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해반, ‘가변적 풍경을 직조하다’
    REVIEW/Visual arts 2020. 3. 16. 19:02


    Intro


    ▲ 이해반, 한탄강(작업 세부), 2014. 리넨에 오일, 오리엔탈 잉크, 제소, 193.3×130.3cm.


    서구/근대의 풍경(화의 탄생)은 대상과의 적당한/안전한 거리를 통한 시선의 지배를 전제한다(‘조망의 시선’). 반대로 동양/전근대의 풍경(화, 가령 산수화로도 불리는 그림)은 대상과의 마주침과 뒤섞임을 가정할 수 있었다(‘함입의 시선’). 풍경에 대한 이분법적 도식은 동시대에는 풍경과 주체의 복잡한 역학 관계, 곧 세계를 보는 또는 세계에 위치하는 특정한 주체의 방식으로 다시 성찰될 수 있다. 풍경으로부터 사라지는 주체(에 대한 비판)이거나 실재로서의 풍경이 주는 기호(에 대한 긍정)이거나 풍경은 이제 투명한 가시성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하나의 알레고리이자 당대(의 시각적 사유)를 일별하는 시대적 에피스테메로 위치한다.


    특정 장소에 대한 (관심과 이로부터의) 재현이 아닌, 특정 장소로부터 출발한 세계에 대한 인상을 재구성하는 작업으로서, 이해반 작가의 작업에서 풍경은 또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창안된다. (곧 이후 그가 보고 그리는 것들을 ‘풍경’으로 상정하고, 그의 풍경이 어떠한 세계를 구성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작업은 첫 번째로 인물을 부각시키는 좁은 밀실이 아닌 드넓은 풍경 안의 사물-대상의 배치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두 번째로 풍경이라는 내용을 캔버스 내에서 재사물화하며 메타 풍경을 정초하는 것으로 가시화된다. 세 번째로 풍경은 가변적 양상을 띤다, 그의 생각이, 환경의 움직임이 풍경과 동기화된다. 


    사물화 또는 분할되는 풍경


    ▲ 이해반, Goliaths, 2018. 패널에 아크릴, 철 소재의 추, 자석, 플라스틱, 배터리, 가변크기, 촬영: 임장활.


    캔버스가 사물이라면, 회화는 이를 텅 빈 기호로 신비화한다. 반면 회화가 사물이라면, 캔버스는 이를 텅 빈 기호로 구체화한다. 이해반은 캔버스에 그림들을 다양한 형태로 ‘정확하고’ ‘빠르게’ 안착시킨다―이는 그간 작가의 작업의 양과 주제 및 스타일의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차이가 맞물리는 가운데 측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캔버스는 그림이 폭발하는 어떤 사라짐의 경계가 되는 대신, 자신과 현실의 경계를 명확하게 분별해 내는 기호가 된다. 곧 이해반의 캔버스는 회화를 이미지보다는 캔버스라는 대상으로, 이미지의 설치로 구성해 낸다. 


    《골리앗, 탱크》(2018)는 회화를 탱크와 같은 어떤 대상의 테두리만을 남긴 목판에 그린 작업들로, 이는 시계추를 달고 끊임없이 유동한다. 여기서 언뜻 ‘캔버스로서의 목판’은 회화가 고여 있는 세계를 분할한다. (이후 캔버스를 “유화를 그릴 때 쓰는 화포”의 즉물적이고 사실적인 정의가 아닌, 회화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회화를 전제하는 평면이자 동시에 회화의 설치가 가능해지는 사물로 개념화하고자 한다.) 또 다른 기표로서 목판의 형태는 탱크의 형태로써 제목을, 전시가 이뤄진 평화문화진지라는 환경을, 나아가 전시의 주제를 지시한다. 이는 작업의 기의를 명시하며, 회화의 디테일을 일종의 배경으로 뒤집는다, 또는 복속시킨다. 탱크의 형태를 지닌 시계의 추는 너무 빠르고, 따라서 6.25전쟁 이후의 고여 있는 시간은 현재에 측정하기 위해 가속되어야만 한다. 


    표면적으로 형태(캔버스)는 이미지(회화)를 가두고 이미지는 개별자로서 고유의 힘을 잃는다(고 보인다). 하지만 전경(figure)과 배경(ground)이 뒤집힌 이런 형태는 뭉뚱그려져 있고, 하나의 평면을 구성한다고 볼 수는 없을까. 회화는 큰 평면 안에 조각 나 있고, 테두리에 의해 분할되는 게 아니라, 테두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실제 작가는 네모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자른 게 아니라 잘려진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므로 분할은 잘려 나간 바깥을 보이지 않음으로 갈무리하는 또는 볼 수 있음의 가능성으로 상상하게 하는 게 아니라, 구부러진 곡선의 이음매로부터 표면을, 세계를 구성한다. 형태는 세계를 구성하는 데서 나아가 세계를 보는 시점을 재편한다. 


