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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푸름, 〈생산적 생산〉, ‘사라지는 매개물’
    REVIEW/Dance 2021. 12. 23. 14:00

    윤푸름 안무, 〈생산적 생산〉 ©Kim Ju Bin [사진 제공=윤푸름프로젝트그룹](이하 상동). 로와정 작가의 설치 앞에서 이를 응시하고 있는 강진안 무용수.


    〈생산적 생산〉은 크게 세 장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로 사물의 움직임과 그에 조응하는 신체, 두 번째로 영상으로 갈음되는 신체와 두 단어 또는 구문의 절합과 신체, 세 번째로 사물의 동작을 잔상으로 처리하며 미시적인 자장만으로 움직이기로 구분할 수 있다(편의상 이를 각각 1-1, 1-2, 1-3으로 구분하려고 한다). 〈생산적 생산〉은 사물로부터 이양된 움직임, 사물을 재현하는 게 아닌 사물로 분류될 수 있는 어떤 미세한 움직임들로써 일반적인 안무가 구성하는 춤의 클리셰로부터 탈피하고자 한다. 무엇을 표현할 것이냐, 그로부터 어떻게 움직이느냐가가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표현하지 않을 것이냐, 그로부터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느냐로 초점이 옮겨온다. 곧 재현을 거스르는 움직임의 형상, 수용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가 질문된다. 적어도 표면만을 보면 그러하다. 각각의 사물들은 모터로 움직인다. (신체 움직임이 존재하기 전) 가장 첫 번째 움직임은 컴프레셔와 양동이 안에 놓인 컴프레셔와 연결된 호스, 원판 위의 회전하는 작대기, 오르내리는 전동 블라인드, 양옆을 오가는 작대기 메트로놈, 원형의 줄 위를 굴러가는 이동 모형, 실에 매달린 튜브 등의 작동이다. 
     
    1-1에서, “무용수”들은 움직이는 설치와 공진하는 움직임을 개발한다. 공연 브로슈어를 보면, “자본주의 ‘생산’의 일부를 우회하여 (예술)노동의 다른 대안을 제안”하는 게 공연의 의도쯤으로 제시되고 있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자본주의 생산의 일부가 재현되는 현장에서 그러한 기계 장치로부터 파생된 “부산물(by production)”, 일종의 움직임을 신체로 이양하는 것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기’라는 예술의 유인을 재설정하는 것과 움직임의 전략적 차원이 만나는 지점, 곧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에는 정합되지 않는 간극이 있다[각주:1].
    〈생산적 생산〉은 결과적으로 예술의 강박적 생산의 이념이 곧 자본주의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성찰로부터 시작해, 예술이 자본주의의 생산력 일부를 빌려오는 것이 오늘날 예술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전제를 세우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생각하지 않기’, 그럼으로써 ‘다른 움직임을 만들기’라는 실천의 양식은 ‘움직임을 바깥에서 가져오기’, 곧 ‘창작의 방법론을 바깥으로 외주화하기’(바깥의 힘을 빌려오는)로부터 가능한가. 그리고 여기서 그러한 생산(력)으로부터의 “우회”는 어떻게 또한 가능할 것인가. 

    (사진 왼쪽부터) 김승록, 최민선, 이종현, 강진안 무용수. 1-1로, 한 명의 움직임이 끝나면, 모두 다른 구성을 일제히 취하기 위해 움직인다. 

    결과적으로 1-1에서, 동적인 기계(설치 미술)의 의사-형상이 되어 무용수들은 움직이거나 그러한 작업들을 응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기생산되는 움직임을 연장하며 기계를 재현하거나 그것을 단지 바라보며 감시하는 기계와의 상호 관계를 암시한다. 오히려 전자에서 시스템 일부를 벗어나는 예술의 “무용”한 형상이 무언가를 “생산”하며, 후자에서는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데, 이때 움직임은 완전히 기계로 이양되고 더 이상의 움직임은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서 무용수의 비생산은 기계와 관계 맺는 이로서 응시로서의 움직임을 또한 재현하게 된다. 

