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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앤드씨어터, 《없는극장 짓기》: 극장의 두 가지 차원
    REVIEW/Theater 2026. 9. 16. 15:32

    부정성을 전화하기

     

    앤드씨어터, 《없는극장 짓기》©김솔 [사진 제공=앤드씨어터](이하 상동).

    《없는극장 짓기》는 앤드씨어터의 강화도 소재, 없는극장에서 열린 아홉 명의 창작자가 선보인 공연들로, 없는극장의 운영단과 앤드씨어터의 시즌 단원 등이 참여해, 4달 정도의 준비 기간을 갖고 사적 다큐멘터리 연극 창작 방식을 적용해 각자의 작품들을 만든 것을 묶은 것이다. 각자 창안한 아홉 작품은 하룻동안 없는극장 안팎을 경유해 주말 동안 두 번 발표되었고, A팀과 B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특히, B팀의 경우, 야외를 전격적으로 활용했는데, 공연들이 사이사이를 횡단하는 방식으로, 공동 창작과 운용의 묘를 살렸는데, 이는 이동이 전제된 공연 자체와 맞물리면서 없는극장을 중심으로, 바다~갯벌과 보호수~숲을 크게 잇는 하나의 수직축으로써 없는극장의 장소성을 현상했다. 서사는 그 여정의 장소인 자연에 널려 있고, 그 장소로부터 주어지고 나누어지고 추출되었다.

     

    ‘없는 극장’이라는 알레고리가 잠재적인 것을 곧 이야기하고 있다면, 짓기는 건축적이고도 물리적인 차원의 행위와 노동을 상정하며, 이 없음, 곧 부재의 차원을 조각할 수 있는 것으로, 실질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함으로써 없음을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차원으로 더 진작한다. 그렇다면 ‘없는’은 무엇일까. 더 적확한 그것의 자리를 가리키기 위해서 위치해야 할 질문, 곧 ‘없는’은 무엇을 가리키지 않는 것일까.

     

    구조적 차원에서 부정성을 전화시키려면, 우리는 무엇을 배제하고 있었거나 우리에게 무엇이 은폐되어 있던 것일까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이미 있(었)음을, 있음‘들’의 사이를 성찰하는 것과 같을 것인데, 이는 결국 기존의 구조를 의심하고 재구성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정신분석적 심급으로 들어가서 없음이 결여이거나 결핍이라면 없음의 사유는 욕망을 혹은 소망을 찾아 나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사물-기억

     

    공간의 추상적, 알레고리적 차원의 숙명을 체현하려는 이 같은 제목으로부터 〈없는극장 짓기〉는 개인적 차원의 서사들을 장소적 차원과 결부 지어 세계로 확장해 간다. 그것은 없는 극장이라는 장소성 없음이 장소성의 확장, 증대로써 갱신되어 극장의 물리적 확장성을 꾀하는데, 이는 없음이 어떻게 더 넓은 세계의 차원을 요청하고 제안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념으로서 극장의 어떤 대안을 마련한다.

     

    어쩌면 극장 주변을 작품으로 연장하지는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극장의 개방적 면모가 가령 창문을 가리던 검은 시트지를 떼어내면서 햇빛이 쏟아지는 것으로써 발현되는 것과 같이, 오히려 극장이 아닌, 혹은 반-극장의 차원, 자연 안의 한 부분으로서 극장의 위치성이 재접지되는 이 순간으로부터 야외는, 극장 너머는 자연 서사가 나아가는 타당성의 경로로서 연장되기에 이른다. ‘없음은 없음을 또 다른 있음을 경유해 자각한다.’

     

    민재원의 〈마지막 찬스〉는 투박하고도 진솔하게 할아버지의 없음을 더듬어 나가며, 기억의 단서가 되는 몇 가지 사물들을 소환하고, 할아버지의 신체성을 환유하게 되는데, 그것은 처음 할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와 잠든 몸으로 나타난다. 곧 의자 위에 올려진 스피커 앞쪽으로 민재원은 새우잠을 자며 할아버지를 체현한다. 할아버지가 된다. 소리에 잠기면서 소리가 신체를 잠식하도록 둔다.

