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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차연, 《집으로》: 여정을 위한 의식으로서의 퍼포먼스-전시
    REVIEW/Visual arts 2021. 8. 29. 00:42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하차연 작가의 개인전 《집으로》는 쓰레기를 갖고 하는 행위, 작업, 쓰레기에 대한 관찰 등이 주를 이룬다. 행위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으로 주로 드러나는데, 이는 시각적인 차원과 시간적인 차원에서 퍼포먼스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 쓰레기를 갖고 물리적으로 제작한 작업인 〈매트, 보트, 카펫-나의 매트, 가족을 실을 배, 모두를 위한 양탄자〉(1988, 2021)―이 작업의 경우 1988년에 작가가 시도했던 페트병들을 활용해 새롭게 만든 것이다.―는 업사이클링 아트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눈에 띄는데, 이는 심미화되지 않은 각각의 쓰레기를 고스란히 드러낸 바에 따른다. 쓰레기는 쓰레기로서 지시되고, 그 쓰레기라는 기표에 관점이 실리는 방식이다. 

    하차연, 〈Balade de Carola〉(2008) ⓒ하차연[=대안공간 루프 제공](이하 상동)

    〈Balade de Carola〉(2008)의 떠돌아다니는 분홍 비닐봉지―바닥에 굴러다닌다는 점에서 그것은 쓰레기이자 쓰레기를 담는 쓰레기 봉지로 감각된다.―를 클로즈업한 영상은 그 직접적 예시라 할 수 있다. 가장 낮게 위치하며 시점과 어떤 자리도 점유할 수 없는 시간의 경로를 보여주는 이 영상은, 이주민의 지위를 선명하게 재현하는데, 이는 작가의 오랜 연구 주제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가시화되지 않았음을 인식하게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의식화되지 않음의 신체들, 곧 존재로서 마주 보게 되는 비닐봉지는 우리의 발밑에 채이거나 그것을 피해 가거나 불순물처럼 현실에 있었던 것이며, 이를 적극적으로 카메라에 둘 때 이는 단순히 쓰레기가 아닌 주변부에 위치하는 이방인의 시각을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하차연, 〈토지지기〉(2019)

    〈토지지기〉(2019)는 비닐봉지에 흙을 채우며 부푼 형태의 그 덩어리들을 계속 언덕 가에 두는 식으로 진행된다. 역시 봉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봉지에 흙을 담고 놓는 손 정도만 같이 드러나게 된다. 흙은 새로운 공간을 얻는다. 동시에 봉지는 무게와 부피를 얻는다. 흙은 봉지 안에서 구조화되면서 영토를 이룬다. 흙은 다른 영토 위에 있으며, 다른 영토로 그것이 교환되는 것까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 낯설게 비닐봉지를 통해 일정한 부피로 형상화될 뿐이다. 한편 이러한 봉지를 자본주의 사회에 병치해 보면, 무엇을 담되 그것은 직접적으로 상품의 가치를 띠지는 않는다. 식물을 기르거나 하는 생명의 가치로 이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땅의 착취에 있지 않다. 오히려 땅을 보전하는 행위, 땅의 가치를 가시화하는 전략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존재의 형상을 취한 봉지는 제목에 나타난 땅을 다스리는 신령인 ‘지기’를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하차연, 〈The Collecting〉(2020)

    〈The Collecting〉(2020)은 갖가지 쓰레기통에서 쓰레기가 담긴 봉지를 빼서 씻고 이를 빨랫줄에 걸어 말리는 행위로 이뤄진다. 〈토지지기〉의 봉지가 그 내용물인 흙과 연결되며 재생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면, 〈The Collecting〉은 원래의 쓰임을 향하며 봉지 자체가 재생됨을 희구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이런 행위들은 쓸모없음의 것, 또는 꺼려지는 것 자체의 감각을 전유하며 전복하는 인지적 실천에 가깝다. 

    하차연, 〈스위트 홈 4〉(2009)

    〈스위트 홈 4〉(2009)는 쓰레기가 된, 버려진 슈트 케이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슈트 케이스가 놓인 곳에서 다시 슈트 케이스는 밀쳐지고 쓰레기차로 다시 옮겨진다. 이런 사태에서 슈트 케이스는 항변하거나 항거할 수 없으며, 어떤 종착지를 갖는 대신 〈Balade de Carola〉의 비닐봉지처럼 정처 없는 이동, 이동을 위한 이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슈트 케이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무한 굴레의 숙명이 있다. 집은 임시적인 거처이자 철거될 운명을 노정한다. 그리고 앞선 이주민과 비닐봉지의 연결처럼 이러한 운명을 가진 존재에 대한 환기로 이어진다. 
    〈스위트 홈〉(2004)는 프랑스 지하철 승강장의 의자에 스티로폼을 묶어 두고 그 위에 눕기도 하고, 이를 의자 아래로 묶고 앉아서 지하철의 다른 이용자도 함께 앉아 있음을 꾀한 퍼포먼스로, 집은 임시적인 사회(상징계) 내의 장소이면서 따라서 일반 시민 역시 그곳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이러한 장소는 노숙인의 삶이 투영되는, 사회를 전유한 특수한 장소에 대한 비유가 된다. 현실에 대한 시선을 던지는 〈Balade de Carola〉와 같이 작가의 퍼포먼스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그것의 경계를 그리고 시험하며 그 경계 속에 던져진 신체를 드러낸다. 이는 자리 없음의 존재가 갖는 임시적 장소를 드러내면서, 사회의 균열을 가시화한다. 

