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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S고원에서〉(히라타 오리자 작/성기웅 연출): 죽음을 기입하는 방식REVIEW/Theater 2026. 9. 16. 15:24
세미-퍼블릭한 공간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S고원에서〉(히라타 오리자 작/성기웅 연출): 죽음을 기입하는 방식ⓒ김솔[사진 제공=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이하 상동). 히라타 오리자의 동명의 원작을 옮긴 〈S고원에서〉는 “고원에 있는 새너토리엄”이라는 하나의 장소성에 기초하며, 휴게실로 보이는 하나의 특정 장소, 곧 환자, 면회객, 의사, 간호조무사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과 퇴장을 임의로 반복할 수 있는, 히라타의 문법대로 “세미-퍼블릭한 공간”에서 다양한 “회화”가 이뤄진다.
그것은 새로운 정보를 거의 끌어오지 않는 “용장률” 높은 대화이며, 무엇보다 죽음의 분위기가 감도는 공간에서 병의 진행 정도나 죽음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된다. 따라서 환자 개인의 병과 그의 심리의 직간접적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며, “직계가족”이 아닌 면회객(으로 한정된) 입장에서 의사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는 것 역시 제도상 불가능함이 확인되는 가운데, 이들의 입장에서 그것을 조심스럽게 추정하게 될 뿐이 된다.
주요한 플롯을 차지하는 두 명의 환자, 공연 시작 전부터 무대에 머물던 니시오카(이윤재)와 무라이(백종승)가 차례로 뒤늦게 등장하는 그 둘의 결정적인 면회객을 통해 각자의 플롯을 진작, 심화시켜 나간다면, 후쿠시마(이세영)는 공간에 상주하는 환자치고 늦게 등장하는데, 그것은 대규모의 외부로부터의 친구들을 동반하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부와 외부가 혼합된 로비 공간에서, 연갈색 나무와 검은 배경이 마치 두 개의 무늬인 양 교대 배열되면서 거의 동일한 면적을 이룬 디자인된 전면 벽은, 공공적 차원에서 무난하게 수용되는 디자인 양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기본적으로 중앙이 뚫려 있는 통로 공간으로 이어지며, 활발하게 병원 내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을 촉진한다면, 상수의 앞쪽 입구/출구로는 완전한 외부의 출입, 또한 외부로의 퇴장을 허용한다.
횡단의 사물-존재들

전자를 통해 병원 내부를 가장 활발하게 횡단하는 건 오랑우탄 인형이 한쪽 끝에 매달려 있으며 자동으로 움직이는 “자동 수레 로봇”이며―물리적 차원에서 비일상적인 시간의 독립적 분기를 주장한다.―, 그리고 호출 벨을 누를 때마다 주로 음료 배달 심부름을 하는 간호조무사(조성민), 간호사(은소하)가 끌고 다니는 카트 위의 “의료 보조 로봇” ‘테루’ 역시 빈번하게 등장하한다.
이들은 플롯을 형성하는 대신, 기본적으로 중심인물의 내면을 관찰, 파악하는 입장에서 그 동기가 성립하는 외부자들에게 장소를 다시 내부로 경계 짓는다. 곧 병원의 이미지를 단속적으로 확인시키고 구축하면서 역설적으로 전도된 내부의 이질성, 외부성을 외부자들에게 확인시킨다. 결정적인 장소성이 그렇게 유지되며, 어느 정도의 긴장과 함께 ‘반절의’ 공중적 차원의 장소성이 혼성되며 흘러가는 것이다.
가령 AI 기반의 로봇, 테루는 1991년 원작에는 없지만 근미래 시점을 도입하기 위해 새롭게 도입된 부분이다. 이는 단순 정보에 대한 응답과 확인 정도의 차원에 머물긴 하지만,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와 같은, 주로 환자들의 병원 일상의 앎에 대한 욕구를 추동하며 확인시킨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물론 궁극적인 차원의 호기심은 환자의 현재 상태를, 심각함의 정도를 알고 있는 의사 마츠모토(김동완)를 향하지만, 이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단호하게 거절된다.
