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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춤판야무 , 《오》: 금배섭 안무의 중간 점검 혹은 다시 보기
    REVIEW/Visual arts 2021. 10. 19. 17:48

    〈?〉, 〈니가 사람이냐?〉, 〈미친놈널뛰기〉, 〈섬〉, 〈포옹〉: 존재의 바탕을 구축하기

    금배섭 안무, 〈포옹〉 ©박태준. [사진=춤판 야무 제공](이하 상동).

    금배섭의 춤판야무의 안무 작업들은 퍼포먼스에 가깝다. 극장 공간은 장소의 실천적 의미로 변한다. 금배섭의 움직임은 이 안에서 사물로 연장된 행위의 분명한 단위들을 설정하고 반복하는 것에 가깝다. 그 사물들과의 관계 맺기는 움직임을 제약하는 한편 재분절한다. 이 속에서 금배섭은 어떤 감정에도 휩싸이거나 드러내지 않는, 공간을 측정하고 사물을 제어하며 기계적인 움직임을 구사한다. 
    가령 〈?〉에서 두 팔을 양옆으로 휘저으며 연장시키는 움직임은 순전히 심미적 차원, 또는 형식적 차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을 구성한다. 반면, 이러한 움직임은 더 나아가는 대신, 곧 그치고 이후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이러한 행위로서 움직임은 퍼포먼스에 가깝고 동시에 극의 요소를 갖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이는 극적인 차원과는 어느 정도 구별된다. 
    〈포옹〉에서 금배섭은 소위 뽁뽁이로 불리는 에어캡이 바닥에 깔린 환경에서 이를 롤러로 미는데, 이러한 행위는 육체노동에 가까우므로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반복성이 주는 피로감 역시 관객으로까지 연장되므로 극의 맥락에서 어떤 멈춤의 조율이 필요해지는데, 이때 고개를 들고 숨을 밖으로 크게 내쉬는 동작을 두 번씩 반복한다. 이러한 포즈의 인위성은 그 자체로 연극적인 표지를 띠지만, 노동과 쉼이라는 행위의 단위를 명확한 것으로 일정하게 성립시키는 차원에 속한다고 보인다. 

    금배섭 안무, 〈?〉 ©박태준. (이하 상동).

    집요하게 반복되는 행위로서 움직임은 조명―예컨대 암전―이나 음악의 변화에 따라 단락을 맺는다. 곧 외부 환경의 제어는 한 인물의 내부를 재현하는 대신 (무한한) 반복된 움직임의 단위들로 이어지는 퍼포먼스를 단속적으로 재접속하게 하고 끝내 극적으로 종결짓는다는 점에서 퍼포먼스를 다분히 극적 장면들로 승화한다. 〈?〉은 퍼포먼스적인 한편 시각적 도상을 활용하거나 액션 페인팅의 요소를 일부 사용하는 등 시지각적 차원이 강한데, 무엇보다 그 극의 단위 구성의 차원이 두드러진다. 가령 행위는 장면의 단위에 예속된다.
    신체로 연장된 사물, 사물에서 제약되는 신체의 탐구는 미시적이고 세밀한 감각을 관객에게 수여한다. 오브제 활용이 극단적으로 신체와 결합되는 〈니가 사람이냐?〉는 구겨진 신체의 행위라는, 매끄럽거나 심미적인 몸짓과 전혀 다른 출발선상에서의 움직임이 전제되며, 그 자체로 놀라운 긴장 상태를 만든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또한 무엇을 표상하는지 질문을 자아낸다. 주제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한 “홀로 버티는 사람들”을 모티브로 만든 다섯 개의 솔로 작업이 어떻게 그들을 재현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존재에 도달하려 하는지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안무(가)의 스타일을 윤리적인 차원의 영향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것일까. 그들의 존재는 닭(〈?〉)이나 소(〈포옹〉)와 같이 동물 존재의 알레고리를 띠는 듯 보인다. 이러한 존재론적 지위의 차원을 달리 구성함은 오히려 현재의 동물권, 타자의 인권과 같은 개념에서 현재와 만나는 지점이 더 강하다고 보인다. 이후 일종의 사물 기계, 퍼포먼스적 행렬을 선보이는 금배섭의 다섯 작업을 상연된 순서대로 살펴보며 그의 안무에 대해 조금 더 면밀하게 기술해 보고자 한다.

