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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판지》, 극장의 경계를 시험하는 퍼포먼스REVIEW/Performance 2021. 10. 19. 17:29
한국-스위스 공동창작 프로젝트: 돌과 판지, 6편의 솔로 작업 리뷰
극장은 판지의 무게로, 판지의 차갑고 푹신푹신한 재질로, 공간을 메우는 빈 부피로 현상된다. ‘돌과 판지’라는 제목에서처럼 판지가 공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단지 그 양적 차원이 아니라, 몇 가지 판지의 특질을 곳곳에서 체현한다. 반면 돌은 정지혜의 무대에서 한 번 등장하는데, 브로슈어에서 판지와 대조적인 재질로서 지시되는 돌이 무대에서 거의 부재한 것은 인공의 특질과 관련을 맺는 공연의 직접적 성격으로 수렴한다. 곧 이 공연은 현재 각종 박스가 뒤덮고 있는 우리의 삶, 그러한 재현 가능한 어떤 삶의 양태를 고스란히 추출하고 있다.
그리고 세 퍼포머의 불연속적이고 단속적인 무대는 어떤 관련을 지시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행위에 대한 질문을 자아낸다. 그것은 어떤 상징이나 의미로 분쇄되지 않는 행위 자체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근원적이다. 그것은 또한 결국 그 행위가 초래하는 효과로 수렴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감각적이다.얀 마루시치는 “STAFF”가 뒤에 쓰인 티셔츠를 입고 공연 초반에 스태프 역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얀 마루시치를 포함해 〈돌과 판지〉에 출연하는 퍼포머는 총 네 명이지만, 얀 마루시치는 무대를 본격적으로 채우기보다 연출로서 공연의 아이디어를 정초하는 데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한다. 세 명의 퍼포머의 각 두 번씩의 퍼포먼스로 이뤄지는 〈돌과 판지〉에서 그 퍼포먼스들이 엄밀히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심지어 각 퍼포머 자신의 퍼포먼스들 역시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각기 다른 퍼포먼스들 간의 어떤 교류의 기류를 읽을 수 있다. 물론 판지를 주요한 무대의 요소로, 또한 모티브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무대는 제목이 극으로 연장되는 대로, 공통의 질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세 명의 퍼포머는 극장이라는 경계를 제각각의 언어나 행위로 시험하거나 노출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질문을 구성하는 듯 보인다.
펼친 박스를 이어 붙인 무대 막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관객 입장이 채 끝나기 전에 무대 바닥에 깔린 박스 사이로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데, 이에 대해 관객이 응답하고 실제적인 행위로써 그 박스를 거두기까지는 꽤 그 말이 쌓이고 난 이후이다. 관객 중에 시종일관 부동자세를 에티켓으로 유지하는 것이 당연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바닥에 깔린 사람이 공연의 맥락에서 ‘관객’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들이 쌓이고 있는 공연의 불편한 체증 상태에 대응해 일종의 공연과의 연대를 순간적으로 형성해, 이 공연을 효율적으로 굴러가게 할 사람이 빨리 나올 것을 기다리지 않는 관객도 서서히 줄어들어 갔을 것이다. 반면, 여기서 관객이 느끼는 부조리는 이 말들이 끊기는 순간만큼은 공연의 퍼포머로 동참하며 주체적으로 그 시간을 지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궁핍한 관객의 위치를 벗어나 그리고 관성의 법(칙)을 벗어나 용기 있게 객석을 박차고 나가는 것은, 불편함이 더해지는 현재의 감각과는 다른 실행의 압박이 가하는 미래라는 것 역시 강력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따라서 국지인의 관객에게 부여하는 수행적 과제, 일견 길거리에서 다급한 위치를 자처하는 타자의 형상에서 출현하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는, 상투적인 극장의 문법을 지시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모순과 분열을 관객에게 초래한다. 극장의 문법을 깨뜨림은 더 큰 극장의 언어로 포함된다. 곧 한 관객이 국지인에게 도움을 줄 것을 질문하고, 더 나아가 다른 관객에게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며(‘마치 저만 이 상황을 인지하는 것 아니잖아요.’ 거기에 더해 ‘저만 이 상황을 처리하길 원했던 것은 아니잖아요.’라는 무언의 말이 거기에 담겨 있음을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역시 인지했을 것이다.), 몇 명의 관객이 무대로 등장하고, 극장 뒤편에 있던 얀 마루시치도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해 이를 돕는다.
판지를 모두 거둬냄으로써 관객은 “그래도 극장인데.”라는 안전한 테두리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국지인은 도움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대신, 곧 모든 관객을 다시 제로 베이스의 상태로 상정하며, 매무새를 짧게 다지고 앞을 응시한다. 그 표정은 심드렁하고 냉소적이다. 이러한 표정은 관객을 물론 향하고 있지만 의사소통의 제스처와는 거리가 멀다.이어 정채민은 무대 중앙의 움집 같은 작은 공간에서 뒤돌아 쭈그려 앉아 특정할 수 없는 바깥의 사람들에게 영어로 질문을 한다. 이는 혼자 중얼거리는 대화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말 걸기는 물론 처음의 국지인이 타자의 위치를 자처한 것을 상기하게 하는데, 그보다는 연극적이며 동시에 어떤 등장인물도 등장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 수행적이다. 이러한 말이 의사소통과는 상관없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환경 자체를 함의한다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곧 그 말들에 대한 대답의 간격이 그만큼 주어지거나 상대의 응답으로 연장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질문의 내용은 그 자체로 기억하거나 각인할 필요가 없다.