     

    사실상 기억의 단편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구체적 서사 대신에 할아버지라는 기억의 조각에 근접하는 일로 대체된다. 이는 할아버지의 회초리를 찾으러 가는 여정으로, 다시 할아버지, 할머니와 연 날리기를 했던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으로써 그것이 실현되는 외부의 또 다른 장면을 시차를 두어 도입하는 것으로 계속 사물적 상상력을 부풀려 가며 기억의 조각들을 찾고 확장한다.

     

    부재와 편재

     

    할아버지라는 부재는 무한한 사물과 세계의 차원에서 편재한다. 기억은 사물화되면서 애도를 이어 나간다. 바깥으로의 여정이 가능한 ‘사이’의, 매개의 차원으로서 놓이는 작품이 다 은의 〈나랑 고라니 찾으러 갈 사람!〉이다. 없는극장 옥상에서 시작된 이 작업은 강윤민지의 〈호수의 세계〉의 입구를 여는데, 극장 바깥 고라니 소리를 내어 외부로 나갈 유인을 만들고, 고라니의 부재를 장소성에 편재시킨다.

     

    그러니까 작품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너른 장소에 포개지고 단편들로써 세계와 재접지한다. 주변에는 고라니인지 노루인지 모를 생명체가 지나갔던 경로―초식동물의 배설물 흔적―가 현재에 입혀지고, 할아버지에게 맞을 회초리가 될 나뭇가지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민재원이 계속 나아가면, 다 은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렇게 서사는 분절되어 장소에 산재하게 된다.

     

    다 은의 이 종잡을 수 없는 경로는 사라진 고라니를 체현하며, 그때마다 그것의 희미한 지표성을 검출해 낸다. 타자를 매개하는 이 행위는 타자를 부정확하게 의태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반성적 토로의 결말에 도착한다. 자기 윤리 차원에서 7년간 비건을 하고 있음을 처음 밝힌바, 다 은은 장화를 신고, 마지막에 갯벌로 서슴없이 걸어 나가면서 발화한다.

     

    유해조수로 지정된 고라니와 보호동물인 노루에 적용된 인간의 심급이 고라니의 관점에서 철저히 외부적이고 폭력적인 차원의 비판의 자리에는, 대신 고라니를 잘못 매개하고 대리할 수밖에 없는 다 은 자신의 위치에 대한 반성과, 그럼에도 그것을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대한 회의가,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며 극복해 가야 하는 양가적이고도 모순적인 사태에 놓인다.

     

    경계 넘기

     

    그런데 이는 궁극적으로는 초월적 자연과 그와 대비되는, 소실되는 미약한 인간 존재의 관계 쌍으로 새롭게 자리하게 되는데, 실재의 스펙터클이 기입하는 건 다름 아닌 고라니의 부재 혹은 불가능성, 혹은 타자성, 고라니라는 부채에 대한 대속의 불가능성, 그것의 간극이 주는 정동 따위다. 다 은은 우리 대신 원격 현존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벗어나서 우리로부터 간극을, 포기를 기획하며 마침내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가 되어 간다.

     

    강윤민지의 〈호수의 세계〉는 다 은의 관점을 잇는데, 감나무 밑에서 매실나무의 존재를 새롭게 깨달은 이야기를, 강화도 사는 곳이 인간의 개입으로 어지러웠을 때 키우던 (길)고양이 쿠키가 사라진 것에 대해 눈물을 삼키는, 장소를 경유한 인트로를 도입한다.

    보호수가 자리한 평상으로 관객을 이끈 후 평상을 둘러싸고 관객이 정렬된 뒤 평상 위에서 물을 피해 살아온 ‘호수’를 연기하고, 그 바깥 강에서 헤엄치는 ‘정화’를 채 윤이 연기하면서, 비로소 〈호수의 세계〉가 시작된다.

