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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현정×김재덕, 〈그래도, LIVE〉: 즉흥(음악)에서 음악(성)으로
    REVIEW/Dance 2026. 10. 6. 19:32

     새로움 혹은 관성으로서 즉흥

     

    임현정ⓒ박상윤[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

    〈그래도, LIVE〉는 (세 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었지만, 현장성으로 편의상 다시 구성하면) 1부는 연주회에 가깝다면, 2부는 비로소 음악과 춤의 협연이라 할 수 있었는데, 전자가 임현정은 자신이 포함된 카타르시스라는 팀을 불러왔다면, 후자는 김재덕이 자신의 작업과 함께 자신이 이끄는 모던테이블의 무용을 세운 것이다. 1부에도 춤이 가미되었는데, 이는 현장에서 즉석으로 관객의 아이디어를 받아 즉흥 연주를 하는 것에 또한 맞춰 추는 것이었다.

     

    따라서 춤은 그 아이디어 자체로부터도 가늠되며 그것을 배경 차원으로 두고 어떤 서사를 만들기도 했지만, 선제적인 매체의 경로를, 곧 자의적 음악의 틀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즉흥에는 그 중심을 춤을 보고 음악적 차원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결정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음악적 정합성 자체를 기(약)하는 가운데, 춤은 남은 무대 앞을 주로 활보하며 ‘빈틈’을 메우고, 음악을 가시화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이는 〈신청곡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열렸는데, 이는 즉흥 연주가 어떻게 관념적인 혹은 서사적인 차원을 처리할 수 있는지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지점에서 적어도 흥미로웠다. 첫 번째 ‘붉은 노을’에 대해서는 물질적 차원에 대한 정서적 변용을 점진적으로 주로 임현정의 피아노에 의해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갑자기 변화한 계절로 인한 고독감’의 경우, 색소폰에 빈 바람을 불어넣음으로써 매체적 속성을 신체적 환유―텅 빈 몸, 혹은 스산한 바람―로서 풀어냈다.

     

    즉흥의 쉬움과 어려움: 대상과 정서의 유무

     

    색소폰이 주 멜로디가 되는 가운데, 음악은 수미쌍관의 형식으로 조응되기 위해 다시 빈 바람이 투여될 때쯤 피아노는 잦아들었고, 그 거의 비어 있음의 소리를 머금고 맺는 순간이 발생했는데, 이 부분에서 어떤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때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표현이 감축되어 있었고 다소 모호해졌다. 이는 춤의 영역에서도 두 무용수 지학수와 와사비가 부유한다는 느낌으로 얹혀졌다.

     

    이를 추상적인 차원보다 인물이 대입되어 있는 부분에서 시작된다고 본다면 모호해지는 부분으로, 이른바 부모와 대응되는 자식을 동시에 표현해야 그 표현이 완성되는데, 이는 어떤 논의 없이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달리 교환해야 할지를 그 둘이 미결정된 상황에서 어떻게 (둘 또는 둘 간의) 감응적-행위적 차원을 표현할 수 있는지의 까다로움을 수여한다. 반면, 다음 곡 ‘가을이 타고 온 귀뚜라미의 등’ 같은 경우, 그 둘은 귀뚜라미를 바로 의태할 수 있다.

     

    음악 역시 그러한데, 피아노는 스타카토로 바로 이를 구체화한다. 여기서는 춤이 선제적이다. ‘만세’는 재즈 피아노 연주자―정현우―와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김덕화―가 한 대의 피아노를 동시에 연주하는데, 쿵쾅거리고―아티큘레이션―, 찰랑거리는 자유로움이 섞이지 않고 함께 묶이는, 무엇보다 피아노 자체의 나눔, 곧 매체적 이중 분화의 차원이 흥미로웠다. 아마도 다음 부분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즉흥’이 주제로 부상한 것이다.

     

    메타-즉흥

     

    ‘즉흥’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메타적으로 구현할 것인가. 아마도 설명할 것인가. 이는 전체적으로 즉흥이라는 관습성을 재현하는 방향으로 갔는데, 곧 즉흥 연주회 자체를 바깥에서 바라보며 그것을 의태하는 것, 즉흥 자체의 새로운 경로를 모색(할 수 있는 것인지를 타진)하는 것보다는, 즉흥의 규격을 상정하고, 그것의 어떤 일반적인 양태를 재현하고 있었다. 이때 그것은 음악적으로 정합되는 대신에 오히려 헐겁게 유격을 갖고 분기들 자체를 끄집어냈다.

