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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비드 프리먼 작, 강보름 연출, 〈크립스〉: 시대착오적인 동시대성
    REVIEW/Dance 2026. 10. 6. 19:32

    상징계의 틈

     

    강보름 연출, 〈크립스〉[사진 제공=(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하 상동).

    〈크립스〉가 펼쳐지는 남자 화장실이라는 단일 공간은 네 명의 뇌병변장애인들이 이곳이 속한 장애인 보호작업 시설에서의 노동을 피해, 일종의 의도적으로 일을 지연시키는 사보타주 행위를 지속함으로써 유지된다. 처음 짐이 대신 파견되고, 손더슨이 조명으로 구획된 공간의 경계를 단속적으로 두드리다 들어오고, 결국 카슨이 방문하는 사태에 이르지만, 이들은 뻔뻔하게(?) 그때마다 화장실에서의 용무를 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그들의 경계, 외부의 압력이라는 하나의 주요 플롯이, 사회와 환경의 힘이 전제가 되고 있음은, 그것이 예외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이 일과 시간으로부터 기원하는 부분이며, 그럼에도 이들이 조바심을 낸다거나 하지 않는 것, 또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곳 자체의 특수성, 곧 특수한 존재들에 기생하면서 이득을 취할 수밖에 없는 차원으로 설계된 법인체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노동자로 직접 부리는 것(의 명목)은 이들을 보호하는 하나의 사회적 환경을 가설하고 운용하는 데 그들의 노동이 덤으로 더해진다는 것(의 효과)를 부가적으로 취하는 데 불과한 것이며, 순수한 노동자 지위로의 환원과 평가를 가하는 것은 부절적하다기보다 불필요하다. 그러니까 이들이 기생하는 건 이들의 노동이 아니라 이들 자체이며, 그들도 이 사회의 기전과 이 직장의 기이한/예외적 중핵을 꿰뚫어보고 있다.

     

    따라서 업무를 이탈한 이들의 관계가 각자의 관점들이 경합하며 질적 차원의 개체화가 이뤄지는 어떤 특이성의 시간으로 재구성되는 가운데, 외부에 대한 구조적 차원의 분석 역시 가해지며 드러나는 상징계적 구조의 틈으로부터 (그 깨달음으로부터) 그와 대별되는 안락감 같은 것이 생겨난다. 화장실은 상징계적 대리자들이 그들을 어찌할 수 없는 틈으로서 적절한 근거가 된다.

     

    혐오스러운 혹은 사회문화적 지표로서

     

    여기서 손더스나 카슨은 적어도 노동자의 생리 활동 자체만은 막을 수 없다는 도덕적 차원의 정상성에 입각해서 그들을 막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반드시 장애인들이 노동자로서 일을 해야 한다는 근거를 될 수 없는 입장으로부터 곤궁을 겪고 있다. 내부와 외부의 차원이 넘나들며 결정되고 해소되는 이 재결착의 시점은, 장소적 특이성과 장소의 특수성이 절합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화장실은 경계의 공간으로 재설정되며 내밀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한다. 이 지점에서 게토화된 남성성 집단의 문제가, 곧 발화가 불거진다. 여성 혐오와 인종 혐오 등이 교차하는 음담패설과 ‘나쁜 장애인’이라는 금기화된 영역이 경합하는 시점이 발생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후자는 단순히 그들이 나빠서는 안 된다는, 나쁠 수는 없다는 인식적 차원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과는 다르다.