    〈?〉(2020)

    ‘고국을 떠나온 이주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는 〈?〉는 제목을 물음표로 둔다. 이러한 물음표는 이주 여성보다는 닭장 속의 닭에 가까운 존재에 대한 물음, 나아가 인간보다  동물처럼 보이는 것이 맞는다면, 이러한 알레고리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향한다. 장면은 조명의 암전 여부로 잘게 분할된다. 현실은 단속적인 컷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암전은 극단적인 환경에 처한 존재의 상황을 더욱 숨막히게 감각하게 한다. 
    금배섭은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닭장 속의 닭에게 식판으로 식사를 주는 또 다른 역할로 분배되는 듯 보인다. 또는 이는 하나의 자아가 노동의 주체에서 죽음을 맞는 수동적 대상으로 변해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짧은 하의만 입고 네 다리를 들고 유리 상자 안에서 식판 위의 물감을 묻혀 천장을 칠하는 행위를 통해 협소한 공간에서 삶의 의지를 처절하게 노출하는 존재의 실존을 재현하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언어가 없는 장면들의 전개는 최소한의 환경 정보를 가지고 최대한으로 확장해 현재를 바라보게 하는데, 따라서 정보 값은 추상적이지만 해석에 대한 강력한 의존도를 형성한다. 

    상자를 열고 그림이 천장으로 띄워지며 새의 형상이 분명해질 때 존재는 뒤로 돈 채 얼굴을 새의 얼굴이 있는 자리에 맞춘다. 이어진 날갯짓의 몸짓은 자유를 표상하는 듯하다. 이는 이미 그려져 있는 것이긴 하나 절박한 행위가 생존의 행위가 아닌 심미적 도상을 만드는 행위로 치환되는 건 〈?〉의 주제의식에 가깝다고 보인다. 물론 여기서 금배섭의 행위는 그 자체로 심미적인 차원을 지향하지 않으며, 심오한 무언가를 그리는 주체의 긴장이나 몰입 상태를 재현하지도 않는다. 주목할 수 있는 건 그러한 맹목적인 행위가 심미적 차원으로 접속되는 순간이다. 
    새는 닫힌 환경을 여는 환상에 대한 상징일 것이다. 이주 여성의 상황을 대입한다면, 이는 환영을 통한 현실 도피인가. 아님 그러한 현실 도피를 갈구할 정도로 어려운 현실을 되려 지시하는가. 여기서 안무는 결국 인간을 동물의 재현으로 두며,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아닌 동물의 실재적인 삶의 감각에서 타자의 삶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이는 직접적인 재현의 대상을 뒤바꿈으로써 얻는 재현 질서의 풍부함과 유추를 통한 확장성에 기대고 있다. 이는 대상을 비켜남으로써 얻는 간극이 아니라 다른 대상의 지시를 통한 또 다른 현존의 지시이며 동시에 그 재현의 자유로움이다―나아가 그 존재가 두 다른 존재들의 사이에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재현의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두 다른 세계가 평행의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종래 만나게 된다면, 그 교차의 지점은 공연 바깥의 언어적 차원의 전제에 있는 것 아닐까.

    처음 무대 오른편 상단의 벽에 있던 프린터에서 종이가 출력되며 시작되는 공연은 이어 범죄 사진의 몽타주처럼 금배섭의 옆면이 사진으로 찍히고 마지막에 이 행위를 금배섭이 반복하며 끝난다. 이러한 사진이 입국 심사에서 찍는 사진을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읽을 수는 없지만 언어, 인간적인 초상, 이를 기록하는 문화는 경계에 있는 다른 인간 세계의 입구를 극 중 가장 명확하게 지시한다. 