    이러한 ‘분할’의 방식은 회화를 하나의 사물로서의 기표로, 이미지-캔버스의 설치 자체로 전환한다. 홍천미술관에서 선보인 ‘길 위에서’로 명명된 9점의 작업은, 정방형의 캔버스 위에 그린 소품들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던 도파 프로젝트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재구성된 것과 함께 홍천에서 보고 구상한 것들이 혼재한다. 캔버스 등에 연이어 쓰인 “TRANS RAINBOW”라는 언어는 정면이 아닌 비스듬하게 보기로부터 출현하며, 작업을 따라 걷는 보기의 방식을 통해 작업들을 마치 열차의 몸통들처럼 연결한다. 


    재서사화되거나 동조되는 풍경


    ▲ 이해반, 민간인통제구역2[까마귀님과 독수리들], 2012. 캔버스에 오일, 87×68cm.


    이 작업들은 모두 저마다의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주제로 수렴되지 않고, 나아가 어떤 스타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발사되는 우주선과 이미 공중을 날고 있는 우주선이 시간의 연접을 이루는 것을 제하면, 대부분은 독립되고 폐쇄된 각자의 프레임 안에 있다. 곧 각각의 풍경을 구성한다. 그중 가령 새의 얼굴에 사람의 전신을 가진 생명체가 위치한 배경은 홍천의 한 풍경을 기초로 한다. 여기서 풍경은 특정 장소와 직접 결부되지 않으며, 원래의 맥락을 상실한다. 이해반의 풍경은 대상의 재현 대신에 대상을 어떤 식으로 그리는지에 대한 자의식에 기반을 둔다. 


    구상적 조합, 상상에 따른 인계로써 새로운 풍경의 생성 외에 또 하나 주목할 것은 풍경 자체가 작가의 환경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열차에서 풍경은 물론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가변적인 반면, 일정한 흐름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각각의 이미지로 절단된다기보다 어떤 하나의 이미지의 연속된 풍경으로 비친다. ‘길 위에서’ 중 풍경 자체를 그린 또 하나의 작업은 물감이 뭉텅이째 밀려 있는데, 이는 자의적인 붓 터치가 아니라 이동 중에 “스치는” 풍경을 구현한 것이다. 


    ▲ 이해반, DMZ Landscape series - 707OP에서 본 금강산, 2019. 캔버스에 오일, 193.3×112.1cm,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소장.


    이해반 작가가 707op에서 본, DMZ 너머 그린 금강산의 풍경은 일차적으로 마치 진경산수화처럼 간략화되고 대담한 필치로 그려진 회화 작업들인데, 산세의 운동성과 속도를 마치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의 기괴한 형태인 양 주조한 것이다―실제 이를 종이에 스케치한 드로잉은 상대적으로 이를 더 명확하게 보존한다. 담백하게 보이는 풍경은 거대한 풍경을 너른 붓질들로 수축한 것이고 따라서 묵중한 무게를 갈음한다. 여기서 회화는 대상을 재현하기보다 차라리 인상을 재현한다. 


    실제 먼 거리에서 조망한 풍경에서 통일전망대의 대형 망원경을 통해 조여 본 검은 구멍(=벙커)이 나 있는 금강산으로 시각이 전이되는 작가의 망막 체험 이후, 망원경의 렌즈로 필터링된 실재이며 동시에 실제를 수축해 반영하는 후자의 이미지는, 망원경을 투명한 매체로 상정함으로써, 곧 망원경이 매개되지 않은 하나의 평면으로 펼쳐짐으로써 회화는 성립할 것이다. 두 시선의 종합은 갈(볼) 수 없는 거리를 볼(갈) 수 있는 거리로 반영하며 금강산을 기괴한 형태로 재조립한다―그림은 그 갈 수 없음의 거리를 망각하게 한다. 


    드로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오히려 드로잉은 회화의 이전 작업보다는 또 다른 작업 양상으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이해반의 회화는 그리는 방식 자체를 간직한다. 이를 현대 회화의 어떤 당연한 작동방식으로 본다면, 이해반은 장소 자체에서 재현 (불)가능성의 범주가 아닌, 표현의 자율성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는 게 특이점이다). 작가에게는 실제의 재현보다는 체험적 실재의 반영이 더 중요하며 이는 회화의 자율성을 보존한다. 


