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SCENE032, 〈예쁜어린이선발대회〉(작/연출 한아름): 예쁨에 대한 신화학적 탐침
    REVIEW/Dance 2026. 10. 6. 19:32

     선망의 아이콘의 자리

     

    SCENE032, 〈예쁜어린이선발대회〉(작/연출 한아름)[사진 제공=SCENE032](이하 상동).

    〈예쁜어린이선발대회〉(이하 〈예쁜어린이〉)는 동명의 대회에 출전해 예쁜어린이상을 받고자 하는 초등학생 나비의 강박적 외모 가꾸기와 좌절 및 시련의 과정을 다루는데, 여기서 “예쁜어린이선발대회”는 미스코리아 대회와 같이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인대회를 고스란히 어린이에게 투사해 놓은 것이다.

    그 첫 등장이자 시작으로 참가번호 1번부터 3번인 나비에 이르는, 사회자의 멘트가 ‘예쁨’에서 최종적으로 ‘귀여움’으로 전환되는 이 과정은, 나비 역의 김하진 배우 한 명에 가해지는 가치 전도의 과정으로, 아마도 공연에서 가장 인식론적인 충격을 수여하는 시퀀스다.

     

    먼저 어두운 배경에서 사회자가 오른쪽 손에 든 마이크 쪽으로 얼굴을 향해 그 발화의 중요도를 가시화하며 대회 참가자들을 한 명씩 소개할 때, 상수 쪽 전면의 붉은 커튼으로부터 한 명씩 등장하게 된다. 성인 배우가 어린이를 전유하는 이 연극에서, 어린이의 자리에 (뜻밖에도) 성인이 있고, 성인이 키 큰 그리하여 ‘우월한’ 초등학생 어린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될 때, 외모에 대한 기준은 배우 자신을 의도치 않게 격하하게 된다.

     

    “장원영인가요”라는 반문에서 “장카설양”으로 이전되는 1, 2번의 참가자 소개는 과장되어 있는데, 초등학생 사회에서 통용되는 미의 절대적 가치 기준을 적용해, 일종의 이데아적 표상을 성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간극을 해소하는 이 이중 작용에는 과잉된 긍정성과 부정성에 대한 부인이 동시에 자리한다. 그러니까 김하진 배우는 초등학생 장원영이 아니라, 장원영이 되는 데 실패한 가짜 장원영의 수식어를 수여받는데, 이것이 어린이가 직접 출현한 것보다 더 큰 충격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장카설”은 K-POP 4세대 걸그룹에서 비주얼을 대표하는 멤버들의 성을 따서 조합한 것으로, 이는 아이브의 장원영, 에스파의 카리나, 엔믹스의 설윤에 해당하며, 그중 “장원영”이 있다. 그럼 2번 참가자는 장원영‘을 포함해’ 더 많은 다양성의 미를 충족하고 있는 것인가, 아님 셋의 평균율을 통해 어쩌면 더 감축된 미모를 갖게 된 것일까. 성인의 기준을 어린이에게 고스란히 투사함으로써 그것은 아이돌에 대한 어린이들의 선망의 태도에 편승하고 그것을 보존하는데, 이는 다분히 문제적인 것이다.

     

    ‘미’라는 이데올로기

     


    이제 어린이의 삶은 가장 예쁜, 궁극의 미를 지닌 아이돌, 성인에 이르기 전 단계의 삶으로 조직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다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 된다. 아이돌이 되고자 하는 아이들의 어떤 꿈과 아이돌의 외모를 갖고자 하는 아이들의 어떤 꿈은 다르지만, 후자는 전자의 충분조건이며, 기초 단계일 것이다. 곧 예쁜어린이선발대회를 통과하고 나서는 아이돌이 되는 하나의 관문을 넘어선 것과 같을 것이다.

     

    아이돌이 일상의 판타지로 자리 잡았다는 전제를 보여주는 근래의 작업으로 공놀이클럽의 〈이상한어린이연극 오감도〉(이하 〈오감도〉)를 들 수 있을 텐데, 이 작품의 경우, 아이돌이 되고자 하는 아이들의 열망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으며[각주:1], 따라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솔직한 아이들의 전언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화된다면, 반면, 〈예쁜어린이〉는 그와 유사한 욕망이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차원임을 드러낸다.

