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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민하, 〈Self-Salutation ver.3〉: 매(개)체로서 카메라의 도입이 갖는 효과
    REVIEW/Performance 2021. 11. 15. 13:05

    차민하 안무, 〈Self-Salutation ver.3〉 ⓒ팝콘(이하 상동). 김보민.

    고프로 카메라를 손에 든 두 퍼포머가 이를 자기 신체를 비추는 매체로 대부분 활용하고, 그러한 반영을 서로 간의 교환으로 확장하면서 진행되는 퍼포먼스 〈Self-Salutation ver.3〉는, 미디어아트와 퍼포먼스를 접목시키고, 몸의 미디어로의 동시간적 확장을 꾀한 작업으로, 비교적 단순한 매체 간 융합의 형태를 띠는 한편, 그 전제와 시작점을 몸에 두고 있다. 매체의 도입이 갖는 효과를 산출하는 것은 카메라가 자기를 찍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몸을 어떻게 바꾸는가 또는 구성하는가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바라보는 것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퍼포머 간의 차이를 보는 것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 왼쪽이 서현정, 오른쪽이 김보민.

    두 퍼포머의 양상은 사뭇 다른데, 김보민이 주로 카메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롭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시간 무대 중앙에서 카메라를 바닥에 두고 한정된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부분이 특히 그러한데, 여기서 카메라는 그 시작 지점에서 잠깐씩 확인된다. 카메라를 보는 순간은 움직임이 재배치되는 시작점을 알리는 것과 같다. 동시에 그 시작 지점은 카메라와 퍼포머 간의 단절이기보다 그 영향권 아래에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음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다른 퍼포머(서현정)는 자신의 발의 움직임이나 기둥에 기어 다니는 자신의 손가락같이 자신의 신체 부분을 찍거나 상대를 찍는다. 카메라의 반경은 자신의 신체 부분에 한정되거나 완전히 바깥으로 열려서 자신을 벗어나며, 넓은 변경의 폭을 가져간다.

     

    두 퍼포머가 객석 반대편 의자에 앉아 움직임이 시작되는 순간이 어떻게 연장되었는지는 자기 반영의 과정이 어떻게 차이를 생산하는지로 연결해 살필 수 있을까. 여기에는 시차가 우선한다. 김보민이 먼저 자신의 영역에서 나온다면, 서현정은 자신의 발에 집중한다. 서현정이 자신보다 상대를 비출 때 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사실상 말이 등장하지 않는 오로지 카메라와의 교호 작용과 이동과 움직임만이 있는 무대는 어떤 룰이나 움직임의 규칙이 적용되어 있지 않은 듯 보인다. 아니 그것을 찾기 힘들다. 작위적으로 짜인 안무라고 지시할 수 있는 정도의 움직임은 후반의 서현정에 의한 것인데, 그 외에 움직임은 공간에의 적응과 분포, 상호 간의 관계, 움직임 혹은 몸짓의 자율성이 주체의 선택에 따른 또는 즉흥이라고 하는 전개 방식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두 퍼포머의 움직임이 행위와 몸짓에 가깝다는 점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Self-Salutation ver.3〉에서 자기-인사는 간단하게는 자신에 대한 점검에서부터 나아가 자신을 타자로 두며 감각하는 인지 작용을 포함한다. 또는 그 자기가 상대와 교환하는 지점을 포함한다. 김보민을 서현정이 포옹하는 장면에서 서현정의 카메라 한 대는 그의 손에 의해 지지된다. 말하자면 김보민을 감싸고 있던 카메라를 서현정이 대체한 것이고, 카메라 화면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김보민과 근접한 거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카메라가 ‘나’를 포옹하는 것이다). 반면 서현정은 얽힌 신체를 자신의 신체로부터 연장한다. 오로지 자신으로 수렴하는 김보민에게 서현정은 타자로 성립한다. 반면 서현정은 타자를 자신의 영토 안에 가둠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스크린은 반대편의, 다른 각도의, 또는 사각지대의 공간에서의 움직임을 반향한다. 차민하 안무가는 그 둘을 좇으며 퍼포머가 내려놓은 카메라를 들고 자신과 퍼포머 사이에 놓음으로써 두 개의 스크린의 공백을 마감한다. 두 퍼포머는 카메라가 작은 화면으로 자신들을 반영하고 있음을 인지하지만, 동시에 두 퍼포머 각각에 할당된 스크린이 그것이 자신을 초과하며 나타나고 있음을 살피는 것은 예외적인 순간이다. 이는 서현정이 스크린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거울처럼 동시에 카메라와 스크린을 볼 때이다. 사실상 이미 자신이 찍히고 반영되고 있음을 아는 퍼포머는 관객이 자신들을 보고 있음 역시 인지한다. 실제 카메라는 회전에 따라 객석을 반영하며, 따라서 객석은 무대 바깥이 아니라 무대 안으로 포함된다, 퍼포머의 인식 반경뿐만 아니라 스크린이 투사하는 이미지로.