    다시 ‘길 위에서’의 아홉 점의 그림으로 돌아오면, 좌측부터 두 개의 강원도의 산, 스치는 풍경, 숲의 세 존재들, 발사되는 그리고 발사된 우주선, 창문 프레임을 포함한 열차 안, 역시 창문 프레임을 포함한 두 개의 침대가 있는 열차 안, 석양이 지는 풍경의 순으로 설치가 이어지는데, 사실 이 자체가 여행의 흐름을 설계한다. 고정된 순간에서 이동하는 시점으로, 그리고 꿈에서 이뤄지는 공상적 차원을 거쳐 이동과 기억이 혼합된 파편적 이미지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꿈을 꾸고 있는 이의 머리에 말풍선이 달려 있듯, 그리고 정방형의 동일 사이즈에서 추측할 수 있듯 이 그림들은 일종의 서사 구조를 띤 드로잉북으로 엮으려던 작가의 계획으로부터 출현했다, 물론 이는 회화의 형식으로 안착되었지만.


    드로잉북은 동일한 프레임을 통한 분할의 코드, 그리고 동일한 프레임의 축적을 통한 시계열상의 서사의 흐름을 가정한다. ‘길 위에서’를 드로잉북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여기서 회화는 순간-깊이의 코드보다는 지속-넓이의 코드를 가진다. 이를 각각의 이름들로 분류하고, 별도의 핸드아웃으로 문장들을 만들어 텍스트의 기의를 부여한다면, 곧 이미지에 기표의 성격을 부여한다면, 이는 읽기의 한 방식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아홉 점의 그림은 하나의 연작 시리즈로 갈음될 수 있는 한편, 개별적(인 제목)으로 분할되지 않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사물-존재-풍경의 동맹 


    ▲ 이해반, Rainbow birdcage, 2016. 캔버스에 오일, 마스크, 액자, 208.9×136.3cm.


    ‘The holy Garden’(2016) 내의 작업들은 이해반의 풍경의 세 가지 특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 곧 그의 작업의 시계열상의 결절점이자 작업들이 소환되는 움푹 파인 잠재성의 영토에 속한다. 회화와 설치의 절합(‘회화의 재사물화’ 또는 ‘사물의 재회화화’) 속에 존재와 세계의 기이한 동맹이 출현한다. 첫 번째 <Rainbow birdcage>에서 세계는 거대한 새장이고, 하얀 새는 양 옆의 동그라미-사물과 중앙의 세모-사물 사이에, 그리고 그 구상 사물-세계와 거대한 새장-세계의 경계에 위치하는 새-사물이자 세계 내 존재이다. 이 기이한 존재/사물은 세계 내에 있기도 하고 그 바깥에 있기도 하다. 반면, 이 새장-세계를 매듭 짓는 건 하얀 하회탈이다. 


    하회탈은 회화-세계의 바깥에 있지만, 새장-세계의 안에 있고 그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곧 회화가 내부적으로 접히는 또는 분기되는 세 개의 사물이 위치한 연한 분홍색 패널의 세계는, 일종의 캔버스의 변형으로서의 회화, 곧 ‘회화 바깥의 회화’이며, 회화를 종합하며 회화에 포획되는 하회탈과 상하의 수직적인 위상차를 이루는 동시에 회화와 캔버스의 두 세계를 잇대고 맞닿으며 지시한다. 하지만 하회탈의 아래턱과 맞물린 실제 캔버스의 액자틀은 이 회화를 닫힌 프레임으로 구획한다. 반면 두 번째 <Rainbow birdcage>에서 하회탈과 맞물린 캔버스의 액자틀은 사라지는 대신 하회탈과 띄운 간격이 여전히, 적당하게 회화 전체를 함입한다. 곧 빈 액자틀을 구성해 낸다.


    가상의 평면계의 내재적 개념쌍으로서 회화-캔버스는, 앞서 언급한, 설치로서의 회화를 구성하는 작가의 하나의 방식이다. 여기서 새장이 하나의 프레임임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회화를 설치로 인계하는 하나의 방식에 비유해서 이는 다시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 ‘Rainbow birdcage’라는 제목에 상응해서 실제 새장의 프레임만이 무지개색을 띠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제목이 가리키는 바는 매우 즉물적인 일부의 사실이다. 반면 그 단 하나의 언어에서, 무지개가 배경이 아니라 사물로 귀속됨의 사실은 기이하게 세계가 전도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새장이 기이한 시각장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 이해반, DMZ Landscape No.21, 2016. 캔버스에 아크릴, 40.9×60.6 cm.