    하차연, 〈도착〉(2009/2021)

    〈도착〉(2009/2021)은 〈스위트 홈 4〉의 슈트 케이스의 등장 부분만을 동그란 하이라이트로 주며 전환되는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인공적이며 연극적인 이러한 이미지들은 현실의 배경을 지운 동시에 현실이 지워진 주체들을 조명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매트, 보트, 카펫-나의 매트, 가족을 실을 배, 모두를 위한 양탄자〉(1988, 2021)

    〈매트, 보트, 카펫〉은 페트병들과 이를 잇는 줄을 통해 일종의 매트와 그에 연결된 보트 형태를 전용한 것이지만, 그 제목은 오늘날 해양을 건너는 이주민과 그들의 집에 대한 이상과 가족 단위의 삶, 그리고 모두가 같지 않은 세계의 경계를 포괄한다―이 작업은 1988년 작가가 체류했던 프랑스 님므에서 엄청난 홍수를 겪고 생수병이나 플라스틱병 같은 구호품들이 돌아다니던 상황이 모티브가 된 것으로, 2021년 이전의 페트병들(이는 1988년 당시 위아래 부분을 잘라, 작가의 말에 따르면, “구슬”처럼 꾈 수 있는 재료로 다듬어진 상태로 계속 보관되었다.)이 다시 꺼내져 새로운 작업으로 구성되며 당시의 맥락에 더해 현재의 시점들이 중첩될 수 있다. 그 옆에 위치한 〈내비게이션〉(2021)은 물의 표면 위 햇살이 담긴다. 잘 들리지 않는 파도 소리와 모터 소리는 이 물과 존재를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해 감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고여 있는 물 위의 빛은 이주민에게 경로에 대한 좌표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Study Return Home 3〉(2019/2021)[=작가 제공](이하 상동)

    1층에 놓인 〈Study Return Home 3〉(2019/2021)은 비닐봉지를 액자로 압축한 작업들로, 해변에서 그러한 작업을 하는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인 〈집으로-지중해 난민들을 위한 헌정〉(2019)과 함께 전시되는데, 비닐봉지의 복잡다단한 결은 하나의 평면으로 눌리면서 어떤 폭력적 쓸림 아래 제각각의 다른 쏠림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압축이 쓰레기 봉지를 유일무이한 고유성의 시각적 오브제로 자리하는 건 분명하다.

    하차연, 〈나를 불태우다〉(1986-1987)

    〈나를 불태우다〉(1986-1987) 역시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지만 그 결괏값은 사진인데, 페트병들이 바닥에 깔려 있고, 그 앞에 작가 키 정도의 나무 한 그루와 위로 손을 들어 페트병을 들고 돌아서 있는 작가의 모습이 함께 담긴 모습이다. 나무는 검게 탄 페트병들이 이룬 나무이다. 작가가 온전히 드러난 이 작품은 어두운 대안공간 루프 공간의 환경에서 몸을 사리며 어두운 인장처럼 각인된다. 물을 주는 듯한 제스처로부터 두 신체의 마주함과 교환의 열망 또는 전이의 메타포를 드러내는 듯하다. 

     

    하차연, 〈Reis pflanzen(Planting Rice, 모심기)〉(1988)
    하차연, 〈Bleibt wie Baum(나무처럼 머물기)〉(1989)

    이는 작가가 ‘자리 잡기’로 번역한, 영어와 독일어 모두 같은 프랑스어 ‘Localisation’으로 명명한 지역을 이동하며 이뤄진 네 개의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그중 첫 번째로 수행되었다. 두 번째 1988년에는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행한 〈Reis pflanzen(Planting Rice, 모심기)〉은 신문지와 동전을 사용한 오브제를 시멘트 바닥에 심는 퍼포먼스였다. 세 번째 1989년 다시 님므에서 실시한 〈Bleibt wie Baum(나무처럼 머물기)〉은 통나무와 작가를 붉은 줄로 발가락에 묶어 불안정한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려 했던, 정적이지만 매우 미세한 떨림을 반영하는 유동적인 작업이었고, 마지막 퍼포먼스는 같은 해 앉아서 출생연도부터 한 해씩 동그랗게 연도를 이어 적어가며 그 크기를 바깥으로 확장해 가는 퍼포먼스 〈Von 1960 bis 2080(1960년에서 2080년까지)〉였다. 모든 장소는 신체 너머의 경계와 연관되면서, 그 경계로 신체를 확장한다. 자리 잡기는 토지의 소유를 의미하는 게 아닌, 바깥과의 불안정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의 수행과 그것이 사회를 가리키며 발생하는 정동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집으로》는 직접적으로 이주민의 여정을 나타낸다. 〈매트, 보트, 카펫〉은 그 주요한 매체가 된다. 보트와 연결된 매트, 그리고 융단이라는 은유로서 이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 깃든 작품은 전시장 바닥을 양분하며 어둠에 잠겨 있다. 장식적 미감을 띠거나 심미적 오브제로서 분할되지 않는 작업은 바닥을 바다로 바꾸고 있는 듯하며, 역시 바닥에 놓인 두 개의 〈내비게이션〉은 그런 확증을 준다. 
    결과적으로 작가가 드러내는 건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사물을 통한 사회의 경계와 균열, 간극이다. 거기에는 앞선 비체의 존재를 은유하는 가치 없는 사물들, 그리고 의미화되지 않는 자연의 불특정한 사물들 등이 자리한다. 

     

    김민관 mikwa@naver.com

    [전시 개요]


    하차연 개인전: 집으로Return Home
    전시기간: 2021년 7월 22일(목) – 2021년 8월 22일(일)
    전시장소: 대안공간 루프
    관람시간: 10:00AM - 7:00PM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님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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