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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구, 〈15분이나 기다렸지만〉: 실재(에)의 침투REVIEW/Theater 2026. 9. 16. 15:28
문 안에서

이양구, 〈15분이나 기다렸지만〉©남산제작소[사진 제공=15분연극제](이하 상동). 〈15분이나 기다렸지만〉(이하 〈15분이나〉)은 장소와 사건의 차원에 기대어 있고, 이 둘은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특이하게도 〈15분이나〉는 희곡이 아닌 장소에서 (희곡 역시) 출발한다. 이는 반대로 희곡이 장소를 완벽하게 내포하고 있음이 아니라, 그 장소에 맞게 재배치되며, 장소성에 따라 그 희곡의 언어가 비로소 자리 잡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15분이나〉는 어떤 장소성을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기도 하다.
아마 가장 주요한 장치라 하면, 이곳이 하나의 닫힌 공간이라는 점이며, 총 세 개의 문 중 두 개의 문이 활용된다는 것이다. 테라스가 보이는 투명 문이 일종의 가상-실재적 공간으로의 입구가 되며, 사실상 하나의 무대(의 도입부)이다. 곧 다른 공간으로 건너갈 수 있고, 건너가야 하는 인물들의 숙명이 공간을 특정 물리적 방향성으로 인계하며, 해당 장소에 운명 공동체의 속성을 부여한다.
또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이곳이 프로시니엄 아치가 자리하지 않으며 배우와 관객이 거의 동일한 차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따로 객석이 없으며, 실은 모든 객석이 하나의 무대이며, 강제적으로 하나의 장소 안에 모두가 동일한 가상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물론 정보와 행위의 극단적인 비대칭이 기존의 극장과 같이 이어지며, 관극과 연기의 차원이 명확히 분기되는 가운데, 관객은 동일한 역할을, 동일한 역할에 대한 정보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대기표를 꼽고 오지 않을 순번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지향점이 생겨남으로써 장소적 차원은 분화되어 연장된다. 곧 ‘이곳’이 유일한 무대이며 동등한 모두의 무대이지만, 따라서 오직 객석만이 물리적으로 무대를 가정하고 있지만, 가상의 저쪽이자 실재의 ‘저쪽’이 지향되면서 무대를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배우가 후반 그곳으로 문을 열고 건너감으로써 그는 부재의 시간 안에 위치하게 된다.
부재하는 존재

극은 부재를 무대적-극적 장치인 암전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차원으로 둔다. 배우가 사라지(고 관객이 없는 곳에서 실제 어떤 행위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시간은 완전히 비워진 채로 있다―사실상 암전이 실재의 지연된 시간 자체라는 것에 상응한다. 사실상 무대는 없고 오케스트라만이 자리한다. 그 안에서 관객은 코러스로서 역할을 수여받는데, 그 안에서 배우들은 실재를 매개하고자 한다.
“창구 직원”이라는 ‘유일한’ 배우는 이미 부재한다. 그 부재의 이유를 극 내재적으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15분이나〉는 카프카식 부조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우리는 교착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실상 내부의 경계보다는 외부와의 경계 안에서, 외부성과 내부성의 정보 비대칭성이 공간을 잠식한다. 내부의 총체는 보이지 않는 외부와 대응한다.
그런데 그곳은 직원이 앰뷸런스로 실려갔다는 정보에 의해 또 다른, 더 먼 외부의 장소성을 도입할 뿐, 그곳이 어떤 실재로 이뤄져 있는지에 대한 초점을 흩트리는데, “사람들은 있는데 말을 안 해요.”(우범진)는 그곳이 간접적으로 묘사될 수 있을 뿐, 소통과 매개가 허락하지 않는 곳임을 의미하며, 따라서 기괴하고 모호한 공간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반면, 이곳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지만, 어떤 각자의 필요에 의해 업무를 처리하러 온 사람들로, “돈”을 받으러 온 정도로 보이고, 더 구체적인 목적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이 추상성은 관객이 자신의 특정 경험을 투여할 수 있는 보편성의 견지에서 산정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관공서나 은행 같은 곳에서의 기다리기의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공통의 경험으로부터 외부라는 절대의 경계를 향해 미끄러지게 된다.
수평적 차원에서

