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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티마 베스 Ultima Vez, 〈보이드 VOID〉: 편재하는, 분절되는 개인들REVIEW/Dance 2026. 10. 6. 19:31
국제성으로서 무대

울티마 베스 Ultima Vez, 〈보이드 VOID〉©Danny Willems, 출처=https://ultimavez.com/productions/void.(이하 상동). 〈보이드〉는 여섯 명의 각기 다른 욕동 혹은 정체성의 차원이 교직되는 세계를 그린다. 그것은 시노그라피적 접근을 경유하며, 가설되는 무대의 시시각각의 변화 아래 놓임은 무대 장치 차원의 거시적 변화 외에도 무용수들의 오브제와 연관된 행위 차원에서도 그러하다. 의상 역시 각각의 차이를 명시하는데, 이는 각 개인의 고유성으로 수렴하는 한편, 그 개인들이 동등한 차원에서 병치됨에 민주주의적 질서가 전제됨을 은폐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여러 언어의 자기 발화 속에서 정체성 자체를 고민하거나 깊숙한 욕동 자체를 드러내는 것 모두 정신분석적 심급의 분석이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특성, 곧 개성으로 응결되고, 그 차이의 존재들이 집결된다는 것, 일종의 다양성의 기조를 채택한 민주주의적 사회의 장 아래 그것이 성립한다는 것 자체가 결국 중요해진다.
그러니까 빔 반데키부스(Wim Vandekeybus, 1963~)는 개방적인 사회 풍토의 정신을 체현하는데, 세계를 아우르는, 투어로서 일종의 예술 무역의 형식, 국제적인 존재들로서 매체의 차원을 하나의 이념으로 연장하면서, 또는 그것으로 소급되면서 그러한 다양성의 정체화를 거꾸로 극단화하면서 세계 내 이념 없음, 대안 없음의 차원에 대한 해법을 찾는다. 이것은 형식적이기보다 내용적이며, 엄밀히는 내용을 하나의 형식으로 밀어붙이는 일이다.
〈보이드〉는 매체의 문화적 차원, 개인적 차원을 각 개인의 고유성으로 소급하여 어떤 서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서사‘들’의 표면을 나열하고, 그것들의 간접적이지만 물리적인 침투를, 혼재됨으로서 스펙터클을 만드는 것이 안무의 절대적인 운용 방식이 된다. 따라서 모든 무용수는 각기 다른 움직임의 특질을 갖고 그것으로써 각기 다른 정체성을 극대화하지만, 어떤 누구도 주체의 견지에서 다뤄지지는 않는다.
혼돈, 다양성으로서 서사

각자의 서사가 일종의 관찰자적 거리 안에서 그 자체의 강도로서 주어지는 걸 보는 것, 곧 하나의 강도들로 인접하지만 분절되는 차원에서 교차되는 것, 인접한 차원에서 교환되는 것, 발화와 표현의 폭발적 차원을 전달받는 것, 안무는 전적으로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스타일, 형태를 고안해 낼 필요가 없으며, 각자의 정체화를 추구하는 것을 진작하는 것이 안무의 묘가 된다.
이 뒤섞임의 광경은 〈보이드〉가 존재 특화적 서사이지만 특정 존재 일변도의 서사는 아니므로, 존재들의 인접함, 곧 물리적 배치상 맞물림을 자연 수용하는 것에 따른 것이며, 그 어지러움 자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동시에 그 각각의 장면이 가진 상징적 의미에 대한 뚜렷한 규명보다 그것이 갖는 혼돈으로서 서사를 수용케 한다, 또는 그것으로 쉬이 환원된다.
보이드(Void)가 반데키부스가 말한 것과 같이 물리적 차원에서의 빈 공간이 (갖는 절대적 부정성이) 아닌, (아마도 들뢰즈를 경유하여) 공백이 갖는 잠재성의 영토를 나타낸다면, 〈보이드〉에서 그것은 차이가 차이로서 수용되는 정치적-연극적 적 장에 가깝다. 이때 자기의 연극적 상연은 정신분석가나 직접적 관찰자를 대리하지 않고서도 가능한데, 그것은 실은 그 모든 걸 나의 권리적 연장으로 보는 집단적 공동체라는 전제가 먼저 성립하기 때문이다.