     

    이 차이는 미에 대한 엄격한 가치 기준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적인 이데올로기라는 성찰, 곧 어린이들의 특수한, 고유한 문화가 아니라, 어른의 가치가 이전된 것이거나 공통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비판적 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겠다. 아울러 그 무의식적 증상을 분석하는, 정신분석학적 시도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수용이 아닌, 집단-구조적 차원의 무의식으로 소급해 들어가는 작품의 형상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겠다.

     

    그러니까 〈오감도〉가 어린이를 무대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리고 그들과 성인 배우들이 함께하면서 그들을 기본적으로 존중해야 하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면, 아니 취해야 한다면, 〈예쁜어린이〉는 어린이를 어른이 연기하는 가운데, 어른이 투사된 어린이―이는 교차-횡단 가능한 부분이다.―의 실상, 아니 실재에 천착하며 ‘예쁨’의 관념을 재고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그 ‘실재’에는 무의식이 접면하는 것이다.

     

    그로테스크한 욕망의 잔여

     

    사실 〈예쁜어린이〉는 〈오감도〉보다는 영화 〈블랙스완〉(2010)에서 특정 역할이 되기 위한 강박이 환각으로 전이되는 일련의 과정과 더 유사해 보이는데, 나비의 일부를 이루는 돌과 드레스는 비인간-사물이지만, 나비의 각각 오른팔, 왼팔과 같은 조력자 역할을 하며―그가 두 존재에게 동시에 손을 내밀며 “뼈”와 “살”이 되어 달라고 할 때 점유하는 위치에 해당한다.―, 점차 나비의 욕망과 가치 기준이 그 둘에게 전이되기에 이르는데, 이 부분에서 특히 자연의 한 사물이었을 뿐인 돌의 변화가 섬찟함을 주게 된다.

     

    곧 나비의 외모 가꾸기에 총동원된 삶의 양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애초에 예쁜어린이선발대회가 나비의 삶 전반의 운용으로 가치 전화되는 차원으로부터 욕망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기에는 전사가 빠져 있다면, 오히려 예쁨의 가치가 나비에서 돌로 강제 이전되는, 일종의 세뇌되는 과정은 매우 급격하고도 나이브하고 또 투박하며, 그것은 나비가 그랬을 것임을 대신 보여주는, 일종의 원-장면 같은 것일 수 있다.

     

    곧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나의 욕망이 따로, 근본적으로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욕망을 선망하고 그것과 같아지고자 하는 방식으로 생겨나는 욕망의 기원을 명시하는 것으로서, 그 장면은 타당하다. 돌이 나비에게 당도한 건 우연한 사건의 경위이며, 홀연히 나타난 드레스가 그 전의 주인이 마구 거리를 활보하다 바닥에 끌려 돌이 술 하나에 끼게 된 것이었다.

     

    드레스의 일부만 남긴 형태이지만 극 안에서 드레스로 지칭되는, 일종의 태슬 드레스의 프린지 장식 몇 가닥만 남긴 오브제는, 나비가 지난번 참가했던 466회 대회에서 인기상을 받았던 참가자의 이 의상으로서, 사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그렇게 길지 않지만, 그렇게 언급하는 돌의 비유적 발화는 그 인기상 수여자의 상을 받고 나서 연장되었을 미의 과시와 쾌락의 정서 등을 복합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절대화된 미의 기준

     

    그것은 어느 날 돌연 하늘에서 내려온 일종의 데우스엑스마키나적 무대 장치의 산물―무대 천장 바텐을 내려 거기에 단―이며, 동아줄이라기보다는 금기의 산물과도 같다. 그것의 발견은 비현실적인 차원으로 발생하며―극장의 실재적 차원이 지시되면서 그것을 곧장 봉합해 버린다.

    이러한 장면은 뒤에서 한 번 더 반복되는데, 곧 빨간 커튼을 열었을 때 상수 가에서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사다리가 뉘여 있음이 명시된다.―, 나비의 욕망을 주조하는 한편, 그 반대로 나비의 욕망이 투사된 산물이다.

