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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단 명작옥수수밭, 〈메이드 인 세운상가〉: 현재의 그림자로서의 과거
    REVIEW/Theater 2022. 2. 6. 21:15


    왜상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효과

    극단 명작옥수수밭, 〈메이드 인 세운상가〉 @윤헌태[사진 제공=극단 명작옥수수밭](이하 상동)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메이드 인 세운상가〉(이하 〈세운상가〉)는 1986년 북한 수중 공격에 대한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목으로 평화의 댐 모금 운동의 정부 선전이 한창이던 시기에서 출발한다. 거북선도 만들 수 있다는 풍문의 세운상가 주인들은 북한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잠수함을 만드는 데 머리를 모은다. 국가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1. 국가가 있고 내가 있다. 2. 북한은 주적이다.―에 부속하는 소시민의 맹신은, 실제 500톤 규모의 잠수함을 만드는 데 이른다. 목선을 주조하고 이를 타고 월북하려는 ‘믿음’을 지닌 주인공을 다룬 그린피그의 〈목선〉(2019)은 〈메이드 인 세운상가〉보다 빨리 왔지만, 〈메이드 인 세운상가〉의 지속하는 미래를 선취하고 있다. 반면 〈세운상가〉는 〈목선〉의 권력의 억압과 이데올로기의 조작에 의한 잘못된 신념으로부터 출현하는 환상에 대한 단서를 펼쳐 놓는다.

    이 개체들의 합산되는 동력은 동시에 경제 호황을 맞았던 당대의 외양을 반영하는 서사의 동력으로 이어진다. 명암의 다른 한 축인 주적으로서 ‘북한’은 6.25와 냉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채에서 연장된다―군부 독재의 언어는 민주화운동에 나선 광주 시민을 빨갱이로 처리한다. 빨간 비디오는 이 양면을 함축하는 메타포다. 사회적 기준으로는 음란하고 개인의 기준으로는 은밀할 포르노그래피를 담은 이 테이프는 사실 5.18민주화운동 현장을 찍은 군부의 시민을 폭도로 지칭하며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흔들리는 영상을 감추는 기믹이다. 또는 가까스로 그 외설적인 언어 안에 실재의 폭력을 숨길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의 진실과 하나의 거짓을 품는다. 

    그러한 폭력의 실재는 사실 북한이 파괴할 세계 공간의 무력함으로부터 구원을 안길 잠수함이라는 견고한 상징물로 굴절되어 나타난다. ‘500톤 규모의 잠수함’, 물론 실제 이것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용접, 방수, 전자회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직 해군 등 각각의 다른 전문가와 설계를 맡은 MIT 공대 출신의 미국 시민권자가 일종의 학제적 협력 시스템으로 4일 만에 잠수함 설계에 성공하는 과정은, 무대 전면과 양 옆면에 투사되는 거대 프로젝션의 잠수함 설계도 이미지의 변주와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스테레오타입적 음악[각주:1]의 반복된 나타남 아래 바쁘게 돌아가는 외양과 속닥이는 말들이 백색소음에 가까워지는 일종의 ‘환기 구간’으로 스쳐 지나간다. 