     

    곧 ‘나쁜 장애인’에 대한 담론은 그들의 나쁨으로부터 그들 역시도 동등하게 자유로울 수 있음의 권리적 영역을 주창하는 데서 거꾸로 취해올 수 있는 이 순전한 부정성이 지닌 반전의 효과와 그럼에도 그것이 지닌 순수한 나쁨에 대한 비판이 경합하는 가운데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혐오는 불행히도 (사실 다행히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인식과 편견에 반한 의도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1965년 쓰였던 (동시에 1965년으로 기입되는) 희곡이 담은 시대적 한계에서 온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희곡 자체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에 복무할 수밖에 없는 연출의 방향성으로부터 온다. 그런데 사실 이 희곡의 또 다른 경계는, 진짜 경계는, 유령성의 목소리, 델마의 다급한 요청, 울부짖음이다. 그것은 “무대 밖”의 자리로 소거되고, 말 이전의 매체적 단계로 소급되는데―곧 〈크립스〉 자체가 연극임을 가시화하는 자리로 소급되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희곡의 대사를 클로즈업해서 카메라로 비추는 것이 그것이다.

     

    미궁의 사건

     

    그런데 그것은 사회에 대해 가장 냉소적인 태도와 조소를 보내며, 규칙을 깨부수는 데 거리낌 없는 인물인 샘(유두선)과 델마의 전사로, 세상의 풍문과 샘의 관점에서의 발화가 경합하며, 제대로 된 수렴을 보여주지 않는 데 그치는 그야말로 문제적인 일이자 접근이다. 그러니까 전자에서 샘이 델마를 범한 것이라는 것이 후자에서 아니라고 반박될 경우, 그것이 맞는다도 아니며, 나아가 정당화가 아닌 것이라고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의 부적확한 해결 절차에 의해 일은 더 심각해지고 미궁의 사태에 빠져들며 (샘의 부정성의 여지마저) 봉합되는데, 이후 샘은 델마의 선제 행위에 의한 ‘자연스러운’ 반응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에서 ‘더’ 말하지 않아도 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샘의 성기가 바지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고, 침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간 델마로 교착된 그 상황이 델마의 부모님에게 펼쳐진다.

     

    그런데 그에 대한 부모님의 대처는 마치 (샘과) 델마가 신앙심을 잃어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에 이르게 된 것으로, 또한 장애인에 대한 욕망 자체를, 나아가 마치 여성의 욕망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전제―그러니까 샘이 델마였고 델마가 샘이었다면―함으로써 딸에 대한 수치와 부인, 대속의 자리에 딸을 강제로 묶어두고, 이로써 딸이 영원히 진정한 신앙으로의 출구를 찾는 상황으로 몰아가게 된다.

     

    이를 델마의 입장으로 소급시켜 보자면 델마가 패닉 상태에 이르게 되는 데 실은 결정적인 원인이 자신을 더 가리키는지 바깥을 더 가리키는지가 모호한 상태로 남는다. 곧 델마는 적어도 단순히 그가 갇혀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수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 않은가.

    여기서 샘의 가해자적 행위의 가능성을 부모의 입장에 따라 잠시 봉쇄해 둔다면, 곧 델마의 곤궁이 그 자신의 부정성에 대한 순수한 자신의 욕망을 여전히 부인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그 욕망 자체가 부정성에 입각해 실행한 것이 드러났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인지는 모호하게 남는다.

     

    여성 혐오적인 것!?

     

    나아가 그것이 일방적인 델마의 유혹이 선행되었다고 하는 것에 따라 델마에게 (법적 차원에서) 전적인 책임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인지, “여성의 특권”을 발휘했다는 순간부터 샘의 행위가 델마에 대한 명백한 성적 침해의 행위가 되었던 것인지, 그것으로 인한 왜상으로 델마가 진짜로/그제야 정신을 잃게 되었는지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샘을 전적으로 믿는 것도 또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도 불가능한데, 이는 델마의 발화를 결코 더 들을 수 없는 지점에서 극이 지속되기 때문이 아니라, 샘의 일방적 발화를 장애인 약자와 여성 약자에 대한 시점이 교차하지 않고 절합되는 지점을 살펴야 함이 전적으로 우리의 윤리적인 차원에 배속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델마를 성적 대상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위악성 때문이라고 쉽게 말하고 넘길 수도 없는데, 그가 여성 혐오적 세계관 안의 시종일관 델마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애와 여성의 권리가 경합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둘이 모두 더 잘 사유되지 않기 때문에―동시에 장애 여성의 권리는 더 인식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둘을 따로 또 같이 인식하고 사고해야 하는 측면은 부득이하다.