     

    이것은 끔찍한 피의 궤적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그 전에 돌과 드레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비에게 뼈와 피부가 되어줄 것을 요청받게 되며, 또 그 전에 돌은 그 자체가 먼저 윤곽 성형을 거쳐 네모 반듯한 괄사가 되어 나비의 뼈를 깎아 다듬어 줄 매개가 되어 줄 것을 요청받는다. 나비는 돌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동시에 그 욕망에 대한 지지체가 될 것을 요청~강제하며, 그 스스로가 그 욕망에 사로잡힘을 추동하고 강제한다.

     

    돌은 나비의 욕망에 대한 기준을 세뇌받고, 기꺼이 나비-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능적 산물로 전화한다. 이 나비의 (욕망의) 일부가 되면서 주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치환하는 과정, 일종의 식민주의적 질서가 이식되면서 주인을 선망하는 노예의 과정을 가시화하는 이 같은 과정은 앞서 말한 듯 섬찟하다.

     

    처음 돌은 나비를 마주하고, 그와 대화가 곧장 통화게 되자 “반짝이는 것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 외모에 대한 기준이 그의 무의식에 선취되어 있음의 단서이다. 곧 그는 온전히 사물적 존재라기보다 인격적 차원의 한 잣대를 체화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반짝이는 것을 욕망하지는 않(는다고 부인하)더라도 그의 말은 그가 반짝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가치 기준이 적용되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이 부정성의 차원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분명히 누설한다.

     

    강박적인, 종교적인

     

    한편, 이 돌+드레스의 도착은 안데르센의 동화, 벗을 수 없는 구두를 신고 영원히 춤을 추는 형벌에 처하게 된 주인공 소녀 카렌을 그린 「빨간 구두」와 같은 일종의 원형적-신화적 모티브를 간직하는데, 결국은 드레스의 자크를 억지로 올려 살과 드레스가 엮이며 흡착되고 벗을 수 없는 단계―“삐져 나온 옆구리살”―에 이르게 된다. 곧 핏빛 등, 드레스가 되며, 그에 따라 (대신) 무대가 빨갛게 물들게 된다.

     

    얼굴 리프팅 밴드, 복부 경락 밴드를 한 번에 붙이고 “복부지방 S라인 주파수”를 동시에 듣고 있던 나비의 모습은, 뉴에이지적 명상의 일단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종교의 수행 자체와 구분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실제 이후 대회에서 아마도 호명 받기 직전 나비가 자신의 양옆으로 드레스와 돌을 대동하고 무대 앞뒤를 걸어갈 때, 종교적 문란, 또는 종교의 대통합이 이뤄지는데, “할렐루야”를 외치고 나서 목탁 소리와 함께 “마하바야바라밀다…” 주문을 왼다. 미에 대한 애착과 일념은 뼈를 깎는 수도의 일단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나타난 이 드레스+돌은, 어쩌면 그 주파수가 환상의 기제를 갖고 있는 것의 연장선상에서 환각적으로 구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것은 욕망이 투사해 낸 어떤 산물일 것이다. 앙상한 뼈대로서 이 옷은 진정한 “뼈말라”가 되어야만 입는 게 가능한 의상이며, 따라서 그 자체가 불가능성의 산물이다. 곧 궁극의 미를 소원하는 건 불가능성에 대한 일념을 환상적으로 용인하는 것과 같다.

     

    무대는 전적으로 사각의 링과 같은 것으로 설계된다. 첫 번째 대회에서 두 번째 참가자는 이 사각형 테두리를 따라 꼭지점 하나마다 착지하여 포즈를 취하는데, 상수 뒤쪽 빨간 커텐에서 등장한 이후, 하수 뒤쪽에서 파란 조명하에 “겨울 쿨 톤”으로, 다시 하수 앞쪽에서 주광빛 조명하에 “웜 톤”으로, 다시 상수 앞쪽에서 “자줏빛” 조명을 받으며 “가을 뮤트 톤”의 대상이 된다.

     

    부차적-종속적 가치들

     

    이와 대조적으로 두 번째 대회에서 나비는 꼭지점이 아닌 무대 뒤쪽 중앙부에 서서 좌우-앞뒤로 교차하면서 사각형 테두리를 만드는 분열증적인 조명 아래 실루엣이 된다. 직접 가하는 하이라이트가 아닌 그의 얼굴을 비껴 나가면서 그의 얼굴은 어두운 그림자 얼룩이 된다. 사실 나비의 방황은 두 번째 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 극단에 치닫게 되었으며, 앞서 본 것과 같이, 끊임없이 앞뒤를 오가는데, 이때 조명은 나비와 다른 둘을 먼저 일종의 실루엣으로 기입한다.