그런데 여기서 배우들은 반응하면서 점차 선동하는 존재가 되는데, 저쪽을 향해서든(최요한), 아니면 각자의 시간을 향해서든(하준호, 최요한), 두 개의 문을 활용해 이쪽을 벗어나는 가운데, 함께할 것을 요청한다. 우범진은 함께를 추동하지 않고, 저쪽을 유일하게 횡단하는 사람이 되는데, 처음 최요한이 책상 아래 고개를 숙인 채 자리하고 있어 예외적으로 무대화되지만, 그것을 깨뜨리는 건 하준호로, 그의 발화는 객석의 경계를 깨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저쪽으로 가는 문 근처의 무대 바깥 쪽에서 처음 무대가 가설되고―최요한―, 그것이 예측을 깨고 깨어지며 확장된 무대가 진짜로 가설되고―하준호―, 이후 또 다른 인물이 그에게 제동을 걸 때―우범진―, 무대는 마침내 객석 전반을 아우르게 된다. 이 삼각형의 구도는, 마지막 두 번의 등장을 예기치 못 함의 사건으로 기입하는 가운데 구성되며, 점차 넓어진다. 마지막 경계는 이 두 개의 문이다.
〈15분이나〉는 관객을 그 셋과 같이 공공 행정의 폐쇄된 시스템과 결부되는 힘 없는 시민으로 갈음하는데, “간부”는 “윗사람들”로 치환되고, 동시에 “결정 권한이 없”는 아랫 사람들로서 더 윗선의 피라미드식 서열에서의 상대적인 위칫값을 갖지만, 중요한 건 그들 자체라기보다 그 절차와 가장 위의 존재에 대한 비의성이다.
이 기다림의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창구 직원이 쓰러졌기 때문이지만, 그의 더 상급의 존재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하는 존재의 수동성으로부터 (‘영원히’) 현재의 기다림이 해소될 수 없는 것임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납득 가능한 차원에서 외부의 정보를 끌어온 것이다. 연극은 수직적 위계의 시스템 아래에서 사는 수평적 차원의 동등한 우리를 현상한다.
장소적 금제

우리는 저 너머의 상황을 보지 못하지만, 그것이 그럴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으로부터 배우와 연루되는 동시에 장소에 고착된다. 관객은 수동성 안에서 번민하게 된다. 더 많은 정보를, 외부라는 무대를 확인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겪게 된다. 배우가 절대적 매개자가 되지만, 그 매개의 내용이 순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15분이나〉는 실재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으로 끝까지 남는다는 점에서, 곧 카프카의 금제된 장소성을 떠올리게 한다.
가령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법 앞에서(Vor dem Gesetz)」(1914)의 하나의 관문이나 『성(Das Schloss)』에서의 뱅뱅 돌게만 되는 성과 같이 대타자(의 부재)라는 존재, 그리고 실재의 접지 불가능성은, 각각 가리키는 바가 다르지만, 끝까지 불(가)능의 장소로 주인공과의 간격을 벌린다. 저 아래의 곳은 연극의 약속된 장소로서 전유되지만 그것은 실재에 쓰이는 환상성과의 엄격한 분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저곳에 설사 관객이 난입하여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더라도 그 앞선 서사 바깥을 충당할 수 있는 다른 서사를 고안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곳을 연극 바깥으로 탈구시킬 수는 없다. 우범진의 말은 저곳과 우리의 거리를 확인시키고 저곳이 현재와 결부될 수 없는 곳으로 착종시키면서 우리를 역설적으로 이곳에 정체시킨다. 이 공동체에의 고착과 저곳의 위상차는 상호 교환된다.
상위의 절차와 조직과 차이가 있으며, 그 바깥에서 “폭도”로 우리는 규정될 수 있고, 그 위로 쉬이 거슬러 오르거나 어떤 조처를 취하기 어렵다. 바로 이 부분이 이양구가 계속해서 특히 15분 연극제에서 가상-실재적이고도 수행적인 차원에서 시도해 온 〈다리를 건너며〉(2024), 〈이렇게 덥지만, 이렇게 더운데〉(2025, 이하 〈이렇게 덥지만〉)1에 이어, 〈15분이나〉는 특히 〈이렇게 덥지만〉을 확장한다.
금단의 문