     

    이는 각 악기의 자유도가 높아져서 즉흥의 무질서함 자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막바지의 분기 역시 표현했는데, 그런데 그것은 더 실험적이거나 그것의 부정성을 반문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즉흥의 순전한 이념을 구가하(는 가운데 어떤 새로운 기점을 생성시키)기보다 그것이 기존 즉흥과 어떻게 닮아 있는지를 어떻게 보면 검열하면서 작동하는, 일종의 메타 인지의 차원에서 가동되는 그런 것이었으며, 그건 즉흥이 으레 도달하는 그런 무질서함의 끝에 가까웠다.

     

    다음으로 군대 간 아들이 (파병 안 가고)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라는 아버지 관객의 청에 대해, 참고로 모든 아이디어는 색소포니스트 이진우와 임현정이 번갈아 가며 그것을 정리하고 연주로 넘어갔는데, 이진우는 먼저 싸움이 있고, 그 뒤로 어떤 화해를 모색하거나 그렇다 하더라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전제를 두었다. 이는 해금―서은영―과 색소폰의 긴장감 어린 대치로 이어졌고, 점점 소진되어 가며 색소폰의 맺음에 두 무용수가 포옹하는 것으로 끝났다.

     

    곧 두 악기의 물질성이 서사의 (두 주체의) 축 자체이기도 하며, 이것이 바로 두 무용수로 ‘응결’되어서 명확하게 극적인 차원으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은 한 관객이 ‘재밌는 무대’를 제안했는데, 이는 동요 〈비행기〉를 해금이 모티브로 즉각 가져옴으로써 그것을 피아노가 조금 섬세하게 연장하는 식으로, 매우 짧게 마무리되었다.

     

    음악이 기입되는 몸 또한 음악 안에 있는 몸

     

    김재덕, 〈댄싱 바흐〉[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 맞춘 〈댄싱 바흐〉는 하수 쪽 고정된 피아노의 임현정과 상수 가의 하이라이트 공간의 김재덕의 뒷모습으로 대칭 구도를 이루면서 두 사람의 협연을, 인격적 현전의 대화임을 부각하며 시작된다. 그럼에도 김재덕은 뒷모습을 통해 ‘심연’을 전제시킨다. 대부분의 사위라 할 건 흐느적거림이다. 김재덕은 기다란 두 팔을 좌우로 흔들며 넘실거린다. 몸은 직접적 동조 대신에, 음들을 실어나르고 보내는 처리를 하는 것에 가깝다.

     

    음을 정교하게 세분하기보다 그 흐름을 양태적으로 처리하는 이 같은 움직임은 그 포즈의 시작점, 결정점 같은 것의 구분을 흐트러트리는데, 그것은 음악의 몸으로의 이완이자 환원이다. 김재덕은 상수 앞단으로 나오며 정체화되고, 두 영역을 통합하게 된다. 음악이 멈추고 야구 동작 같은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연주가 다시 시작된다. 움직임의 밀도가 음악보다 적거나 정교하지 않다는 건 음악이 몸에 입혀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음악적 움직임이 일정한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적 흐름 안에 기입되는 것으로 〈댄싱 바흐〉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는 일차적으로 음악에 대한 반응이면서, 음악 안에 있음의 몸을 현시한다[각주:1]. 김재덕은 임현정에 도달해 접촉의 포즈를 취하는데, 이로써 분위기는 가일층 풀려난다. 이후 피아노가 그치고 모자를 벗고 숨을 토해 내는데, 피아노 쪽으로 모자를 떨어뜨리고 나서 조명이 켜지며, 그는 이제 음악을 들으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스텝은 비슷하지만 두 팔은 자유롭게 박동하고 뻗는다. 암전 직후 잔음 아래, 상수 안쪽에 하이라이트 조명이 켜지고, 그가 쪼그려 앉고 나서 암전된다. 그가 입은 의상, 모자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통일된 이 의상은, 모자라는 비의성과 그것에 대비되어 모자를 벗을 때의 클라이맥스 같은 순간에 기초한 존재의 현전에 대한 의미 자체를 잠재된 서사로 가져가게 하는데, 그것은 모호하지만, 〈볼레로〉와 중복된 서사의 전형을 이룬다.

     

    남성성의 안무란

     

    김재덕 안무, 〈볼레로〉[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

    〈볼레로〉는 몇 번의 분절로써 음악 안에 마디, 일종의 더듬이를 세우는데, 음악 ‘안’에 있다가 한 번은 반동을 탁 하고 주며 일어나는 것으로, 다음은 서서히 일어나는 것으로, 다음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고개를 들어 얼굴이 살짝 보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팔 좌우로 저으며 약간 트위스트를 하며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에서 왼팔을 뻗어 얼굴께로 가져가는 동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철저히 구문론적이다.

