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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1 SPAF] 호주 백투백시어터 <작은 금속 물체> 리뷰 : '팔 수 없는 그 무엇'
    REVIEW/Theater 2011. 10. 24. 01:30

    ▲ 10월 15일(토), 서울역KTX에서 열린 호주 백투백시어터의 <작은 금속 물체>

    1987년 호주 질롱 지역을 기반으로 창단한 공연예술단체인 백투백시어터(Back to Back Theatre)는 전문 배우와 지적장애인이 함께 창작 활동과 순회공연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워크숍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인 예술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장애인의 성(性), 거짓된 지식, 인간의 우성과 열성의 기준에 따른 유전학적 통제, 채울 수 없는 욕망과 피할 수 없는 죽음 따위의 어두운 사회의 측면을 이야기한다.



    <작은 금속 물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일상 공간인 호주의 작은 기차역에서 공연되었고, 멜번 초연 당시 평일 오전 8시 30분 출근 시간에 맞춰 공연하기도 했다.

    2011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해외 초청작으로 상연된, 작은 금속 물체는 서울역 KTX 타는곳 3층에서 진행됐다. 콩나물시루 같은 역사 안에 분주한 사람들은 서로의 낯섦을 승차 장소로의 이동 목적 아래, 같은 목적을 지닌 ‘합리적인 이성의 장애물’들 사이를 통과했고, 특히 고집스레 버텨 선 스티븐을 매너 있게, 재빠르게 스쳐 갔다.
     


    늘 많은 사람이 오가는 서울역의 일상에서 공연하는 이들은 눈에 잘 띄지 않은 채 홀연히 시작됐고, 군중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현실로 전가된다. 헤드폰의 증폭을 통해 다가오는 실재는, 먼 거리를 통해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얻어진 이 낯선 현실과 간극을 형성한다.


    스티븐은 여자 친구가 없는데, 이는 그의 조금 다른 외모 때문이라고, 또 그의 차림에서 드러나는 금전의 부족 때문에서 기인한다고 자연 판단하게 된다(이러한 인식은 한국 사회에서는 얼마나 명확한가). 스티븐 자신의 성정체성을 의문하게 되기에 이르는데 친구인 게리는 파트너를 소개해 준다고 한다. 게리에게 전화가 와서 앨런이란 사내가 3000달러를 주겠다고 하고, 현장에 등장한다. 그 대가를 받아들여 스티븐이 잠자리를 당연히 허락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남자의 일방적인 말은 스티븐의 신체를 통과하지 못 하고 미끄러진다. 여기서 오는 혼란은 관객의 혼란으로 치환된다.


    시종일관 무감각한 스티븐에게 다음 타자로 남자의 동료인 여자가 등장해 치료를 해 주겠다고, 작은 금속 물체를 내 놓으라고 합리적인 말들로 설득한다. 작은 금속 물체의 거래 조건으로 사회에 온전한 적응의 단계를 밟게 해 주겠다는 표면의 말은 작은 금속 물체를 반강제적으로 취하려는 조건은 은근하게 뒤로 빠지는데, 이 여자의 말에도 별로 휩쓸리지 않는 스티븐의 곧은 심지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인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작은 금속 물체의 가치가 획득된다.


    작은 금속 물체는 신비스러운 어떤 것으로 남겨져 있었고, 돈으로써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개인의 본질(차이의 정체성)이자 스티븐의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삶을 자신에게 수여하는 어떤 고수되어야 할 이념이자 그 신체 자체의 환유이기도 했다(그렇다면 이는 이미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드러난 것이다. 이는 언뜻 다시 스티븐의 성적 기호로서 신체와도 결부됐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단단하게 맺힌 그 무엇).

    사람들은 간혹 이 공연을 물었고(배우보다는 관객을 보고), 헤드폰을 껴보고자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갔지만, 실상 우리는, 배우를 포함해 그들 바깥에 있었다. 헤드폰이 현실을 재편하고, 그 둘 만에 스폿 라이트를 비추었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실상 우리 자신이 사람들에게 관찰되고 있음을, 망각하기 십상이었다. 현실 바깥에서, 현실과 그 현실을 타고 진행되는 극이 중첩되는 가운데 진행되는 극을 따라 이 새롭게 생성되는 현실의 현재를 통해 현실의 바깥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헤드폰의 체험은 세상과 단절을 그리고 세상에의 내적 체험을 부각시킨다.


    스티븐을 피상적으로 훑고, 스쳐 가는 사람들과 그의 삶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무지한 사람들은 스티븐의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사람들이 오직 위치 정보로만 치환된다면(자신의 자리와 공간은 없다면), 스티븐은 자신의 양심의 공간을 만드는, 붙들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고, 자신만의 자리를 지켜 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연극의 체험을 공유할 수 없는 가운데, 폭력적 미끄러짐을 수행하며 극을 완성했지만, 그 대조의 지점을 관하게 할 수 있는 역할로서 극을 완성시켰다.

    사운드는 대략 세 차례 정도, 일정한 박자에서 증폭을 통한 혼란을 안겼는데, 이는 의중을 드러내지 않는(그를 아끼는 개리에게만 고민을 이야기한다) 스티븐의 의식의 자장이 전환되었음을, 또는 강한 자극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극적 장치였다. 그 장치가 바로 현실을 재편하는 헤드폰, 사운드의 힘이기도 했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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