     

    가령 휠체어 특정적 신체에 입각해 그가 델마를 처음부터 전적으로 강제해서 침대에 눕히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수 있음을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 굳이 언급함은 단순히 일반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동등한 남자와 여자의 차원에서 발생한 성적 침해로 이 사건을 볼 때 결과적으로 장애에 대한 사고를 한편으로 은폐하며 다른 한편으로 강화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장애인 소수자-약자로 간주하며 그를 성적 자기 결정권을 전적으로 가질 수 없는 자로 둘 때의 부정성 역시 명확하다.

     

    편견에 대한 편견

     

    그런데 그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가 욕구 불만의 상태일 것이고, 또한 마음대로 그를 대할 수 있다는 (어쩌면 성욕의 대리 충족적 대상으로서 수월하며 그에게 어느 정도 시혜를 베푼다는) 일종의 어떤 편견과 부정성의 사유가 델마에게서 직접 실천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되는 상상이 아니라, 여성 혐오주의자 샘의 반쪽짜리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샘의 발화에서 델마는 발정이 난 존재이자 그에게 전적으로 호기심을 갖고 있는 대상인 것처럼 재현된다. 그것은 과도함의 것으로 측정된다. 반면, 상대로부터 비롯된 성적 행위를 받아들일 때 그가 갖는 즐거움의 정동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측정된다. 샘의 여성에 대한 성적 문란함으로서 부정성의 기호와 남성에 대한 동물적-성적 자유로움으로서 긍정성의 기호가 결정적으로 여성 혐오적 세계관의 일환이라면.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 둘의 행위가 장애인과 정상인(?)의 관계를 허용할 수 없는 (부모의 입장에서의 연장에서) 우리의 편견이 가시화(되어 비로소 사건의 지위를 얻)는 사건이라면!? 사실 샘이 델마를 범했다는 서사와 델마가 샘을 유혹했다는 변명 같은 서사 다음에는 샘과 델마가 일정 정도 진짜 사랑을 했을 수 있다는 전제가 누락되어 있다.

     

    물론 이는 이 희곡의 재현 윤리―역할에 대한 장애의 적확한 묘사적 전제―를 충실하게 ‘어느 정도는’ 따르면서도 수행의 재현 (불)가능성으로부터의 유격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있다. 가령 희곡과 달리 지문을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 델마의 발걸음‘에 대한 정나무 배우의 표현’은 정상인에 입각한 신체의 자리에 델마를 올려두어 완성하는 오해 혹은 혼동의 조건을 수여한다.

     

    감축된 혹은 과잉된 재현

     

    델마의 목소리에 “경련”이 있다는 지문상(에서만)의 언급은 지연되는 영상의 자막으로 처리됨으로써 존재의 부재를 강화하고 증폭하는 한편, 희곡집의 외양으로써 전-표현적인 가능성을 메타적으로 지시하면서 보여준다. 델마의 목소리에 대한 자막화는 어떤 가능성도 현실적으로 취하지 않으려 하면서 매체적 확장과 연극 이전의 시간성으로써 연극의 시간을 봉쇄하는 그럼으로써 연극 자체를 진정으로 중단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그 둘의 사랑을 반대하는 것, 장애 당사자의 사랑은 무용하거나 불결하며, 또한 장애 당사자‘와’의 사랑은 무용하거나 불결하다는 양가적인 모순으로부터 사건은 종착되며, 곧 부모의 편견에 의해 사건은 (그 둘 사이에서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잘못 봉합되며, 그것이 결정적으로 델마의 거취에 대한 봉쇄로 이어짐으로써 델마의 증상으로서 ‘경련’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은 끝내 미궁으로 남고, 여러 해소할 수 없는 것들의 유착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결국, 누가 더 약자인가의 판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약자들이 경합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 실은 그것들의 교착 속에서 그 둘의 권리 모두를 따로 또 같이 놓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

     

    곧 관객은 그 캐릭터 본연의 나쁨, 불온전성 따위로부터 그를 옹호하고 신뢰하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의 전사로서 야유회에 가서 로터리 재단 사람 딸을 더듬는 걸 피트가 봤다고 했을 때 “그러라고 두는데”라는 변명은 여자의 자율적 선택의 영역하에 있는 것이었나라는 혐의를 차치하고, 여성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관객을 옭아매는 윤리적 역설이다.