니시오카에 대한 우에노(문현정), 후쿠시마에 대한 하라(베튤)로 이어지는 물음은 철저히 봉쇄된다. 적어도 니시오카와 후쿠시마는 그 미스터리에 싸인 병의 정도로부터 삶보다는 죽음의 차원에 더 가깝게, 친밀하게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데, 또 한 명의 환자인 무라이는 그 병에 대한 외부로의 매개가 빠져 있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징후

주요한 플롯은 오히려 그의 여자친구로 찾아온 오타케(김현숙)와 언급만을 통하며 계속 유예되다 가장 늦게 등장하는 그의 친구 사사키(이수현)에 의해 봉인된 부분이 풀려 나가며, 오타케의 직장 동료와의 곧이은 결혼 소식이 실은 봉쇄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는 물론 그 사실 자체로서 중요하기보다 그것이 무라이의 병의 정도를 파악하는 것을 뒤덮는다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한다는 지점에서 중요하다.
곧 그의 죽음의 문제가 그 스스로의 반응에 입각해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죽음에 대한 진지한 사고의 틀이 실은 그럴 수 있다라는 것에서 ‘더’ 의미를 얻는다. 그와 대조적으로 니시오카는 시종일관 그에게 친밀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전 약혼자 우에노의 플로리다로의 3주간의 여행 제안과 같이 거처를 바꿔야 하는 큰 건에 답을 하지 않거나, 니시오카의 호텔과 다소 떨어진 흑나리나 엉겅퀴 꽃이 핀 고원을 함께 산책하는 것과 같은 소소한 어떤 요청 역시 흔쾌히 수용하지는 않는다.
이는 니시오카가 우에노에게서 어떤 감정이 사라졌음보다 그가 더 관계를 진척시키는 것 자체를 우려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것은 삶을 함께 살아낼 수 있음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따라서 이 부정성의 기류는 전적으로 부정적이기보다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애잔함을 풍기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인데, 이때 얼굴을 돌린, 정면을 향한 우에노의 얼굴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것이 직접적인 거부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요청과 거부를 횡단하는 죽음과 삶의 교환이 불가능함을 재확인받게 되기 때문 아닐까. 무엇이든 간에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다. 여기서 가장 바깥쪽 중앙 스툴과 하수의 또 하나의 스툴, 중앙 안쪽의 쇼파와 상수의 또 하나의 쇼파가 시계 방향으로 직사각형의 회로를 구성하는 가운데, 중앙의 횡으로 놓인 스툴, 쇼파, 통로로 이어지는 종으로의 방향 아래 무대는 해상도의 차로써 플롯을 조율한다.
실재로서 죽음

곧 앞쪽 스툴 앞으로 우에노의 눈물이 앞을 가로막는 고립된 모습은 그 뒤의 니시오카에게는 다른 감흥을 준다. 그 둘은 뱅뱅 도는 대화로부터 비교적 솔직한 민낯을 노출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친구들이 테니스를 치러 갈 때 따라간다 하고 누운 후쿠시마와 그를 살피는 하라는, 앞쪽 스툴을 점유한 후쿠시마와의 단절 속에서 둘의 관계가 지속되고, 이후 후쿠시마 단독으로 대사 없이 진행되는 모습은 죽음을 향한 실재의 차원을 가시화한다.이때 테루가 뒤에서 말을 건네며 그의 잠을 연신 깨우고,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다 눈이 잠기려는 순간 번번이 제지당하게 되는데, 이 잠결의, 거의 전의식적 차원의 몸짓은 잠이 드는 순간이 곧 죽음임을 넌지시 암시하며, 역설적인 유머가 역설적인 차원의 슬픔으로 분화한다. 여기서 상수 가의 테루가 말을 건넬 때 거리가 멀며 사실상 후쿠시마가 등지고 있음에도 그 둘의 직접적인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곧 둘의 직접적인 관계는 테루가 히로시마의 달라진 상태를, 미묘한 내면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에 의거하며 마찬가지로 히로시마가 테루의 몰지각한 소통의 방식을 무심한 것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에 또한 의거한다. 이 둘에게서는 예외적으로 다른 인물들과 달리 대면과 그렇지 않은 경우가 구분되어 적용되지 않음으로써 우에노의 죽음이 ‘차단’된다는 사실은, 원작과는 분명 다른 효과를 주는 부분일 것이다.
