”와 같은 문장이 그것이다. 이는 비극을 마치 장르적 서사로 연장하면서 배반, 패러디한 결과와 같으며, 과거의 기억이 아닌 미래의 어느 시점을 과거로 끌고 왔다는 인상을 준다.

     

    공동체에의 실패

     

    어쩌면 김상훈은 구자혜의 문장들이 과거를 맴돌며 거기에 고착되어 있음으로부터 탈출을 꾀하며 그것의 외전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타자에 대한 윤리의 연장선상에서 애도마저도 불성실한 태도로써 일관함으로써 앞선 부조리에 대한 (참여가 아닌) 회의적 차원을 끝까지 관철하는 셈이 된다. 이때 김상훈은 형식을 추출해 전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기다리기의 끝과 맞닿음으로써 죽음은 실재가 아니라 가상의 차원에서 죽음을 가지고 노는 일종의 화음, 피처링이 된다.

     

    그런데 괜찮아. 원래 모든 건 한 번만 볼 수가 있어. 그게 두렵니?”로 이어지는 하영미의 막바지 말은, 개기일식을 이제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짜라는 것을 기이하게 애무한다. 개기일식을 보는 것이 세상의 끝이라도 된 듯 말이다.

    그런데 실은 기다리기는 부재라는 끝을 유예시키기 위해 작동하는 것과 같다. 개기일식이 곧 맥거핀임을 가리기 위해 기다림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기다림 자체가 개기일식의 부재를 가리기 위한 맥거핀이다.

     

    개기일식은 분명 부재로 현상된다. 그것은 거의 유일한 공통의 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의 무대를 가설하는 건 모두에 근접한다. 막이 비로소 오르지만, 공연은 시작되려는 순간 끝이 난다. 그러니까 막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극장이라는 희미한 자의식 아래, 무언가의 도래를 믿어 본다. 무언가가 움직였다면, 작동했다면 바로 그러한 의식이 기울어지는 가운데 발생하는 비가시적인 정동이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지지체를 얻지 못한 미완의 의식이다. 사실 무언가가 다 밝아져서 주의를 사로잡는다. 하나의 빛 아래 공간이 하나로 재편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막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나뉘어 있던 개체들을 예외적으로 공동체로 규합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까. 실패한 공동체는 공동체의 실패와는 다르다. 그것은 공동체에의 실패, 공동체라는 존재가 느끼는 실패감이다. 그 공동체만이 느끼는 실패라는 충만함이다역으로 그 공동체를 규합하는 의식.

     

    내파시키는 외부

     

    그런데 왜 우리는 극장에서 실패해야 하는가. 그것은 왜 필요한 것일까. 기다리기는 극장이 억압적 제도의 산물이며 합의라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공연을 해체시킨다. 자율적 개체의 역능을, 소비주의적 주체의 향유를 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공약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는 선택을 취할 수 있었을까. 마지막 공통의 경험, 공동체의 실패라는 경험을 만들고자 했을까.

     

    기다리기는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잠재적 희망 안에서, 허구보다는 가상의 분위기, 징후, 정동 같은 걸 만들고자 한다. 물론 허구 역시 자리한다. 김보우와 하영미가 시차적으로, 이접적으로 그러니까 한 번은 공연 중간쯤 극장 바깥 로비에서 김보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한 번, 그리고 뒤늦게 입구 반대편 쪽 스크린을 향해 걸어가면서 멀리 소리를 보내는 것으로 한 번, 그렇게 하영미는 김보우 위에 덧입혀진다.

     

    앞서 언급했던 대사를 포함해 아마도 동일한 대사들은, “그때 우리가 함께 앉았었던 바위와 같이 헤어진 후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접된 시간 자체를 불러온다. 전사가 자리하지만, 그것은 극장 바깥의 맥락을 불러오며, 현재와 평행하는 또 다른 극으로서 결코 온전히 만나지 못할 것임의 차원에서 그것이 펼쳐진다. 그것은 연극이며 또한 연극적이다. 관객은 그것을 보기보다 그것이 연극임을 인지한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연극이지만 그것은 연극적이다.

     

    연극은 마치 사건으로서, 사물로서 주어진다. 이는 앞선 두 명의 퍼포머가 무대 주변부를 배회하면서 실재의 잔여를 가지는 것과 다르며, 방송이라는 약속된 무대의 틀을 깨뜨리면서 동시에 대놓고 하나의 무대를 삐죽 도입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배우라는 인공성을 장치적으로 시험하는 것이 주는 건 연극이 저 바깥에 이물감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부 회절되는 곳곳에 퍼포머들을 비로소 재확인시키려는 몸짓일까.

     

    공통성을 조각하기

     

    연극이라는 것의 작위성을 비판하는 것일 수도, 연극을 전사로서 흩뿌리며 이전의 역사이거나 이후의 역사인 이질적 시간 층위로서 환상성을 부여하여 개기일식이 지닌 추상성의 시간을 물리적 토대로 한 번은 갈음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는 이 삽입 장면은, 극적인 드라마의 서사를 물리적이고 시차적으로 횡단하며 기입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시끄럽게 극장 바깥을 맴돌던 김보우의 목소리를 따라 이동한 사람은 극소수이며, 그것이 둘의 서사로 정합됨을 감각하는 사람 역시 더욱 드물 것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비의적으로 감추어진다.