〈다리를 건너며〉에서 거리 위에 일종의 문지기로서 바리케이드를 담당하는 안전 요원을 두고 그가 신분증을 요구함으로써 관객의 신분이 의심되고 심문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치안과 통치의 기율이 우리의 정신과 신체를 강제하고 불길하고도 불쾌한 효과를 미침을 최단 시간, 최소한의 장치로써 드러낸다. 그것은 곧 전복되는데, 관객을 대리하는 관객으로 위장한 또 다른 배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관객은 매우 적극적으로 법의 기원과 그것의 목적성과 법의 통치 범위와 법을 제정한 권력에 대해 묻고 있는데, 이는 매우 집요하며 주체의 자리를 점유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관객의 형상과 대비를 이룬다. 그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관객이라는 이념형을 낳는다.” 「15분 연극제: 이동을 위한 연극들(2024)」
어떻게 보면, 이후의 작업들과 연관지어 이곳은 바깥이며, 실제 문이 없기 때문에 우선 경계를 구획하는 물리적 인자로서 사람이, 또 그것을 철회하려는 지점에서 가상의 문을 재확인받는 상황이 (서사의 중핵을 차지하는 것이지만) 벌어졌다고도 볼 것이다. 그런데 이 문이 실제로 존재할 때 문제는 명확해지기보다 한층 모호해지게 된다.
극장은 은연중에 통제의 역학에 따라야 하는 장소라는 사실이 (탈)은폐되고 있는 것인데, 문 바깥의 활동은 사실상 극의 끝이며 (다른 이들과 달리) 극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사실상 극의 현실은 허구적인 것만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의 실재인 것이다. 〈이렇게 덥지만〉의 문 밖에서 벌어지는, 벌어질 것이라고 하는 서사는 공포와 위협으로 둘러싸여 있고, 〈15분이나〉에서는 마찬가지로 사전 경험자에게만 정보가 우선 매개되며, 그 바깥은 사건이 벌어진 직후가 된다.
선택 (불)가능한

곧 〈15분이나〉는 등장과 퇴장이 가능한 두 개의 문이 있으며, 하나는 퇴장의 경계를, 다른 하나는 알 수 없는 실재의 심부를 나타내지만, 그 둘은 계속 돌고돌며 새로운 입구와 출구의 가능성을 낳는다. 하준호와 최요한은 퇴장을 번복하고, 알 수 없는 실재에 먼저 접근했던 우범진이 (대신) 퇴장하(는 형국이)지만, 하준호는 기회를 틈 타 그곳으로 관객 한 명을 끌고 향하고, 최요한 역시 그곳을 따른다.
그리고 모두가 퇴장한 순간, 퇴장의 기로에 있던 우범진 뒤에서 모두가 재등장하는 순간의 직전이 곧 극이 종결되는 시점이 된다. 그곳은 이곳을 초과하는 다른 영역의 시간을, 동시에 이곳과 연관을 맺는 차원의 동시적 시간을 현상하는데, 정신 없는 횡단 속에서 관객은 갈피를 잡기 어렵게 된다. 곧 입구와 출구가 계속 연결되면서 극장은 일종의 통로 자체가 되는데, 이곳 자체가 하나의 매개, 저쪽의 환상을 횡단하는 매개가 되면서, 저곳은 탈신비화되지 않고 오히려 실재화된다.
팬데믹 직후의 2024년에 〈다리를 건너며〉가, 계엄과 파면의 2025년에 〈이렇게 덥지만〉이 나오면서 봉쇄라는 정치사회적 알레고리가 경험적으로 체현되는 면이 있었는데, 가령 〈다리를 건너며〉는 그 이전부터의 집회의 자유와 치안 사이의 간격 같은 것, 블랙리스트 사태의 검열 관련한 부분도 직접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다. 따라서 장소성은 시대적 정동의 차원과도 결부된다.
〈다리를 건너며〉가 공연이라는 하나의 시간을 메타적으로 중첩시킨다면, 〈이렇게 덥지만〉이 저 바깥의 공포스러운 서사를 각색한다. 곧 그로써 두 작업이 조금 더 극적인 사건 혹은 사태를 전제했다면, 〈15분이나〉는 ‘일상’으로 돌아가 더 관료제의 어떤 모순, 폐단 같은 것에 초점을 맞춘다.
문이라는 장소성으로부터