곧 각자의 정신분석적 차원의 질병과 해방(이라는 다음 절차의 완성)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차이가 차이들로써 연쇄되어 공통의 차원으로 규합하는 순간이 중요하다. 해방은 그 규합 자체에 있다. 아마도 잠재적인 효과는 이들이 각자의 말을 충동적으로 수여한다는 (부)자연스러운 현실이 아니라, 곧 어떤 부재를 채우는 말들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 모두가 하나의 공통된 환경 안에서 그것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민주주의적 규약성

〈보이드〉는 자아를 표출하고 동시에 그것을 수용하는 집단, 세계를 공작해 가는 비의미적 차원의 행위들과 세계의 혼잡스러운 이미지적 성립, 개인적 정체성이지만 문화적 차원으로도 소급되는 차이들은 절대적 고유성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형식의 자율성 아래 담기지 못하며, 각 개인은 사회적 정체성의 예시 혹은 표본으로 분화하며, 다양성(의 형식)으로 환원된다. 결과적으로, 일종의 캐릭터성과 무용수의 개성 사이에 유격 같은 것이 시험된다.
그리고 이는 후반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규합되며 집단적 의례가 펼쳐지는 것으로 분화하는데, 그것은 둘씩 짝을 지어 포크 댄스의 연장선상에서 춤을 추거나 얼굴을 펼친 손으로 가리고 떼고 하는 집단 무도회적 광경을 연출한다. 이는 서사의 차원이 관계를 경유해 진작되어 맞는 효과가 아니라―사실상 대화라는 것이 있던가.―, 애초에 개인 서사들의 자유로운 난립이 공동체 안에서 허용되고 있었음이 비로소 가시화된 것에 불과하다.
이 집단 안에서는 충동의 한 효과가 폭력으로 나타날 때 역시 관계의 비대칭성을 나타내거나 폭력성을 지칭하지는 않게 되는데, 가령 접시를 프로시니엄 아치로 굴러 떨어뜨려 깨고, 두 번째부터는 그 곁의 다른 존재들이 이를 방어하게 되는 것이 대표적으로, 이는 각자의 여러 신체 부위에 넣은 접시를 망치로 마구 깨뜨려 가는 후속 행동이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부분이다.
각자의 신체에 각기 다른 위치에 부착된 풍선을 불어 터뜨리는 것 역시 폭력적 효과를 내재적으로 함입하는 것이지만, 이는 원으로 둘러싼 집단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폭력을 일종의 게임의 연장으로 받아들이며 집단적으로 승인하는 지점에서 그러하다. 일종의 문화적 정체성의 차이를 개인들로 수렴시키며 다성부적이기보다 혼성적인, 분열적이고도 혼란스러운 각 개인의 내재성들을 타자성의 차이들이라는 견지에서 수렴시키는 방식이라 하겠다.
다양성의 캐릭터들

인물들은 한 명씩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일상을 의태한다. 처음 홀로 무대에 오른 파올라 타데오(Paola Taddeo)는 북을 치려 하지만, 연이어 실패하며, 점차 공격적이 된다. 두 번째로, 바베트 페르베크(Babette Verbeek)는 하수 가 쪽의 골판지(?)를 덮고 사물화된다. 또한 이후에는 상자 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물론 비가시성에 대한 직접적 욕망이 아니라, 죽음충동을 도착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의상에 따른 변신의 폭이 가장 큰 편에 속하며, 할머니에서 소녀로 변화하며 처음에는 물리적 위장―은폐됨―을 경유해, 다음에는 집단 내 분란의 주동자로―그는 처음 꽃 무늬 바디수트와 속이 비치는 얇은 상의를 그 위에 걸치고 있다, 이때는 바디수트 위에 원피스를 걸친 중간적 변장을 한 상태이다.―, 중간자적으로 다른 이들과 결합하게 되는 트릭스터적이면서 자신의 개성을 그만치 희석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온전히 원피스를 입은 상태가 된다.
나비 매듭 모양으로 걸린 붉은 천 사이로 훌쩍 빠져나오는 검은 천과 함께 등장한 콜라 호 록 이(Cola Ho Lok Yee)와 그 천 아래에 숨겨져 있던 하킴 압두 믈라나오(Hakim Abdou Mlanao)는 곧 그 천 위에서 격정적인 관계 아래 듀엣 무대를 꾸린다.
여자의 끊임없는 또한 입체적인 공격성에 대한 안정적인 지지체로서 남자의 양태를 통해 둘의 관계는 위태롭지만 평온함 속에 재생된다. 수직 점프해서 두 다리를 굽히며 안착하는 장면은 무술의 합을 이루는 것처럼 강한 인장을 남긴다.
