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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은미의 <사심 없는 땐쓰> : 사심捨心 있는 댄스에서 사심私心 없는 댄스로...
    REVIEW/Dance 2012. 2. 28. 14:44


    ▲ 23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사심 없는 땐쓰> 프레스 리허설 장면

    지난 24일에서 26일, 서울 종로구 소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안은미의 <사심 없는 땐쓰>(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안은미컴퍼니)는 그녀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에 이어 두 번째 보통 사람들에서의 특정 계층 집단을 대상으로 한 리서치 아카이브 프로젝트이다. 안은미는 이를 ‘무용책’, ‘미디어책’이라는 단어로 언급하기도 했다.

    ▲ 13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사심 없는 땐쓰> 제작보고회에서 안은미 안무가

    안은미는 얼마나 춤추는 이가 똑똑하고 예쁜가 보여주는가 보여주는 게 춤의 일반적인 모습이고, 무대 위의 사람들이 관객과 제대로 소통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지속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먼저 가서 배우고 그 사람들도 와서 배우고 하는 형태가 이번 무대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예술가와 고등학생과의 만남은 할머니들의 춤을 수집하고 이를 무대에 녹여 냈던 저번 작품에 비해 거의 육십 년의 세대 간 간극을 보인다. 안은미는 지난 13일 열린 제작보고회 당시 인터뷰에서 고등학생의 몸에는 ‘직업성’이 없다는 말로 일종의 노동이 육화되어 있는 할머니들의 몸이 갖는 역사성과 또 그것의 코드화된 부분이 없음의 말랑말랑한 이들의 신체성을 또한 짧게 언급했다. 이들은 가깝지만 굉장히 떨어져 있는 우리 사회의 세대 축을 이룬다. 그래서 안은미의 말에 따르면 이들이 몸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며, 춤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시 이들이 갖고 있는 몸의 속성들에 주목하게 되는 공연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전했다. 대략 용인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춤을 추는데, 한 시간 만에 기적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춤의 비물질적 특성과 효과적인 소통의 매개로서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6개월의 만남이라는 시간이 걸린 이후, 이들의 마음도 열렸고, 이들에 관한 안은미 자신의 오해들도 깨졌다.


    인터뷰에 이어 본격적인 쇼케이스에서 믹싱 되는 음악은 경쾌하고 안은미컴퍼니의 무용수들의 춤의 동력으로 작용하며 황홀경을 빚어내는 듯했다. 음악에 있어서는 일종의 재코드화·탈코드화 전략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이 음악들이 세대적 감수성을 반영한다고 할 때 해석은 달라진다. 필자를 포함해 대다수 할머니들의 육체와 춤보다는 현재 그것들이 동시대성을 띠고 흘러나오는 유행가들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등학생 또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영상 형태의 춤의 수집 기록물이다. 여기에는 음악이 없다. 몸 자체에 주목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원래 인원은 더 많았으나 아이들의 바쁜 시간 관계상 최종 서울국제고등학교 스물두 명으로 인원이 줄었다. 아이돌 댄스는 구십 년대부터 아이돌 문화가 시작되어 엄청난 영향 아래 전 국민적으로 번져가며 확대됐는데, <사심 없는 땐쓰>에서 안은미컴퍼니의 무용수들의 춤은 고등학생들한테 영향 받은 것을 춤으로 만든 것이다.
    이들 사이에서는 ‘아이돌 댄스를 딴다’는 은어가 사용된다. 안은미는 “아이돌 음악이 사회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제대로 짚어준 사람이 없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하고 한편 국민 사이에 오르가즘을 주는지 질문해야 하는데, 역시 기록하는 사람이 없다, 안무가가 아닌 오히려 역사학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전한다.


    그녀가 가졌던 아이돌 댄스에 대한 부정적인 이전의 견해는 이들이 춤 말고 도망갈 구석이 없다는 점을 알며 깨졌다.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 외모라는 잣대가 사회를 지배해 스스로들 외모 콤플렉스를 떠안고 미디어 속으로 몸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것.

    같이 한 학생들 중에는 생각보다 더 개성이 많은 친구가 많았다. 가르쳐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무용 안 해본 사람들로서 건드려 주면 터질 것 같은 에너지, 무한대로 커질 수 있는 잠재력이 보였다고도 했다. 안은미의 행보는 체體의 논리에 따라 본질적인 것들을 찾아 나가기보다 용用의 논리에 따라 사회 현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몸짓들에 주목한 결과이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잘난 척하지 않은 채, 중생 속에 들어가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늘 그녀의 민머리가 신기했던 바였는데, 이번에는 정확히 부처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두 번째 프로젝트에 이어 안은미는 ‘중간 세대인 사오십 대 남자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기획하고 있다.


