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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정 연출, 〈김수정입니다〉: 예술은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가
    REVIEW/Theater 2022. 2. 16. 18:19

    김수정 연출, 〈김수정입니다〉[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사진 왼쪽부터 박미르, 김보경, 김수정, 이강호, 강주희, 남호성, 민현기.

    효과로서의 종결과 의미로서의 종결 사이

    〈김수정입니다〉는 김수정이라는 연출을 극단 신세계의 연출로서 극단의 시계열에, 그리고 극단 이전에 김수정의 연극사 안에 배치한다. 김수정의 실제 서사를 전면에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아가 이를 인터뷰 영상의 서술을 동원하는 가운데, 극단 연출이 실제 극 전반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극 형태가 아니라 뉴다큐멘터리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김수정의 등장은 서사의 핍진성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김수정의 전면적인 자기 고백이 수행적 발화로 나아가는 데 필요하다. 이 등장 전에 김수정의 시상식 주인공으로서의 모습, 디렉션을 하는 연출로서의 역할이 극 안에 어정쩡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이후 김수정은 그 바깥에서 단독자의 형상으로 발화한다. 곧 김수정의 마지막 발화가 갖는 진정성은 연기자와 다른 그의 지위가 극 속에 끼어 있을 때 그의 연기 아닌 연기와 함께 유예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대가 아닌 경우에는 공간 중앙 기둥 앞에 앉은 의사-연기자로서 그의 위치는, 실제적인 말을 하는 이와 합치되기 위해 또는 그 간극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불순물과 같지만 존재해야 했다. 

    〈김수정입니다〉의 ‘솔직한’ 자기 고백은 학창 시절 성폭행 이후 2차 가해까지를 당했던 경험, 극단 내부에서 당했던 언어폭력과 그에 관한 갈등 상황에서 나아가 인정 욕구로 인해 연극을 해왔다는 것으로 이어져, 종국에는 연출의 포기 선언으로 나아간다. 김수정의 일대기에서 자기 연약함을 노출하고 예술과 삶의 층위를 전복하는 것으로, 그의 삶이 예술에 전면 들어오던 것에서 연출의 선언은 연극사와 현실에 기입될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의 연극이 그 스스로에 의해 중단되었음을, 하나의 극의 시간이 극의 종료 이전에 예측 불가능하게 예측 불가능한 시점까지 멈추었음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수행적이다. 이는 연극의 종결 안에서‘만’ 놓여 있다는 점에서, 급작스러운 반문으로 남는다. 정말 끝인가. 결과적으로 연극의 과정 안에서 이를 재구성해 형식적인 완성도를 논하기보다는 그의 종결이 가진 이후의 시점에서 무엇을 구성해야 할지에 관한 질문이 남는다. 

    그의 연극사, 김수정이라는 한 개인의 내밀함은, 동시대 연극의 전사(前史)이면서 그 자신의 특수성을 띤다. 그 둘의 분기는 그를 연극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가 연극과의 거리를 두는 것에서 온다. 연극은 닫힌다. 어떤 새로움의 탄생을 기약하지 않고, 더 이상의 새로움의 생산을 예고하지 않고. 따라서 그 새로움은 다른 장소(연극)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연극의 끝을 연극의 다른 끝으로 바꾼 결과이다. 수없이 닫히는 ‘한 번’의 형식으로서의 끝은 사실 내용으로서의 ‘모든’ 끝인 셈이다. 이러한 연극은 보편에서 예외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물론 연극 안에서 마감되었음을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다른 시작이 가능할 것인가.

     

    김수정의 어린 시절. 민현기 배우.

    예술의 언어와 예술계에서의 언어

    그의 피해자 경험을 살펴보면, 미투 이전의 시기와 중첩됨에도 그 순수한 재현으로 머무를 수는 없을 터인데, 이는 어쩌면 드러나지 않(았)을 수많은 여성, 약자의 피해를 가시화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현실을 외설의 스크린으로 보여준다. 여기에는 논평이 가해지지 않는다. 안전장치는 없다. 그 자신이 상처의 토로라기보다는 그의 삶을 전술하기 위한 파편으로 삽입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 김수정의 상처를 이해하거나 인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파악하는 게 어려운 건 그것이 마치 미투를 경유하지 않은 듯 원-사건처럼 다루어지며 현재의 서사에서 재독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공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삶 안에 자연스레 통합된다. 사실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점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 사건이 설명하는 건 김수정이 상처와 삶의 원동력을 분리하며 살아왔음이다. 곧 사적 내밀함의 무대를 지우고, 공적 지위의 역량을 펼칠 무대 위에 서 왔음을 의미한다. 그 무대는 김수정이 전면화됨으로써 비로소 드러난다. 