     

    기다리기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곁가지로 놓이거나 그렇게 치부되거나 또는 중요하지 않은 차원으로 전개됨으로써 모든 것을 의미화한다, 또는 평평하게 만든다. 이 장면 역시 극적 치솟음이 어떻게 단락되며 잉여적 부산물이 되는지, 그 과잉됨 자체가 얼마나 한갓된 것인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반동적으로 주어지는 실은 의미 없는 극이었을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맥거핀이라면, 그 안의 행위들이 모두 기믹이라면, 이 가짜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진정함 역시 의사-행위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러니까 우리의 행위 자체가, 가짜, 연극적 행위라면, 연극의 부정성을 더 분명하게 확인시키는 건 연극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게 만드는 거리 두기의 시도일지도 모른다. 아마 기다리기는 이 행위의 반진정성이 아닌 비진정성, 탈진정성의 차원을 반향하는 차원에서 사실 쓰이는 것 아닐까.

     

    기다리기에서 무언가 교환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물리적으로 무대라는 특권을 누구도 점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두가 무대 위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공통적으로 기다릴 수 있을까. 연극이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기다리기는 그것을 성취하기보다 시뮬레이션해본다. 그러니까 모든 특권은 우리 모두의 잠정적 합의에 기초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지점이 모두에게 진정한 의사-흥분을 부여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함께 하는 연극적 공동체는 만들어지지 않고 잠재적으로 구성된다. 김상훈은 만들지 않고 구성한다. 실은 만들지만 그것들은 시간을 메우기 위한 파편적 그러모음일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연극이라는 타자성이 구성되고 나서 다시 하나의 초점화된 목소리로부터 우리는 끝을, 마지막의 소진을 향해 함께 나아간다. 그 끝은 물론 극장이 공통성의 토대를 이룬다는 단 하나의 전제만을 가리킨다.

     

    김민관 편집장

     

    음이온 on Sync Next 26

    개기일식 기다리기

     

    08.07 () - 08.10 ()

    평일 19:30, 주말 15:00 / 180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구성연출 | 김상훈

    드라마투르그 | 정인혁

    안무 | 허윤경

    건축 | 하이퍼스팬드럴

    조명 | 김형연

    조명 프로그래머 | 서가영

    사운드 | 카입

    음향감독 | 오연주

    영상 | 전석희

    출연 | 강상헌 , 구자윤 , 권혁재 , 김경헌 , 김도윤 , 김동민 , 김보우 , 김승록 , 김은한 , 김중엽 , 김해솔 , 김휘람 , 박서영 , 박소현 , 배시은 , 백민재, 서현성 , 송승언 , 박준형 , 윤가연 , 이소여 , 이채은 , 임영 , 전혜인 , 정나원 , 조어진 , 하영미 , 한지수 , 허윤경 , 황숙영

     

    무대감독 | 이라임

    정인혁

    기획PD | 박이분

    전강채

     

    접근성 기획PD | 성다인

     

    접근성 드라마투르그 | 허영균

    접근성 자막 제작 | 임민정

    접근성 기록 | 오승은

     

    수어통역 | ()이래봄

     

    제작PD | 박선미, 조휘영

     

    공동제작 | 세종문화회관 , 경기문화재단 백남준아트센터

     

    젤라또 | 녹기전에

    1.  1. 참조=「음이온, 〈개기일식 기다리기〉: 부재를 응시하는 법」,  https://www.artscene.co.kr/2352.  [본문으로]
    2.  2. 참조=「김상훈, 〈유인매장〉: 유인(誘引)하는 유인(有人)들로서 극장」, https://www.artscene.co.kr/2012.  [본문으로]
    3. 3. 감자피아, 열린 연극회 : 오픈 오케스트라 쇼(이성직 연출)에 대한 주석: 기원으로 소급하며 자유로워지기, https://www.artscene.co.kr/2025. 크레디트 명단에 나왔듯 여기에 (현장에는 없던) 김상훈은 이념적으로 공동 작업으로 참여했다. 곧 연극의 이념 자체를 공유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4.  4. 「이성직, 〈착생 안티 식물 고네〉: 『안티고네』라는 매개」, 참조=https://www.artscene.co.kr/1994.  [본문으로]
    5. 5. https://www.seoulfringefestival.net:5632/load.asp?subPage=270. [본문으로]
    6. 6. “결국 이 선생님들에 대한 태업, 저항, 학교생활 자체를 유예하고 지연시켜 학교에 오지 않은 또 다른 Q와의 거리를, 시간을 좁히려는 몇 가지 행동 양상이 떠오른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 발굴되지 않은 언어의 고통(구자혜 작/연출): 고통을 발굴하는 언어(의 역능), https://www.artscene.co.kr/227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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