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작당모의, 〈터키행진곡〉: 존재들의 아우성
    REVIEW/Theater 2021. 12. 24. 10:56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존재의 이행

    작당모의, 〈터키행진곡〉 ©박태준(이하 상동). (사진 왼쪽부터) 박진호, 박은경, 김계남 배우.

    문자-발화와 이미지-움직임이 어떤 하나의 세계에서 정합될 수 있다면, 아마도 〈터키행진곡〉은 그와 같이 연극과 무용이, 또는 무대와 배우/무용수가 하나의 평면으로 흘러가는 또는 하나의 평면에서 출현한다는 점에서, 공연의 본원적 차원을 보여준다. 역할과 역할 간의 분리를 구획할 수 없다는 점에서 ‘존재들 간의 교환’ 또는 하나의 역할로 고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존재의 변위’가 무대의 존재론적 법칙을 구성한다면, 세계 내 실존의 양상은 그 구체적인 이행이자 삶에 대한 철학, 그리고 존재의 인식론적 앎으로 펼쳐진다. 
    존재의 이행과 이행으로서 존재의 변위는 또한 서로 교환되며 세계를 구성한다. 쇠똥구리의 존재 양식은 분뇨를 앞둔 소의 존재 양식과 관계 맺으며, 이는 다시 축사를 돌보는 사람의 존재 양식과 관계를 맺고 있다. 애벌레의 존재론적 도약은 쇠똥구리의 존재론적 도약과 만나고, 누에의 존재론적 도약은 대륙나방의 존재론적 도약과 만난다. 파도가 가린 석양을 보려는, 곧 파도의 끝을 넘어 석양을 보려고 하던, 파도와 석양이 만나는 경이로운 풍경을 인식하고자 하던, 파도에 날개가 찢긴 존재(박은경 배우)―애벌레―의 첫 등장은 파리의 모습으로 이전(移轉)된다(이는 쇠똥구리로의 연상 작용 속에서 환기된다).

    (사진 왼쪽부터) 박진호, 박은경, 김용희, 김계남 배우.

    어떤 존재도 하나의 존재 양식으로 수렴하지 않는 게 무대의 존재론이라면,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음은 하나의 존재의 이념에서 자연스레 만난다. 바로 죽음을 건 도약의 내기, 곧 세계의 경계를 가늠하기이다. 저승사자라는 메타포로 은유되는 죽음이 대륙나방(김계남 배우, 그리고 그를 따라가는 김용희 배우)의 세계로의 여행, 곧 모험에 늘 따라붙는다는 건 그 같은 모험이 죽음충동을 따르는 여정임을 의미한다. 대륙나방의 모험은 세계의 축적 또는 모음이 아니라 세계의 경계를 향해, 끝을 향해 현실을 떠돈다는 것을 의미한다.
    쇠똥구리가 소의 똥으로 옮겨감이 자신이 가진 세계를 향한 가장 근원적인 그리고 확실한 욕망이라면, 애벌레들이 자동차 바퀴에 올라타 더 나은 환경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함은 세계의 재편을 구성하는 주체의 모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계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욕망을 유예하는 일종의 결단으로써 죽음을 감내해 낸다. 

    움직임과 이미지

    (사진 왼쪽부터) 박진호, 김용희, 김계남, 박은경 배우.

    누에들―애벌레들의 존재의 이전으로 이 둘은 즉물적으로도 구분하기 쉽지 않다.―은 몸의 분절을 통해 노래를 만드는데, 일반적인 관습법으로서의 씹기를 이탈하는 입 짧은 누에의 씹기―누에의 상징계에서는 대타자의 언어에서 규제의 대상이자 비정상적 예외로의 규정―로부터 다른 씹기의 방식을 고안하며 이를 음악의 유형들로 바꾸는 과정에서 어색한 부분은 없다. 누에의 씹는다는 표현의 변이형들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인 채 두 다리를 드는 온몸의 운동으로 옮겨 가고 그 두 다리를 미세한 차이로 조절함으로써 음악의 구문들을 만들 수 있다는 부분으로 나타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그 음악의 구문이 움직임의 단위와 동기화되어 발화된다는 것 역시 이상하지 않다―‘누에의 언어는 문자가 아닌, 누에의 움직임이나 누에의 노래 자체이기도 할 것이다’.).

    (사진 왼쪽부터) 박진호, 김용희, 박은경 배우.