     

    차민하 안무가는 김보민 퍼포머의 카메라를 자신의 손으로 연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관객은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볼 수 있는 것일까. 관객의 시선은 중계되는 스크린과 중계하는 몸과 동시에 그것을 벗어나기도 하는 몸 사이에 있다. 이 공간에 전시된 영상 작업들은 각 작업자들이 브이로그 형식으로 자신을 찍는 방법론을 적용한 것들이다. 이러한 자기 기술의 방식은 애초에 누군가를 상상적으로 앞당겨 의식하며 이뤄진다. 반면 무대에서의 자기 기술은 직접적인 대면이 아니라 시차의 기술 방식을 도입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계에 대한 인지가 다시 퍼포머를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관객과 퍼포머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시선과 시차를 갖는다.

     

    퍼포머가 카메라를 보는 것은 그 화면 안에 내가 포함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시선은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오지 않지만, 관객을 향한다. 하지만 후자에 대한 인지는 그 화면 안에 잠기는 순간 부차적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에의 몰입은 카메라가 자신의 신체를 벗어나면서 가능한 것일까, 또는 카메라를 통해 바깥을 인지하면서 가능한 것일까.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닫혀 있는 김보민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지만 그 카메라를 통해 바깥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서현정, 그리고 그 둘을 연장하며 관객의 자리를 선취하는 차민하까지 자기-인사는 외부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일까.

     

    퍼포머는 상대방을 찍을 수도 (사진처럼) 자기 자신을 찍을 수도 있다. (사진처럼) 자신을 보고 찍을 수도 있고, 자기 얼굴을 찍을 때처럼 자신을 보지 않고 찍을 수도 있다.

    브이로그 방식은 팬데믹 상황 아래 극장이 닫혔을 때 창작이 어떻게든 지속된다는 환상을 준다. 온라인에서 교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자기로서 발화하는 방식은 무언가 일상이 비어 있지 않음을 증명할 수도 있다. 〈Self-Salutation ver.3〉는 자기에 대한 인식 작용, 대화나 소통의 과정에 집중[“몸의 어떤 부분을 감각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감지하기도 하고, 반대로 마음의 상태가 어떤 증상으로 몸에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Self-Salutation〉은 바짝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바로 그 ‘스스로 상호작용’으로부터 출발한 작업이다.”]하는데, 이를 매개하는 장치가 카메라라는 매체다.

     

    이러한 몸의 집중, 나아가 카메라(에)의 집중은 관객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무엇을 찍고 있음, 찍히고 있음을 용인하는 카메라와 스크린의 자장은 CCTV의 무미건조한 반영의 체계와 크게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객석은 파괴되거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관객은 입장 당시 움직일 수 있는 권리를 확인받았지만 아무도 따라 움직이거나 반대편의 카메라의 시선에 도달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 객석이 허물어졌다면, 무대는 그 빈틈을 파고들며 확장될 수 있었을까.

     

    관객은 퍼포머 대신에 스크린을 볼 수도 있다. 공간은 스크린을 통해 확장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퍼포머는 관객을 벗어난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다.