     

    다 은의 갯벌로 나가는 〈없는극장 짓기〉의 마지막 장면은 물론 호수가 윤을 따라 평상 끝에서 강으로 발을 딛는 순간을 기점으로 문명적인 것에서 자연으로 내려오는 마지막 동작에 조응한다. (‘보’)호수이기도 보호수 너머 호수이기도 한 ‘호수’라는 중의적 이름은, 놀랍게도 아니 자연(‘에’)의 사랑이 가능해지는 순간이 놀랍기 위해 한 번도 물을 닿아 본 적 없다고 한다.

     

    호수가 아예 물에서 나오지 않고 사는 정화로부터 닫힌 세계로 구획지어지고, 그 경계를 나설 수 있게 되는 건 환상적이고도 아름답다. 그 둘의 거리가 경계를 안고 있다면, 고라니와 다 은의 거리는 시차가 더해진다. 호수와 정화가 하나의 경계를 함께 통과한다면, 다 은은 고라니였을 어떤 경로를 가정하고 그 거리와 간극으로써 자신의 윤리를 정초한다.

     

    창작이라는 억압

     

    변준섭의 〈112〉 역시 다 은과 같이 인간의 기준에서 밀려나고 소거된 동물의 자리를 다루는데, 강화도가 인천에서 압도적으로 돼지를 많이 키운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해, 아프리카돼지열병 발생[2019]으로 대규모 돼지 살처분 이후, 추후 다시 묻어준다는 당국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한 농가 인터뷰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이때 그것에 힘들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는 변준섭의 고백은 이 사태의 부정성과 그것에 대한 인류 차원의 반성적 감정을 확인하여, 죽음, 어떤 텅 빈 실재의 자리에 응당한 상징적 처리를 통해 적당한 승화의 지점을 만들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그야말로 변준섭의 정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실과 작업 모두 자신의 욕망과 괴리가 있음에서 오는 것인데, 이는 환상적 차원에서 일종의 악몽이 실재화되는 것으로 부상한다.

     

    “세계예술환경은행”이라는 곳은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연구”로서 연극의 가치를 탐구하는 예술가들의 어떤 자율적 공동체성을 만들어나간다기보다 그것 자체가 기존의 생활에 가해지는 억압 기제로 다가오는 것인데, 이는 기후 위기가 사회적 의제와 예술(가)의 차원이 공명하는 지점을 찾아 나가는 것들 안에서도 특정 의제로 부상하여 지배적인 이념이 되는 것에 대해 온전히 자유롭지 않은 예술가의 곤궁 같은 것을 또한 초래함을 역설적이지만 보여준다.

     

    그리고 없는극장의 동물성 음식을 지양하는 원칙 아래―이는 차윤석의 〈우리 그래도 사람을 미워하지는 마라탕〉에서 또한 언급되는데, 이 때문에 고기를 넣지 않고 마라소스에 땅콩 소스인 즈마장을 넣는다.―, 고기를 식단에 주요하게 포함시키던 평상시의 자연스러운 선택을 변경하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실천적인 것으로 이행되지 않은 단계를 노출한다.

     

    금제, 그로부터 여성적인 (분투)

     

    〈112〉에서 차윤석은 세계예술환경은행에서 그에게 빚 독촉을 하러 온 역할로 분하는데, 이는 도덕적 금제를 그가 어겼기 때문이라기보다 예술과 삶의 괴리로 인해 삶보다 예술에의 괴리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112〉는 창작을 하기 위해 실재를 혹은 진실을 다뤄야 하는 예술가의 곤궁을 다루는데, 그의 이름을 부르며 “뭐 하고 계세요?”라는 시차를 둔 차윤석, 강윤민지의 목소리는 바로 그 지점을 보여준다. 외부적 차원의 도덕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변준섭은 창작 과정임을 밝히고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에서 운영하는 농장을 견학하고 싶다고 보낸 메일에 대한 답을 받지 못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이 모든 과정은 예술가의 내재적 욕망이 아니라 예술의 외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빠지는 자가 당착적 오류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112〉는 사적 다큐멘터리를 급(격)하게 만드는 과정 자체의 과잉, 시차 같은 것들을 징후적으로 담아 낸다.