    실패한 주체, 주체의 실패

    〈세운상가〉의 통속적 신화의 가정은 환상을 실재화하기에 이른다. 이는 분명 현재로부터 출발한, 과거를 넘어선 우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 잠수함이 움직인다는 건 세운상가에 대한, 나아가 세운상가의 사람들이 가진 환상을 확인하는, 작품 안의 거의 마지막 유머이다. 그 환상이 실현되지 않는 것으로, 곧 안기부 직원들은 정보를 조정하는 것으로, 역사는 적절히 자리 잡는다. 어쩌면 이 환상을 믿어줄 사람은 오늘날의 신화를 끝까지 환상이라 치부하지 않을 어떤 관객일 것이다. 문제는 이 잠수함이 모델링되는 데 이어 실제 무대 뒤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잠수함의 디지털 이미지, 픽션보다는 그 과학 언어의 정교함을 보여줬어야 하는 것 아닐까. 곧 영상 제작자와의 협업이 아닌, 희곡 구성에서 전문가와의 협업이 동반되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이는 희곡과 연극의 선후 관계의 배분이라는 프로세스 자체의 재고와 제도적 반영까지의 현실 문제를 수반한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탑재하고 국가를 위해 기꺼이 신민이 되는 한편, 아버지의 명예를 각종 표창을 받음으로써 이를 신체로 새기고자 하는 차석만(김동현 배우)은 〈세운상가〉의 주인공이다. 이와 대조가 되는 시민을 강압하는 폭력적 정부를 비판하는 자유로운 시민, 미국 명문대 출신의 피터 존슨(오민석 배우)이다. 그는 수학적 지식은 한편으로 잠수함 설계에 주축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다른 한편 한국 정부의 평화의 댐 모금 운동의 허구성을 간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차석만이 이데올로기적 주체로서 내파되는 대신, 자신의 국가를 향한 충정이 내란죄로 뒤집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곧 시대적 한계를 체현하는 존재로 마감된다면, 피터 존슨은 북파 간첩 박연희(문상희 뱅)의 잠수함 만드는 행위의 비판과 위험성에 대한 경고에서 후자를 취함으로써 국가 이데올로기에 잠식된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기보다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한 채 그로부터 깔끔하게 도피하는 교묘한 전술을 부리는 것으로 반전된다. 그는 일종의 최종 승자인 것처럼 남는다. 
    차석만이 시대적 한계로부터 자기 오류를 깨닫지 못하며 이데올로기의 부산물적 주체에서 자율적인 주체로의 전환에 실패한다면, 피터 존슨은 시민의 편이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시민을 지식의 심급으로 차별함으로써(‘그들은 사실 무지한 신민이었다.’) 미개한 한국 사회로부터 미국 시민권자의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으로 도피한다는 점에서 주체의 자리를 포기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실재를 보여주는 ‘빨간 비디오’로부터 균열된 주체의 위상은 하락한다. 그는 자기 신념을 배반한다. 어떤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웃음 짓는다.

    차석만은 적어도 끝까지 진정성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그가 어떻게 자기 신념을 마지막에 포기하게 되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아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작품은 그가 그 신념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신념의 포기가 그를 새로운 주체로 갱신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확인이 물론 중요한 것은 아니다. 차석만을 통해, 그리고 잠수함을 만드는 세운상가 사람들을 통해, 〈세운상가〉는 과거를 전경화한다. 우리는 극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오늘날 그러한 존재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한 소시민의 신념을 무지의 주체로 현상하는 피터 존슨의 관점은 냉소적이다. 어쩌면 분단 이데올로기 바깥에 있는 유일한 두 존재, 박연희와 피터 존슨 중 우리는 후자의 위치에서 그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작품은 그 위치를 피터 존슨을 경유해 우리에게로 온전히 돌리지는 않는다. 실제 그는 마지막에 잠수함이 아닌 미국으로 가는 러시아 밀항선에 탑승한 채 박연희와 대화를 나누는데, ‘뒤돌아서’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은 차석만을 포함한 역사에서 사라질 세운상가 사람들처럼 마찬가지로 역사의 그림자를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은 냉소주의적 시각으로써 시대적 한계를 내재화한 존재들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역사에서 출현하는 그러한 존재들을 어떻게 하나의 사회 안에서 정치의 언어로써 이야기하며 대화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런 지점에서 〈세운상가〉는 역사를 현상하며 오늘날을 반추하게 하되, 여전히 어떤 대안의 관점을 제시하는 데 주저하거나 미온적이라는 점에서 어떤 아쉬움을 준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은 역사적 잔재를 하나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며 우리 사회를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 탁월함을 지닌 작업이다. 