    지난 23일에는 그 보살행의 실현을 공연 전에 볼 수 있는 프레스 리허설 판이 열렸다. 무대는 파편들의 분출을 이음매 신경 쓰지 않고 더해 나가는 콜라주 방식이다.  리듬은 순간에 분절되며 이어지고 순간의 기표는 제 역할을 다 하고 사라진다. 쉽게 말해 음악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춤은 거기에 딱딱 맞게 떨어진다. 이는 신세대라, 아이돌 세대라 불리는 문화의 한 전유 전략임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춤들 간 공통 요소는 마네킹과 같은 즐김의 정동affect 아닌 사유 아닌 거친 분출의 정동이 사유 없음의 정도로 드러난다. 여기에는 일종의 코드화된 기호들 그리고 그것이 주는 몸의 속박 외에 어떤 일정 총보score를 미리 짜여 있는 안무에 바삐 또 능숙하게 맞춰 나가야 하는, 그래서 얻어지는 일종의 쾌감 같은 것도 배제할 수 없다.

    끊임없이 나아가는 데 모종의 공포, 곧 이 주기가 끝날 것이라는 데 대해 교체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는데 곧 동시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일종의 테크노의 시간이 없는 경계 그리고 횡단적 형태로도 볼 수 있다.

    그 와중에서도 꼭두각시놀음 같은 분절 요소들은 전통적인 요소들이 몸에 내재된 상태로 남아 있다가 분명 아이돌 댄스에 절합(節合, articulation)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음악과 춤이 엮는 자장은 그 음악이 느려지기도 하는 것을 현격하게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음악들이 공간에 정박되는 신체를 붙잡아두는 요소로 강하게 기능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한다. 이는 관객이 느끼기에 공통되는 것이지만 이 신체는 소모되어야 하며 댄서는 춤추는 기계로 작동되어야만 한다. 음악이 느슨해지고 연결되는 지점에서의 더딘 몸은 활력 장치를 걸어 놓아야만 한다.

    이어 영상에서 나오는 춤은 일부러 목소리를 무화시켜 진행하지만 실상 각 춤들은 분절되지 않는 측면이 크다. 즉 각각의 개성이 드러나기보다 몸에 체화되어 있는 아이돌 춤들을 이 순간에 전유하고 있을 뿐인 춤들이 다수다. 이 춤은 형태적인 유사성을 띨 뿐이다. 이런 측면은 후반에 가면서 춤을 오히려 더 못 추는 그래서 더 개성이 드러나는 사람들의 춤들로 아카이빙 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인, 무대에 초대된 서울국제고등학교 학생들이 한 명씩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낯선 몸짓들이 나왔다. 어린이 헌장을 읽으며 그들 자신의 미래와 바람이 담긴 목소리는 그 자체로 들린다. 즉 이는 어떤 괴리를 낳고, 이는 한편 세대의 전락을 의미한다. 이는 낯설고도 뚜렷하게 들리는 게 이미 다른 세상에 있는 느낌인 것이다. 그들 간의 연대가 발생되는 가운데 이화작용이 발생하는 측면은 짙다.


    보살행이 결국 성공한 것일까. 마지막은 다시 아이돌 댄스로 돌아갔는데, 팔딱거리는 몸의 생명력들이 육화되어 있는 무용수들과 그 생명력이 몸짓 기호들에 배어 나오는 아이들의 춤이 한 덩어리를 이룸은 예기된 교합이었음에도 마음을 움직였다. 아이돌 댄스는 춤의 대중 춤의 접근과 대중의 춤에의 접근이 서로의 관계 맺기 작용을 즉시로 벌이며 커뮤니티 댄스를 출 때 아이돌 댄스는 생각지 못한 감흥을 줬다. 



    안은미는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는 참가하는 고등학생들의 몫으로 돌렸고, 공연은 특히나 그들이 가진 익숙함보다 설렘이 먼저 당도해 있는 무대로, 즐거운 놀이와 연대의 장이 됐고, 춤을 보며 같이 찾기를 사전 종용했던 안은미의 말대로 해답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결국 <사심 없는 땐쓰>는 자기 자신을 뽐내고자 하는 사심私心이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을 쏟는 사심捨心 있는 댄스가 모태가 되고 있었던 것일까. 커뮤니티 댄스는 퍼포머티버티(performativity, 수행성)적인 측면에서 주체의 형국을 지우고, 참여자에게 그 몫을 돌리는 것처럼 실상 그 사심捨心 조차 없어진 결과랄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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