     

    사회자는 “예쁜 것들”이 아닌 것으로서 나비를 계속 정의하며 예쁨에 대한 정의를 유예한다. 반면, 대회 직전 돌은 예쁨에 혹해서 또는 냉정하게 드레스에게 “예쁜 것들”을 “다르다”라거나 “생각이 깊”다고 정의하며, 그 과정에서 예쁘지 않은 것들이 부차적으로 정의되어지게 된다―이로부터 사회자의 말은 예쁘지 않음에 대한 부정성을 부인하는 온갖 수사들에 불과하게 된다.

     

    곧 가치가 전도되어 있는 셈인데, 온갖 좋은 것들이 예쁨의 가치로 수렴하며, 예쁘면서 또 다른 가치도 있는 금상첨화의 미덕이 예쁜 것들에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예쁜 것들이 모든 긍정의 가치를 소유한다. 아니,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나아가 소유할 수 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근본적으로 예쁜 것만이 가치가 있다라는 명제로의 항해술을 구성한다.

     

    예쁨은 절대적 가치이며, 다른 가치들은 그것에 종속되거나 부차적인 가치에 머문다. 반면, ‘귀여움’이나 ‘착함’은 그보다 질적으로 저하된 가치이며, 또는 예쁘지 않음을 봉합하기 위한 “대체어“(한아름, 26.10.01 공연 이후, 작가와의 대화에서)에 불과하다. 마치 귀여움은 성인과 어린이의 간격을 내포하고 있고, 아직 성인 정도의 성숙한 미에 다다르지 못한 어린아이의 단계를 결여의 차원으로 표상하며 특정 어린이를 그에 대입한다.

     

    그리고 착함은 예쁨이 갖지 못한 또 다른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 예쁨이 달성되지 못했을 때 충족되어야 할, 그러니까 마치 예쁘지 않을 때 착하기라도 해야 하는, 예쁘지 않음에 대한 좌절된 욕망을 마치 착함의 수용적 태도로써 승화시키고 진작해야 하는 가치가 된다―‘복스러움’은 다른 둘처럼 규정의 하이라키를 전제하면서도 착함의 의미를 내포한다.. 곧 사회자의 멘트 하나 하나는 예쁘지 않음에 대한 비하를 예쁨에 대한 절대적인 찬양과 함께 동반한다.

     

    괄사 특정적 신체

     

    조명이 (나비 대신) 서성거릴 때, 마치 조명 괄사를 통해 나비가 깎여 나갈 때, 나비는 혼자 남겨진 채 그 자리에 고착된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고통을 수동적으로 받음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이행의 차원이 나비의 삶의 태도를 이룬다. 그리고 그 전에 검붉은 조명 아래 비좁은 구역을 앞뒤를 오가는 장면은 아직 스테이지에 오르기 전을 상정하는 듯하지만, 그곳은 런웨이에서 그가 이행할 동작들을 암시한다.

     

    앞서 이때 그의 종교적 주문은 이 런웨이-수행 경로가 또한 그의 일상의 연장이며, 일상이 이미 런웨이의 자리를 꿈꾸고 선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런웨이에서의 긴장 어린 주문과 일상의 수행사적 주문은 이로써 통합된다. 사회자는 일종의 상징계적 원환을 완성시키는 존재이다. 이 예쁨의 가치가 세계를 지배하는, 예쁨의 가치 외에 다른 것은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 나비의 행위는 홀로 기이하기보다 보편적 차원에서 자연스럽다.