    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이(작업반장, 김용희 배우)는 축사를 향한다. 거기에는 그가 맞이할 또 그가 마주할 또 다른 세계가 있으므로 그 여정은 의미를 머금는 여정과 같다는 점에서, 애벌레의 그 자동차 뒷바퀴에 매달려 아스팔트 표면을 벗어나려는 시도와 또 대륙나방의 세계로의 모험에 상응한다. 〈터키행진곡〉의 기이한 전개는 존재의 교환(A는 B 또는 C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존재들은 그 자체로 잠재태로서 변위의 욕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중첩된다. 따라서 A든 B든 C든 간에 이 모두는 단순히 역할‘들’이 아니다. 이는 어떤 이념형으로서의 역할의 다른 분포들이다.)에 근거를 둔다. 나아가 장소의 중첩과 더불어 플래시백 효과로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연극적 재현의 장이 펼쳐지고 사라진다. 사실 처음 무대는 반절 정도로 크기로 자른 백업재 용도의 하얀 스펀지로 가득 부풀려진 비닐봉지 하나가 무대 왼쪽에 놓여 있음에서 출발하며, 점차 이를 풀어놓고 어질러 놓는 것으로 무대는 변위된다는 점에서 매우 단출하면서, 행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무대에 쌓이는 구조라는 점에서 불가역적으로 나아가는 복잡성을 띤다. 

    여기서 모든 존재는 물리적으로 봉지에서 풀린 스펀지들을 흩어놓는 것으로 나아감으로써 행위의 효과를 가져온다. 동시에 이전(以前)의 흔적 위에서 움직인다. 무대의 시간은 존재‘들’의 시간이며 존재들의 시간은 어떤 존재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 안에서 존재들 간의 교환이 이뤄진다. 역할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역할로 이전(移轉)되며, 다른 역할에 이전(以前)의 역할이 연장된다. 무대는 사라지지 않으며 시간은 사라지고 또 부상한다. 연극(의 시간)은 만들어지고 없어지며 연극(의 공간)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속한다. 여기서 존재는 무대의 가변적 잠재성 위에서 호흡하며, 무대를 변위시켜 나간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창작의 이념

    (사진 왼쪽부터) 박진호, 김용희, 김계남, 박은경 배우.

    누에의 노래 만들기와 자동차 운전자가 튼 터키행진곡 이후에 모차르트(김계남 배우)와 그의 어머니(박은경 배우)가 주고받는 터키행진곡을 만들게 된 경위를 보여주는데, 어머니를 위한 레퀴엠으로 터키행진곡을 바친 모차르트의 선택을 추정해본 것으로, 이는 앞선 누에의 노래 짓기와 같이 구문을 만들고 이를 변주하는 구조를 만드는 문법을 지시한다. 터키 메흐테르 군악대의 행진이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다. 〈터키행진곡〉은 비닐봉지 안에 들어가 그 끝을 뭉쳐서 손으로 잡고 버티는, 각기 다른 모습의 누에들의 개사한 노래로도 발현된다. 뮤지컬도 흥얼거림도 아닌 투박한 음에 붙인 가사를 읊조리는 노래이다. 창작의 과정에서 모차르트는 끝없는 변위들은 시간의 제한을 어긴다고 말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건 선형적인 사고에 갇힌 것이라고 질책한다. 이는 〈터키행진곡〉의 작업 철학을 지시한다. 그건 종결의 문제가 아니라 잠재된 것들이 어디까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애벌레가 자동차 바퀴로(도약의 차원), 다시 누에로(동형성의 차원), 대륙나방으로(이야기의 차원), 바다로 이동(다시 도약의 차원)하며 전환할 수 있느냐의 차원이다. 

    군악대의 행진은 실제 재현되는 대신 아른거리는 광경으로 두 사람의 시야에서 펼쳐진다. 이는 박진호 배우가 투명 테이프를 뜯어 무대 오른쪽에서 왼쪽 끝까지 연결한 이전(以前)의 행위에 의해 조직된 행렬의 잔상이 그제야 종합되므로 가능하다. 이 무한한 행렬은 동시에 그 두 사람의 시야 전체를 잠식하고 또 초과한다―이는 관객에게 물론 이전된다. 음악은 그와 같이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음악 안에 내가 잠기는 형식으로 들어온다. 두 퍼포머가 이 테이프에 바닥의 스펀지를 붙여 음표가 놓이는 악보로 이 테이프를 조직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대화가 무대 오른쪽 앞쪽에 길이가 다른 두 개의 좌대 위에 쪼그려 앉아 진행된다. (탁월한 건 그 뒤에서 똑같이 남은 두 배우―각각 모차르트와 모차르트 어머니 역할에 박진호, 김용희 배우가 그 행위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 둘이 내려와 길게 뻗은 테이프를 따라 시선을 확보할 때 비로소 지나간 군악대의 모습이 시차를 안고 그 위에 겹쳐진다. 앞선 ‘행위’가 행진의 모습으로 비로소 사후적으로 종합되는데, 이런 의미의 시차적 교환은 앞선 장면에 그 잠재적 의미를 끊임없이 다음 장면이 되돌려 주는 식으로 결합한다는 점에서, 의미는 엮이며 생산되고 발현된다. 여기서 이전 장면은 엄밀히 다음 장면에 대한 과거가 아니며, 나아가 〈터키행진곡〉의 구성 역시 연대기적이지 않다. 존재들 각각의 영토에 대한 공통의 매듭이 생겨난다. 그러한 매듭이 바로 죽음을 향한 모험이다. 