     

    〈112〉와는 극단적으로 분기되며, 곧 타동적 차원으로써 제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곤궁에 처하는 대신에, 채 윤은 〈여자 지나기〉를 통해 적극적으로 제도적 차원을 휘저으며, 부나방처럼 현란하게 자신의 위치를 의도적으로 끊임없이, 분열적으로 재정렬하며 분투한다. 이는 비슷하지만 다른 두 개의 작품, 최현조의 〈( )와 친구가 되고 싶어요〉나 김진솔의 〈이불킥(없는)오디션〉 중에서, 후자와 더 조응한다.

     

    가령 후자가 여성 혐오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는 각종 미디어 관련 오디션장을 재현하면서 대학교를 갓 졸업한 여성 연기자의 취약하고도 비선택적 차원의 삶을 보여주는데, 이는 “없는 오디션”이라는 이름 아래 환상적으로 횡단함을 통해 일시적인 해방구를 찾고자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그것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부조리적이고 비극적 차원을 희극의 외양으로 봉합한 것에 다름 없다이 지점에서 〈이불킥(없는)오디션〉는 진정 하이퍼리얼한 비극을 보여준 것 아닐까.

     

    (비)인간적인 것

     

    최현조의 작업은 《없는극장 짓기》가 시작된 지점을 가시화하는데, 이때 작업을 제안한 전윤환의 목소리가 재생된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팀원들과 함께 오른 산의 휴식 주에 자신의 무릎에 앉은 애벌레를 평소의 벌레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귀여움으로 녹여내던 자신에게서 ‘역겹고 징그러움’을 느꼈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 바퀴벌레를 작업으로 육화하기에 이른다.

     

    이런 경험은 꽤 기이한데, 그러니까 어떤 정서도 절대적이지만은 않고, 합성되고 연접된 감정들의 총체 안에서 전치되는 것과 같고, 또한 그 감정 자체가 온전히 사적인 차원, 곧 자율적이지 않으며 외부 작용 아래 전도되며 재구성된다는 지점에서, 그는 외부에 대한 혐오 대신에, 혐오의 기저에 깔린 자신을 성찰하는 쪽으로 방향을 옮기게 된다.

     

    유연한 생명력의 바퀴는 파킨슨병으로 누워 지낸 지 7~8년이 된 할머니 박덕경으로 환유되고 전치되며, 이는 바퀴를 전유한 멕시코 민요의 〈라쿠카라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정관사 La와 바퀴라는 뜻의 쿠카라차(cucaracha)가 결합한 이 노래는, 멕시코 혁명(1910~1920) 당시 농민들이 자신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바퀴에 비유해 부르던 것이다.

     

    할머니가 바퀴벌레(의 생명력을 가진 존재)였으면 좋겠다는 발화와 음습한 환경에서 지배자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비인간 존재를 긍정성으로 뒤집는 역사의 사실이 연합되면서 최현조는 “하나의 영혼”으로 합성된 존재의 영역에 다다른다. 그러니까 선글라스를 끼고 멕시코 전통 의상 판초를 걸치고 쭈그려 앉아 다른 존재―“뿔레뿔레따”―로 변양된 최현조의 클라이맥스는 이것을 가시화한다.