    〈니가 사람이냐?〉(2017) 

    금배섭 안무, 〈니가 사람이냐?〉 ©박태준.

    〈니가 사람이냐?〉는 유일하게 금배섭 안무가가 아닌 김석주 배우가 출연하는 작업이다. 한곳에서 진행되며 미세한 행위들의 더디게 누적되는 퍼포먼스로, 장면의 전환 역시 거의 없이 퍼포머에게 온전히 집중된다. 김석주의 쇠 갈고리들은 모서리에 걸친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끌고 와 이를 무대 천장에 매달린 모빌의 꾀어진 실에 거는, 순전한 행위가 연속된다(어떤 대사나 심미적 표현 같은 것이 부가되지 않는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갈수록 높아지는 한편 갈고리를 걸 수 있는 틈이 좁아지며 행위는 지연되기도 한다. 
    결국 수십 개의 갈고리가 모빌에 걸리게 되고, 이빨에 낀 치실 같은 실을 왼손 장갑에 끼운 채 행위가 계속되며, 갈고리의 메타포는 신체로 연장된다. 곧 이빨에서도 손에서도 빠지지 않는 또는 빠져서는 안 되는 전제가 부여된 상황에서, 김석주는 자신의 두 신체 부위를 가깝게 붙여놓으며 부자연스러운 신체 형태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후 그 상태에서 총 세 곡의 음악이 따라붙는다. 그가 마이크를 왼쪽 입가로 구겨 넣듯 붙여 근사한 팝을 부르기 시작한다. 표정의 변화 없이, 자세의 변화 없이 음악은 키를 높이며 후렴까지를 두어 차례 오간다. 다만 마이크를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모빌을 돌린 채.

    군중에게 낙인찍힌 한 찌그러진 자아의 솔로를 연출한 이 작업은 보이지 않는 미세하지만 끊어지지 않은 선분이 신체를 옭아매고 있는 남자의 시종일관 고단한 분투를 보여준다. 김석주의 시선이 맺히지 않는 세계를 확인하는 것, 그가 보는 것이 어떤 공백 같은 것임을, 어떤 생각의 흐름이 읽을 수 없는 것임을 인지하며 관객은 그의 고통의 무게를 감지한다. 그것은 가시화된 옥죔 너머로 반사되지 않는 기괴한 인간 형상의 단단함이다. 소통 불가능한 언어는 미시적인 행위의 누적, 신체의 제약 조건에서 연장된 행위의 표현 자체로부터 신뢰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장갑에 실을 걸기 전까지 장갑은 끼었다 벗었다 입에 넣었다 다시 뱉고 여기에 하나를 더해 뭉쳐서 입에 넣었다 빼는 식으로, 그에게 가해진 낙인은 그의 신체 표면들을 쓸고 접촉하고, 그의 침이 더해져 내장을 관통하며 신체의 연장이 되어 간다. ‘신체에 낀다. 또한 벗겨낸다. 문다. 그리고 뱉어낸다.’ 이 같은 동사들은 신체의 장악이자 촉각적인 접촉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표층의 접촉이 낙인의 효과라면, 이후 장갑에 실을 꿴 것은 그 자신이므로 낙인은 그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일 수도 있고, 그러한 형벌의 대가를 적극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장갑을 발에 끼고 손가락 부분 하나를 구두 굽으로 만든 후, 퍼포머는 갈고리를 두 발목에 걸고, 모빌을 돌리며 걸어가는데 발목에 건 갈고리들이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갈고리를 다 걸어 모빌을 완성했을 때 반짝이는 음향부터 세 곡에 이르기까지, 곧 사운드와 모두 그가 소화하는 음악(팝, ‘그리운 금강산’, 또 다른 팝)은 극적 장면의 전환을 만드는 매체로 적극적으로 개입한다―음악은 극적 장치로서 발화되거나 배경음으로 휘감으며 남자를 어느 정도 고독한 정념의 주체로 형상화한다. 
    남자의 삶은 자기 결단적이고 또한 사물 환경에 내속적이다―이런 차원은 퍼포먼스의 자기 완결성, 자족적 성격을 굉장히 많이 공유하는 부분이다. 발에 낀 것처럼 장갑은 끝까지 몸의 연장이 되고, 몸의 지지대로 활용된다. 그리고 혼자만의 공전으로 이어진다. 곧 자가적인 세계의 완성과 그 세계로의 영원한 귀속의 절차를 보여주는 〈니가 사람이냐?〉는 풀리지 않은 팔의 긴장 관계를 여전히 유지한 채 갈고리에 빈 양동이를 그리고 자신의 팔을 건 채 암전으로 끝난다. 

