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허성임 안무 <넛크러셔(NUTCRUSHER)>: ‘균열적인’
    REVIEW/Dance 2019. 3. 12. 13:59

     

    허성임 안무 <NUTCRUSHER> 공연 사진


    한껏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것. 이것이 거의 전부라 할 안무는 필시 소진을 향해 가고, 소진의 변증법이라 할 뻗음과 침묵의 영원으로 수렴해 간다. 세 퍼포머는 마치 크로마키 기법을 시현하기 위한 신체 전체를 감싼 의상에서 출발해 하나씩 그것을 벗고 나체화된다. 가린 의상과 더불어 이들은 시종일관 얼굴을 돌리고 있고 따라서 신체의 대상화는 역으로 전도되어 불편한 감각을 맺히게 한다시선이 지배할 수 있는 건 시선을 돌린 얼굴과 신체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신체가 아닌, 기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자체 동력의 신체들이고, 이는 박자를 세는주로 허성임이 중간에서 그 역할을 전반적으로 가져가는 듯 보인다행위로써 이 움직임은 반복되어야 한다.

    이 박자는 이 안무를 음악에 맞춘 매끈한 시간의 구조를 거부하며 소진의 밀도를 구성하는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만든다. 곧 이 박자는 현재 생성되는 움직임을 지시하며 동시에 그 움직임은 그 박자로부터 점점 간극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또는 그 반대이다. 숫자를 세는 것 역시 그 움직임으로 인해 불가능해지는 곧 흐릿하거나 미약해지는 시점이 오게 된다. 물론 이 동작들은 이미 연습과 리허설을 수없이 거친 조각들이겠지만, 그것은 일정한 단위로 완성되어야 하며 반복된다는 규칙을 벗어날 수 없고, 그것은 강박적으로 지속되지만 어쩔 수 없이 끝을 맺어야 한다.

    ▲ 허성임 안무 <NUTCRUSHER> 공연 사진 ⓒ Philip Stanier

    이 소진의 동력학에서 덧대어진 전자 사운드는 그것이 곧 폭발될 것 같은 이상한 불/쾌감을 형성한다. 음악의 크기 역시 물리적인 한계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 신체의 물리적인 한계이기도 한를 겪으며 지속을 그칠 것이고, 신체 역시 그것과의 부착됨을 언젠가는 포기할 것이라는 예측이 자리한다. 그것을 보는 것은 거의 고통의 단계에 이른다. 그 끝을 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신체를 움직인다기보다 움직이는 신체에 잠식되어 간다는 것, 리듬의 구성이 아닌 박자의 구조를 뒤쫓는 신체는 그 위에 덮인 지속적 사운드의 고양 아래 호흡 곤란의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중단을 요청하지만 멈출 수 없는 신체는 빨간 구두와 같은 주술적 모티브를 상기시킨다.

    헤드뱅잉을 하며 상반신을 벗어 버리는 허성임을 비롯해 세 명의 퍼포머는, 옷을 하나씩 벗고 몸을 관객으로 비스듬하게 돌리는 것으로 간극의 시점을 만들지만, 박자의 지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변화는 균열이 아닌 변화의 시간을 시차적으로 생산하는 것에 그친다(‘어느새 달라져 있다!’). 완전히 눅진해진 신체가 서로를 찾고 감싸고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은 (주체의) 선택/포기인가, 온전한 소진으로서의 끝/결과인가. 물론 이는 극적 양식의 의도적 완성에 다름 아니며, 애초 관객이라는 외부적 영역과의 단절을 선사한 만큼 극의 경계를 명시적으로 구성하는 커튼콜을 피한 것 역시 이에 속할 것이다. 곧 이 작업은 관객(현재)의 세계에서 제어가 불가능한 동력을 지시하고자 했는데, 그 스스로도 제어 불가능한 지점을 산출할 수 있는지, 아니 그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지는 논외의 지점일 것이다.

    다만 박자를 세는 것이 불가능해진 어떤 시점, 렉이 걸린 듯한 음악에 감염의 통로를 벗어날 수 없게 된 어떤 시점, 모든 것은 끝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끝냄 역시 시점을 특정할 수 없게 된다. ()능의 신체는 시작되기 위해 끝을 맺어야 하는 단계에 이른다. 어쩌면 따라서 끝은 또 다른 시작의 예비 단계에 이르며 앞선 멈춘 사물의 상태와 만난다. 그렇지만 이는 옷을 벗어던지고 순전히 숨을 쉬는 어떤 신체들이다. 그들에게 쌓이는 긴장감은 외부를 향하지 않고 내재적으로 감싸진다. 그것을 오랫동안 보여주며 침범 받지 않은 독자적인 영역을 만드는 것은, ()가능의 신체를 더 이상 구동하는 게 불가능해진 아니 의미 없어진 어떤 영역에서 온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지점은 또 다시 이 작업을 구조의 적확한 안무가 아닌 현재형의 균열적인 퍼포먼스로 만든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명: 넛크러셔 NUTCRUSHER

    일시: 2019.1.18.() 20:00 / 2019.1.19.()-20.() 19:00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러닝타임: 50(예정)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