    동적 사물의 움직임이 모티브가 되어 일종의 사물 되기를 실천하기는 무용수는 그 자신의 내적 동기를 버리기라는 모더니즘 예술의 전략과 만난다. 〈생산적 생산〉의 방법론적 고안, 곧 아마도 안무가의 움직임 지도가 아닌 설치 미술로부터 파생된 움직임 고안에서, 일종의 그러한 이양 자체가 자본주의에 대한 사유를 창안해 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각주:2] 

    1-2의 영상. 이미지로는 펼친 손의 앞 뒷면이 나열되고, 아래 자막에는 “165cm”, “빌딩”이 좌우로 놓인 장면이다.

    1-2의 영상은 직접적인 관련성 없는 두 단어 또는 구문의 절합―각각 영상 하단의 왼쪽과 오른쪽 끝에 배치―이 끊임없이 나열되는 가운데, 무용수들의 포즈에 가까운 미세한 움직임들을 나열한다. 네 명의 무용수들의 부분 신체가 강조되고, 전신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움직임을 조망하기 힘든 촬영은 부조화한(?) 단어의 조합으로 영상을 수렴시킨다. 사실상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편집된 영상으로서, 그러한 출발선상의 시작이었다고 해도, 그 두 단어의 조합은 명확한 편집점을 갖는다. 말이 되지 않는 조합이 일으키는 효과를 주는지가 그것이다. 또한 앞의 구문 혹은 단어가 형용사나 명사라면 뒤따르는 뒤의 구문 혹은 단어는 명사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각기 다른 두 단어 혹은 구문의 연결됨을 애초에 의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은 꽤 빠른 속도로 많이 나열되는 전략을 통해 쌓이지 않고 휘발되는데, 두 단어 사이의 간극은 또는 의도 없음의 연결은 가령 그러한 단어 사이의 무한한 공백으로부터, 또는 두 단어가 만드는 이상한 세계에 대한 심상으로부터 관람자를 끊임없이 상상하게 만들고 투신하게 만드는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적 동기나 사유 없음으로부터 시작하기, 더 이상의 무용의 자발적 동력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유희적 놀이와 만난다고도 보인다.

    가령 단어들의 나열에서, “성실한 | 코로나”나 “컨템포러리 | 화장” 같은 경우의 절합이 생겨나는데, 거기에는 어떻게든 맥락이 형성되는 것이다. ‘컨템퍼러리 화장’에서, 누워 있는 신체의 복부부터 패닝으로 화면이 흘러가는데, 이를 보며 죽음을 처리하는 절차로서의 화장을 연상한다면, 일종의 그럴싸한 동기화라고 일컬을 수 있을지 몰라도, 중요한 건 특정 서사 자체를 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상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는 그런 의미화 자체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의미를 위한 자의적 봉합에 그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상은 언어 유희의 전략에 의해 부분화된 신체를 특정하는 시야를 따라 일종의 배경으로 신체-움직임을 처리하는데, 따라서 영상은 신체의 공간으로의 반향이나 많은 움직임을 대체한 최소한의 신체 움직임 자체만을 부각하고 있음을 은폐하거나 아예 지우는 측면이 있다. 반면 이러한 신체의 움직임은 1-1의 움직임의 연장으로도 볼 수 있다. 