    〈미친놈널뛰기〉(2014)

    금배섭 안무, 〈미친놈널뛰기〉 ©박태준.

    다섯 작업 중 가장 처음 만들어진 작업으로, ‘부당함에 대항하여 인간 존엄을 찾고자 하는’ 남자의 모습을 제의를 치르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여기에 신중현과 엽전들의 ‘나는 너를 사랑해’가 반복된다. 노래는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좋아해”를 거꾸로 한 가사―이 사실을 모르면 가사를 알아듣기 어렵다.―와 상엿소리를 표현한 카우벨 연주가 반복되는 곡으로, 공연에서는 이 노래를 다시 반복한다. 금배섭의 다리에 멘 흰 천은 뒤뚱거리는 자태, 상대적으로 잰걸음의 형태를 만든다. 또한 천을 두 손에 동여매고 좌우로 틀며 앞으로 상여를 이동시키는 것 같은 역동적 포즈를 구성하기도 한다.
    마지막은 부적 같은 널빤지를 짊어지고 이동해, 널빤지를 나무에 괴고 위에 올라간 후, 천장에서 무거운 사물이 떨어지며 파열음을 내는 순간 금배섭이 천장으로 자연 점프해 보자기에 스스로를 폭 감싸고 완전히 안 보이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혼자만의 세계에 침잠한다거나 그 스스로를 장례 치른다거나 어쨌든 그가 치르는 제의는 뚜렷한 대상 없이 그 스스로의 시간으로, 그 자신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갈음된다. 

    〈섬〉(2017) 

    금배섭 안무, 〈섬〉 ©박태준. (이하 상동).

    옴브레가 위치한 무대 우측에 가서 마이크에 대고 금배섭은 “들리세요?”를 여러 번 외친다. 이는 퍼포머와의 의사소통의 간극, 보이는 것이 주는 기이한 세계의 광경이 보는 것에 대한 질문을 만드는 춤판 야무의 작품이 갖는 어떤 특성에 가닿는다. 곧 ‘존재의 행위가 존재의 당위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또는 ‘이러한 구체적 현실이 어떤 현실을 재현할 수 있는가.’ ‘존재의 행위가 어떤 현실과 구체적으로 맞닿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솔로 연작에서의 각기 다른 존재에 관한 탐구적 성격과 관련을 맺는다.
    〈섬〉에서 남자가 위치한 장소는 물론 섬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펼쳐져 있는 각목을 양손으로 각각 네 개씩 잡고 사각형의 형태로 차례차례 쌓는다. 바닥을 헤엄쳐 가고 쭈그려 앉아 잰걸음으로 가기도 하는 등, 무대는 물리적으로 먼 길, 복잡하게 구획된 지형의 장소로 변환된다. ‘섬에서 나가기 위한 배일까.’ 또는 ‘자신의 거주 공간일까.’ 그중 어떤 형태로도 적합하지 않은 이 구조물은 그 자신을 은폐하는 또 다른 섬의 알레고리를 형상화한다.

