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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금형, 〈리허설〉: 정금형의 아카이브, ‘이음매는 끊어져 있다.’
    REVIEW/Performance 2021. 10. 5. 21:09


    정금형, 〈리허설〉 2021년 9월 29일 공연 컷 ©이강혁 [사진=인천아트플랫폼 제공](이하 상동)

    〈리허설〉은 정금형의 지난 작업들을 파편으로 가져와 변주하는 퍼포먼스이다. 이는 하나의 빈 공간에서 일어난다. 무대의 스펙터클이나 맥락, 구성 모두를 제한 상태에서 진행되므로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불투명한 계열체로 남고 움직임 자체에 대한 형식적 탐구의 여지도 생겨난다. 반면 기존 작업들에서 움직임의 자료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재현(a)에 대한 재현(b)의 양상을 가지며, 기계와의 섹스를 재현해 온 지난 작업들의 연장/변형/재구성은 여전히 수행적이고 사실적이며 구체적이다. 
    반면 ‘재현(a)의 재현(b)’은 애초 이 작업이 빈 무대라는 지점에서, 그리고 ‘리허설’이라는 유일한, 하나의 맥락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그 목적을 달리한다. 이는 순수한 표현의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 양태 역시 달리한다. 리허설은 하나의 공연이며, 이후 또 다른 공연의 이전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족적이며 완성되는 무엇이다. 따라서 〈리허설〉은 잠재적인 이미지, 움직임의 시험이며, 동시에 또 다른 완성을 기각한다. 

    여기서 어떤 움직임들의 파편들도 균일하고 매끄러운 이미지의 통합체를 형성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떤 흐름 안에서 그것들은 나타나거나 사라진다. 곧 선형적 역사의 순서가 아닌, 문득 부상하는 것이거나 뒤늦게 뒤따르는 무엇이다. 안무가는 이음매 없는 재료들로 어떤 이음매를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더 큰 차원에서 여러 다른 재료들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고도 할 수 있을까. 종합은 완성이 아니라 어떤 모색들과 남는 이음매들이다. 이러한 순간들이 이어진다는 사실, 동시에 분절되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은, 아니 분절되며 이어진다는 것은 〈리허설〉이 3시간이라는 정해진 시간 안에서만 종합되며 이러한 종합은 일시적이고 우연한 차원이라는 사실에 맞닿아 있다. 하나의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넘어갈 때 이음매의 차원은 기존에 하지 않았던 움직임을 구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착상이며 기억의 재구성과는 조금 다른 차원이다. 착상은 이전의 것과 이전의 것들을 잇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리허설〉은 정금형 작업들의 아카이브이며 또 다른 작업을 위한 연습, 곧 리허설이기도 하다. 여기서 아카이브는 과거의 영상이나 그대로의 재현이 아니라 기억에 포착되는 실재의 연장으로 드러나는데(동시에 실재의 연장으로만 존재한다.), 과거의 것들은 어떤 것도 이전의 차원에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맥락을 상실하며, 맥락에 대한 요청도 상실한다. 순수한 움직임의 덩어리로 깎여 나가지만 이전의 형상을 기억하고 있다(a). 그것들 사이에 이음매/간격이 생긴다는 것은 그 이전과 이후의 것이 그 ‘중간’의 무엇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중간은 이전과 이후 그 두 개의 움직임이 사실은 어떤 유사한 움직임의 계열체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수렴하는가. 
    정금형의 동작 또는 행위는 모두 느리고 더디며 신체의 특정 수행의 목적성을 갖고 있다, 이전 공연들에서는. 이러한 목적성이 없어졌을 때 동작/행위는 움직임의 어떤 양태들로 또한 차이의 의미를 간직한 범주들로 맥락화된다. 하지만 그 양태들을 지배하거나 품는 어떤 초점‘들’의 우위를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통합체로서 완성되지 못함은 곧 〈리허설〉이 잠재적인 것들을 여전히 수용하고 있음에서 온다. 

    한편으로 〈리허설〉은 연습이라는 실재를 재현한다. 노출되지 않을 것, 노출되지 않아야 할 것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 펼쳐짐은 곧 맞닿음이며, 따라서 〈리허설〉의 모든 장면은 우연한 관객의 방문들에 맞닿아 있다. 열려 있는 낮의 공간은 누군가의 방문을 안에서 투명하게 노출하며, 정금형은 문 안쪽 공간까지를 사용하며―그 바깥을 관객의 공간으로 두며―그 안에 들어왔을 경우에만 자신을 노출한다. 한 명의 관객이 세 시간을 볼 수도 있고, 수많은 관객이 세 시간을 채우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리허설〉은 어떤 공연이 될 것들, 어떤 공연이 되었던 것들의 순간을 열어젖힌다. 그 순간들은 기억의 작용이기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들이라는 점에서 과거를 향하며, 리허설이라는 점에서 미래를 향하지만, 드러나기 전의 과거로 간직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러한 과거형이 실은 ‘리허설’을 제목 자체로 지시함으로써(곧 리허설을 위한 리허설이나 공연을 위한 리허설이라는 전후의 상상적 문맥을 차단함으로써) 현재는 과거의 변형으로 존재하며, 과거는 무한한 재료의 성질로 나타난다. 9월 25일에서 29일까지의 4번의 공연은 모두 다 다르고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곧 이러한 완성 가능성을 〈리허설〉은 여러 시간의 연속을 통해 제한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n개의 〈리허설〉은 n개의 다른 리허설을 상정하며, 이는 〈리허설〉 a가 〈리허설〉 b의 앞에 존재하며, 〈리허설〉 c가 〈리허설〉 b의 뒤에 자리할 것을 의미한다. 

    〈리허설〉의 이음매들은 정금형의 여러 다른 움직임이 연원하는 부분적 신체의 이음이기도 했고, 어떤 몸의 급작스러운 변신이기도 했다. 그러한 분절이 어떤 어느 정도의 봉합선을 남기는 데 반해 그것은 사실 어떤 정도의 지루함이나 끝없는 침잠을 의식적으로 해소함으로 조율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한한 형태가 아니라 무한한 변환의 흐름 안에서의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형태들이라는 점에서 계속해서 볼 수 있게 했다. 결국 공연의 단락은 관객의 공연 중단의 선택과는 반드시 결합하지는 않는다. 〈리허설〉을 결국 움직임‘들’의 실험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움직임들의 움직임을 만드는 시현.

     

    김민관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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