    실제 새장 밖 세계는 석양이 오는 시점쯤이고, 새장 속 세계는 조명을 밝힌 정원의 어둠으로 놓이는데, 이 두 개의 다른 시점으로부터 새장의 표면이 실제 뚫려 있는 게 아니라 불투명한 투명 프레임으로서, 무지개색 새장의 프레임과 연속되어 있는 것을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햇빛을 가정하는 무지개는 역설적으로 투명하게 (세계의 바깥을 반영하며) 닫힌 세계를 은폐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지시체가 되는데, 은유적으로 무지개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실제적으로 무지개는 새장의 실체를 유일하게 증명한다.


    여기서 ‘새’라는 존재는 새장에 갇혀 있기보다 새장의 풍경을 유일하게 조망하는 주체적 관망자로 보이는데, 새는 특수한 풍경의 정동 아래 동물의 단순한 재현보다는 익명화된 존재의 인격을 표상하거나 정신분석학적으로 작가를 대리하는 주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새가 응시하는 건 풍경일까, 아님 그 바깥의 세계일까. 곧 새가 가리키는 건 새의 그런 세계의 분열증적인 또는 세계를 해체하는 그의 시선이다. 풍경-세계와 세계-풍경의 경계에 서 있는 하얀 새는 마찬가지로 새장과 세계의 경계를 이루는 하얀 하회탈과 조응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 세계가 생성되고 소급되는 끄트머리에 있으며 다른 한편 여전히 회화 안에 있으며 회화의 바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회화와 인접하지만 새장 바깥과의 접면을 드러내지 않으며 회화 바깥에 있는 하얀 하회탈과 명백한 차이를 갖는다. 


    새는 풍경에 함입되는 존재-대상이다. 동시에 풍경은 새에게로 함입된다. <Rainbow birdcage>에서 꼿꼿하게 선 새는 세계의 지평선이자 가늠좌가 된다. 반면 세계를 조망하는 새는 여전히 새장 안에 애매하게 위치한다. 그리고 여기서 세계의 출구가 요구되거나 지지되는 건 아니다. (아마도 세계의 실재는 잠깐 열리는 어떤 틈과 간극을 통해 일별될 수 있을 뿐이다.) 새의 위치는 특별한 시각장 안에서 닫히며 열리는 세계를 구성할 뿐이다. 그리고 이 새의 위치를 통해 이해반의 풍경에 대한 시각이 지지되며 탄생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Outro


    ▲ 이해반, Rainbow birdcage(작업 세부), 2016. 패널에 오일, 가변크기, 세 개의 패널.


    이해반은 아마도 <Rainbow birdcage> 이후, 회화와 더불어 어떤 하나의 서사를 구성해 왔다. 새장 안에 있는 사람에게 새장 바깥의 총천연색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로써 작가의 스테이트먼트가 아닌, 또 다른 화자를 생산한다.) 이 다른 세계의 구성은 서사의 사이클에 침잠된다. 이 서사의 세계는 끊임없이 자가 증식한다. 3차원으로 확장되는 2차원, 풍경에서 인계되는 어떤 색다른 세계의 풍경, 그 경계의 전이가 확인시키는 건 세계 너머로의 도약이 아닌, 세계 자체가 구성되는 망점의 서사다. ‘비가시적인 것이 결코 아닌 시각 자체의 재구성.’  이는 작가의 현존에 각인되는 인상, 꿈의 프로세스와 함께 자라나는 상상, 물리적 토대를 체현하는 구상의 차원에서 구성된다. 풍경의 재현이 아닌 풍경 자체를 생산하며. 그리하여 세계는 어떻게 종결될 수 있을까. 아니 세계는 어떻게 생성될 수 있을까. 


    이해반은 그림 바깥의 화자를, 또 그림 속 시선의 주체를 상정함으로써 풍경과 풍경 안 주체의 관계를 구성해 간다. 서사가 궁극적으로 도착하는 곳, 이를 서사의 결말이 아닌 서사의 효과로 옮겨 본다면, 다시금 서사는 내러티브가 아닌 내러티브를 가장한 웅얼거림일 것이며, 시작과 끝 사이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몸을 횡단하는 풍경일 것이다. 이 서사가 온전히 픽션 또는 픽션으로의 항해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동시에 회화에 대한 매체적 탐문이 서사를 벗어나서 지시될지 역시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회화는 또한 물질적이다. 아직 이해반의 회화가 지닌 마티에르를 다루지 않았다. 그것을 조망할 수 있는, 그것이 떠오를 수 있는 체험 이후를 기약해 보려 한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