    〈김수정입니다〉는 무대 밖의 삶을 무대 위로 올리며 그 무대가 더 이상 존립 불가능함을 선언한다. 그러한 무대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무대가 가설되며 그 무대에 선다. 수상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러한 수상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시상의 주체 역시 극단의 단원들이므로 이는 자기로 회귀할 뿐 외부의 권위를 받지는 않는다. 따라서 삶의 외부로서의 무대는 스스로 부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삶의 내부로서의 무대는 지속 불가능하다. 김수정의 선언은 이러한 모순에 대한 천명이다. 
    문제는 그의 연극 포기 선언이 솔직함의 미덕으로 수렴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있다. 외부의 인정을 위한 표현, 자기를 감추거나 늦추며 또는 포기하고 사회성 짙은 소재를 채택하며 나아가는 김수정과 정교하고 복잡한 체제를 지닌, 무한 동력 기관으로서의 극단 신세계의 모습은, 그러한 외부로 비치는 모습 너머의 내재적인 극단의 이념과 언어의 근거를 찾을 수 없음과 손잡는다. 김수정과 극단의 직접적인 무대 위의 자기 투영은 다분히 공허하다. 기존의 활동들은 자신과 자신이 가져오던 사회와의 교점을 내재적으로 형성하지 않는다. 사회의 문제를 의제로 삼고 자신의 언어로 삼을 때, 여기서 사회는 인정 욕구를 충족할 어떤 사회와는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술의 언어는 예술계에서의 언어였음을 의미한다. 관객은 그들의 부르디외적 장에 위치한다. 상징계의 바깥을 찾을 수는 없다. 사회의 문제가 내부의 윤리로 다가오는 경우는 여기서 가정되지 않는다. ‘예술과 삶은 분리된 채 실행되었고, 어느새 삶이 예술을 넘어서는 지점이 발생했다.’ 김수정의 선언은 이렇게 분석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과 삶의 통합되는 지점을 찾는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솔직함은 다시 이야기될 수 있다. 문제는 예술과 삶의 분리가 종국에 등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삶의 분리 자체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술(가)의 언어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어떻게 극복할지의 질문에서 좌초할 것이다―김수정의 발언은 너무나 강력하다. 물론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순전히 관객의 과제가 된다는 것이다. 

     

    사진 왼쪽부터 남호성, 박미르, 강주희, 김보경, 고용선, 민현기, 이강호.

    솔직함의 내용은 솔직한가

    솔직함이 가리고 있는 것, 말하지 못한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솔직하다는 것이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는 투명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 역시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솔직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른 한편, 솔직함 역시 서사의 일부이다. 무대 위에서의 ‘솔직함’은 철저하게 서사의 정교함 속에 발현하며, 그에 따라 어떤 정동을 발생시킬 때의 효능감으로 연장된다. 애초에 김수정의 사소설적인 에피소드들은 ‘김수정=예술가’의 명제를 구성하기 위해 단순하게 쌓이는 감이 있다. 또한 그 뒤의 충격적인 그의 사건들은 예술과 봉합되거나 해독되지 않은 날것처럼 던져진다. 결과적으로, 화려한 자기 기술의 포장 뒤에 예술가의 병약한 자기 고백이 자리한다. 

    표면의 이면은 명확하고 투명한 것으로 기술된다. 관객은 어떤 예술가의 상을 얻었다. 반면 그 예술가의 강력한 언어와 그 핍진한 예술가의 내재적 언어와의 간극을 해소할 수는 없다. 사회 질서에 대한 첨예한 문제 제기라는 연극의 이념과 그것을 좋은 연극으로 인정하는 연극계의 이념의 합치는 비판되어야 한다. 삶이 회복되지 않은 채 예술을 하는 것의 위험성, 마찬가지로 삶과 예술의 간격을 삶과 예술로 연장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 역시도. 물론 이러한 교훈은 이 연극의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솔직함이라는 언어가 가진 강력한 효과이다. 김수정이 배제한 사적인 이야기의 일부분―중간 지점―은 재현이 아닌 차원에서 이미 반복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뒤늦게 도착했다. 또 다른 의미의 차원에서 폐제되었음을 드러내면서.

    〈김수정입니다〉에서 김수정의 자기 기술은 자기 배설로도 읽힌다. 이는 앞선 정교하지 않은 듯한 파편들의 잉여성, 잘 통합되지 않는 그의 서사가 빠뜨리는 것들, 극 자체의 담화 구조의 부재 등으로 인한 착시일까. 문제는 공적 무대에 올라야 할 것들이 제한, 제약되어 있고, 사적 공간의 언어가 정치의 장으로 오를 수 없다고 단정할 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스테레오타입이 무엇인지, 그 구분선은 누가 만드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수정입니다〉가 역설적이지만 보여주는 건 이런 공과 사를 지탱하는 이분법적 세계에의 믿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아닐까―그는 그의 사적인 이야기를 공적인 무대 위에서 하고 있다. 또는 이에 대한 구분의 강박이 어떤 문제를 끊임없이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 아닐까. 그의 솔직함이 의미를 얻는 건 바로 이런 지점 아닐까. 이는 결국 굳이 이런 이야기가 왜 공연에 올라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어떤 하나의 대답일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사진 왼쪽부터 김보경, 박미르, 남호성, 강주희, 민현기, 고용선, 이강호.

    [공연 개요]

     

    연극 〈김수정입니다〉

    공연 일시: 2021년 12월 7일(화)~12월 25일(토) 화수목금 7시 30분, 토일 3시

    공연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공동창작

    연출: 김수정

    극작: 김수정, 박슬기, 전웅, 조가희

    출연: 강주희, 고용선, 김보경, 남호성, 민현기, 박미르, 이강호

     

    관람연령: 14세 이상

    러닝타임: 100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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