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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 윤, 〈여자 지나기〉: 여성을 접면하기
    REVIEW/Theater 2026. 9. 16. 15:30

    분투하고 분열하는 여자

     

    채 윤, 〈여자 지나기〉©김솔[사진 제공=앤드씨어터](이하 상동).

    〈여자 지나기〉는 분열적이기보다 생성적이다. 부정성을 띠기보다 부정성으로부터 긍정성을 취하거나 전화시킨다. 채 윤은 도발적이고도 섹슈얼하다. 도발적이지만 섹슈얼하다. 도발적이어서 섹슈얼하다. 그 반대는/가 아니다. 제목은 여자(에 할당된 클리셰)를 지나(쳐)야 하는 부정성의 대상으로 할당하며 이를 극복의 대상으로 두는 듯 보인다.

     

    곧 ‘여자 지나기’는 자신에게 할당된 여성의 몫을 건너가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일 수도 있고, 그로써 여자라는 관념을 벗어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보다 여러 여성을 만나는 일에서 시작된다. 타자가 되는 방식으로써 여성(적임)을 건너가는 일이 된다. 그런데 여성들은 자신에게 수여된 여성적임의 위치를 일종의 금제로, 억압으로 받아들이며 분열한다.

     

    곧 ‘여자’라는 것은 사회적 위치와 자아의 간격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또는 의심하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분투하고 분열하는 존재이다. 이는 윤이 자신을 끊임없이 갈아 끼우며 그들을 체현하려 할 때 타자와의 간극에 대한 직접적 곤궁보다는 여자라는 마찬가지의 억압을 확인하는 한편, 그로부터 분열하는 자신을 또한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유로워지(려)는 자신을 자연스럽게 연장하는 기술이 된다.

     

    곧 특정한 타자의 재현은 타자의 위치에 지정된 여자라는 관념과의 거리보다 친밀하면서 그 다양성의 기술 자체가 여자에 붙들린 자아의 확장 방식이며, 실은 그것 자체가 여자임을 보여준다, 관습과 억압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존재로서 여자. 이는 또한 여자들과의 연대를 내재적으로 갈음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성이라는 거리

     

    따라서 〈여자 지나기〉는 여자라는 보편성과 여자라는 특정성들의 경합시키면서 관념과 실재의 간극,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예컨대 ‘여자의 은밀한 진실 같은 것은 이렇답니다.’와 같은―, 그 관념으로 인해 파생된 삶, 차라리 관념적 실재로부터 새로운 수로를 파나가야 하는 여자의 허구적 진실을 보여준다.

     

    채 윤은 페미니즘의 화력이 이제 막다른 길에 처했다거나 진부하다고 (잘못) 판단될 때, 여성에게 부여된 상투성을 경유해 그것과 자아의 거리를 확인하고 확보한다. 관음증적 대상으로, 감시의 시선으로 판단되는 여성의 몸을 채 윤은 처음 객석 뒤쪽에서 소리로만 관객을 지배, 장악하는 것에서 끊임없이 위치를 변경하여 고정된 몸의 축을 파쇄한다.

     

    그는 회색 민소매 탑을 두 손을 아래로 교차해 잡고 가슴께로 끌어올려 벗으려는 제스처를 그때마다 취한다. 그것은 관음의 틈을 미처 구성하기 전에 내려가며 말의 휘몰아침과 함께 이동하며 그 시선을 물리친다. “벗은 몸을 섹슈얼하게 여기지 않는 공간”의 불가능성을 설파하면서 실은 공간을 제어한다. (남성) 관객은 그곳에 갇히고 조소당한다.

     

    윤은 여성/자아의 욕망을 먼저 말하는데, 실사가 아닌 2D 포르노와 촉수물을 이야기하고, “노예”, “수녀”, “하녀” 등으로 범주화되는 포르노 출연 여성의 관습적 성 역할, 그리고 실상 “창녀”인 이 여성 심급에 대한 비판이 항시 영화의 섹스 신에서 여성의 나체만이 먼저, 전면적으로 제시되고, 그러니까 미학적인 차원으로 노출되고, 그래서 오히려 이 아름다운 여성 자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전이된/(재)학습된 효과로 뒤집힌다.