     

    이때 생명력의 어떤 특정 범주로서 유연함은 생명 자체에 대한 유연한 태도로 확장되며 최현조는 바퀴를 닮는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분법적, 인간-비인간의 구도를 지지하는 것과는 다르며, 그 안에서 인간적 관념으로서 ‘절대적’ 부정성을 고유함의 긍정성으로 전화하는 어떤 비약적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관계의 미학

     

    이는 차윤석의 작업에서, 마라탕이라는 혼성의 맛이라는 구체적 미학으로 옮겨 간다. 처음, 마라에 빗대, (음식의) “재료”, “연극”, “관계”의 차원에서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관념들을 제시하는 것, 이는 반대로 그의 마라탕을 만들어 나누는 작업 자체가 실은 그것들을 보여주기 위한 은유라는 것을 선취하고 있다. 합성되면서 하나씩 역할을 부여하며 투여한 재료들은 각자의 정수를 나눔으로써 입체적인 하나의 맛을 만든다.

     

    차윤석에게 재료 각각은 자신의 삶을 투과시키는 상징적 조각들이 된다. 연기는 재료를 경유하며 재료는 음식으로 실제 구성된다. 이 같은 중첩된 기술 양식은 음식 만들기와 연기가 교환되는 가운데, 일상을 입체적으로 기술한다. 곧 음식 만들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가 요리에 씌이고, 요리를 매개한다. 삶이 그 가운데 음식으로 건너오면서 연기는 사라지는 매개가 된다. 어쩌면 요리 자체가 연기라는 허구를 지워낸다.

     

    기본적으로 차윤석은 관객을 향하며 직접 말을 걸고 대화하는 방식을 택한다. 요리라는 중간적 과정은 관객의 시선을 매개하지만, 차윤석 역시 그 중간적 대상에 몰입하며 연기의 직접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유격을 가질 수 있다. 조냇물의 〈그러니까 여기도 없는데요.〉 역시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를 추출해 그가 인터뷰어로서 위치한 여러 소스들을 나열하는데, 그것은 어떤 이념을 논증하기 위함보다는 그들 자체를 경유하기 위함이다.

     

    관찰적인, 반성적인

     

    처음 작품은 남녀공학 전환 반대 시위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해, 페미니즘이 물리적-사회적인 일종의 게토적 영역이며 그 반대편에서 페미니스트 혐오와 적대가 분기되며 평행선상을 달린다는 어떤 가정에 근접하는데, 곧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반대편의 이야기를 겸허하게 듣는 것으로써, 거꾸로 페미니즘이 이념으로서 근본적으로 통약 불가능한 진리가 아님을 거꾸로 증명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이는 혐오를 직접 동반하지 않거나 그들의 삶에 실제 적확한 페미니즘과 여성에 대한 혐오가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단지 궁핍한 현실 자체가 옮겨붙는 대상으로서 여성에 대한 증오가 어떤 혐의로 부상한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이러한 차원이, 그들에 대한 이해가 자신이 처음에 관철하고자 했던 바와 어긋나는 지점에서, 조냇물의 작업은 변준섭의 작업처럼 과도기에 있다.

     

    하지만 반페미니즘 혹은/실은 비페미니즘의 물적 토대를 검증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는,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를 경유해) 계급적 전선의 차원을 페미니즘과 교차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수 있는, 또는 그것이 지금에 대한 해석의 관점을 일부 열어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지점이 실패의 지점은 아니며, 작업의 또 다른 전기를 다른 방향으로 이어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변준섭이 작업 자체의 무게를 작업이 내용으로 취하는 주제의 차원의 무게와 어쩌면 혼동하는 것 같은 지점을 보여주었다면, 그리하여 정신분석적 차원에서 다분히 징후적인 작업이었다면, 조냇물은 이 의도치 않음의 결과가 가정을 흔드는 지점을 그래도 어느 정도 담담하게 수용하는 모습이다. 이는 그가 인터뷰이의 말들을 들으면서 그가 일종의 정신분석가의 위치에 자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극장, 상상적인 그리고 건축적인

     

    《없는극장 짓기》는 최현조의 작업에서 나오듯 “내게 없는 것들을 가지고 없는 극장을 만드시면 됩니다.”(전윤환)라는 말과 같이, “없는”은 개인의 결핍과 부재의 차원을 가리키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는 공포, 불편(한 대상), 트라우마적 기억 등등을 직접 다루는 다양한 작품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없는극장 짓기》는 한 축에서 극장 자체를 세계 내 현시하는 방식으로써 자연과 인접한 없는극장의 특징을 실천한다.