     

    마지막에 돌과 드레스는 나비의 순전한 조력자가 아니라, 나비를 비꼬고 힐난하고 질타하는 역할로서 사회적 차원에서 실패한 존재에 대한 악플러들의 행위를 체현한다. 이러한 태도 전환은 일종의 구경거리가 되는 참가자들에 대한 구경꾼의 냉소적인 시선을 보여주기 위한, 어쩌면 그들의 변환이 아니라 그것에 이입한 (다른 이에의) 관점의 변경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를 미의 가치 기준을 나비에게서 수혈받은 그 둘이 나비에 대한 조력을 통한 온전한 미의 달성 과정에서, 나비에 대한 선의가 아니라 나비의 자기 착취와 소진을 향한 여정에서 그것을 지속시킬 당의정 같은 발화로서 선취되었던 것이 탄로나는 지점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드레스와 딱 맞는 신체 사이즈를 강제하면서, 드레스는 온전하게 신체에 펼쳐지고, 돌은 술에 온전히 끼어져 “정착”함으로써 그 둘은 동시에 미적 가치의 완성된 토대 아래 통합된, 온전한 하나의 가치를 수여받게 된다.

     

    불결한 혹은 불길한

     

    처음 나비는 이 드레스에 대해 “암내”를 연신 발화한다. “영예”를 지탱하기 위한 피 나는 노력에 대한 긍정의 차원일까. 어쩌면 그것은 불결하고 더러운 것의 이면이 시각적 차원의 표층에서는 어떤 의미로도 전화되지 않고 은폐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스스로의 행위가 구림을 누설하는 증상적 발화는 아닐까.

     

    이 암내에 대한 의미는 모호하고, 또 양가적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쩌면 불길한 이 오브제는 순수한 조력자, 곧 인간적인 차원으로 처음에 그에게 다가왔지만, 실은 그의 내면 한 축의 어두운 그림자적 무의식을 호출해 온 것 아닐까. 그 연장선상에서 돌과 드레스의 발화가 성립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빛의 무의식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어떤 형상으로 발현되는 것일까.

     

    〈예쁜어린이〉는 사회 구조적 차원의 문제를 어린이를 경유해 끌어올리며, 따라서 더 어둡고 회의주의적이다. 독일식 잔혹동화의 교훈과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심리-스릴러적 차원의 긴장과 파괴적 장면을 담고 있으며, 비극으로의 결정적 장면은 “마술사 최현우”의 자기 소개로 시작되는 “최면” 사운드를 통해 침잠, 소거, 은폐, 봉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최현우의 다이어트 최면 사운드는 주파수 사운드의 연장으로 보이지만, 뜬금없고 명료한 결말을 적잖이 뭉개는 바 있다. 한아름의 발화를 참조하면, 어린이극이 가진 특유의 긍정성과 밝음에 대한 회의와 비판의 한 축에서 시작된,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 실제 참가했던 경험이 거기에 뒷받침된 〈예쁜어린이〉는, 어쩌면 어린이의 죽음이라는 왜상으로부터 어린이를 구원하기 위해, 비극에의 침묵을 선택했지만, 실은 발화될 수 없었던 진실의 차원을 수면 위로 끌어 낸 것으로는 충분히 그 사명을 다한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작, 연출 한아름
    단체 SCENE032

    📅 2026. 9. 30. – 10. 4.10. 1.
    📍 소극장 공유
    ⏰ 평일 19:30 | 토 16:00·19:00 | 일 16:00
    👀 관람연령 11세 이상

    출연 권용찬, 김하진, 윤건우

    작·연출 한아름
    드라마투르그 권소담, 노효은, 오하음
    무대 이윤하, 채경재, 최재공
    조명 노명준
    의상 오현희
    뮤직터그 고유진
    포스터 오하음
    우정출연 조민송

    1. “가령 7장의 “스마트폰”에는 성냥팔이 소녀를 패러디해 성냥 대신 스마트폰으로 온기를 내려는 아해(김지은)는 아버지가 일론 머스크가, 어머니가 아이유가 아닌 자신의 여러 현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데, 이는 아이가 보는 세계과 그에 대한 욕망을 적시한다. (중략) 그가 성냥 대신 스마트폰을 켜서 자신의 행복한 삶을 표상하는 데에는 AI가 조작해 낸 트럼프와 장원영, 손흥민이 아해에게 따뜻한 미소와 말을 건네는 가상의 현실이 동원되고, (중략) 제로 투 댄스를 추며 어른들의 행태를 핍진하게 재현하고 자본주의적 열망을 고스란히 체현한다.” 「공놀이클럽, 〈이상한어린이연극 오감도〉: 횡단하는 존재 혹은 시간」, 《아트신》, https://www.artscene.co.kr/2072.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