히로시마는 최초에 테루의 목소리‘만’을 지각하고, 둘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테루의 신체적 존재(의 일부)가 아닌 목소리만을 독립적으로 경유한다. 이는 처음 니시오카가 무라이가 잠깐 나간 사이 하수 스툴 바깥쪽으로 등을 굽혀 숨는 장난을 칠 때 돌아온 무라이가 즉각 그의 존재와 그 행위의 의도 자체를 간파하고 대응하는 것과 조응하는데, “방으로 들어가 주무세요!”라는 요청 혹은 제안은 후쿠시마의 존재성, 그 미묘한 컨텍스트의 지각이 없이 행해지는 발화이다.
실재로부터 지연되는 승화의 순간

그것은 히로시마를 더 비참한 실재의 대상으로 전화시킨다. 상대를 파악하고 분명한 의도성을 띠지만 맥락이 결여된 로봇의 대화로부터 존재는 의도치 않게 부각된다. 소리와 소리 지각이 잠을 깨우는 두 지점에서의 미묘한 시차와 간극이 강렬하게 전파된다. 이 본격적인 대화가 없는, 컨텍스트가 오가지 않는 관습적 문법의 경로에서 신체는 멈추어져 있다 미묘하게 꿈틀거리며 이 반복 속에서 죽음은 신체에 근접한다.
히로시마는 밝고 유쾌하며 장난스럽게 친구들을 대하고, “거미(줄)”이나 “문어(발)” 같은 메타포로 언급되면서 병원 내 사교적 존재로 각인되어 있음으로 드러난다. 이 지점이 꺼뜨려진 지점에서 그는 홀로 고통과 죽음의 어떤 무게를 견디는 존재로서 드러난다. 여럿의 존재에서 가장 심도 깊은 대화가 이뤄지는 둘의 고립된 장면으로, 다시 혼자만 남은 예외적 순간에서의 언어의 사라짐은 끝 간 데 없는 고독을 수여한다.
이는 실재의 차원을 지시하면서 모든 일상의 말을 한갓된 것들로 치워내면서 이전 시간과의 뚜렷한 분기를 만드는데, 그것은 오히려 충만해 보이며, 그 전까지는 회화~대화의 차원을 벗어난 부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후의 장면은 매우 선명하다. 매우 더디게 조명 하나 하나가 꺼지면서 중앙 안쪽 쇼파로 등지고 누워 있는 후쿠시마의 등에 꽂히는 하이라이트 하나가 조금씩 빛을 다해 가면서 극은 닫힌다.
이 시간은 꽤나 길며, 비일상적이고 환상적인 차원을 극장의 실재로써 구현하는 셈이다. 이러한 조명의 효과는 클라이막스의 승화를 위한 극적 장치로 기울어지면서도 지나치게 과도하여 실제의 매체 자체로서 지시되는데, 가령 더딘 운용으로부터 조명의 꾸물거림 자체를 생명의 독립된 기호로 받아들이게 된다―이는 윤푸름 안무가의 〈공통의 되기 : 되기의 기술〉에서 보여준 조명 하나가 객석을 가로지르는 것 자체를 무대의 가시화로 두는 부분에 상응한다.
자연과 삶의 간극 혹은 대비

극장 전반으로 도약, 확장하는 새로운 신체성은 히로시마의 영면에 드는 신체성 자체를 감싸면서 일상의 세계에서 자연의 시간을 인공적으로 도입하며, 노을이 지며 밤이 찾아오는 필연적 시간의 반복으로써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의 변화를, 앞선 세계의 전도됨을 암시하고 체현한다. “바람이 이누나. 살아나 보련다.”와 같은 폴 발레리의 시구를 옛 일본어로 번역한 어떤 책 구절을 해석하는 문제는 집요하게 여러 사람을 통과한다.
자연과 삶의 연결은 요양원이라는 특수한 장소성의 바깥을 지정하는 것, 언어로써 고원 주변을 맴도는 것, 니시오카와 우에노의 대화에서 장소가 시뮬레이션되는 것에서 가령 실제로 드러나는데, 보편적인 차원으로 순환되는 존재는 삶과 죽음의 일시성을 지정하면서, 현재의 순간으로부터 고착되는 순간을 경감시켜 준다. 또는 무한한 영원 자체에 대한 긍정으로써 현재를 그것으로 환원시킬 기작을 마련해 준다.