     

    발을 뻗기, 무릎 들기, 뒤로 발끝 세워 선 긋기 등 상체에서 하체로 세부 움직임이 옮겨 가며 변화를 꾀한다. 전체적으로 세부 분절의 차원으로 음악과 동조되는 움직임들은 이 구문의 반복적 단위 자체에 고착된다. 그러니까 어떤 자유로운/음악적 흐름이 움직임으로 결정될 여지를 남기지 않고, 그 단단한/딱딱한 단위에 복속되면서 음악 자체를 순간순간 지정한다. 그런데 이는 쌓아가는 음악 자체에 대한 향유 자체를 감축하거나 소거하는 데 이르는 것 같다.

     

    아마도 대부분의 〈볼레로〉 안무가 그 음악의 특색에 연원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곧 그것이 음악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밀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만) 확장된다면, 모던테이블의 그것은 그보다 더 표지적인데, 그리하여 음악과의 온전한 동조보다도 음악을 찍고 찍어 누르는 방식으로 음악을 전유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떤 남성적인 강도이다. [각주:2].

     

    희미하지만 뚜렷한

     

    사실 〈댄싱 바흐〉와 〈볼레로〉는 움직임의 궤적, 단위, (서사적) 캐릭터 모두 상응하며, 이 일상의 캐릭터성을 체현하는 의상, 마치 의경이나 경호원 등 특색 없는 남성 집단을 상기시키는 이 의상은, 그 단단함~딱딱함의 움직임 자체를 합목적화하는 기원이 되는데, 따라서 의상은 그 기이한 움직임에 대한 근거를 봉쇄하는데, 어쩌면 그것은 비의 〈깡〉(2017)과 같은 둔중하고도 위세를 잡는 캐릭터에 대한 풍자 혹은 오마주와 같은 느낌이 들 때 대중문화적 심급 자체까지 봉쇄한다.

     

    가운데 원 안에서 옴짝달싹하는 것 자체가 밀도(를 증폭시킨다)라기보다 일치된 조형미와 틈을 소거하는 전략 자체에 기인한다. 이는 딱 한 번 정도 무대 앞쪽 좌우 축을 잇는 횡대로 퍼져 나가며 확장된 양태 자체가 음악적 상승을 해소하고 잇는 차원으로 유효하게 드디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수축되어 원으로 모이게 된다. 곧 에너지를 압축하기보다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봉쇄하는 ‘영원한’ 미봉책 정도로 이 원형 집단의 배치술이 이해된다.

     

    곧 빈틈은 곧 메워진다. 그리고 더 엄청난 순간을 예비하는데, 그것은 모두가 모자를 벗어 하나의 이미지가 벗겨지는 것이다. 벗겨지는 이미지가 압축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때 제각각의 얼굴들이 드러나며, 숨찬 얼굴과 제어할 수 없는 양태들이 드러난다. 이는 뭔가 라이브니스 자체의 원칙에 따라, 제어될 수 없음을 제어한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그들이 일괄 모자를 벗는 순간, 오히려 정돈되지 않은, 정돈할 수 없는 민얼굴을, 구겨졌지만 그 위에 어떤 포즈를 덧씌우려는 찰라의 정돈(-불가능성)을 드러낸다. 타동성으로부터 주체성을 새겨 넣으려 한다. 이러한 모순과 역설의 알레고리는 그 분투적 행위가 용기와 과감함으로 순일하게 연결되어 증폭된 반응을 끌어내는 경로를 만든다. 그러니까 개성 없는 아니 개성을 지운 남자들만의 남성적 춤, 볼레로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김민관 편집장

    1. 1. 이것과의 차이를, 그러니까 비슷한 음악이면서 그 음악에 대한 또 다른 반응 양식은 어쩌면 예외적이며, 근래 금배섭의 〈바흐〉를 불러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테이프의 흩날림을 조작하는 행위, 두 선의 테이프를 맞잡고 흔드는 행위는, 그 기다란 테이프의 허공에서의 역동적인 떨림과 변화로써 그 음악에 응전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금배섭, 〈바흐〉: 음악, 인형, 사물의 아상블라주〉, 《아트신》, https://www.artscene.co.kr/2375. [본문으로]
    2. 2. 물론 그와 달리 이 음악을 정동적으로 추출해서 사용하는 예외적 사례가 Lee K-Dance의 〈레이어스(LaYeRs)〉라 하겠다. “음악이라는 외부를 그것의 재도입이라는 형식적 차원으로서 전유하여 고유한/확고한 움직임의 단위를 기각한다.” 〈[MODAFE 2026] Lee K-Dance, 〈레이어스(LaYeRs)〉: 움직임을 전유하는 주체의 시간성〉, https://www.artscene.co.kr/2344. 그런데 그것은 여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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