     

    실재의 이유

     

    사실상 여성에 대한 욕구가 공공연히 가시화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거리낌 없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 어떤 걸림도 없는 샘이라는 캐릭터성에 대한 역설적인, 불유쾌한 의혹―그것이 우리의 편견을 보여주는 상상적인 것이라고 해도―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기 쉽지 않다.

     

    가령 샘이 델마에 대해 “여성의 특권을 믿고 설친” 것이라고 항변하는 지점은 여성과 장애가 경합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경합한다. 나아가 실은 〈크립스〉가 대부분의 인물이 장애를 단지 명목으로 두르고 있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 장애 이전에 여성 혐오적 남성 중심의 세계를 표상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 이는 이 연극이 장애 연극의 외피로써 오히려 여성 혐오적, 인종 혐오적 중핵을 간과하거나 은폐하는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 아닌가 하는 반문을 갖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니까 〈크립스〉에서 그들이 장애인을 떠나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은―여전히 장애인으로서 자연스럽게 보이다는 말을 벗어나기 어려운 이 관점은―, 그들이 일반적인 ‘한남’의 형상으로부터 어떤 간극도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사실상 〈크립스〉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은폐되고 소거된 여성 혐오를 증상적으로 드러내면서 장애 인권에 대한 메시지를 내세우는 (그것으로 봉합되고자 하는) 매우 징후적인 작업이다.

     

    결과적으로, 여성 혐오가 세계의 기본값이므로 여성의 목소리는 소거되는 것일까. 〈크립스〉가 실재의 차원으로 제시하고자 한 델마의 목소리 없음은 여성이 소거된 사회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인가. 아님 여성의 목소리가 재현될 수 없음을 반영하는 시대착오성적 한계에 대한 불가능성의, 환상으로서 조치인가.

    그러니까 그것이 다룰 수 없다는 것이 단지 그것이 실재라는 점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아님 다룰 수 없는 것으로 처리하기 위해, 다룰 수 없음을 부인하기 위해, 실재라는 명목하에 그것을 봉쇄하고 있는 것일까.

     

    델마라는 경계성

     

    하나의 부정성을 분명한 근거 없이 연장하거나 다른 부정성과 바로 교직시킬 수는 없다는 것에 의해서, 샘의 행위는 판단 불가능한 것으로 남겨둔다면, 그럼에도 그런 지점에서 말할 수 없음의 델마라는 상태는 윤리적 곤궁으로서 이 작품의 구조를 개설하며, 폐쇄된 구조의 경계를 두드린다. 그러니까 실재는 기이한 환상의 차이로서 극을 횡단한다. 아니 횡단할 수 없음을 가시화한다.

     

    델마의 단속적으로 출현하는 목소리의 시각화, 그것은 들리지 않는, 들을 수 없는, 청각이 소거된, 하지만 그 부재의 지점에서 강화되는 그 시각적 경험에는 그 부재의 자리를 분명하게 듣는 것까지가 포함된다. 또는 우리는 진정 듣는 경험이 멈추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은 일상을 틈 타지만, 일상을 멈추는 비상 사태의 효과를 띤다. 유령의 흔적은 끊임없이 귀환하며, 실재의 차원에 대한 접근 불가능한 감각을 만든다.