니시오카에게 고원에 가는 길은 단순히 호텔과 멀어지는 길일 뿐만 아니라, 그가 의탁되어짐을 쉬이 허용하기 어려운, 그로써 그를 품을 수도 없는 패러독스의 상황에서일상적 소여의 내밀한 차원을 타자와 결부지어 생각할 때 그의 관점이 투영된 장소성과 우에노의 표면적 차원의 긍정성이 연장될 장소성이 조응되지 않음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그것은 그의 장소를 바꾸면서 그의 죽음에 저항하는 또 다른 의미가 거기에 덧대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바람의 비가시적 이미지는 마음의 바람과 갈구를 담지하며, 그로 인한 어떤 의지 자체의 부상으로서 삶의 연장 차원이 사사키의 등장, 오타케가 암시해 놓은, 실은 사사키를 매개하기 위해 먼저 등장하며 그 빈 자리를 임시 봉합하고 사라지는, 일종의 맥거핀적 대상으로서 오타케로부터 마침내, 느닷없이 출현하는 사사키의 해석을 경유해서 고전-정전이 갖는 무게는 그 내용 자체의 가벼움으로 치환되며 소거되는 듯 보인다.
두 개의 장소성

특별한 의지를 담고 있지 않기에, 바람은 우연하고 소소한 정동을 불러일으키며 삶의 소소한 의지나 바람을 촉발하고 또는 그것과 접지되고, 삶은 그 자신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고, 현상에 취해, 가볍고도 경쾌하게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어떤 도약과 비약의 지점이 그야말로 창발된다. 그런데 이 순간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오히려 자연의 보편적 차원이며 자신의 지난한 삶은 일시적인 차원과도 같다.이러한 장소성에 입각한 사고는 두 죽음의 환자인 니시오카와 후쿠시마 양자에게 다른 의미로서 발현되는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것,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후쿠시마는 그 말 자체를 즉자적으로 실행한다면, 외화한다면, 니시오카의 경우, 죽음의 실제적 층위의 경게성에 입각해, 그 경계 안에 타자를 들이지 않으려 한다. 죽음은 단독의 주체로서만 겪을 수 있을 뿐인데, 그런 지점에서 후쿠시마의 밝음은 죽음의 모습을 가리는 어쩔 수 없는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는 그것을 의도하지 않고서 의도한다. 친구들을 테니스 치러 보내고, 자신은 혼자 쓸쓸한 순간을 겪어 간다. 이 응시가 없는, 아니 응시가 가득 찬, 응시가 온전히 자신을 감싸는 타자의 순간을 우리가 목도하는 건 그 혼자만이 남아 있는 물리적 환경에서의 지연되고 비어 있는 실재의 차원으로서 증폭되며, 그 전의 언어들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소란함의 과거로 치환한다.
죽음에 승복하지만, 죽음이 있는 자리를 누가 대신할 수 없다는 깨달음, 어쩌면 지혜는 이 둘에게 선행된 인식이며,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 나를 기쁘게 하더라도 죽음의 양상이 달라지지 않는 것 역시 그 둘은 인식하고 있다.
〈S고원에서〉는 후반 죽음에 대한 당사자들의 특수한 징후 혹은 신체에 도달함으로써 내재적이거나 실재적인 차원에서 회화가 갖지 못하는 차원의 언어를 운용하기에 이른다. 첫 번째가 이 바깥의 장소, 병원과 대립되는 차원의 자연의 이미지로 쓰인다면, 두 번째는 텅 빈 신체, 물화되어 가는 신체 자체의 변전하는 장소성으로부터 그러하다.
김민관 편집장
2026.08.21.Fri - 08.30.Sun 평일 7:30PM | 주말 3:00PM (쉬는 날 없음)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
원작_히라타 오리자(平田オリザ)번역·윤색·연출_성기웅출연_이윤재 우미화 김동완 마두영 백종승 전수지 문현정 김현숙 이세영 베튤(ZUNBUL BETUL) 이수현 임진성 은소하 지수정 조성민 박세은무대디자인_서지영조명디자인_최보윤소품디자인_제페토기술감독_강경호로봇 코디네이터·드라마투르그_김경임그래픽·사진_김솔조연출_정재학무대감독_이승혜기획_송진우주최·주관_제12언어연극스튜디오후원_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예매_NOL ticket 1544-1555 | tickets.interpark.com/goods/26011235문의_0502-1932-0512'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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