    말과 움직임

    (사진 왼쪽부터) 김용희, 박은경, 박진호, 김계남 배우.

    가장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터키행진곡〉은 인간이 아닌 생명들의 발화 방식을 독특한 표현으로 전개한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턱관절을 위아래로 올렸다 내리며 성대에 음절들을 분절해서 한 뭉텅이로 붙여 나가며, 문장을 구성한다. 배우들은 곧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조음기관을 운동적 차원으로 전개한다. 엄밀히 비인간의 재현이 아니며, 말과 움직임의 동시적 표현이 갖는 구분도 아니며, 모든 것을 조형적 형태로 구성하는 운동성 아래 말과 움직임이 제각각의 자리를 찾아갈 뿐이다. 이는 말 위에 움직임이 붙은 것도 아니고, 말을 위해 움직임을 따로 형상화한 것도 아니다. 움직임 이후에 말이 출현하며, 말 이후에 움직임이 이어진다. 
    이런 두 개의 절합을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박은경 배우는 처음 석양에 겹친 파도를 겪고 날개가 찢겨 돌아온다. 그때 무대 앞 중앙쯤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온다. 돌연 축 처진 몸에서 말이 이행되며 어떤 의미를 뱉어낸다. 안무는 금배섭이 맡았다. 표현을 위한 표현도, 의미를 위한 표현도 아닌 몸짓들은 존재가 내는 아우성이다. 그 아우성에 연출을 맡은 김풍년은 흘러나가는 말들을 싣는다. 그러니 말은 그 투명한 동공처럼 발화의 수신자를 가정하지 않고 시적인 알레고리로 배우의 몸 위에 떠 있다, 마치 말풍선처럼. 어떻게 보면 말은 몸과 (분리되는 게 아니라) 분절되며 세계를 떠돌아다닌다. 그 이야기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것처럼 배우들은 주체를 포기하고 자기의 몸을 그러한 이야기의 이념에 기꺼이 양도한다. 말은 그렇게 이야기로서 움직인다. 세계로 나아간다. 존재들의 도약에 대한 숙명처럼.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1.12.17(금) ~ 12.26(일) 평일 20:00 : 주말 15:00 (※월 쉼)
    공연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출연: 김계남, 김용희, 박진호, 박은경
    사진영상: 박태준
    분장: 장경숙
    의상: 김지연
    연출: 김풍년
    무대미술: Gold Biskuit
    안무: 금배섭
    음악: 옴브레
    조명: 정유석
    기획: 신재윤
    진행: 김은진
    인쇄: 가인기획
    후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작당모의 소개: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자다 봉창 두들기는, 바람결에 떠돌던 이야기를 깁는 골방의 이빨 빠진 할망구이고자 한다. 일상에 머물던 사소한 씨앗들이 느닷없이 부딪혀 엉뚱한 우주를 여는 모습이 흥미롭다. 이는 낮은 곳에서 영웅을 찾아내며, 후미진 골목에서 보물을 캐는 일과 같다. 
    미천한 이야기들이 초능력으로 확장되는 과정은 얼마나 짜릿하고 낭만적인가. 
    물정 모르고 무모한 벗들이 작당하고 모의하기에 가능하다.

    〈누룩의 시간〉(2021), 〈용선〉(2020), 〈무릎을긁었는데겨드랑이가따끔하여〉(2020), 〈구멍을 살펴라〉(2019), 〈숨통〉(2018), 〈이상할 것 없는 나라의 안이수〉(2017), 〈앉은뱅이〉(2017), 〈에너자이저〉(2016)를 작업하였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