     

    그러니까 델마의 통약 불가능성은 델마에의 그것이기도 하다. 누구도 델마의 소리의 진원지를 알지 못하거나, 알지만 마치 그것을 들을 수 없는 것으로 행동한다, 또는 진정으로 듣지 않는다. 델마라는 존재는 피트 등에 의해 신경 쓰이는 존재, 타자의 형상으로 심리적 차원의 해소할 수 없는 잔여로 남아 있는 듯 보인다.

     

    사회적 외부로서 공동의 내부성을 구축한 등장인물들과 그 바깥의 사회, 그리고 실재적 내부로서 델마라는 제3항의 구도는, 이 사회와의 불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바깥으로 나가려는 톰에 의해 새로운 국면으로 이행된다.

    톰은 상부 시스템과 친연하며, 동료들에게 열심히 성실히 사회에 복무하며 살아가는 정상성의 태도를 주입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게으른 데다 뻔뻔하며 도덕적 해이를 겪고 있다고 비판하기에는 이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사회의 구조를 이미/너무 잘 알고 있다.

     

    상징계를 유지하는 장치

     

    델마의/델마라는 불가능한 횡단이 ‘삽입’되는 것과 같이, 극 중 극 형식으로 사회적 형식의 주입 역시 삽입되는데, 그것은 소위 보호시설이 생존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경로로서 한 번의 자해를 통한 ‘장애인-되기’가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것이라는 지점에서, 매뉴얼 차원으로 전파되고 있는데, 그것조차 힘들다면 더 세게 머리를 내리쳐 천국행을 선택하라는 식으로 이야기된다.

     

    여기에 마이클의 홍성훈이 광대로 분하고 있지만, 이 장면들은 분명히 그들의 중간에 투여되는 물리적 차원의 진공이고,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에게 바치는 상찬이 아니라, 그들을 비하하고 조소하며, 그들과 같은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고 벌어지는 것임을 드러내는 차원으로 가시화된다.

     

    델마가 부재의 자리로서 현상된다면, 이 쇼들은 나머지를 상징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징계 자체가 그 바깥의 비정상 존재들의 낙인을 통해 그 너머로서 존재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들이 보상체제로만 살아갈 수 있음을 정의한다. 거꾸로 해이하고도 나태한 정신을 가진 존재들에 대한 당의정 섞은 구원이 아니라, 그들이 장애인으로 추락하는 냉소적이고도 잔혹한 삶으로(서 정의함으로)부터 반어적으로 그들의 의식 개조를 강행하고자 한다.

     

    또는 장애 자체를 작위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는 가운데, 그것이 본디 삶과 친연하지 않은 부정성의 차원으로서 정의를 강화하며, 장애를 부자연스러운 것, 불필요한 것으로 재구성한다. 그러니까 화장실 안이라는 임시적 차원의 내부적 앎과 깨어 있음은 관성적이고도 엄한 사회 자체의 진실과 절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양립하고 있는 것이다. 곧 톰이 바깥으로 나가고자 할 때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절대적이다.

     

    낭만적인 상상의 결말

     

    마지막 무대 전면 벽의 정사각형 구멍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바깥으로의 유혹일까, 아님 도무지 나갈 수 없는, 손 하나 뻗을 수 있는 면적으로부터, 그 벽의 두께를 새삼 새롭게 일러주는 엄혹한 경고의 메시지일까. 이 모호한 공간 연출의 기제로부터 〈크립스〉는 Iggy Pop(이기 팝)의 〈The Passenger〉(1977)로 마지막 발화를 갈음한다. 곧 그것이 차에 탑승한 승객이 보는 차창 너머의 빛나는 별들, 긍정성의 대상들이라면.