정채인은 이후 한 번 더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한층 더 연극적인 광경을 구성하는데, 잠옷을 입은 상태에서 판지가 깔린 바닥에 스프레이로 하트를 그린 이후, 교감신경 관련한 검색 결과를 읽으며, 동시에 이어폰을 껴서 바깥으로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이는 자기 방 안에서 막 목욕을 마쳤거나 잠이 들기 전에 스터디와 운동 또는 유희를 동시에 벌이는 자유롭고도 활기찬, 어떤 젊은 현대 여성을 재현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인물에 대한 전사를 굳이 추정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닌데,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 내용이 추후 제시되지도 않기도 하지만, 재현의 조각들이 ‘잉여’처럼 붙어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전체 공연 안에서는 괴리를 구성한다고 보인다. 오히려 이 장면은 공연 전체 내에서는 정지혜의 덧없는 행위의 체증에 대한 ‘백신적 효능’을 갖기 위한 단편적인 장면으로 보인다.
정채민의 대화 혹은 중얼거림에 이은 정지혜의 등장은 매우 단순한 수행으로 이어진다. 이는 수미쌍관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돌 하나를 올린 벽돌을 양손으로 들고 온 정지혜는 돌을 물고 벽돌 두 개를 팔을 벌려 든 채, 눈을 감는다. 돌 세 개의 무게를 버티다 다시 팔을 접고 처음의 자세의 역순으로 돌아간다. 이는 앞선 기억을 현상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전의 시간이 무거워진 진공의 덩어리처럼 더해져 있음을 순간 깨닫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또 다른 정지혜의 수행은 후반부에 가에 있는 박스들을 무대 왼쪽과 오른쪽을 잇는 커다란 탑으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가장 더디고 지루하며 긴 시간을 쓰는 이와 같은 수행은, 관객의 시선을 박스가 쌓일 다음 구간으로, 또한 정지혜의 움직임으로 각각 분산시키는데, 곧 퍼포머에 대한 온전한 응시는 불가능하다. 또한 모든 움직임을 응시의 대상으로 두는 것 역시 퍼포머에게는 불가능한 과제가 된다. 그는 박스를 3층 정도까지 쌓는 과제, 더 정확히는 가에 있는 박스들을 일정한 높이의 탑으로 쌓는 과제 자체를 결괏값으로 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러한 과제는 관객이 중간에 깨닫게 되는 과제이다. 하지만 그 과제를 중단시키거나 도울 수 있는 관객은 없다. 그것은 진행될 것이고 어떤 끝을 자족적으로 충분히 혼자서도 가져갈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국지인은 판지를 얼굴 위로, 다시 얼굴로, 옆으로 돈 채 허리로 각각 들며 자신을 노출한다. 그리고 판지의 위치를 바꿔 가는 가운데, 어느 순간부터 판지를 든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지는데, 일관되게 국지인은 관객에 대한 응시를 그러한 표정을 읽을 수 없음으로 관철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처음부터 그의 존재를 비가시화하며 관객을 마주했던 점, 곧 마치 쌓인 상자들의 좁은 틈에 대응하는 관객의 사이를 그가 비집고 나오고자 했던 점과정에서 그로부터 초래하는 결과가 타자의 얼굴이 의사소통의 긍정적 발신이 되는 게 아니라, 그 타자의 얼굴이라는 것이 부재하거나 읽어낼 수 없을 때조차 우리는 그와 소통할 것인가, 또는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질문하게 하는 데 그 초점이 있었던 것과 같다. 이는 물론 레비나스의 현상학적 타자의 개념과 그 층위를 달리한다.
아마 이 공연은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의 아우라를 극적으로 역이용하며 덧없음의 무시간성을 쌓아나간다. 일관되게 상관성을 띠지는 않는 그러한 퍼포먼스가 적당한 시간의 배분과 교차로 연속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비가시적인 연출이라는 법의 타이틀이 브로슈어에 기재된다는 점에서, 세 명의 퍼포먼스는 하나의 공연으로 묶이게 된다. 그럼에도 이 퍼포먼스들은 그 각각이 극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시험하고 있다고 보인다―굳이 이것들을 어떤 의미로도 수렴시키지 않으면서, 또 어떤 메시지를 제안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면 〈돌과 판지〉는 처음부터 극장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었던 것일까.
국지인의 언어와 정채민의 언어 바깥으로 묵묵한 정지혜의 행위는 이 공연의 처음 막과 같은 형태를 상기하게 하며, 공연을 이루는 뼈대 자체를 지시한다. 이 알 수 없는 행위, 극장을 쌓고 자기와 관객을 나누는 분할선을 만드는 행위는, 역으로 극장이 타자와의 경계를 뚜렷하게 확인시키는 공간이라는 것을 발화한다, 그것이 어떤 간섭과 침범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곧 국지인이 부여한 과제는 이렇게 다시 극장의 문법으로 봉합됨을 관객은 수용할 수밖에 없다. 〈돌과 판지〉는 그 극장의 문법을 교란하고자 함에도 여전히 그 공고함을 확인시키며, 극장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메타 극장의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김민관 mikwa@naver.com[공연 개요]
공연 일시 | 10.15.(금) 19:30
공연 장소 | JTN 아트홀 1관
가격 | 무료
관람연령 | 15세 이상
소요시간 | 90분
초연 | 2021 서울국제공연예술제〈스태프〉
연출·콘셉트 | 얀 마루시치
출연·연출협력 | 정채민, 정지혜, 국지인
예술·실행·기술 자문 | 얀 마루시치
프로덕션·기획(한국) | 주한스위스대사관 프랑수아즈 가르디, 국지수
프로덕션·행정(스위스) | 페르스우스 프로덕션 쎈느, 클레어 펠릭스, 레오노흐 프리들리, 나탈리 뷍게흐
기술보조 | 레오 마루시치
후원 | 스위스 펀드 코리아, 제네바시, 프로 헬베티아728x90반응형'REVIEW > Performa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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