    역사의 실패를 어떻게 (다시) 마주할 것인가

    사실 세운상가에는 여러 다양한 주체가 자리한다. 식당을 운영하는 것으로 자신을 숨긴 박연희 외에도 처음 상가의 좁은 통로를 지나다니는 무수한 사람들에는 여공으로 추정되는 사람부터 해서 여러 여성의 모습이 있는데, 세운상가의 ‘주인’들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주인들이 남성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처음 등장하는 그 주변부의 이야기가 완전히 누락되는 건, 나아가 자기 자식 자랑에 몰두하는 남성 주체 간의 연대라는 단일한 서사로 한정되는 건 분명 아쉬움을 준다. 
    이는 그 이데올로기의 주체가 남성적이라는 사실―가령 차석만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존재로서의 삶―과는 물론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이는 여자 역시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는 시대의 한계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선사하는 단일 서사의 압력이 그 내부적으로 의심받거나 점검되지 않고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차원이다. 이는 피터 존슨에 의해 구성되지만, 그는 그 이념을 깨는 본질적인 차원을 궁구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그들의 의견, 더 정확히는 차석만의 의견에서 부딪혀 나오는 데 그친다는 점에서 그 서사에 사실상 조력하는 것에 가깝다. 마지막에 이들이 모두 현실에서 닫히고 은폐되는 주체로 한 번에 전락하게 된 순간은 허무함을 안긴다. 서사는 붕괴한다. 이로써 시대는 접힌다. 그렇지만 그 상처를 헤집는 건 그 바깥의 몫으로 돌려진다는 것 역시 결론의 허무함을 안긴다. 곧 ‘〈세운상가〉의 도착적 현재는 어떻게 다른 미래와 손잡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명: 극단 명작옥수수밭 〈메이드 인 세운상가〉 2021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공연장: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공연 일시: 2022년 1월 21일(금) ~ 1월 30일(일) 화~금 7시 30분 / 토, 일 3시 / 월 쉼
    러닝타임: 100분 (인터미션 없음)
    관람연령: 만 13세 이상(중학생 이상) 관람가

    작: 차근호
    연출: 최원종
    출연진: 김동현, 최무인, 오민석, 문상희, 김왕근, 하성민, 김늘메, 정상훈, 최영도, 공재민, 류경환, 장격수, 이창민, 김설빈, 박석원, 조수빈, 강수현, 김수민, 김동현, 이석진, 신무길, 강기혁
    프로듀서: 이시원

    무대: 이창원

    조명: 성미림(청강문화산업대)

    영상: 최종찬

    음악: 김동욱

    의상: 박현주

    소품: 윤미연

    분장: 백지영

    사진: 윤헌태

    무대스태프: 조수빈, 황연수, 권나현


    주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극단 명작옥수수밭
    기획: 아트리버 02-6498-0403

    1. 1. 이는 케이퍼 무비라 불리는 장르물―가령 〈범죄의 재구성〉을 떠올려 보자!―의 어떤 특성들을 상기시키는데, 주인공의 우월한 능력을 각각의 특색 있는 캐릭터로 배분하는 가운데, 특히 음악의 효과 아래 각 캐릭터의 능력을 인증하는 짧은 장면들을 교차시켜 삽입하는 것으로써 본격적인 성공에 대한 강한 암시를 주는 엉터리 환락의 잉여를 생산하는 구간이라 하겠다. 결국, 이들은 이 사건의 부속적 차원으로 동원되는 파국을 맞는다는 점에서 서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체의 언어를 빼앗는 구간으로서, 이 닫힌 장면 안에서 일제히 모두를 맥거핀으로 미리 휘발시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캐릭터는 캐릭터로 소모된다. 〈세운상가〉 역시 이러한 프로세스를 유사하게 수행한다. 반면 〈세운상가〉에서 이러한 주체들은 이데올로기를 입고 나타나며, 이는 현재 역시 유사하게 반복된다는 점에서, 부정할 수 없으며, 또한 분석을 요청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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