     

    아니 그것이었어야 함을 〈크립스〉는 말한다. 그것은 노래일 뿐인 소망일 뿐이다. 델마의 존재는 부재에서 실재의 레벨을 더 강화해 간다. 암전 이후 3번의 형광등 깜빡임, “무덤 속에 묻혀서” “나 살아 있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자막과 함께 무대 위에 발걸음이 실제 투여된다. 톰의 “델마 쟤는 맨날 저래”와 같이 그것은 공간 근처, 바깥에서의 식별되는 소리로서 현실화, 현재화된 것으로, 그것이 갖는 유령성은 매개의 차원에 힘입어 감축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델마가 손쉽게 타자화되어 저 너머로 보존된다는 점에서 이는 더 끔찍한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게 된다. 〈크립스〉는 상징계적 균열을 직시하는 여러 선명한 대사들이 산재하지만, 바깥에 세계의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모호하게 알려주는 것―모호하게 세상의 희망이 존재한다고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극 자체가 진리의 외양만으로 충분할 수 없음의 실재적 균열을 델마로써 완성한다, 선취한다―미리 도착할 뿐이다.

     

    우선, 이 내부의 비판과 자각은 꽤나 충실하다. 샘의 태업은 지능적이지만, 이는 한편 그의 시스템에 대한 역겨움으로부터 온다. 아니 그가 그 시스템에서의 역겨움 자체를 자처한다. 그가 그런 것임을 그 스스로 자율적으로 승인한다. 샘은 “순교자”인 척하는 “아줌마”와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비극적 삶의 주인공으로 자신의 처지를 격하하는 “아저씨” 둘을 농락하기 위해 식사 자리에서 입에 손을 내어 음식물 모두를 게워낸다.

     

    교차되지 않는 타자성

     

    샘은 나아가 장애인들이 “연민이나 당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정의함으로써 사회의 위선을 폭로하는 한편,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며 살아가는 모순된 존재로서 장애인을 사회의 입장을 전유해 조소한다. 보호시설, 곧 세계는 소수자적 타자의 위치를 전유해 거꾸로 정상성의 세계를 구획한다. 그 소수자의 자리에 “흑인”(피트)이나 “원주민”(톰)이 들어설 것이며, 그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혐오에 “연민”이 더해진다는 게 샘의 의견이다.

     

    여기서 문제적인 듯 보이는 건 이들이 동일한 소수자의 위치에서 그것을 너무/이미 잘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보다는 (그것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중립적인 입장 또는 어쩌면 동조하는 입장에 있는 것처럼 또는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들의 세계 속에서 톰을 예외로 하지만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여성혐오적 표현, 또한 퀴어에 대한 혐오적 사고 등과 같은 비뚤어진 의식 아래, 교차성의 논리에 입각한 이해와 연대의 차원이 발생하지 않음은 물론, 최종적으로 델마에 대한 방치와 2차 가해적 동조의 차원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까.

     

    하나의 진정한/순일한 희망은 그래도 샘을 위시로 한 남성적 무리에서 벗어난 톰이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톰이 하위 계층의 남성 문화의 지점에서 어떤 불일치나 대화의 지점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의 부정성 역시 산출된다. 엄밀히 이는 세계와 나를 분리시키는 기작에 의거한다. 그럼에도 톰은 델마에게 증상적 차원으로 가장 근접한다.

     

    곧 톰은 애드거 앨런 포우(Edgar Allan Poe, 1809~1849)의 소설 「생매장」(1844)에 나오는 한 캐릭터 이야기를 꺼내는데, 누군가 자신을 생매장해서 무덤 속에서 살아 있다라고 소리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그 이야기는, 실은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델마의 외침을 표현한 것과 같지 않은가. 이 이야기에 이어 바로 델마의 외침이 공교롭게 등장하기도 한다.

     

    분절적인 그러나 종합적인

     

    델마의 외침과 이곳을 나가려는 톰의 내면의 외침은 조응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리된다. 곧 톰 역시 델마의 문제를 진정한 것으로 놓고 사유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델마의 외침은 장애 보호 시설의 폐쇄성을 표면적으로 증명하며 톰의 바깥으로의 탈주에 대한 명목을 증폭시키는 사라지는 매개에 그치고 마는 듯 보인다.

