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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다페 2009] <Comedy> 연희장의 감각적 재현과 풍부한 상상력의 코미디극
    REVIEW/Dance 2009. 5. 28. 10:52

      프랑스 Nasser Martin-Gousset 안무 작품 <Comedy> 리뷰


     호텔의 어느 한 연희장 안의 재즈 밴드 연주, 복식을 갖춘 신사숙녀들의 파티. 이는 이 극의 전반적인 특성을 말해 준다. 극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작품이 몸짓 자체나 주체적인 몸짓의 발화가 전연 없다는 점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이 춤을 추는 것이 흥으로 번져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인형처럼 의식 없이 관성화된 몸짓들로 채워져 있다. 저녁에서 새벽으로 몽롱한 기류의 촉각적 느낌은 시간을 무화시킨다. 여기에 밴드는 다시 정확하지 않은 낮과 밤의 경계를 가르며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이에 몸은 반응한다.

     인형처럼 움직인다는 말은 재즈 연주에 완전히 이들이 복속되어 움직임을 말한다. 따라서 음악을 무화시키며 답답하게 진행된다. 사실상 이들은 하나의 표피적 이미지로 남고 그 속에 내재적인 의식이 전혀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빈틈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하나로 뭉쳐서 영역을 상정하고 이에 벗어나지 않는 모습으로 웃고 떠드는 사교계의 원칙, 즉 웃음 속에 자신을 무화시키는 것과 함께 심미적 움직임의 고취와 붓의 유연한 터치 같은 움직임 사이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마치 음식의 간을 보는 것 샴페인을 살짝 혀에 닿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표현은 육감적인 이들의 몸짓과 몸, 이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쾌락 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데서 과장된 은유만은 아니다.


     주제적인 의식은 이들이 인형처럼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띠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옴으로써 그것이 가상의 의식이었음을, 하나의 관점을 취한 것이었음을 드러내는 데 있다.
     보이지 않는 화자는 그들을 희화화하는 것으로, 이는 사교계 그 안의 댄스에 대한 진실이다. 아무리 흥겹게 춤을 춰도 그것은 사교라는 외부적 진열의 범위 안에 있게 되며 그 흥은 붙잡아 둘 수 없는 표피적인 차원에서 흩날려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술을 통한 미열과 흥분의 정도와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이 장은 의미 없음을 명백히 한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즐기기에는 뭔가 공허함이 관객에게 먼저 와 닿는다. 그리고 관객으로서 이들의 주체적 의식의 깨임을 기다려야만 한다.


     어느덧 흥이 가시고 몸이 노곤하게 피로로 젖어들 때 까딱거리는 손으로 이들은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오가는 진실과 망각의 경계에서 진실의 차원에 의식을 담그는 어떤 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것이 약간의 희망의 요소를 띤다고 생각했지만, 극은 쉽게 그 차원을 뒤집어 버린다. 그래서 극은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보여주는 데 있기보다 단순히 코미디극을 창출한다는 데 의미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극에는 영화적 상상력이 많이 투사되어 있는데, 양복을 입고 경쾌하고 절도 있게 동작들을 수행하는 것은 아무래도 영화 007을 보는 것 같고, 양복이라는 옷의 특성이 춤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데서 기인하는 측면도 있다. 즉, 이 극의 몸짓은 맞춤 양복에 걸맞은 멋들어진 자태를 뽐내는 측면이 크다.
     샴페인과 무화된 육체 그리고 육체와 육체의 섞임, 곧 프렌치 키스는 고깃덩어리와 같은 감각을 전한다. 이어 섹스까지 이어진다. 쾌락의 구조는 이 환경에 어떤 누구도 통제하지 않는다는 데서 그 끝을 알 수 없게 한다. 공허함과 함께 결말에 대한 불확실성이 공존한다. 쾌락은 돈, 자본에 의해 지배된다. 곧 다이아몬드는 실제 이 극의 심연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진실의 심연이 존재한다. 조명이 빛을 덜고 밴드의 음악이 끝나고 어둠에 이들의 모습이 드러날 때 여전히 이들은 인형처럼 하나의 동작을 반복, 공통되게 한다.
     낮게 드리우는 음악이 증폭된다. 이는 신의 음성 내지 지배적인 화자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순간과도 같다. 끝 간 데 없는 구조 밖에 한 지점을 전하는 것이다. 엄중한 지적으로서 약간의 공포를 더한다. 다만 이는 가상의 진동일 뿐 현실로 극은 곧 돌아온다.
     극은 코미디인지라 쉽게 밴드와 함께 또 다른 사교춤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단지 날을 지나치는 공허함의 한 순간일지라도 그것은 유효한 진실로서 성립된다. 공간을 지르는 같은 움직임은 하나의 주파수에 맞춰져 심연을 드러낸다. 음악은 배경음으로 나오고 있고 밴드의 표피적 음악과 달리 주로 배경음이 극을 지배할 때 이는 사람들의 내면을 상정하거나 구조 밖의 절대자 내지는 주제의식을 지닌 화자의 의식에 닿아 있다. 그러한 심연 이후 음악은 실재와 맞닿아 있다. 이들은 움직임 대신 잠재성을 지닌 그리고 과거의 표피를 입은 채 앞을 보고 있다. 동시에 하나로 뭉쳐야 하는 개별성과 주체성의 소멸에서 내적 의식을 지닌 개별자로서 위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극을 진지하게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오히려 재미있게 보면서 관성화된 몸짓의 진실을 새긴 우리 현실을 바라보는 데까지 간다면 이 극은 성공적으로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단순히 코미디 차원에 머무는 극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이야기에는 다이아몬드에 대한 등가물로 총 등의 무기가 등장하는데, 남자 두 명, 이 둘은 춤과 동성애의 본능을 진실로서 숨기고 있다. 이것이 하나의 복선적 지점으로서 결국 느끼하고 몽롱한 공기의 음악을 깸으로써 끝을 맺는다. 표피적 전환에 걸맞은 그리고 코미디적인 상황에 따른 결말의 조치로 보인다. 다소 개연성이 있는 극적 스토리를 맺는 것은 아님에도 다이아몬드의 영상 안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뒤섞이는데, 사실 이들은 사람보다는 하나의 원소나 입자로서 그리고자 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체의 없음은 단지 몰개성화된 현대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의식과 함께 움직임 안에서는 어떤 전환도 용이하게 성립되는 원소라는 잠재적 움직임을 내재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극은 코미디로서 충분히 재미있고, 진부한 코미디 공식을 따르거나 과장된 유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몸짓과 연주가 풍요로운 안무의 세계를 만든다는 지점에서 유쾌하게 다가왔다.


    사진제공_ⓒAudoin Desforges


    관람일자 및 장소 26일 8시, 아르코 예술극장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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