    탈북민이 모티브가 된 이 작업에서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따라서 펼쳐진 나무를 쌓는 나무로 어김없이 변환하는 금배섭의 행위는 노동에 가깝다. 금배섭이 다 쌓인 구조물 안에 들어가 몇 개의 층을 들고 얼굴을 가린 기괴한 생명체의 형상으로, 남은 나무 틀을 발로 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른 존재로의 변환은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움직임은 치장되지 않은, 그러나 빈틈없이 재단된 행위의 양상을 띤다. 
    금배섭의 행위가 재현하는 존재는 곧 그 사람의 처절한 실존 그 자체가 부추기는 연민과 같은 감정보다는 그 행위의 진득한 관철에 마침내 수용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삶의 양태 자체로 수렴한다. 여기서 그 존재는 스스로를 행위로 관철하며 그 행위로써 언어를 대체하며 묵묵한 몸짓 자체로 발화한다. 금배섭의 행위는 그 사람의 상상적 재현이 아니라 그 사람의 빈 자리를 어떤 제약과 연장의 기술로 쌓아나가며 그 사람을 제의적으로 성찰하는 것 아닐까. 곧 〈미친놈널뛰기〉의 기조는 다른 작업들에서도 연장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곧 타자를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스스로의 간극에 투신하기가 솔로 연작을 관통하는 철학이 아닐까.

    〈포옹〉(2018)

    금배섭 안무, 〈포옹〉 ©박태준 (이하 상동).

    무대 바닥을 거의 덮은 에어캡은 위아래가 철로 집힌 채 위쪽 중앙에 단 고리가 천장에 걸려 일종의 투명막을 만들고 있다. 이 앞에서 금배섭은 멀어지고 가까워지며 그림자극을 상연한다. 이 막이 걷히고 금배섭의 걷기, 그리고 이후 긴 손잡이가 달린 롤러로 미는 행위, 드럼통이 연결된 무거운 롤러를 끄는 행위와 같이 주로 에어캡을 터뜨리는 행위 등, 노동으로서 행위가 일관되게 지속된다. 에어캡을 완전히 다 터뜨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경로를 일정하게 훑어가는 것은 가능하다고 금배섭은 생각하는 듯하다. 이 경로를 같은 패턴으로, 곧 짧게는 좌우로, 그리고 크게는 위아래로 이동하는 행위는 빈틈없는 경로로 이어진다. 
    “자신의 과오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라는 〈포옹〉은 다른 네 작업에 비해 조금 더 정서적인 측면이 가미되고, 이는 그 몸짓의 발현 양상에서도 뚜렷한 부분으로 나타난다. 본격적으로 롤러를 사용하기 전에 포옹하려 하고 동시에 포옹하는 상대가 벗어나는 동작이 반복되는 것은 예외적으로 심미적인 몸짓에 가깝다. 

    에어캡은 이중으로 깔려 있었고, 금배섭은 그 안에 들어가 얼굴까지 뒤덮여 허우적대며 이동한다. 거기에는 작은 야광 막대가 군데군데 달려 있고, 이것이 들리자 일종의 판타지가 구성된다. 롤러의 압력에도 야광 막대가 부서지지 않은 건 에어캡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어캡을 터뜨리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끄러운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인가. 무언가를 완전히 지우려는 노력인가. 그 행위가 메시지로 연장될 상징과 뚜렷한 관련을 맺기 힘든 것이 〈포옹〉, 그리고 금배섭의 무대가 갖는 특징으로 보인다. 
    곧 구체적인 사물과 현재의 캐릭터가 존재함에도 동시에 그 사물과 관계 맺는 캐릭터의 구체적 행위가 존재함에도 이는 현실을 재현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 행위는 행위 자체로 자리하며, 그 행위를 지속하는 것이 금배섭의 원칙으로 드러난다. 포옹할 수 없는 존재와 그 마음을 형상화하는 대신, 금배섭은 은유될 수 없는 존재와 시간을 물리적으로 가리키고 구성하는 데 집중한다. 형상화의 노력은 그의 몸이 투여되고 노동이 축적되는 시간 자체이다. 그리고 이는 사물의 집요한 사용과 얽힘이다. 