     

    델마의 목소리의 매체적 소거는 실은 장애 당사자에 대한 거의 확실한 언급의 차원을 소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델마를 신비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역설적으로 재현 불가능성의 윤리에 따른 델마를 재현하지 않음, 그리고 재현의 감축은, 과잉된 상상력을 불러온다.

    델마의 경계 바깥에서의 정형 행동으로서 회전은 스릴러적 긴장을 동원하며 비가시화된 존재를 흐릿하게 가시화하지만―조명 바깥으로 밀려난다.―, 장애의 부재로서 인식을 의도치 않게 증폭하는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간과된 것이 바로 계급인데, 이 지점에서 샘의 위악성은 그가 하위 계급의 차원을 인식하고 있다는 지점에서 합목적적인 차원으로 재분류될 수 있을지 모른다. “여성의 특권”이라는 말을 단순한 여성 혐오의 산물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샘 자신의 계급에 대한 비판 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착종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가령 샘이 화장실에 들른 손더스를 ‘바닥에 엎드린 공주’로 비유하는 지점을 연결 짓자면 그런데, 이는 남성과 여성을 분리짓는 가운데, 계급적 차이를 함께 드러낸다.

     

    곧 여성, 장애, 하위 계층의 차원이 분절되어 있는 가운데, 그것을 교차시키는 것의 몫은 작품 내재적으로보다 작품 바깥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정성으로 구분되는 것들, 정상과 평범함의 기준에서 저하된 것들의 반동으로부터 의도치 않게 그것들의 엮임이 보이기도 한다.

     

    그것들은 절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구조 에서 추동되고 있으며, 그 하나가 불거지는 가운데 다른 것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모두 함께 다뤄야만 온전하게 다뤄질 수 있는 것으로, 〈크립스〉는 덜커덩거리면서도 그것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걸 시도하고 있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2026 모두예술극장 기획제작
    크립스 Creeps
    2026. 9. 16.(수) - 9. 20.(일)

    • 공연시간
      수,목,금 19:30 / 토,일 15:00
    • 장소
      모두예술극장
    • 러닝타임
      130분(인터미션 없음)
    •  
    • 관람연령
      15세 이상
    만드는 사람들
     
    작 데이비드 프리먼
    연출 강보름
    출연 백우람, 신강수, 양대은, 유두선, 정나무, 호종민, 홍성훈
    번역 및 드라마투르그 김현지
    조연출 송은혜
    무대감독 이효진
    무대 및 소품디자인 서현재
    조명디자인 박혜림
    사운드디자인 목소
    의상디자인 이윤진
    분장디자인 장경숙
    영상디자인 장주희
    움직임디자인 고권금
    접근성 매니저 및 자막해설 디자인 이청
    연습기록 박예지
    홍보 조유림
    프로듀서 김은정
    영상 프로그래머 및 오퍼레이터 정한비
    자막해설 오퍼레이터 이우람
    조명 오퍼레이터 이현동
    사운드 오퍼레이터 류혜영
    RF 엔지니어 김서경
    위스퍼링 및 접근성 현장진행 박하늘
    무대 크루 김현희, 마광현
    조명 크루 류성훈, 박유나, 양가영, 이지민, 이현동, 홍나영
    음향 크루 마광현 
    무대제작 산들이 움직인다, APIC(애픽) 
    무대제작 크루 김가은, 김택민
    무대 셋업, 철거 크루 강하은, 박정민, 양진규
    의상 및 소품 제작 옷장
    제작운영 대행 티끌
    조명장비 임차 맨땅프로젝터LD
    영상장비 임차 (주)엠투비쥬얼
    홍보영상 신승은
    홍보사진 및 기록촬영 스튜디오 야긴
    그래픽디자인 홍은주 김형재
    인쇄 으뜸프로세스
    언론 신시아
    모두예술극장
    총괄 오세형
    기획 이연경, 김가은
    기술 신현우
    무대 임혜민
    음향 강우진
    조명 강상민
    하우스매니저 이정민, 정혜원
    티켓매니저 김국희
    제작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모두예술극장)
    주최/주관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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