     

    사랑으로서 여성

     

    이때 시선은 남성의 시선을 체현하는 것이라기보다 남성이 소거된 자리로부터 (남성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시화되는) 여성을 비로소 재전유할 수 있게 되는 것에 가까울까―이른바 남성의 자리를 경유해 남성의 자리를 탈환하기. 그 반대편에서 (미)소년~남자의 사랑, 곧 BL이라는 특정 장르물 안에서 미학적-이상적 남성상이 여성의 관점에서 호출되며, 그렇게 채 윤의 말처럼 여성적인 것은 퀴어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또는 교차된다.

     

    채 윤은 여섯 명의 여성을 추출하여 자기인 양 내세우며, 거기에는 “경”도 있는데―이는 프로젝터로 투사된 글자에 해당하며 그 빈칸의 몫을 윤이 채움으로써 그 당시의 대화를 현재 재현하게 된다.―, 그의 ‘훌륭한 여주―여주인공―’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 곧 올바른 여성, 보편 타당한 여성이라는 금제의 실천 자체가 페미니즘을 할 권리를 거꾸로 만들어내는 것 같은 도착(적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한다.

     

    나아가 “나약”하고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사람의 “자유”가 부여된 역할을 갈망한다. “엄마”, “딸”, “스토킹 피해자”, “창녀”로 갈음되는 여성 역할의 한계에서 다른 경로를 찾고자 한다. 이때 도착하는 “마녀 프레임”을 “괴물”을 벗어나는, 뒤집기보다 초과하는 여성 (영웅) 서사는, 기필코 좌절과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선형”이 아닌 “나선형”으로 흐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부정성을 떠안고 진격해야 한다.

     

    여성은 이성애적 사랑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있으며, (폭력적/지배적 남성 대신에 비루한) 여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좆같다”라는 욕의 정합성이 “보지”가 아니기 때문이라면 곧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수치심의 범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에 긍정할 수 있다면, 좆을 뗀다라는 건 더 적극적인 의미를 기한다.

     

    부정성의 성기

     

    곧, “좆의 제국”이라는 동화에 등장하는 “좆뗐단”은 실제 성범죄자와 같은 이들의 좆을 물리적으로 떼는 단으로, 적극적으로 부정성을 소거하기 때문에 ‘더욱’ 긍정적이다. 여성이 처한 사회가 “좆됐다”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비판하고 타개하기 위해, 그리하여 그 언어를 수치심 없이, 부인 없이 사용하는 비윤리적 여성 아닌 존재의 환유로서 ‘좆’을 기각하고 청소하기 위해, 남자라는 관념을 ‘세탁’하기 위해, 그들은 나선다.

     

    곧 부정성에 대한 관습적-감각적 기호로서 ‘좆’을 뗐기 때문에 ‘좆뗐단’은 부정성의 대상으로부터 긍정성의 주체로 도약한다. 무엇보다 여자가 현상된다. 윤이 상상하는, 욕망하는 “여성 영웅” 혹은 “여성 악당”의 상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이고 싶지 않다. “취약함으로써 감각”하는 세계에서의 윤리적 주체로 살아가고 싶다.

     

    “네가 네 자유를 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라는 문장이 끝이 되는 짧은 구문을 없는극장 유리문 입구에 적고 윤은 떠나는데, 이때 그가 쓰는 글씨는 그가 ‘만지는’ 문과 같다. 그는 출구를 입구로 바꾸고 나가며, 이는 《없는극장 짓기》의 다른 공연들이 그렇듯 일관된 하나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일종의 전복의 의미를 감행한다.