아드리안 토메스(Adrian Thömmes)는 등을 굽혀 잰 발걸음으로 돌돌 말린 바닥의 천을 손으로 밀어 까는 동작에서 그 하얀 천 위에 등을 굽혀 페르베크를 태우며, 수행적-구도자적 여정의 일정한 외양을 상정한다. 또는 하얀 매듭 줄을 줄타기의 외양으로써 홀로 걸어가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뉴욕에서 다시 고향 핀란드로 돌아온 실제 삶에서의 물리적인 여정으로서 자신의 할머니의 경험을 매개해, 발화에 앞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선 접시 깨기의 로타 산드보르(Lotta Sandborgh)가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다중적 웅성거림
마지막에 〈보이드〉는 검은 천에 휩싸여 모두가 사라지는 결말로 끝난다. 모든 것을 수합하는 비가시성의 장치는 막이 쳐 있는 무대의 가변성과 임시성의 차원과 결합한다. 〈보이드〉는 일종의 기이한 소극, 회수되지 않는 차원에서의 소극이 갖는 과잉됨과 과장성을 가져가는 것으로 경유하는 가운데, 주체를 비주체성, 반주체성의 차이로 기각한다. 다양성의 견지는 수용의 개방성을 단 하나의 윤리로 취하면서 주체성을 타자화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캐릭터성을 극적으로 고양시켜 가는 과정 자체가 극을 결정하는 주요한 전제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어느 정도 피나 바우쉬가 무용수들에게 요구하는 각자의 개성을 투출하는 방식과 흡사하면서, 그것의 뒤섞임 자체를 예외적인/하나의 주제로 명시하기에 이른다는 점에서 차이를 낳는다.
그것은 각 개인으로 소급되지만, 배치의 나열적 차원과 병치에서의 간극 모두를 수용함으로써 서사들의 차원이 어지럽게 퍼져 있는 가운데, 무대의 다중 시간성과 빈 시간성 모두를 가져가게 된다. 곧 토메스의 장면에서 돌연 다른 이들이 무대 안쪽에서 주광빛 조명 아래 단체로 사우나를 하는 장면은 약속적 공동체의 텅 빈 기표를 은폐하기 위한 속임수처럼 보인다.
그들은 일종의 다중이며, 각 개인으로서 오직 공동체 집단의 차원에서만 동등하게 관계 맺을 수 있으며―그러니까 이후 집단 제의의 차원에서 움직임은 오직 이념적 차원의 순전함을 지닌다.―, 서로의 모나드 자체로서 존립한다―애초에 서사는 그것이 갖는 윤리적 차원에서 봉합되거나 종합할 수 없는 차원으로 제시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곧 그 서사의 파편성 자체가, 그리고 임시적으로 가설되는 무대 안의 가변적-파편적 서사 자체가, 당위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당위를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09.02.(Wed) 8:00pm강동아트센터 대극장 한강소요시간 : 90분연출·안무
Wim Vandekeybus
공동 창작· 출연
Iona Kewney, Lotta Sandborgh, Cola Ho Lok Yee, Paola Taddeo, Adrian Thömmes, Hakim Abdou Mlanao , Babette Verbeek (performed by 대역 출연)
예술 협력· 드라마투르기
Margherita Scalise
무브먼트 협력
Maria Kolegova
작곡·사운드 디자인
Arthur Brouns
무대 디자인
Wim Vandekeybus
무대 제작
Pepijn Mesure
조명 디자인
Wim Vandekeybus, Sarah Feyen
의상 디자인
Isabelle Lhoas
의상 디자인 협력
Juliette Lejeune
테크니션
Schröder, Pepijn Mesure, Benjamin Verbrugge
공연 배급
Julia Bouhjar
제작
Heleen Schepens, Kenneth Raemaekers
연주
Kristofor Parvanov – Violin
Fil Caporali - Double Bass
Simon Leleux – Percussion
Daniel Jonkers – Drum
추가 음악
Hihats In Trees - Lander Gyselinck Obsequies
공동 제작
KVS Brussels’ Flemish city theatre, Danseu Festival, Theater im Pumpenhaus, Emilia Romagna Teatro ERT / Teatro Nazionale
특별 감사
Thi-Mai Nguyen, Jerry Killick, European Theatre and Film Institute.
프로덕션 매니저
Willie Hermans
기술 코디네이터
Pepijn Mesure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Fernando Vandekeybus
운영 조정
Kenneth Raemaekers
총괄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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