배우를 포함해 아무도 저 바깥에서 앰뷸런스(가 직원을 실어나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그 하준호의 듣지 못함의 반문은 그것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착각을, 나아가 실재를 파지할 수 없다는 진리의 위치를 거기에 수여하기에 이른다. 〈15분이나〉는 대단히 수행적이지만 모호하며, 그것은 실재의 효과를 매개하며 극장이 아닌 장소를 가상-실재적으로 확장한다.
문 바깥은 극장을 초과한다. 〈이렇게 덥지만〉과 〈15분이나〉는 모두 문 바깥으로 나감으로써 그 너머의 세계를 서사적으로 이전에 장소적으로 확인하고, 확충한다. 관객 모두가 극장의 일원으로서 그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관객이 그 바깥의 실재를 접지하지 못한다는 점이 역으로 그 실재의 불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든다는 것.
물리적으로 도달할 수 없음의 잠재된 규칙과 불가능성의 이념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데, 그러니까 경계로서 가정된 문 너머를 허구적으로 이곳으로부터 연장해서 구성된 불가능성은 하나의 장소성만을 가정하는 극장의 특성에서 비제도적인 부분과 제도적 관습을 함께 견인함으로써 문 바깥이라는 서사적 내용 자체를 불가능한 차원으로 몰아간다.
세 개의 작업은 뚜렷한 장소성을 가져간다. 배다리의 골목과 임시 다리, 미닫이문이 있는 스페이스 빔 1층의 로비 공간, 테라스와 사무 공간을 잇는 실내 공간. 이 세 공간은 발견된 공간이며, 거기에 어떤 인공적 차원을 부가하거나 재편하지 않는 상태에서 연장된다. 이양구는 장소성으로써 극장을 가설하되 극장성으로써 장소를 재분절한다.
저 너머의 경계는 바리케이트를, 미닫이 철문을, 투명한 유리문을 경유해서 지시되며, 관객은 그곳을 나갈 수 없게 된다. 경계의 지지체는 상징성으로 갈음되지 않고, 진짜의 외양을 은폐할 수 없으며, 거기에 재부여된 의미는 그것의 과잉됨을 극의 내재적 차원으로 봉합된다.
그것이 실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또 다른 실재라는 것을, 규칙과 그것을 결부하는 것이라는 것을 혼동하는 지경으로 우리를 몰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 허구의 행위(자)가 실재를 전달하기에 앞서 그 작은 실재를 먼저 경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적확하게 놀라운 사실 아닌가.
김민관 편집장
작, 연출: 이양구
출연: 최요한, 하준호, 우범진
수어통역: 김경순, 김유리, 이명진
제작: 극단 해인
주최• 주관: 15분연극제X인천 후원: 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
2026년 8월 22일(토)~23일(일)
스페이스 빔(인천문화양조장) 2층
제13회 15분연극제
- 1. 이 공연의 경우, 앞선 행정 기관의 직원과 그 체계가 작동하는 저 너머의 공간이 대타자라는 존재의 장소로 치환되는 지점에서 〈15분이나〉와 일맥상통한다. “공간 안에 숨는 것과 공간 안에 갇히는 것의 두 대립적 표상 아래, 문밖의 세계는 알 수 없는 곳으로 현상된다. 곧 이들의 대화는 문 바깥의 세계로 모든 것이 환원되는 구심점을 만든다.”, 「[제12회 15분연극제] 극단 해인, 〈이렇게 덥지만, 이렇게 더운데〉: ‘빈 공간’의 연극」, https://www.artscene.co.kr/207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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