     

    이는 또한 묘비명으로, 자신의 죽음을 향한, 제도 속 갇힌 자아를 뚫고 나가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과의례 자체를 자신이 규정하고 이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섯 명의 역할이 여섯 개의 각기 다른 위치와 조명 할당에 의해 체현되는 가운데, 그가 장소를 옮기며, 정체성을 바꿔 가며 결국 공통적으로 도달하는 건 고정된 정체성 따위는 없다라는 진리이다.

     

    진부한 관념으로부터 내파시키기

     

    〈여자 지나기〉는 여섯 명의 각기 다른 여성, 채 윤이 관계 맺은 어떤 여성들의 발화를 지나치며 여자라는 통상의 관념에, 제도적 금제에 맞선 여성들의 분투와 사고를 통과하며, 채 윤은 일종의 매개자로, 또 거기에 욕망을 투영하는 자기 연장 기술로, 물리적으로는 여자들을 긍정하며, 관념적으로는 여자에 대한 부정성을 재고한다.

     

    어쩌면 〈여자 지나기〉는 여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끌어오면서 마찬가지로 진부한 관념에 빠져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니까 진부한 남성에 대한 통념 안에서 남성적인 것을, 제도적인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여자에 대한 편견을 마주하는 건 우리가 그것들이 부정적이지만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음을 깨워 주는 동시에, 그것들을 지나가며 어떤 간격을 낼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조명이 공간을 가르고 깁는 무대, 비가시화되어 있다 객석의 이면에서 관객을 가로지르며 등장하는 채 윤으로부터 조명이 각자의 아우라를 현상하려는 어떤 의지 이외에도 지배적인 세계에 대한 힘과 효과를 드러내려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곧 조명은 주체를 대신하고, 주체에 대한 억압과 주체의 분열을 따로 또 같이 현상한다. 조명이야말로 지배적 주체이며, 채 윤은 그것의 틈새를 엿보고 도망가는 교란하는, 항거하는 피지배자의 주체성을 띤다.

     

    과잉되거나 과소된 여성의 언어

     

    페미니즘이 진부하다고 여겨질 때 여자를 지배하는 갖가지 언어, 관념, 기억 들이 한 개인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다시 드러낼 때,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 존재의 드러남이 존재들 간의 세계의 다른 연결과 접속의 가능성을 비추게 될 때, 그러니까 그것들이 반복되어 발화되고 중심의 언어와 제도를 성찰케 할 때, 그것은 운동적 효과와 힘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 다른 세계를 향한 집단의 정동을 개체적 차원 각각에서 특수하고도 종합적으로 불러오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언어들은 과잉되어 있고 또한 과소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이에게 하나의 발화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발화를 각각에게 따로 또 같이 건네는 것과 같다. 작품 자체가 여러 명의 발화를 선택한 것과 같이, 하나의 자아를 생성해 가는 건 하나(‘만’)의 기존 자아를 분열시키거나 되묻는 과정이다.

     

    “나 너무 구덩이가 많아가지고 말을 못 하나 봐”와 같은 여자들의 연이은 말의 하나에서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그 말과 같이, 〈여자 지나기〉는 과잉되어 있지만 미소하게만 드러나는 발화의 견지라는 상태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가. 여자를 지나고 갱신하고 하면서 무엇이 남는가 또는 발생하는가. 불확실한, 파편적인, 취약한 경로와 마음을 따라 도달한 건 무엇인가. 그것은 여자‘들’(의 연대)인가, 갱신되었지만 세계와 여전히 불화하는 여자의 모순일까.

     

    김민관 편집장

     

    2026.09.05(토) - 09.06(일) A팀 12시, B팀 16시 없는극장 (강화군 길상면 해안남로 627, 1층)

    작 | 창
    연출/출연 | 채 윤
    도움 주신 분들 | 강윤민지 강윤지 박윤선 안정민 이승혜 주경화 표지인

    앤드씨어터,《없는극장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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