    금배섭 안무, 〈?〉 ©박태준.

    다섯 작업이 하루에 5시간 30분 안에 모두 펼쳐진 것 자체가 하나의 실험적 시도라 하겠다. 〈?〉, 〈니가 사람이냐?〉, 〈미친놈널뛰기〉 이상 세 작업 이후, 카페에서 간단히 먹을거리를 교환할 수 있는 쿠폰이 영수증 형태의 티켓에 포함돼 한 시간의 인터미션이 주어지기도 했다. 〈니가 사람이냐?〉를 제하고는 모두 금배섭 독무로 진행되었고, 〈섬〉은 옴브레의 라이브 연주가 동원되었다. 무엇보다 〈미친놈널뛰기〉(2014)에서 〈?〉(2020)까지 7년간의 작업에서 ‘솔로 연작’ 다섯 작업을 추린 것으로, 금배섭 안무를 모두 볼 수 있지는 않지만 그의 세계를 어느 정도 집약적이고 압축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리라는 점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작업이 물론 이전의 형태 그대로를 재현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으로, 〈?〉의 그림이, 〈니가 사람이냐?〉의 모빌이, 〈미친놈널뛰기〉의 보자기가 각각 무대가 끝난 이후 하나씩 천장에 걸려 더해지며 교차하는 가운데 무대가 진행되므로 다섯 개의 작업이 하나의 무대에서 이뤄진다는 자의식이 공연 전반에 깔려 있다는 점의 차이가 원래의 공연들과 달리 발생한다. 한편, 이전 공연에서의 변화나 감축이나 확장을 확인한다면, 또 다른 공연 감상의 지점이 생겨났을 수도 있다.                                                                          

    금배섭 안무, 〈섬〉 ©박태준.

    마지막으로 《오》는 왜 이렇게 긴 시간, 극장을 전유해 다섯 개의 작업을 펼쳐낸 것일까. 그리고 그 다섯 작업은 어떻게, 왜 선택된 것일까. 이미 팬데믹 사태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어렵게 극장에 자리한 관객이 긴 시간 한곳에 머물며 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음에서 착안한 것일까. 좀처럼 돌아올 수 없는, 잔상처럼 남아 있을 수 있는 앞선 작업들을 소환할 수 있는 적기로 현재를 판단한 것일까. 금배섭의 《오》는 지난 그의 작업의 복기이자 현재, 그리고 어떤 미래로의 도약을 위한 중간적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므로 시간을 뒤집고 교차하는 작업으로, 이를 통해 그것들의 닮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반복되는 모티브, 움직임의 방식, 안무의 요소들에서 금배섭의 안무가 가진 단단함을 체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 연 명 춤판야무 연작솔로 <오>
    일     시 2021년 10월 8일(금), 10(일) 오후 4시 
    ※ 토요일 공연 없음 
    공연길이 330분 (인터미션 60분 포함)
    장     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주최주관 춤판야무
    후     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카페오가다 

     

    <출연 및 스태프>

    안무: 금배섭

    출연: 김석주, 금배섭

    기획: 신재윤

    드라마투르기: 김풍년, 이명우

    음악감독: 장영규, 옴브레

    미술감독: 정유석

    무대디자인: 오진경, 정승준, 정용현

    조명디자인: 신동선, 정유석

    의상디자인: 김지연, 이수원

    분장, 소품: 장경숙, 남혜연

    영상감독: 박태준

    무대감독: 박효진

    홍보물제작: 주용빈

    공연진행: 조은데, 김용희, 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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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1

    • 푸른나무 2021.10.25 16:53

      <오>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대단한 공연이었습니다. 예술의 수준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무대였습니다. 공연 중간 따뜻한 차와 샌드위치, 그것도 부족할까 떡까지 준비해주신 넉넉함에 먹는 동안도 감동과 공연의 연장이었습니다.
      <오> 공연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구사하신 김민관님의 평론을 보면서 놓쳤던 부분을 다시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명품공연에 명품 평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