    〈Self-Salutation ver.3〉는 다소 고전적인 자기 반영의 매체로서의 셀프카메라를 활용해 움직임을 파편화하거나 의식된 움직임을 만들거나 신체의 부분들을 탐문하거나 찍고 찍히는 것을 통해 각각 모델이 되거나 모델을 만드는 상호 작용의 과정을 만들어 낸다. 매체의 도입은 움직임을 변경한다. 또한 움직임의 반경을 제한하거나 절단하고 단속한다. 이는 카메라의 물리적 범위, 카메라의 위치를 재상정하는 행위에 따른다. 여기에는 분명한 카메라에 대한 퍼포머의 인지가 있다. 반면 매체와의 관계 탐구 자체가 그렇게 흥미롭거나 신선한지는 의문이다. 음악적 전개가 움직임과 영상과 함께 동시적으로 진행되지만, 카메라와 스크린에 퍼포머는 그리고 관객은 완전히 닫힌 공간에 머무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이는 관객 역시 공간을 유동하면서 변화될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관객은 차민하의 위치에서 퍼포머 간의 사이를 점유할 수도, 스스로가 스크린에 속하며 이러한 스크린이 관객의 눈에 포함되는 것 역시를 인지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사각지대에 있는 퍼포머를 대체하는 스크린을 배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퍼포먼스의 방식이 움직임의 즉흥적 탐구 방식일 수 있음을 차치하고 이러한 작업에서 과정들이 어떻게 움직임을 변경하고 새로운 움직임과 의식 질서를 구성하는지를 발화하는 것 역시 가능할까. 곧 말이 부가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Self-Salutation ver.3〉에서 스크린은 카메라와 같이 퍼포머의 인지적 조건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퍼포머의 움직임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카메라를 자신을 향하고 스크린 자체에 시선을 둚으로써 스크린을 거울로 반영하는 것처럼 퍼포머가 자신의 움직임이 반영됨을 스크린을 통해 인지하고 스크린을 카메라처럼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Self-Salutation ver.3〉이 나눠준 핸드아웃에서 크레디트는 특별한 데가 있다. 프로듀서를 맡은 권효진 기획자가 참여자들의 작업 과정에서의 역할과 시간을 적은 것인데, 크레디트는 대부분 암묵적인 기표에 머무르므로, 이는 대단히 예외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는 ‘자기’에 집중한 공연의 연장선상의 자연스러운 결과일까. 과연 ‘자기’란 무엇인가. 〈Self-Salutation ver.3〉는 카메라와 스크린을 도입해, 중앙의 이미지와 누수되는 바깥의 이미지들의 이중 서사, 그리고 춤을 추는 것과 춤/몸을 찍는 것 사이에서 변용되는 의식과 움직임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자기’에 관한 매체 반영적 탐구의 작업은 표층적 이미지에 다소 주목하고 있다고 보인다는 점에서, 또 다른 발화의 방식이 도입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민관 mikwa@naver.com

     

    [전시/퍼포먼스 개요]

    ▪️전시 일시: 2021.11.10.(수)-13(토) 12:00~19:00 * 무료관람 * 퍼포먼스로 인해 9(화)는 전시 관람이 불가하며, 13(토)는 16시~19시 관람 가능.
    ▪️퍼포먼스 일시: 2021.11.9(화) 17시, 11.13(토) 15시 * 사전예약 마감
    ▪️장소: 공간 TYPE (중구 다산로32길 18)

    콘셉트/안무: 차민하
    움직임연구/퍼포밍: 김보민, 서현정
    프로듀싱: 권효진
    드라마투르기: 현지예
    영상/구성: 나미나
    공간디자인/설치: 정명우
    사운드디자인: 장희진
    그래픽디자인: 공영그래픽스튜디오
    사진기록: 팝콘
    영상기록: 플레이슈터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협력: 공간타이프, 유아트랩서울

    전시 소개: “내 움직임에 집중하고 그것을 느끼는 것, 이것만으로도 나는 위로 받았다.” 
    몸의 어떤 부분을 감각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감지하기도 하고, 반대로 마음의 상태가 어떤 증상으로 몸에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Self-Salutation>은 바짝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바로 그 ‘스스로 상호작용’으로부터 출발한 작업이다. 
    안무자 차민하는 2012년부터 ‘위로와 안녕’이라는 주제로 안무 리서치를 해왔다. 세 번째 버전에서는 보다 많은 참여자들을 작업 안으로, ‘자기’들로 불러들이고자 했다. 퍼포머 외 참여자들에게도 자신만의 Self-Salutation 방식에 대한 브이로그를 요청하여 그들의 안녕을 물었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안녕을 살피게 하는 방식으로. <Self-Salutation ver.3>는 이러한 단편들이 퍼포먼스와 더불어 전시된다.
    각자 말하고 움직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를 대상화하고 다각도에서 바라본다. 어떤 습관에 고착된 자기를 대면한다는 것은 거북한 일, 자기를 하나의 근사한 전체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자기는 붕괴됨으로써 성장한다. 다시,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들을 읽으며 스스로 구원한다. Salutation은 인사라는 뜻이다. Salut는 구원과 안녕, 그리고 두 척의 배 사이의 확인 신호 교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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