    1-3은 다시 각각의 사물 옆에서 각 퍼포머가 위치하는 것으로, 이번에는 한 번에 한 명의 퍼포머가 사물에 조응하는 움직임을 펼친다. 앞서 퍼포먼스의 시작과 맞물려 외부 벽을 타고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시작과 이후 사물과의 마찰 또는 타격음 같은 규칙적 리듬과 전자 음악적 주조음으로 구성되는 사운드가 멎는 순간이나 퍼포머가 포즈를 취하는 것의 지속을 포기할 때 일제히 퍼포머들은 다른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 또는 사물과의 연결점을 재설정하기 위해 긴장된 몸의 움직임을 풀었었다면, 이번에는 한 명이 움직이고 다음 퍼포머가 자신의 움직임을 시작하는 것으로, 무용수의 교대가 일어난다. 
    여기서 움직임은 기계의 움직임이 꺼진 혹은 멈춘 시간 이후의 것이다. 이는 앞선 움직임의 잔상이든 상기든 간에 무용수의 개별적인 착상을 통해 이뤄지는 것으로 보인다. 발뒤축을 디뎠다 떼거나 하는 김승록처럼, 또는 발끝으로 서서 앞뒤로 서핑하듯 기우뚱하는 최민선처럼, 움직임은 역동적이지 않으며, 주체의 판단과 사고는 그러한 움직임과 함께 지연된다. 정확히 무엇을 하기보다 어떤 상태를 간신히 유지하기 위한 사투처럼 보인다. 

    1-3의 각 무용수의 움직임 장면. 최민선 무용수.

    1-1에서 사물 움직임과의 동형성을 좇았다면, 그리고 1-2에서 신체의 사라짐을 대체하는 언어 교환―이를 언어와 신체의 교환을 의도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할까.―을 구성했다면, 1-3은 사물의 부재(=존재 했음)로부터 길어 올린 움직임의 시작을 예비한다. 1-1을 유일한 자본의 즉물화된 메타포인 기계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면, 1-3은 그러한 기계의 움직임, 곧 자본의 생산을 멈춤으로써 그와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구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1-2의 구간을 일종의 1-1과의 분절을 구성하기 위한 인터미션쯤으로 본다면, 1-3은 “우회”를 가리킬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의 일부를 우회”하는 것. 그것을 차용하되 그 경계에서 어떤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것. 

    이 몸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는, 곧 내적 동기의 발현과 주체의 발화와 숙련을 통한 체화 같은 것이 아닌 어떻게 기계로부터, 기계를 이탈하며 이행되는지를 〈생산적 생산〉은 그런 옴짝달싹하지 못하며, 한 지점에 묶인 채, 제한된 몸짓의 몸이 이내 어떤 떨림으로 수렴하는 움직임으로써 가시화하려고 한다고 보인다. 사실 이는 어떤 안무의 규약 같은 것에 의한 단순한 움직임 실천에 불과한 것일 가능성이 짙다. 거꾸로 물어야 할 것이다. ‘움직임은 자본을 형상화하며 동시에 그로부터 이탈하는 모습을 가시화할 수 있는가.’ 여기서 〈생산적 생산〉은 사물이 자본을 매개하고 그 사물을 다시 상징적으로 소거함으로써 자본 이후의 또는 자본 이외의 질서를 상상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에서 (사진 왼쪽부터) 강진안, 최민선 무용수.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1. 12. 18(토) ~ 12.19(일) 3pm
    공연 장소: This is not a church (TINC)

    콘셉트·안무: 윤푸름
    드라마투르기: 김재리 
    시노그라피: 로와정 
    영상: 최윤석
    사운드: 정의석
    의상: 손정민
    퍼포머: 강진안, 김승록, 이종현, 최민선
    연구원: 송유경
    조명: 김병구
    무대: 김인성
    프로듀서: 박신애
    홍보: 서희지, 이연주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1.  1. 사실 이전 윤푸름 안무가의 작업을 2012년에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작업과 지금의 작업 간에 어떤 시간이 놓였는지 모르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작업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본문으로]
    2.  2. 사실상 다원예술의 타 장르와의 긴밀한 협업이라는 제도적 언어와도 만나는 부분이 있다. 그러한 지원 범주에 속하느냐보다도 무용으로 분류되는 이 작업에서 시각예술은 어떻게 스스로를 지시하는가, 바깥의 움직임을 고찰하고 있는가를 살필 수 있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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