     

    “짓기”는 건축적 용어이지만, 극장을 만드는 일이 연극을 만드는 일일 수 있음을, 극장에 대한 사고가 연극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함을 생각하게 한다. 앤드씨어터의 〈극장을 팝니다〉(2020, 부평아트센터)[각주:1]와 같이 코로나 19 이후, 극장의 물리성과 장소성이 부재하는 상황을 (여러 연출의 참여에 일 대 일 대응하는) 여러 공연으로써 고찰하는 경험은, 《없는극장 짓기》와 조응한다.

     

    이는 기후위기와 비서울에서 연극을 한다는 것이 극장의 이념 자체로 옮겨지고 체현되던바, 그것의 잠재된 실현 아니겠는가. 그것은 여전히 없음의 부정성이 가리키는 예술가-미래-비서울의 취약성을 전제하면서 대안과 시도의 틈새를 그리려는 불가능성의, 역설의 노력으로 연장된다.

     

    참고로, 전윤환 연출의 작업은 앤드씨어터 작업에서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사회적 활동 안에서 제도 내, 또는 제도 바깥에서 어떤 또 다른 제도를 만드는, 작업자들의 플랫폼을 만드는 또는 짓는 플랫폼 설계자의 역할들을 해왔는데[각주:2], 이는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신 자체를 고안하고 기획하는, 곧 작품의 생산으로 산정되지 않는 기획자적 창작자의 역량을 펼쳐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어쩌면 그는 그것을 (더) 잘하고, 그것으로써 창작자의 역량을 (진정 재)평가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거꾸로 작품이라는 물화로 도착하지 않는 어떤 고안, 기획 모두를 창작의 차원으로 재정의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2026.09.05(토) – 09.06(일) A팀 12시, B팀 16시
    없는극장(강화군 길상면 해안남로 627, 1층), 극장 밖

    참여 아티스트 | 강윤민지 김진솔 다 은 민재원 변준섭 조냇물 차윤석 채 윤 최현조
    콘셉트 | 전윤환
    프로듀서 | 권근영
    조연출 | 조냇물
    프로듀서보 | 이유정
    티켓매니저 | 김현주
    그래픽•사진 | 김솔

    예매 | 플레이티켓
    문의 | 070-4507-4416

    주최/주관 | 앤드씨어터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

    본 공연은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에 선정된 공연

    1. 1. “물론 이러한 시도는 팬데믹 이후의 시대에 대응하는 형식을 상상한 것에서 직접적으로 출발한다. 인원수에 따른 집합 금지가 국가적으로 지시된 상황에서, 공공 극장은 빈 공간으로 무력화된다. 이런 무력화된 공간에 어느 정도의 가격대조차 제시되지 않고 관객은 아무도 없는 듯 이곳을 누비게 된다.” 김민관, 〈[리뷰] 〈극장을 팝니다〉, 극장에 대한 상상(적 실재)〉, 출처: https://indienbob.tistory.com/1186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본문으로]
    2. 2. 2014년, 이십 대 예술가의 창작 진입 장벽을 허물고자 이십할 페스티벌을 기획, 발의했다면, 2018~2019년 삼일로창고극장 운영위원을 하면서는 젊은 창작자들이 24시간 내 연극을 만들고 발표하는 〈창고개방〉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기도 했다.

      2017년, 앤드씨어터의 작업은 〈창조경제_공공극장편〉을 통해 4개 극단이 각각의 작품으로 참여해 관객 투표로 최종 우승 상금을 독식하는 구조를 취했는데, 이는 혜화동1번지 6기 동인 당시 전윤환 연출이 〈창조경제〉라는 작품의 아이디어를 확장시킨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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